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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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춘은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조명기사로, 한국 영화 조명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일본 유학을 통해 조명 기술을 습득한 후, 1930년대 초반 귀국하여 선진적인 조명 기술을 도입했다. 데뷔작인 《살수차》(1935)를 통해 한국 영화에 빛과 조명 개념을 처음 적용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다수의 영화에서 조명을 담당했다. 광복 후에도 《자유만세》(1946), 《오발탄》(1961) 등 많은 작품에 참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보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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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성춘 |
본명 | 김성춘 |
출생 | 1903년 8월 1일 |
출생지 | 한성부 |
사망 | 1977년 |
분야 | 영화조명 |
참고자료 | |
저자 | 강옥희, 이영미, 이순진, 이승희 |
제목 |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
날짜 | 2006-12-15 |
출판사 | 소도 |
출판위치 | 서울 |
ISBN | 9788990626264 |
페이지 | 37쪽 |
2. 생애
한성부 출신으로, 초기 연쇄극 《의리적 구투》를 보고 영화 기술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 1920년대 일본으로 유학하여 나고야시의 동아키네마에서 조명 기술을 습득했다.[2] 1930년대 초 귀국하여 한국 영화계에 선진 조명 기술을 도입한 선구자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조명 기사로 평가받는다.
데뷔작은 방한준 감독의 《살수차》(1935)로,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영화 제작에 처음으로 빛과 조명 개념을 적용했다.[3]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조명부장 등으로 활동하며 다수의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병정님》(1944) 등 군국주의 선전 영화 제작에 협력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으나 최종적으로는 보류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자유만세》(1946), 《파시》(1949), 《시집가는 날》(1956) 등 여러 작품의 조명을 담당했다. 특히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에서는 조명뿐 아니라 제작까지 맡아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대표작 탄생에 기여했다.
《오발탄》 이후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으며, 마지막 작품은 1970년 개봉한 《천사의 눈물》이다. 그는 조명 분야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대한민국 영화 조명 기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일본 유학
한성부 출신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인현공립보통학교와 혜화공립보통학교 부설 상급실습학교를 졸업했다. 한국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투》를 보고 영화 기술에 대한 열망을 품게 되었다.1920년 무렵 영화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에는 연기를 공부했으나, 이후 영화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나고야시에 있는 동아키네마에서 조명 기술을 배웠다.[2] 일본에서 경험을 쌓은 뒤 1930년대 초반에 귀국하여, 당시 선진적인 조명 기술을 한국 영화계에 도입했다. 이로 인해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조명 기사로 평가받는다.
2. 2. 국내 활동과 조명 기술 도입
일본 나고야시의 동아키네마에서 조명 기술을 배우고 경험을 쌓은 뒤 1930년대 초반에 귀국했다.[2] 그는 선진적인 조명 기술을 한국 영화계에 도입하여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조명 기사로 평가받는다.김성춘의 조명 기사 데뷔작은 사실주의 성향이 강한 방한준 감독의 《살수차》(1935)이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일본에서 최신 조명기를 직접 들여와 조명을 담당했다. 이를 통해 한국 영화 제작에 처음으로 빛과 조명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적용될 수 있었다.[3] 김성춘은 이 작품의 각색에도 참여했으며, 주연 배우로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조명부장과 기술부 책임자를 맡는 등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영화의 조명 작업을 담당하며 한국 영화 기술 발전에 기여했다.
2. 3. 친일 논란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다수의 어용 영화에서 조명을 담당하여,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기도 했으나 보류되었다. 김성춘이 이 시기에 참여한 군국 영화 및 전쟁 선전물은 다음과 같다.연도 | 작품명 |
---|---|
1942 | 《나는 간다》 |
1943 | 《조선해협》 |
1943 | 《우러르라 창공》 |
1944 | 《병정님》 |
1944 | 《태양의 아이들》 |
1945 | 《감격의 일기》 |
1945 | 《우리들의 전쟁》 |
1945 | 《사랑과 맹서》 |
2. 4. 해방 이후 활동과 업적
일제 패망 후 미군정 하에서 제작된 《자유만세》(1946)의 조명을 담당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이후 《파시》(1949), 《시집가는 날》(1956) 등 여러 작품에서 조명을 맡았다.1961년에는 이범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유현목 감독의 영화 《오발탄》에서 조명뿐만 아니라 제작까지 담당했다. 이 작품은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오발탄》 이후 활동은 점차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참여한 작품은 1970년에 개봉한 윤정희 주연의 《천사의 눈물》이다.
김성춘은 조명 분야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 대한민국 영화 조명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3. 평가 및 영향
일본에서 선진 조명 기술을 습득하고 귀국하여 한국 영화계에 이를 도입한 인물로,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조명기사로 평가받는다.[2] 그의 데뷔작인 방한준 감독의 《살수차》(1935)는 일본에서 들여온 최신 조명기를 사용하여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빛과 조명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적용된 작품으로 여겨진다.[3]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조명부장과 기술부 책임자를 맡으며 많은 영화 제작에 참여했으나,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나는 간다》(1942), 《조선해협》(1943), 《우러르라 창공》(1943), 《병정님》(1944), 《태양의 아이들》(1944), 《감격의 일기》(1945), 《우리들의 전쟁》(1945), 《사랑과 맹서》(1945) 등 다수의 군국주의 선전 영화(어용 영화) 제작에 조명 담당으로 참여한 행적이 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영화 부문에 포함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보류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미군정 하에서 제작된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를 시작으로 《파시》(1949), 《시집가는 날》(1956) 등 여러 중요 작품의 조명을 담당하며 한국 영화 발전에 기여했다. 특히 이범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유현목 감독이 연출한 《오발탄》(1961)은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데, 김성춘은 이 작품에서 조명뿐만 아니라 제작까지 맡아 역량을 발휘했다.
《오발탄》 이후 활동은 줄어들었지만, 조명 분야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 대한민국 영화 조명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참여 작품
(내용 없음 -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서술됨)
4. 1. 일제 강점기
한성부 출신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인현공립보통학교와 혜화공립보통학교 부설 상급실습학교를 졸업했다. 한국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투》를 보고 영화 기술에 대한 열망을 품었다.1920년을 전후하여 영화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처음에는 연기를 공부했다. 이후 영화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하고 나고야시의 동아키네마에서 조명 기술을 배웠다.[2] 일본에서 경험을 쌓은 뒤 1930년대 초반에 귀국하여, 당시 선진 조명 기술을 한국 영화계에 도입했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조명기사로 평가받는다.
그의 데뷔작은 사실주의 성향이 강한 방한준 감독의 《살수차》(1935)이다. 김성춘은 일본에서 직접 들여온 최신 조명기를 이 영화에 사용함으로써, 한국 영화 제작에 처음으로 빛과 조명 개념을 본격적으로 적용했다.[3] 그는 이 작품의 각색 작업에 참여하고 주연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조명부장과 기술부 책임자를 맡는 등 일제강점기 동안 여러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다수의 어용 영화 제작에 참여하여 조명을 담당했다.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연극/영화 부문에 이름이 올랐으나 최종 수록은 보류되었다. 그가 이 시기에 참여한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으며, 이들은 대부분 군국주의 선전 영화로 평가받는다.
- 《나는 간다》(1942)
- 《조선해협》(1943)
- 《우러르라 창공》(1943)
- 《병정님》(1944)
- 《태양의 아이들》(1944)
- 《감격의 일기》(1945)
- 《우리들의 전쟁》(1945)
- 《사랑과 맹서》(1945)
4. 2. 해방 이후
일제 패망 후에도 미군정 하에서 제작된 《자유만세》(1946)를 시작으로 영화계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파시》(1949), 《시집가는 날》(1956) 등 여러 영화에서 조명을 담당했다.특히 이범선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은 김성춘이 조명과 제작을 함께 맡아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데 기여했다.
《오발탄》 이후 활동은 다소 줄었으며, 마지막으로 참여한 영화는 1970년 개봉한 윤정희 주연의 《천사의 눈물》이다. 김성춘은 조명 분야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대한민국 영화 조명 기술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조
[1]
서적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12-15
[2]
뉴스
똥기저귀 빨며 일본인에게 영화를 배웠지
https://web.archive.[...]
씨네21
2001-10-10
[3]
뉴스
“영업부장 때려가며 100키로 전기 끌어왔지”
https://web.archive.[...]
씨네21
2001-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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