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리공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좌리공신은 1471년 조선 성종이 즉위 후 왕권 강화를 위해 책봉한 공신들을 일컫는다.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린 제안대군 대신 성종이 즉위하면서, 성종은 신숙주, 한명회 등을 중심으로 좌리공신 책봉을 추진했다.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은 1등부터 4등까지 총 70명의 공신을 책봉하고, 이들에게 토지와 노비 등을 하사했다. 그러나 과도한 공신 책봉은 당대의 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갑자사화 등으로 인해 일부 공신이 삭제되기도 했다. 좌리공신 책봉은 왕권 강화에 기여했지만, 정치적 갈등을 심화시키고 부정적인 유산을 남겼다.
조선 예종이 1469년 만 19세의 나이로 승하한 후, 왕실에서는 제안대군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잘산군(성종)을 예종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왕위 계승은 반발 세력을 만들었고, 어린 성종은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공신 책봉을 추진했다.[1]
1471년(성종 2년), 성종은 신숙주, 정효상 등이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즉위를 도운 신하들에게 좌리공신 칭호를 내리기로 결정했다. 성종은 "좌우에서 돕고 다스림을 보좌한" 공이 있다며, 7월 6일 면복을 입고 역대 공신들과 그 자손들을 맹단에 모아 좌리공신 책봉을 선언했다.[17][18]
2. 경위
1471년(성종 2) 3월 26일, 성종은 신숙주, 한명회, 정현조에게 명하여 공신 책봉을 논의하게 하였다.[1] 다음 날, 성종은 이조에 "내가 왕업을 잇고 중책을 맡아 밤낮으로 삼가 노력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곁에서 힘을 써주어 나라가 태평해졌으니 그 공을 가상히 여긴다"는 내용의 전지를 내려 공신 책봉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2]
성종은 좌리공신에게 아마(兒馬) 1필과 향표리(鄕表裏)[3] 1벌을 하사하였다. 또한 반당(伴儻)[4], 토지, 노비와 구사(丘史)[5]를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하였다. 7월 18일에는 말 1필씩을 추가로 지급하였다.[7]
2. 1. 왕위 계승
조선 예종은 1469년 만 1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예종이 남긴 아들은 만 3살에 불과한 원자 제안대군뿐이었는데, 왕실의 최고 웃어른이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조카인 잘산군(성종)을 예종의 양자로 삼아 후계를 잇게 하였다. 하지만 불안한 왕위 계승은 반발 세력을 만들었고, 어린 성종은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공신 책봉을 추진했다.[1]
2. 2. 공신 책봉 추진
조선 예종은 1469년 만 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예종이 남긴 아들은 만 3살에 불과한 제안대군뿐이었는데,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정희왕후는 원자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예종의 조카인 잘산군을 예종의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했다. 하지만 불안정한 왕위 계승은 반발 세력을 만들었고, 어린 성종은 왕권을 보호하기 위해 공신 책봉을 추진했다.
1471년(성종 2년) 3월 26일 성종은 신숙주, 한명회, 정현조에게 명하여 공신 책봉을 논의하도록 지시했다.[1] 다음날 성종은 이조에 왕명을 내리며 '내가 왕업을 잇고 중한 책임으로 밤낮으로 몸을 삼갔는데, 여러 신하들이 좌우에서 힘을 쓰니 국가가 태평해져서 그 공을 가상히 여긴다'고 하며 공신 책봉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밝혔다.[2]
3. 책봉 과정
7월 3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음복연(飮福宴)을 베풀고 좌리공신에게 녹권이 주어졌다.[19]
3. 1. 대상 선정
1471년(성종 2년) 7월 3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음복연(飮福宴)[19]을 베풀고 좌리공신에게 녹권을 주었다. 공신은 4등급으로 나뉘어 책정되었다. 각 등급별 공신 목록과 칭호는 다음과 같다.
등급 | 칭호 | 공신 |
---|---|---|
1등 |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 신숙주, 한명회, 최항, 홍윤성, 조석문, 정현조, 윤자운, 김국광, 권감 |
2등 | 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 | 이정, 이침, 정인지, 정창손, 심회, 김질, 한백륜, 윤사흔, 한계미, 한계희, 송문림 |
3등 | 순성명량좌리공신(純誠明亮佐理功臣) | 성봉조, 노사신, 강희맹, 임원준, 박중선, 이극배, 홍응, 서거정, 양성지, 김겸광, 강곤, 신승선, 이극증, 한계순, 정효상, 윤계겸, 한치형, 이숭원 |
4등 |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 김수온, 이석형, 윤필상, 허종, 황효원, 유수, 어유소, 함우치, 이훈, 김길통, 선형, 우공, 김교, 오백창, 박거겸, 이철견, 한치인, 구문신, 이숙기, 정난종, 정숭조, 이승소, 한치의, 한보, 김수녕, 한치례, 한의, 이극돈, 이수남, 이현, 신정, 김순명, 유지, 심한, 신준 |
7월 1일, 판중추부사 이변과 행 호군 송처관은 승문원에서 30년 넘게 일했고 성종 즉위 때 고명을 청하는 글을 지었음에도 공신에 오르지 못했다며 추록을 청원했으나,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0] 이후 9월 6일, 구치관이 좌리2등공신에 추록되었다.[21]
1482년 4월 24일, 신정은 왕의 인신을 위조하여 남의 재산을 탈취한 죄로 사사된 뒤 공신전에서 삭제되었다.[22] 1504년 5월 10일, 조선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극돈이 공신 명부에서 삭제되었고, 한명회, 정인지, 정창손, 한치형, 윤필상 또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공신 칭호가 추탈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공신 칭호를 잃은 사람들은 모두 복권되었으며, 1511년 6월 12일 병조참의 이세정의 상소로 이극돈의 직첩도 회복되었다.[24]
3. 2. 특전
성종은 좌리공신에게 아마(兒馬) 1필과 향표리(鄕表裏)[3] 1벌을 내려줬다. 또한 반당(伴儻)[4], 토지, 노비와 구사(丘史)[5]를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했다.[6] 7월 18일에는 말 1필씩을 추가로 지급했다.[7]구분 | 1등 공신 | 2등 공신 | 3등 공신 | 4등 공신 |
---|---|---|---|---|
반당(伴儻) | 10명 | 8명 | 6명 | 4명 |
토지 | 40결 | 30결 | 20결 | 10결 |
노비와 구사(丘史) | 5구 | 4구 | 3구 | 2구 |
3. 3. 추가 책봉 및 제외
1471년(성종 2년) 7월 1일, 판중추부사 이변과 행 호군 송처관은 승문원에서 30년 넘게 일했고, 성종 즉위 당시 고명을 청하는 글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청사로 함께 갔던 권감과 송문림과 달리 자신들은 공신에 포함되지 못했다며 추가 책봉을 요청했다. 그러나 성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0]같은 해 9월 6일, 구치관이 좌리2등공신으로 추가 책봉되었다.[21]
1482년(성종 13년) 4월 24일, 신정은 왕의 인장을 위조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은 죄로 사형당한 뒤 공신 명단에서 삭제되었다.[22]
1504년(연산군 10년) 5월 10일,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이극돈이 공신 명단에서 삭제되었다.[23] 한명회, 정인지, 정창손, 한치형, 윤필상 또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공신 자격을 박탈당했다.
중종반정 이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공신 칭호를 잃었던 사람들은 모두 복권되었다.
1511년(중종 6년) 6월 12일, 병조참의 이세정의 상소를 받아들여 이극돈의 직첩도 회복되었다.[24]
4. 반발과 비판
지나치게 급하고 명분 없이 이루어진 공신 책봉은 많은 반대파를 낳았다. 4월 1일부터 5일까지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들이 계속해서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은 끝내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3],[14],[15],[16]
4. 1. 당대의 반발
성종 즉위 과정의 급작스러움과 명분 부족은 좌리공신 책봉에 대한 거센 반발을 불러왔다. 공신 책봉 당일, 사헌부 지평 김수손과 사간원 헌납 유문통은 세종 때에도 공신이 없었는데 지금 공신을 책봉하는 것은 명분이 부족하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성종은 왕위를 이어받아 지금의 아름다움이 있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8]다음 날, 행 대사간 김수녕은 칭하(稱下)[9]가 옳지 않다는 대간의 주장이 옳다고 주장했다. 김수녕은 4등 공신으로 책록되었음에도 반대 주장을 폈다. 성종은 이번에도 받아들이지 않았다.[10] 사헌부 집의 손순효와 사간원 사간 성준 등도 상소했다. 이들은 개국 이래 7번의 공신 책록은 모두 난을 평정하고 종사를 보위한 공이 있었고 그 수도 많지 않았는데, 대왕대비의 결단으로 성종을 왕으로 한 것을 두고 신하들이 무슨 공이 있어 70명에게 공신호를 주냐고 비판했다. 또한 기근으로 백성들이 떠도는 상황에서 대신들이 좌리(佐理)한 공이 없으며, 재이(災異) 때문에 삼공을 파면한 일은 들어봤어도 은총을 내린 일은 없었다며 명을 거두어줄 것을 청했다.[11]
대간은 다음 날에도 합사하여 공이 없는 70여 명에게 공신호를 준 까닭을 알 수 없다며 명을 거두어줄 것을 청했으나, 성종은 듣지 않았다.[12] 4월 1일부터 5일까지 손순효, 성준, 김수손, 이육, 박숭질, 유문통, 박형량, 남윤종 등이 계속 반대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13],[14],[15],[16]
5. 역사적 의의와 영향
좌리공신 책봉은 조선 정치사에 여러 영향을 미쳤다. 조선 중종 때 이과의 역모 진압 후 정난공신 책봉과 정국공신 개정 논의, 조선 명종 때 위사공신 책봉 과정에서 성종 대의 좌리공신 책봉이 선례로 언급되었다.[25][26][27]
5. 1. 왕권 강화
좌리공신 책봉은 성종의 왕권 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공신 책봉 과정에서 공이 없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후대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조선 중종 때 이과의 역모 진압 후 정난공신 책봉 시, 영사 유순정은 좌리공신 때 추대된 사람들도 모두 참여했다며 책봉 범위를 넓히려 했으나, 지평 김안국의 반대와 중종의 지지로 무산되었다. 사관은 유순정이 잘못된 일을 미화했다며 비판했다.[25]정국공신 개정 논의 때도 중종은 좌리공신에 공이 없는 사람이 포함되었음에도 녹공이 이미 정해져 개정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26] 조선 명종 때 위사공신 책봉 과정에서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으나, 명종은 성종 때 좌리공신 책봉 사례를 들어 공신 책봉을 강행했다.[27]
5. 2. 정치적 갈등
조선 중종 때 이과의 역모를 진압하고 정난공신을 책봉할 때 누구까지 책봉할지가 논란이 되었다. 이때 영사 유순정은 좌리공신 때도 추대한 사람들은 모두 참여되었다며 이번에도 마땅히 그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평 김안국은 상황이 다르다고 반대했으나 중종이 김안국을 지지하였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당시에도 공신의 수가 지나쳐서 비판을 받았는데 유순정이 임금 앞에서 잘못된 일을 잘한 것처럼 꾸몄다며 대신의 도리가 아니라고 비판했다.[25]정국공신을 개정할 때에도 중종은 좌리공신도 공이 없다고 하나 녹공이 이미 정해져 추후에 개정하지 않았다며 정국공신을 추가로 개정하지 않았다.[26]
조선 명종 때도 위사공신을 책봉할 때 공이 없는데도 공신의 수록을 받으면 후세의 웃음을 살 것이라며 반대가 많았으나 명종은 성종 때 이 정도까지가 아니었음에도 좌리공신에 책봉된 자가 많았는데 지금은 위급한 때이니 더 말할 것이 없다며 공신 책봉을 강행했다.[27]
5. 3. 부정적 유산
좌리공신 책봉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권력 남용과 특권 남용이라는 부정적인 유산과 교훈 또한 남겼다.조선 중종 때 이과의 역모를 진압하고 정난공신을 책봉할 때, 영사 유순정은 좌리공신 때처럼 추대한 사람들을 모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평 김안국은 상황이 다르다며 반대했고, 중종은 김안국의 의견을 지지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당시에도 공신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 비판을 받았는데, 유순정이 잘못된 일을 잘한 것처럼 꾸몄다며 대신의 도리가 아니라고 비판했다.[25]
정국공신 개정 시에도 중종은 좌리공신에 대해서는 공이 없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미 녹공이 정해졌기 때문에 개정하지 않았다며, 정국공신 추가 개정에 반대했다.[26]
조선 명종 때 위사공신 책봉 과정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했다. 공이 없는데도 공신으로 책봉되는 것은 후세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는 반대가 있었으나, 명종은 성종 때 좌리공신에 책봉된 자가 더 많았다며 공신 책봉을 강행했다.[27]
이러한 사례들은 좌리공신 책봉이 권력자들의 자의적인 판단과 남용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공정성과 형평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6. 현대적 관점
좌리공신 책봉 사건은 현대적 관점에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참조
[1]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3월 26일 (기해) 3번째기사
[2]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3월 27일 (경자) 3번째기사
[3]
문서
조선에서 생산되는 옷감으로 만든 옷의 겉감과 안감
[4]
문서
중앙의 관아나 고관들이 부리는 심부름꾼
[5]
문서
종친과 공신에게 나누어줬던 관노비로 말을 타고 갈 때 고삐를 잡고 앞에서 끌거나 뒤에서 따르는 하인
[6]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3월 27일 (경자) 5번째기사
[7]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7월 18일 (기축) 6번째기사
[8]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3월 27일 (경자) 4번째기사
[9]
문서
나라가 공식적으로 공신의 칭호를 내려주던 일
[10]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3월 28일 (신축) 4번째기사
[11]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3월 28일 (신축) 6번째기사
[12]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3월 29일 (임인) 3번째기사
[13]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4월 1일 (계묘) 3번째기사
[14]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4월 2일 (갑진) 3번째기사
[15]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4월 3일 (을사) 1번째기사
[16]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4월 5일 (정미) 3번째기사
[17]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4월 4일 (병오) 1번째기사
[18]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4월 6일 (무신) 1번째기사
[19]
문서
제사를 지낸 뒤에 베풀던 잔치
[20]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7월 1일 (임신) 3번째기사
[21]
성종실록
《성종실록》 9권, 성종 2년(1471년 명 성화(成化) 7년) 9월 6일 (을해) 2번째기사
[22]
성종실록
《성종실록》 140권, 성종 13년(1482년 명 성화(成化) 18년) 4월 24일 (임술) 2번째기사
[23]
연산군일기
《[[연산군일기]]》 53권, 연산 10년(1504년 명 홍치(弘治) 17년) 5월 10일 (기해) 2번째기사
[24]
중종실록
《[[중종실록]]》 14권, 중종 6년(1511년 명 정덕(正德) 6년) 6월 12일 (경인) 2번째기사
[25]
중종실록
《중종실록》 4권, 중종 2년(1507년 명 정덕(正德) 2년) 12월 2일 (신미) 1번째기사
[26]
중종실록
《중종실록》 9권, 중종 14년(1519년 명 정덕(正德) 14년) 11월 21일 (신해) 4번째기사
[27]
명종실록
《[[명종실록]]》 1권, 명종 즉위년(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8월 29일 (기미) 1번째기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