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 대포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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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포 대포서원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양성지의 사후 그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우이다. 양성지는 집현전에서 활동하며 여러 편찬 사업에 참여했고, 홍문관 설치를 건의하여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정조는 양성지의 출생지에 월곡서원을 창건하도록 명했고, 1973년 양성지 묘소 아래에 사우가 창건되었다. 사우는 팔작지붕의 익공 건물로, 현대식 강당과 3문,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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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대포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경기도 김포시 양촌읍 |
소재지 | 대포리 산32-3번지 |
유형 및 지정 정보 | |
종류 | 향토유적 |
지정 번호 | 1 |
지정일 | 1986년 3월 3일 |
상세 정보 | |
시대 | 조선 |
소유자 | 남원양씨 |
면적 정보 |
2. 생애 및 업적
양성지(梁誠之, 1415~1482)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문신으로,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그는 세종 23년(1441)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훈구파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집현전 학사로서 고려사 개찬 작업에 참여했으며, 국가 통치에 필요한 팔도지리지와 동국지도 등을 편찬하여 바쳤다. 세조 9년(1463)에는 홍문관 설치를 건의하고 학문 발전을 위한 10개 조항의 상소를 올리는 등 문치(文治)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이후 예종과 성종 대에 걸쳐 지중추부사, 홍문관 제학 및 대제학, 지춘추관사, 대사헌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세조실록, 예종실록, 동국여지승람 편찬과 같은 중요한 국가 사업을 이끌었다. 성종 2년(1471)에는 좌리공신 3등으로 책록되어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양성지는 학문과 행정 양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양성지(梁誠之)는 1415년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순부(純夫)이고, 호는 눌재(訥齋) 또는 송파(松坡)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아버지는 구주(九疇)이다.2. 2. 관직 진출과 학문 활동
세종 23년(144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훈구파의 중진으로서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며 고려사 개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팔도지리지와 동국지도 등을 편찬하여 국가 운영의 기초 자료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세조 9년(1463)에는 홍문관 설치를 건의하여 역대 서적을 체계적으로 보관하고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10개 조항의 상소문을 올려 학문 발전을 위한 정책을 제안했다. 예종 원년(1469)에는 지중추부사, 홍문관 제학, 지춘추관사를 겸임하며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성종 2년(1471)에는 좌리공신 3등으로 책록되어 남원군에 봉해졌으며, 이후 대사헌을 역임했다. 성종 12년(1481)에는 홍문관 대제학으로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2. 3. 홍문관 설치 건의와 학문 발전 노력
양성지(梁誠之)는 조선 전기의 중요한 학자이자 문신으로, 집현전에서 활동하며 고려사 개찬, 팔도지리지, 동국지도 편찬 등에 참여했다. 그는 학문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특히 세조 9년(1463)에는 홍문관 설치를 건의하여 역대 서적을 체계적으로 보관하도록 제안했다. 또한,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상소를 올려 학문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2. 4. '세조실록', '예종실록', '동국여지승람' 편찬 참여
양성지는 예종 1년(1469년)에 지중추부사, 홍문관 제학,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직하며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성종 12년(1481년)에는 홍문관 대제학으로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하였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2. 5. 좌리공신과 남원군 책봉
양성지는 성종 2년(1471년) 좌리공신 3등으로 책록되어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이후 대사헌을 역임하였으며, 성종 12년(1481년)에는 홍문관 대제학으로서 여지승람(輿地勝覽) 편찬에 참여하였고, 지중추부사가 되었다.3. 사후 추모 및 월곡서원 건립
조선 전기의 대학자이자 문신인 양성지( , 1415~1482)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사후 추모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의 자는 , 호는 또는 이며, 본관은 이다. 그는 세종 23년(1441) 문과에 급제한 이래 훈구파의 중진으로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며 고려사 개찬, 팔도지리지 및 동국지도 편찬에 참여하였고, 세조 대에는 홍문관 설치를 건의하는 등 학문 발전에 기여했다. 성종 대에는 좌리공신 3등으로 남원군에 봉해지고 대사헌, 홍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며 동국여지승람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정조 15년(1791), 정조는 규장각 설치를 제안했던 양성지의 공적을 기려 서원 건립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출생지에는 월곡서원이 창건되었으나, 만년을 보낸 통진(현 김포시) 지역의 서원 건립은 추진되었음에도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3. 1. 정조의 서원 건립 하명
정조 15년(1791),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한 후, 그 제안자인 문양공(文襄公) 양성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명하였다. 이 명에 따라 양성지의 출생지에는 월곡서원이 창건되었다. 또한 양성지가 만년을 보낸 통진(현 김포시)에도 서원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하였다.3. 2. 통진 서원 건립 무산
정조 15년(1791), 정조는 설치를 제안했던 양성지(시호 )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양성지의 출생지에는 이 세워졌다. 또한 양성지가 만년을 보냈던 에도 서원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이는 실현되지 못하였다.3. 3. 현대의 사우 건립
조선 정조 15년(1791), 정조는 규장각 설치 제안자인 양성지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서원 건립을 명하였다. 이에 따라 양성지 선생의 출생지에는 월곡서원(월곡서원)이 창건되었으나, 그가 만년을 보낸 통진(현 김포시) 지역에는 서원 건립이 추진되었음에도 실현되지 못하였다.이후 시간이 흘러 1973년, 김포시 양촌면 대포리에 있는 양성지 선생의 묘소 아래에 마침내 사우(祠宇)가 창건되었다.
3. 3. 1. 건물 구조 및 특징
건물은 왼쪽에 현대식 강당이 있고, 그 뒤편으로 삼문과 사당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둥근 기둥(원주)을 세워 만든 팔작지붕 양식의 익공 건물이며, 규모는 정면 8.3m, 측면 3.7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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