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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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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소동은 대한민국의 영화감독, 음악 평론가, 피아니스트, 음반 프로듀서, 영화평론가이다. 1909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으며, 함창초등학교,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일본 니혼 대학교 법학과, 도쿄 중앙음악학교, 연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34년 서양고전음악평론가로 데뷔하여, 피아니스트 및 음반 프로듀서로 활동하다가 1943년 영화평론가로 등단했다. 1946년 영화 《모란등기》로 감독 데뷔 후, 농촌을 배경으로 도시의 모순을 풍자하는 작품들을 주로 만들었으며, 《돈》으로 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했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전임교수,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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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동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출생일1911년 6월 3일
출생지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상주
사망일1988년 11월 9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직업영화감독
음악평론가
피아니스트
음반 프로듀서
영화평론가
영화 시나리오 작가
영화제작자
영화 기획가
대학 교수
기업가
활동 기간1934년 ~ 1988년
종교불교
학력한양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부모김함령(부)
형제자매누나 1명
형 1명
남동생 김한일(영화감독)
수상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2. 생애

김소동은 함창(咸昌)을 본관으로 하며 호(號)는 동파(東坡)이고 경상북도 상주 출생이다.[1]

1934년 서양고전음악평론가로 등단하였고, 1935년에는 피아니스트 데뷔와 음반 프로듀서 데뷔를 하는 등 잠시 활동하다가 1943년 영화평론가로 등단하였다. 1946년 《모란등기(牡丹登記)》로 영화감독 데뷔하였다.[1] 그의 작품 가운데 사극 작품을 제외한 그의 작품 세계는 늘 농촌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도회지의 모순된 상황이나 위선 따위를 풍자 내지 고발하고 있다.[1]

2. 1. 초기 생애 및 학력

김소동(金韶東)은 1909년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함창 김씨이고 호는 동파이다. 1924년 함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34년 일본 니혼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38년 도쿄 중앙음악학교를 졸업했다. 1951년 연희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동 대학원에서 철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69년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1972년 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2. 예술 활동

1934년 서양고전음악평론가로 등단하였고, 이듬해인 1935년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고 음반 프로듀서로도 잠시 활동했다.[1] 1943년 영화평론가로 등단하였으며, 1946년 《모란등기(牡丹登記)》로 영화감독 데뷔하였다.[1] 1956년 《왕자호동(王子好童)과 낙랑공주(樂浪公主)》, 1957년 《아리랑》, 1958년 《돈》, 《오! 내 고향》 등을 발표했다.[1]

그의 작품 가운데 사극을 제외하면 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하며, 도시의 모순된 상황이나 위선을 풍자, 고발하는 경향을 보인다.[1] 특히 《돈》에서는 이러한 비판 의식이 잘 부각되었으며, 제2회 영화평론가협회상을 받았다.[1]

2. 3. 교육 활동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명예교수,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전임교수, 한국영화아카데미 원장을 역임했다.[1]

3. 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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