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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국방경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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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조선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 미군정 군사국에 의해 창설된 군사 조직이다. 조선 국군준비대 등 사설 군사 단체의 난립을 막고 정식 군대 창설을 목표로 하였으며, 각 도별로 1개 연대씩 창설되었다. 초대 사령관은 미군 중령 존 마샬이었으며, 이후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었고, 제주 4.3 사건 진압에 투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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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국방경비대 - [정부기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기관명남조선국방경비대
현지어 이름남조선국방경비대
영어 이름South Korean Constabulary of Police Reserve
설립일1946년
해산일1948년
후신대한민국
관할미군정
상급 기관국내경비부 (통위부)
주요 정보
설립1946년
해체1948년
후신대한민국 육군

2. 역사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청은 미군과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고 미국식 군대를 만들기 위해 군사영어학교를 열었다. 일본군만주국군 장교 출신 한국인 군 경험자들이 이 학교에 들어갔고, 이는 나중에 대한민국 육군의 기반이 되었다.

아서 챔프니(Arthur S. Champeny) 대령이 제안한 "대나무 계획(Bamboo Plan)"은 각 도에 미군 장교가 지휘하는 1개 중대를 만들고, 이를 대대와 연대로 키워 총 8개 연대, 2만 5천 명 규모의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이응준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군처럼 8개 연대로 구성된 1개 사단을 편성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일본군 제식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나중에 M1 개런드 소총 등 미군 무기로 바꾸었다.

1946년 1월 15일, 국방사령부 군사국 인사과 아래 “국방경비대”가 만들어졌다. 같은 날 태릉에서 제1연대 창설을 시작했고, 이후 각 지역에 연대가 만들어졌다. 2월 7일에는 국방경비대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군사영어학교는 “국방경비사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6년 6월 15일, 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이름이 바뀌었다.[1] 조선경비대는 1948년 제주 4.3 사건 진압에 참여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9월 5일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었다.[1]

2. 1. 창설 배경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조선 국군준비대 등 사설군사단체 혹은 유사군사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그해 11월에는 그 수가 무려 60여 개에 달했는데, 미군정 당국은 이같은 난립의 폐해를 막고 정식 군대 창설을 위해 이들 단체에 대한 해체령을 내렸다.[2]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청은 미국 군인과의 의사소통을 도모하고 미국식 군대를 건설할 목적으로 군사영어학교를 개교했다. 일본군만주국군 장교 출신 한국인 군대 경험자들이 입학했고, 이는 이후 대한민국 육군의 기초가 되었다.

2. 2. 남조선국방경비대 창설 (1946년)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조선 국군준비대 등 여러 사설군사단체가 생겨났으나, 미군정은 이들을 해산하고 정식 군대 창설을 추진했다.

1946년 1월 15일, 미군정 군사국 인사과 아래에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창설되었다.[2] 태릉(현 육군사관학교)에 주둔한 제1연대를 시작으로,[2] 각 도에 1개 연대씩 창설되었다. 제1연대는 채병덕 정위가 지휘하는 A중대 187명으로 시작하여,[2] 2월 8일 대대 편성을 완료하였다.[3][4]

초대 사령관은 미군 존 마샬 중령, 2대 사령관은 러셀 베로스 대령이었다. 1946년 9월 하지 중장이 이형근을 사령관대리로 임명하였으나, 베로스와의 갈등 끝에 송호성이 사령관이 되었다.

아서 챔프니(Arthur S. Champeny) 대령의 "대나무 계획(Bamboo Plan)"에 따라, 각 도에 미군 장교 지휘 하의 1개 중대를 설립하고, 이를 대대, 연대로 확장하여 총 8개 연대, 2만 5천 명 규모의 조직을 편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최종적으로 이응준의 의견을 받아들여 미군을 본떠 8개 연대로 구성된 1개 사단을 편성하기로 결정되었다.

초기에는 일본군 제식 소총(38식 보병총) 등으로 무장하였으나,[2] 이후 M1 개런드 소총 등 미군 무기로 교체되었다.

1946년 6월 15일,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다.

2. 3. 조선경비대로 개칭 (1946년)

1946년 6월 15일, 〈군정법령〉에 따라 '남조선국방경비대'가 '조선경비대'로 개칭되었다.[2] 군사영어학교는 국방경비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초기 장비는 일본군의 삼팔식 보병총 등이었으나, 곧 당시 최신예 소화기 중 하나였던 M1 개런드 자동소총을 비롯한 미국군의 무기로 대체되었다.

2. 4.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 (1948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9월 5일 조선경비대는 대한민국 육군으로 개편되었다.[1]

2. 5. 제주 4.3 사건과 조선경비대

1948년 제주 4.3 사건 진압을 실행했다.[1]

3. 조직 및 규모 확대

남조선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 태릉에 있던 구 일본군 지원병훈련소 시설에서 1연대 A중대(중대장 채병덕 정위) 187명으로 시작하여,[2] 2월 8일에는 1연대가 대대 편성을 완료하였다.[3][4] 이후 모병을 통해 연대가 증설되어 여단으로 편성되었고, 1949년에는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켜 전쟁 전에 10개 사단을 갖추었다. 1연대가 1여단으로 확대되고, 1연대의 1개 대대를 모체로 다른 연대를 창설하였으며, 1여단이 다시 1사단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사단들은 제대로 갖춰진 것이 부족한 껍데기 사단이었으며, 경험 있는 인력과 장비가 매우 부족했다.

한편, 좌익 세력이 대거 국방경비대에 합류하면서 국방경비대의 성격이 달라졌고, 이로 인해 국립경찰과 국방경비대 사이에 무장 충돌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4]

3. 1. 초기 조직 (1946년)

군사국 아래에 설치된 한국경비대 총사령부는 다음과 같다.

  • 고급부관실
  • 작전과
  • 조달보급과
  • 인사과
  • 군사영어학교(후의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 제1연대부터 제9연대까지 (1946년 1월부터 3월까지 창설)

3. 2. 규모 확대

남조선국방경비대는 창설 이후 각 도별로 1개 연대씩을 창설하는 방식으로 병력을 늘려나갔다. 1946년 1월 15일, 태릉에 있던 구 일본군 지원병훈련소 시설에서 1연대 A중대(중대장 채병덕 정위) 187명으로 시작하여,[2] 2월 8일에는 1연대가 대대 편성을 완료하였다.[3][4]

이후 모병을 통해 연대가 증설되어 여단으로 편성되었고, 1949년에는 여단을 사단으로 승격시켜 전쟁 전에 10개 사단을 갖추었다. 1연대가 1여단으로 확대되고, 1연대의 1개 대대를 모체로 다른 연대를 창설하였으며, 1여단이 다시 1사단이 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사단들은 제대로 갖춰진 것이 부족한 껍데기 사단이었으며, 경험 있는 인력과 장비가 매우 부족했다.

한편, 좌익 세력이 대거 국방경비대에 합류하면서 국방경비대의 성격이 달라졌고, 이로 인해 국립경찰과 국방경비대 사이에 무장 충돌이 자주 발생하기도 했다.[4]

4. 역대 지휘관

남조선국방경비대의 역대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4. 1. 경비대 총사령관


4. 2. 경비대 부사령관


4. 3. 경비대 육군사령관


5. 주요 지휘관

겸 총참모장정일권만주군관학교제5연대장백선엽만주군관학교


6. 각 연대별 위치 (1946년 창설 당시)

각 연대와 소재지(1946년 창설 당시)
연대명위치
제1연대태릉(서울) (경기 담당)
제2연대대전(충남 담당)
제3연대이리(전북 담당)
제4연대광주(전남 담당)
제5연대부산(경남 담당)
제6연대대구(경북 담당)
제7연대청주(충북 담당)
제8연대춘천(강원 담당)
제9연대제주(제주 담당)
제10연대강릉
제11연대수원
제12연대군산
제13연대온양
제14연대여수
제15연대마산


참조

[1] 뉴스 今日の歴史(9月5日) http://japanese.yonh[...] 聯合ニュース 2009-09-05
[2] 서적 백기인, 육군창설과정
[3] 서적 정해구, 일본육사출신의 대한민국 참모총장 채병덕
[4]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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