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석 (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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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종석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는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에 연루되어 체포, 사형 판결을 받고 1949년 총살되었다.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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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1918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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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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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종석 |
한자 표기 | 金鍾碩 |
본관 | 김해(金海) |
호 | 서이(緖以) |
생애 | 1918년 ~ 1949년? (31세)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 |
군사 경력 | |
복무 | 일본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1년 ~ 1949년 |
최종 계급 | 일본군 대위/대한민국 육군 중령 |
근무 | 육군 제5여단 |
지휘 | 대대장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태평양 전쟁 |
2. 학력
- 1938년, 경성부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 1942년 12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56기로 졸업했다. 동기로는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이형근(송산 타케오)과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책임을 물어 총살형에 처해진 최창식(고야마 타카시)이 있다.
- 1946년, 대한민국 군사영어학교 1기로 졸업했다.
- 1947년, 대한민국 조선경비보병학교 1기로 졸업했다.
3. 생애
1918년 출생하여 1938년 경성부의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학창 시절 명석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는 평가가 있다.[7]
이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제5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는 박정희보다 1년 선배에 해당한다. 일본군 대위로 복무하던 중 오키나와섬에서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이했다.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8] 국군 창설 초기 남조선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국장과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고위 장교로 활동했다.[9] 이후 광주에서 창설된 제5여단 참모장 등으로 복무했다.
1948년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조선로동당 계열 군인으로 연루되어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5] 같은 해 11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10] 1949년 8월 2일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형 집행 직전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인민공화국 적기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11][6] 당시 미 군사고문단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은 김종석을 수재로 평가하며 아까운 인재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1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3. 1. 일제강점기 군 복무
1942년 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는 박정희보다 1년 선배에 해당한다. 동기로는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한 이형근과 최창식 등이 있다. 일본군 대위로 복무하던 중 오키나와섬에서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이했다.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 육군 제32군 산하 보병 제32연대[1] 제2대대 소속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특히 격전지였던 마에다 고지 전투(https://www.city.urasoe.lg.jp/docs/2017052900033/ 마에다 고지 전투 (일본 우라소에시 자료))에 참여했다. 당시 학도병이었고 후에 오키나와학 연구자가 된 토게마 모젠은 김종석(일본명: 니하라 마사토)에 대해 "군인으로서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정확한 판단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마에다 고지 전투 중 부하들에게 "죽는 것만이 국가에 대한 봉사가 아니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고 회고했다. 토게마 모젠은 니하라 중위와 매일 밤 일본과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그가 진심으로 전후 미래를 걱정했다고 덧붙였다.
미군으로부터 "지옥을 한데 모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진 마에다 고지에서 김종석은 소대장으로 참전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외간 슈젠은 니하라(김종석) 중위가 포격이 무의미해지자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적진에 돌입해 수류탄전을 벌이고 복귀하는 등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고 기록했다.[2]
1945년 5월 1일 마에다 고지 돌입 명령이 내려졌을 때[3], 같은 부대 소속이었던 사토 료지는 김종석 중위가 특공대 임무에 나서는 자신에게 "죽는 것만이 봉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사토 료지는 이 조언과 동료 병사의 판단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홋카이도 신문 기고문에서 밝혔다.[2]
김종석은 5월 10일 새벽, 마에다 고지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채로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졌다.[4] 이후 미군의 공격을 피해 참호를 옮겨 다니며 생존했다. 일본의 항복 이후에도 부대는 기노완 산 등지에서 저항을 이어가다 1945년 9월 3일 나카가미군 나카구스쿠촌 키타우에하라에서 미군에 항복했다.
3. 2.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 활동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오키나와섬에서 귀국하였다. 미군정 하에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1946년 3월 27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 임시 대위(군번 10070번)로 임관했다.[8]1946년 9월 11일, 남조선국방경비대 작전 교육 과장(대위)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4일부터 11월 25일까지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인사 처장(인사국장)을 역임했으며,[9] 12월에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사관학교(경비사관학교)의 임시 교장을 겸임하는 등[9] 고급 장교로 활동했다.
1947년 2월 29일에는 제2연대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경리 부정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8년 6월 18일, 광주에서 창설된 제5여단의 참모장으로 부임했다.[9] 같은 해 8월 8일에는 제4여단 참모장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8월 16일부터 10월 11일까지는 여단장 대리를 역임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순 14연대 반란사건이 발생하자, 남조선로동당 계열 군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5] 1948년 11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10] 1949년 8월 2일 오후 2시 서울시 은평구의 한 장소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형이 집행되기 직전까지도 여유를 잃지 않고 미군정 소속 장교들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는 모습을 보였으며, 총살 직전에는 인민공화국의 적기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11][6] 당시 미 군사고문단 소속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은 김종석을 군사학교 출신의 수재로 평가하며 정보장교로 키우고 싶었던 인재였다고 회고했다.[11]
3. 3. 여순사건과 최후
1948년 10월 19일, 남조선로동당에 의한 군 부대의 반란인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하자, 김종석은 좌익계 남조선로동당 계열 군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져[5]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1948년 11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10] 이후 1949년 8월 2일 오후 2시, 서울시 은평구에 있는 모처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총살 당시, 그는 여유를 잃지 않고 밝게 웃으며 미군정 소속 장교들과 악수하고 농담을 주고받았으며, 총살 직전에는 인민공화국 적기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11][6]
당시 미군정 고문관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은 자신의 기록에서 김종석을 군사학교 출신의 수재로, 정보장교로 키우고 싶었던 아까운 인재였다고 평가했다.[11]
4. 논란
김종석은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친일 행적과 대한민국 육군 복무 중 여순사건에 가담한 사실로 인해 논란이 있다. 각 사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친일 행적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5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는 박정희보다 일본육사 1년 선배에 해당한다. 일본군 대위로 복무하던 중 오키나와섬에서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군 부문에 포함되었다.
4. 2. 여순사건 가담
1948년 광주에서 제5여단이 창설되자 참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1948년 8월 8일에는 제4여단 참모장이 되었고, 같은 해 8월 16일부터 10월 11일까지는 여단장 대리를 역임했다.1948년 10월 19일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남조선로동당 계열 군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5] 주모자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 1948년 11월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10] 1949년 8월 2일 오후 2시 서울특별시 은평구의 한 장소에서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처형 직전에도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미군정 장교들과 농담을 나누고, 웃으며 인민공화국의 적기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11][6] 당시 미군정 고문관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은 자신의 기록에 김종석을 군사학교 출신의 수재로, 정보장교로 키우고 싶었던 아까운 인재였다고 남겼다.[11]
5. 오키나와 전투를 함께 한 조선인 군인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 육군 제32군 보병 제32연대[1] 제2대대(시무라 츠네오 대대장) 소속 소대장으로 참전하여 마에다 고지 전투([https://www.city.urasoe.lg.jp/docs/2017052900033/ Hacksaw Ridge])를 치렀다. 당시 학도병이었으며 후에 오키나와학의 권위자가 된 토게마 모젠은 자신의 오키나와 전투 기록에서 김종석(니하라 마사토 중위)의 전투 모습과 인품을 남겼다.
마에다 고지는 미군으로부터 "있는 힘을 다해 지옥을 하나로 모았다"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처절한 백병전이 벌어진 곳이었다. 외간 슈젠은 부대를 이끄는 소대장 김종석 중위의 강인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2]
호 안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지며 시끄러웠다. 잠시 후 와다나카 대대장이 몇 명의 병사와 함께 생환했다. 모두 불사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싸움이었다. 시무라 대대장은 변함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지도를 펼치며 깊숙이 앉아 있었다. 위생병 두 명이 고함을 지르며 부상병을 치료했다. 상처의 고통에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자, 두려움에 울음을 터뜨리는 자, 발광하는 자, 호 안은 수라장이었다. 대대 포 소대의 니하라 마사토 중위는 포가 쓸모없다고 판단하자 과감하게 수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적에게 돌입하여 수류탄전을 벌이며 호로 돌아왔다.
1945년 5월 1일 마에다 고지 돌입 명령이 내려졌을 때, 제2보병 포 소대는 새벽에 마에다 고지로 향했다.[3] 당시 제32연대 제2대대 포 소대 소속이었던 사토 료지는 홋카이도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2]
오키나와 전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무리하지 말라고 타일러준 소대장(니하라 마사토 중위)과 참호에 숨어 있자고 말한 4년차 병사 덕분이었다.
(중략) 5월 1일, 마에다 고지 돌입 명령이 내려졌다. 소총의 제5중대가 야습을 갈 때, 적의 뒤로 돌아가 중화기를 파괴하기 위해 나의 대대 포 소대에서도 3개 조 6명의 특공대가 나섰다. 내가 "출발하겠습니다"라고 보고하러 가니, 한국인 소대장은 "죽는 것만이 봉사가 아니다"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출발 후, 참호가 있었다. 함께 간 4년차 병사가 "여기로 들어가자"라고 말했다. 나는 맥이 빠졌다. 적진까지 가지 않고 계속 참호에 들어가 있었다. 제5중대는 약 100명 중, 돌아온 것은 단 한 명뿐이었다. 특공대도 우리 둘만 귀환했다.
5월 10일 새벽, 김종석은 마에다 고지 전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수 명의 중상 병사들과 함께 건빵 참호[4]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미군의 공격을 피해 마에다 고지의 건빵 참호에서 통조림 참호, 카야 대대의 전투 지휘 참호, 동료들의 참호 등으로 이동하며 다나바라 고지에서 키타가하라까지 잠복하며 이동했다.
일본군의 조직적인 전투가 중지되고 일본이 항복한 이후에도, 그의 대대는 기노완의 산에서 게릴라전을 계속하다가 9월 3일, 나카가미군 나카구스쿠촌 키타우에하라에서 미군에게 항복했다.
토게마 모젠은 김종석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무장 해제가 임박했을 무렵, 키타가하라의 참호에 잠복해 있던 시기가 있었는데, 나의 오키나와 전투 체험 중에서는 비교적 평온한 날들이었다. 대대 포병 소대 소대장이었던 조선 출신 니하라 마사토 중위는 군인으로서 용감한 사람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정확한 판단력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었다. 또한, 처절했던 마에다 고지 전투 중에도 그는 부하들에게 "죽는 것만이 국가에 대한 봉사가 아니다"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 니하라 중위와 나는 매일 밤 일본의, 그리고 아시아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니하라 중위는 진심으로 전후 일본과 아시아의 미래를 걱정했다. 니하라 중위는 패전 후 한동안 도쿄에 살았지만, 한반도로 건너가 조선의 혁신 운동가가 되어 체포되어 총살형에 처해졌다는 소문이 있다. 부친은 조선 출신으로 조선 이왕조의 무관이었다.
오키나와 전투에는 김종석 외에도 다음과 같은 조선인 군인들이 참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신응균
- 최정근: 항사 56기, 오키나와에서 전사
- 정상수: 육사 57기, 오키나와에서 전사
참조
[1]
웹사이트
[証言記録 兵士たちの戦争]沖縄戦 住民を巻き込んだ悲劇の戦場 ~山形県・歩兵第32連隊~|NHK 戦争証言アーカイブス
https://www2.nhk.or.[...]
2020-01-22
[2]
서적
私の沖縄戦記 前田高地・六十年目の証言
각천학예출판
[3]
간행물
북해타임스연재「아아오키나와」
[4]
웹사이트
浦添グスクの缶詰壕とカンパン壕 {{!}} うらそえナビ
https://www.urasoena[...]
2020-01-22
[5]
웹사이트
金鐘碩
https://blog.naver.c[...]
2020-01-22
[6]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5화 여수 14연대 반란
199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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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국제 금융인의 눈
삶과꿈
2003-01-10
[8]
서적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06-01
[9]
뉴스
‘2차 친일 인명사전’ 좌익계열도 여럿 수록될 듯 - ‘박정희 전 대통령 동료’ 남로당 군인 등 포함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3-06
[10]
서적
63인의 역사학자가 쓴 한국사 인물 열전 (3)
돌베개
2003-12-01
[11]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5화 여수 14연대 반란
1999-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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