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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승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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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인승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 화단에서 활동한 화가이다. 경성에서 유아기를 보냈으며,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하고, 1937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며 화단에 데뷔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작품을 제작하고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로 활동했다. 광복 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학장을 지냈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서양화 구상 계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1 문화상,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 등을 수상했다. 말년에는 장미를 주로 그려 '장미의 화가'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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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승 (화가)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김인승
본명(정보 없음)
출생일1910년 1월 19일
출생지대한제국 경기도 개성부
사망일2001년 6월 20일
사망지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
국적대한민국
분야서양화
학력도쿄 미술학교
참고 자료
김인승 화백

2. 생애

김인승은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경성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6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동생은 조각가 김경승이다. 김인승은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화를 전공하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화단에 데뷔했다.[1]

일제 강점기에는 〈간호병〉,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 등 친일 작품을 남겼고, 반도총후미술전람회 추천 작가로 활동하는 등 친일 행적을 보였다.[1] 작품에 일본식 이름 표기(Jinsho, Kin)와 황기를 사용했다는 주장도 있다.[2]

광복 후, 친일 행적으로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배제되는 등 잠시 제약을 받았으나,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등을 역임하며 한국 화단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1974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으며, 말년에는 장미를 주로 그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1963년 문화포장을, 196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3·1문화상을, 196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받았다.[3]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김인승은 경기도 개성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경성부 종로방 명륜정(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그는 6남매 중 장남이었으며, 바로 밑의 동생은 조각가 김경승이다. 김인승과 김경승 형제는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1]

1932년 김인승은 도쿄로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 유화를 전공했다. 1937년 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을 받았다. 초기 작품은 데뷔작 《나부》와 같이 사실적인 여성 인물화 위주였다.[1]

2. 2. 일제 강점기 활동 및 친일 논란

김인승이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는 일제가 중국을 침략하면서 1945년 태평양 전쟁 종전까지 8년간 전쟁을 치르던 때였다. 그 영향으로 그의 인물화에도 정치색이 짙게 깔렸다. 이 기간 중 김인승은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등 친일 작품들을 남겼다.[1] 수채화인 〈간호병〉은 조선식산은행 사보인 《회심》(會心)의 속표지화로, 군복 차림의 일본군 간호병을 묘사하고 있다.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는 친일 미술인 모임인 단광회에서 집단 제작한 대작이며, 전쟁 지원을 노골적으로 부추기는 대표적인 친일 미술 작품이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미술로서 전쟁을 지원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열린 시국 전람회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김기창, 심형구, 장우성 등이 반도총후미술전의 추천 작가들이다. 김인승은 이들 중 심형구와는 도쿄 미술학교 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동생 김경승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어용 친일 단체로 당시 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장인 계광순이 이사장을 맡은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내기도 했다. 김인승은 서양화부 평의원이었고, 김경승은 조각부 평의원이었다. 이 단체는 다른 분야 친일 예술 단체와 함께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특히 김인승은 일제강점기 동안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표기할 때 일본식 독음에 따라 'Jinsho, Kin'이라고 적었고, 연도는 황기로 적어넣는 등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2]

이와 같은 경력으로 광복 후에 적극적인 친일 미술인으로 꼽힌 김인승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 때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3. 해방 이후 활동

광복 후, 김인승은 친일 행적으로 조선미술건설본부 창설에서 배제되는 등 잠시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1] 그러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1947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학장을 지냈다. 이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제조형예술협의회 한국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화단의 대부로 활동했다. 특히 서양화 구상 계열에서 큰 영향력을 가졌다.

1968년 3·1문화상을 받았고, 1974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활동했다. 말년에는 〈들장미〉(1964), 〈장미〉(1973), 〈백장미〉(1985) 등 장미와 모란을 주로 그려 '장미의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1963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장을 받았고, 1965년에는 대한민국 예술원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3·1 문화상을 수상하고, 1969년에는 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받았다.[3]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분야에 선정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2. 4. 친일 행적에 대한 평가

김인승은 일제 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경력이 있다. 1940년 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에서 입선하였고, 반도총후미술전람회에 추천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1] 조선총독부가 조직한 친일 단체인 조선미술가협회 간부를 지냈으며, 서양화부 평의원이었다. 이 단체는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로 들어가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는 일도 하였다.

김인승은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 독음('Jinsho, Kin')으로 표기하고, 연도를 황기로 적는 등 자발적인 친일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2] 〈간호병〉(1944), 〈조선징병제실시기념화〉(1943) 등 친일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광복 후, 김인승은 친일 미술인으로 꼽혔으나, 친일 청산 문제가 흐지부지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및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화단의 대부로 불렸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미술 분야에 김인승을 선정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김인승을 포함했다.[3]

2. 5. 수상 경력

연도수상 내역
1937년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부(裸婦)〉로 최고상 수상[1]
1940년일본 문부성이 주최한 황기 2600년 봉축기념전 입선
1963년문화포장
1965년대한민국예술원
1965년서울특별시 문화상
1965년3·1문화상
1969년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3]


3. 작품 세계

(이전 출력이 비어있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를 제공해주시면 '작품 세계' 섹션을 작성하겠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김인승 https://terms.naver.[...]
[2] 서적 나는 황국신민이로소이다 개마고원 1999-07-28
[3]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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