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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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훈구파는 조선 초 세조의 왕위 찬탈을 도운 공신 세력으로, 막강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학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조 시대에 권력을 장악하고 사림파와 대립하며 무오사화, 갑자사화, 을사사화 등 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탄압했다. 훈구파는 중종반정 이후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나 명종 대에 다시 권력을 장악했지만, 선조 즉위 후 사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몰락했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왕권과 신권의 대립, 경제적 이해관계, 학문적 입장 차이에서 기인했으며, 조선 붕당 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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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 훈구파 |
한자 | 勳舊派 |
로마자 표기 | Hungupa |
영어 | Hungu faction |
개요 | |
창당 | 1455년 (세조 찬위) |
해산 | 1575년 (선조 이후 몰락) |
선행 조직 | 관학파 |
후계 정당 | 서인 |
종교 | 유교 불교 도교 등 |
주요 인물 | |
영수 | 압구정 한명회 희현당 신숙주 사봉 이극돈 손암 심의겸 |
2. 역사적 배경
훈구파는 조선 건국 이후 세조의 즉위 과정에서 형성된 정치 세력이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으며, 이 과정에서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등 많은 공신들이 훈구파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훈구파는 세조 찬위를 도운 공신, 총신, 어용학자, 관학파, 권문세족의 자손들로 구성되었다.
성종 때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훈구파는 안전에 위협을 느꼈으나, 연산군 때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숙청하였다. 중종 반정 이후 기묘사화와 명종 때 을사사화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나, 선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는 몰락하였고 남은 잔존 훈구파들은 대부분 서인에 가담한다.[9]
2. 1. 세조 시대
세조는 왕권 강화를 위해 훈구파를 적극적으로 등용하고, 이들에게 막대한 권력과 경제적 특권을 부여했다. 훈구파는 신숙주, 서거정, 이극돈, 이석형 외 세조 찬위를 도운 공신·총신(寵臣)·어용학자 및 관학파와 권문세족의 자손들로 구성되었다. 세조의 훈구파에 반대한 세력들은 훈구파에서 별도로 절의파로 구분하기도 한다.[8] 이들은 높은 관직에 등용됨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무역에도 관여하고, 공물 방납을 통해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기도 하였으며, 공신전을 받아 막대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상공업의 이익 독점을 추구하였다. 능란한 문필로 여러 가지 관찬사업(官撰事業)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2. 2. 성종 ~ 연산군 시대
성종 대에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이 갈등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사건에서 기인한다. 이극돈과 김일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표면적인 발단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훈구파와 사림파의 근본적인 세계관 차이가 있었다. 훈구파는 수양대군의 즉위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사림파는 세조의 즉위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었다.[10]사림파는 세조 체제를 대역죄로 규정하고,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통해 이러한 인식을 드러냈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등 사림파 인사들을 능지처사하는 등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이 사건은 무오사화로 불리며,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다는 의미에서 '사화(史禍)'라고도 불린다.[10]
연산군은 1498년 무오사화[2]와 1504년 갑자사화[3]를 일으켜 사림파를 탄압하고 훈구파의 권력을 강화했다.
2. 3. 중종 ~ 선조 시대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면서, 훈구파는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나, 기묘사화를 통해 다시 권력을 장악했다.[9] 명종 대에는 을사사화를 통해 훈구파가 사림파를 완전히 제압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9] 선조 즉위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는 몰락하게 되었고, 남은 잔존 훈구파들은 대부분 서인에 가담한다.[9]3. 주요 인물
4.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조선 초기 정치사의 핵심적인 대립 구도였다. 두 세력의 갈등은 세조의 즉위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었다.[8] 성종 즉위 이후 사림파 등장으로 훈구파는 안전에 위협을 느꼈다. 연산군 대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숙청하였으며, 중종 반정 이후 기묘사화와 명종 때 을사사화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그러나 선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훈구파는 몰락하게 되었고, 남은 훈구파들은 대부분 서인에 가담한다.[9]
4. 1. 갈등의 원인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은 조선 사회의 정치, 경제, 학문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했다.정치적 입장 차이훈구파는 왕권 강화를, 사림파는 신권 강화를 주장했다. 이러한 차이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서 비롯된다. 훈구파는 세조의 즉위를 지지하고 옹호했지만, 사림파는 이를 비판하며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경제적 이해관계훈구파는 공신전 등으로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상공업 이익을 독점했다. 반면 사림파는 이러한 훈구파의 경제적 특권을 비판했다. 훈구파는 높은 관직을 이용해 무역에 관여하고, 공물 방납으로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8]
학문적 입장 차이훈구파는 관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세조의 정책을 지지했다. 반면 사림파는 성리학을 중심으로 학문을 연구하고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이러한 학문적 차이는 무오사화의 발단이 된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김종직은 조의제문을 통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했고, 이는 훈구파의 분노를 사 무오사화로 이어졌다.[10]
4. 2. 갈등의 전개
사림파와 훈구파의 갈등은 사화를 통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조선 사회 갈등은 왕권과 신권의 대립에서 시작되어 훈구파와 사림파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세조의 왕권 탈취에서 기인한다. 갈등의 발단은 이극돈과 김일손 두 사람 사이의 문제였지만, 그 배후는 복잡했다. 이극돈은 수양대군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 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다.집권 훈구 세력(구세력)과 신진 사림 세력(신세력)의 가장 큰 차이는 세조의 즉위에 관한 견해 차이였다. 이극돈이 유자광을 끌어들이고, 유자광이 다시 노사신, 윤필상, 한치형, 신수근 등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들 훈구 세력의 세계관이 같았기 때문이다.
사림파는 세조 체제를 대역죄로 몰아 세조 즉위 자체를 부인하는 세계관이었다. 결국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이어져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목을 자르며 부관참시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목을 베는 상황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세 사신(史臣)은 대역죄로 몰려 온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는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사화(史禍)로도 불린다.[10]
5. 붕당
조선의 붕당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을 시작으로, 이후 여러 당파로 분화하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주요 붕당의 분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붕당 | 분화 시기 및 사건 | 주요 분파 | 비고 |
---|---|---|---|
사림파 | 사화 | 훈구파와의 대립 | |
동인 | 1575년 동서분당 | 남인, 북인 | 서인과 대립 |
서인 | 1575년 동서분당 | 동인과 대립 | |
남인 | 1589년 기축옥사 | 탁남, 청남 | 북인에서 분파 |
북인 | 1589년 기축옥사 | 대북, 소북 | 남인에서 분파 |
대북 | 육북, 골북, 중북 | 소북에서 분파 | |
소북 | 청소북, 탁소북 | 대북에서 분파 | |
노론 | 1680년 경신환국 | 소론에서 분파 | |
소론 | 1680년 경신환국 | 노론에서 분파 |
이후 붕당 정치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 신임사화(1721년), 정미환국(1727년) 등을 거치며 더욱 복잡해졌다.
6. 평가
훈구파는 세조 찬위를 도운 공신·총신(寵臣)·어용학자, 관학파, 권문세족의 자손들로 구성되었다. 신숙주, 서거정, 이극돈, 이석형 등이 대표적이다.[8] 이들은 높은 관직을 이용하여 무역에 관여하고, 공물 방납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공신전을 받아 막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또한, 여러 관찬사업(官撰事業)에 참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성종 즉위 후 사림파의 등장으로 위협을 느꼈으나, 연산군 대에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숙청했다. 중종 반정 이후 기묘사화와 명종 때 을사사화를 통해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나, 선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몰락했고, 남은 훈구파들은 대부분 서인에 가담했다.[9]
참조
[1]
웹사이트
훈구파(勳舊派) Hungu faction
https://encykorea.ak[...]
2023-11-15
[2]
웹사이트
무오사화(戊午士禍) Muosahwa
https://encykorea.ak[...]
2023-11-15
[3]
웹사이트
갑자사화(甲子士禍) Gapjasahwa
https://encykorea.ak[...]
2023-11-15
[4]
웹사이트
중종반정(中宗反正) King Jungjung's coup d'etat
https://encykorea.ak[...]
2023-11-15
[5]
웹사이트
기묘사화(己卯士禍) Gimyosahwa
https://encykorea.ak[...]
2023-11-15
[6]
문서
ただし[[燕山君]]期に発生した[[甲子士禍]]([[1504年]])と[[丙寅士禍]]([[1506年]])ではいずれも士林派のみならず、勲旧派も大規模粛清に巻き込まれている。
[7]
웹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장(詞章)
http://encykorea.aks[...]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07-04
[8]
뉴스
"[경북, 정체성을 말한다] 16. 세조 훈구파에 맞선 사육신 등의 절의파"
https://www.kyongbuk[...]
경북일보
2017-01-12
[9]
문서
사실 붕당정치가 발생할 때 서인은 훈구파 가문 출신이던 [[심의겸]]과 [[이이]]의 영향을 받아서 대부분의 훈구파 잔존 세력 처리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10]
뉴스
조광조와 중종, 아무도 믿지 못한 왕… 왕도정치 꿈꾸던 젊은 개혁가 내치다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12-11-30
[11]
문서
[[심의겸]] - 기호학파(율곡학파, 우계학파)
[12]
문서
[[김효원]] - 영남학파(퇴계학파, 남명학파) 및 화담학파.
[13]
문서
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주로 퇴계학파. [[류성룡]], [[이원익]] 등.
[14]
문서
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주로 남명학파. [[이산해]], [[정인홍]] 등.
[15]
문서
광해군 폐위 반대. [[유희분]] 등.
[16]
문서
광해군 폐위와 영창대군 세자옹립 주장. [[유영경]] 등.
[17]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이경전]], [[이이첨]], [[허균]] 등.
[18]
문서
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홍여순]] 등.
[19]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반대. [[유몽인]], [[곽재우]] 등.
[20]
문서
인조반정 주도세력. [[이귀]], [[김류]], [[최명길]], [[심기원]] 등
[21]
문서
반정에 참여치 않은 재야세력. [[김상헌]] 등.
[22]
문서
[[원두표]] 및 그 추종자들
[23]
문서
[[김자점]] 및 그 추종자들
[24]
문서
[[김집]] 및 그 추종자들
[25]
문서
[[김육]] 및 그 추종자들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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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허적]], [[유혁연]], [[권대운]] 등.
[27]
문서
서인과 싸운 예송 주도자들. [[윤휴]], [[윤선도]], [[허목]], [[심광수]] 등.
[28]
문서
[[송시열]] 및 그 추종자들
[29]
문서
[[윤증]] 및 그 추종자들
[30]
문서
영조에게 영합하여 생존함. [[박문수]] 등
[31]
문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 [[이인좌]], [[심유현]], [[김일경 (1662년)|김일경]] 등
[32]
문서
척신정치 반대. [[김종수]] 등.
[33]
문서
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홍봉한]], [[정후겸]], [[김상로]] 등
[34]
문서
천주교 박해 주장. [[홍의호]], [[홍낙안]] 등.
[35]
문서
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안정복]], [[신후담]] 등.
[36]
문서
천주교 박해 반대
[37]
문서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38]
문서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39]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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