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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희 (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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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문희는 1886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인물로, 대한제국 시기 제주목 주사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도청에서 근무했으며, 잡지사 오사카지사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 시기 제주도사 대리를 맡았으며, 제주도 승격 운동에 참여했다. 또한 제주읍장을 역임하고, 향토지인 『증보탐라지』 편찬에 참여했다.

2. 생애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해방대한민국 초기까지 제주도 지역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제주도 제주군에서 태어나 아버지 김응빈의 영향을 받았다. 1902년 제주목주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1908년에는 대한협회 제주도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조선총독부 소속으로 제주도강원도 등지에서 군서기, 도서기, 도속 등으로 근무했다. 1926년 잠시 관직을 떠나 일본 오사카에서 개벽지 오사카지사장을 맡기도 했으나, 곧 귀국하여 제주 청년수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을 하다 다시 관직에 나섰다. 1936년에는 제주도 제주군 조천면장을 지냈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미군정 하에서 제주도사 대리를 맡아 행정 공백기에 잠시 업무를 수행했으며, 제주도의 도(道) 승격 운동에도 참여했다. 이후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제주군 제주읍장을 역임했다. 6.25 전쟁 중과 그 이후에는 제주도 향토사 연구에 힘썼으며, 특히 1954년부터 《증보탐라지》 편찬에 참여하여 주요 역할을 수행했다.

2. 1. 초기 생애와 대한제국 시기 활동

1886년 전라남도 제주도 제주군 중면 일도리(一徒里, 현재의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해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선 말 제주판관을 지낸 남강 김응빈이다.[1] 아버지 김응빈은 제주도한성을 오가며 미역 등 해산물을 판매하는 상인이었다. 한성 남대문에서 흥선군 이하응의 부하들과 시비가 붙었으나, 이하응의 도움으로 풀려난 인연이 있었다. 이후 이하응의 집에 초대되어 교류하였다.[1]

1891년(고종 21년) 4월, 아버지 김응빈은 무과에 급제하여 같은 해 4월 명월만호, 8월 제주판관을 역임했다.[1] 1897년 김윤식이 제주도로 유배를 오자, 김응빈은 자신의 집을 유배지로 제공하였고 김윤식은 1901년 6월까지 머물렀다.[1] 김윤식은 1901년 진도군으로 이배되었다가 1907년 풀려났는데, 이후에도 김응빈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외부 문물을 접했다.[1] 할아버지 김전임(金畊任)은 관직은 없었으나 후에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1] 그의 가문은 16세기 김복모(金福模)가 제주도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1]

김문희는 1902년(광무 5년) 8월 제주목주사(濟州牧主事)에 임명되었으며,[1] 1908년에는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대한협회 제주도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는 대한협회 회보 1908년 제8호(11월호)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1]

2. 2. 일제강점기 활동

1910년 10월 2일 한일 합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서기에 임명되어 제주도청으로 발령받았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제주도 제주군 군서기로 근무했으며, 1914년에는 잠시 강원도 평창군 군서기로 자리를 옮겼다가 같은 해 다시 제주도 제주군 군서기로 복직했다. 1915년에는 제주도 제주군 도서기가 되었다. 이후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전라남도 제주도청 도속으로 일했다.

1926년 잠시 관직을 사퇴하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잡지 개벽의 오사카지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귀국하여 1928년 제주 청년수양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다시 관직에 나섰다. 제주도청 도속과 도 주사를 거쳐 1936년에는 제주도 제주군 조천면장을 지냈고, 1945년에는 제주도청 도농회 주사를 역임했다.

2. 3. 해방 이후 활동과 제주도사 대리 역임

1945년 9월 2일 미군정이 주둔하자, 당시 제주도 도사였던 일본인 大野泰治|오노 타라이시일본어로부터 도사대리 겸 부도사로 임명되어 행정 업무를 인수인계받았다. 그러나 미군정 중앙청에서 후임 제주도사로 추천된 안세훈의 임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안세훈이 끝내 부임하지 않자, 김문희는 1945년 9월 28일 미군이 실제 주둔할 때까지 도사 대리직을 계속 수행했다.

1945년 10월부터 1946년 8월까지는 제주도의 도(道) 승격 운동에 참여하여, 미군정청 제주도 주둔군을 상대로 제주도전라남도에서 분리된 별도의 도로 승격시켜 줄 것을 건의하고 설득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후 1947년 9월부터 1950년까지 제주군 제주읍장을 지냈다.

1950년 6.25 전쟁 기간 중에는 제주 지역의 향토 사료를 조사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제주도 향토 사료 조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1954년부터는 제주도 향토지인 《증보탐라지 (增補耽羅誌)》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제주도 내 지식인 12명으로 구성된 담수계(淡水契)의 일원으로 집필에 참여했으며, 특히 주요 업무를 담당했다. 《증보탐라지》는 1955년 6월에 발간되었다.

2. 4. 향토사 연구와 『증보탐라지』 편찬

1950년 6.25 전쟁 기간 중에는 제주도 지역의 향토사료를 조사하였으며, 1950년대에는 제주도 향토사료 조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1954년부터는 제주도 향토지인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제주도 내 지식인 12명으로 구성된 담수계(淡水契)의 집필진으로 활동하며 주요 업무를 맡았다. 1955년 6월 ''증보탐라지''를 발간하였다.

3. 저서


  • ''증보탐라지'' (增補耽羅誌), 담수계 공저

4. 약력


  • 1886년 4월 28일 전라남도 제주도 제주군 중면 일도리(一徒里)에서 김응빈의 아들로 태어났다.
  • 대한제국 말기에 제주목 주사(濟州牧主事)에 임명되었다.
  • 1908년 대한협회에 가입하여 대한협회 제주도지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대한협회회보 1908년 제8호(11월호) 명단 수록)
  •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 서기에 임명되어 제주도로 발령받았다.
  •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제주군 군서기로 근무했다.
  • 1914년 잠시 강원도 평창군 군서기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다시 제주군 군서기로 복귀했다.
  • 1915년부터 1920년까지 제주군 도서기(島書記)로 재직했다.
  •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제주도 도속(道屬)으로 근무했다.
  • 1926년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잡지 개벽의 오사카 지사장을 맡았다.
  • 1928년 제주 청년수양회 회장을 역임했다.
  • 이후 다시 관직에 투신하여 제주도 도속, 제주도청 주사로 근무했다.
  •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제주군 조천면 면장을 지냈다.
  • 제주도청 도농회(島農會) 주사로 활동했다.
  • 1945년 9월 10일 당시 제주도사였던 오노 타라이시로부터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임시대리 겸 제주부도사 직에 임명되었다. 제주도사로 천거된 안세훈이 취임하지 않아 계속 도사대리로 근무했다.
  • 1946년 7월 9일 한국독립당 제주도지구당이 주도한 독립촉성국민회 제주분회 조직 결성에 참여했으며,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장 박우상(朴雨相)).[1]
  • 1947년 1월 15일 독립촉성국민회 제주지회 총회에서 일부 간부 해임 결정이 내려지자 부회장직을 사퇴했다.[2]
  • 1947년 8월 2일 경찰관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했다.
  • 1947년 9월부터 1950년까지 북제주군 제주읍 읍장을 지냈다.[3]
  • 1947년 10월 24일 제주도 경찰관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4]
  • 1947년 ~ 1948년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 제주도연대가 사건 수습을 위해 구성한 한국인 대표자 22명 중 관공서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미군정 당국과의 교섭 및 협상에 나섰다. (참여 대표: 최원순, 박경훈(朴景勳), 박종훈(朴鍾壎), 최남식(崔南植) 등)
  • 1950년 8월 제주도 총후보국회(銃後報國會) 회원으로 가입했다.[5]
  • 1954년 제주도 향토지인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편찬 사업에 참여했다. 제주도 내 지식인 12명으로 구성된 담수계(淡水契) 회원으로서 집필에 참여했다.

5.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김전임(金畊任, 1811년 ~ 1861년)
  • 아버지 : 김응빈(金膺斌, 1846년 12월 13일 ~ 1928년)
  • * 동생 김문형(金水+文炯)
  • * 동생 김문호(金水+文昊)
  • 당숙 : 김응배

6. 기타

김문희의 가계는 김해 김씨 삼현파의 후손으로, 선조인 김복모(金福模)가 16세기경 제주도 조천면 조천리와 이동리 일대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집안은 이로 인해 '조천김씨 이동파'라고도 불린다.

김복모는 고려 충정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김관(金管)의 후손이다. 김관의 다른 후손인 김근한, 김기손 등 역시 서로 다른 시기에 제주도에 들어와 정착하였는데, 이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 가계는 조천김씨 또는 이동파로 불리게 되었다.

참조

[1] 뉴스 독촉 제주 분회 결성 대동신문 1946-07-26
[2] 뉴스 불순간부 제명 / 도 독촉(獨促) 지부장회의 제주신보 1947-01-18
[3] 문서 후임은 김차봉이다.
[4] 뉴스 경찰후원회 피선 역원 발표 제주신보 1947-10-24
[5] 뉴스 군경, 청방 원호 추진에 일익 / 도 총후보국회 결성 제주신보 1950-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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