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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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조실록은 1455년부터 1468년까지 세조 시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으로, 총 49권 1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1469년에 편찬을 시작하여 1471년에 최종 완성되었으며, 신숙주, 한명회 등 63명이 편찬에 참여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606년에 다시 인쇄되었으며, 여러 차례 영인본과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세조실록에는 악보가 수록되어 있으며, 단종이 폐위되었기에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한다. 또한, 민수사옥이라는 사초 수정 사건이 있었으며, 사관의 독립성 문제를 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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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 |
---|---|
조선왕조실록 정보 | |
이름 | 세조혜장대왕실록 (世祖惠莊大王實錄) |
권 | 49 |
책 |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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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세조실록》은 1455년(세조 원년) 음력 6월부터 1468년(세조 14년) 음력 9월까지 총 13년 3개월에 걸친 세조 시대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이다. 본문 47권 및 부록 2권 등 총 49권 18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이룬다. 원본은 활자본(을해자)이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이 모두 소실되어 1606년(선조 39년)에 총 49권 18책으로 4부를 다시 인쇄하였다.[6]
2. 1. 편찬 과정
《세조실록》의 부록에는 1469년(예종 원년) 음력 4월에 편찬을 시작하여 1471년(성종 2년) 음력 12월에 편찬이 종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 한편 1469년 음력 4월 1일 예종이 실록청 편수관들에게 술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에, "이에 앞서 왕명으로 《세조실록》을 찬술했다."고 적혀있다.[2] 또 4일 뒤인 음력 4월 5일에 제1권이 완성된 것으로 보아,[3] 실제 편찬 작업은 《세조실록》의 부록에 기록된 것보다 빨리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편찬 작업은 예종이 죽고 성종조로 넘어갔으며, 1469년 음력 12월에 6방으로 나누어 편찬하던 것을 3방으로 줄였다.[4] 이후 1471년 음력 12월 15일에 춘추관에서 최종 완성된 《세조실록》을 바쳤다.[5]
편찬에 참여한 인원은 다음과 같다.
2. 2. 참여 인물
신숙주, 한명회가 영관사, 최항이 감관사, 강희맹, 양성지가 지관사를 맡았으며, 그 외 동지관사 5명, 수찬관 3명, 편수관 15명, 기주관 11명, 기사관 24명 등 총 63명이 편찬에 참여하였다.[1]2. 3. 간행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실록이 모두 소실되면서 1606년(선조 39년)에 총 49권 18책으로 4부를 다시 인쇄하였다.[6] 이후 1929년부터 193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에서, 1956년 대한민국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영인본을 각각 간행하였으며, 1979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한국어 번역본을 간행하였다.[6][7]3. 민수사옥
세조실록 편찬 과정에서 발생한 민수사옥은 사초 수정 사건이다. 1469년, 민수는 양성지 등 대신들의 과실을 기록한 사초를 제출하면서 사관의 이름을 함께 적도록 지시받았다. 이에 부담을 느낀 민수는 이인석, 최명손에게 수정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강치성을 통해 사초를 빼내어 6군데를 수정하고 일부는 불태웠다.[8][9][10]
이 사실은 사초 검열 과정에서 양수사와 최철관에 의해 발견되어 참의 이영은에게 보고되었고, 원숙강의 사초 수정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민수는 사형 위기에 처했으나 독자이며 자백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제주도 관노로 유배되었고, 강치성과 원숙강은 고문 끝에 자백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이인석과 최명손은 사초 반출 요청을 거절했으나 보고하지 않은 죄로 곤장을 맞고 군적에 편입되었다.[8][9][10]
이 사건은 사초로 인해 발생하여 '사옥(史獄)'이라 불리며, 이후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적지 않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게 되었다.[8][9][10]
3. 1. 사건 개요
1469년 봉상시첨정 민수는 《세조실록》 편찬에 사관으로 참여하여 양성지 등 대신들의 과실을 기록했다. 사초 제출 시 사관의 이름을 함께 적으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민수는 이인석, 최명손에게 사초 수정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강치성을 통해 사초를 빼내어 6군데를 수정하고 일부는 불태웠다.[8][9][10]이 사실은 양수사와 최철관이 사초의 수정된 부분을 발견하여 참의 이영은에게 보고하면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원숙강도 사초를 고친 사실이 밝혀졌다. 민수는 사형에 처해질 뻔했으나, 독자이고 자백한 점이 참작되어 제주도 관노가 되었다. 강치성과 원숙강은 고문 끝에 자백하여 참형을 당했다. 이인석과 최명손은 사초 반출을 부탁받았다가 거절했지만,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아 곤장을 맞고 군적에 편입되었다.[8][9][10]
이 사건을 민수사옥이라 부르며, 사초 때문에 발생하여 "사옥(史獄)"이라 칭한다. 사건 이후 사초에 사관의 이름을 적지 않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다.[8][9][10]
3. 2. 사건 결과
1469년 민수는 《세조실록》의 사관으로 참여하여 양성지 등 대신들의 과실을 기록하였다. 사초 제출 시 사관의 이름을 적으라는 지시가 있자, 민수는 이인석과 최명손에게 사초 반출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강치성을 통해 사초를 빼내어 6군데를 수정하고 일부는 불태웠다.이 일은 사초 검열 과정에서 양수사와 최철관이 발견하여 참의 이영은에게 보고하면서 드러났다. 원숙강도 사초를 많이 고친 사실이 밝혀졌다. 민수는 사형으로 논의되었으나, 독자이고 자백했다는 점이 참작되어 제주도의 관노가 되었다. 강치성과 원숙강은 고문을 당하고 나서야 자백하여 참형을 당했다. 사초 반출을 거절했던 이인석과 최명손은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곤장을 맞고 군적에 편입되었다.[8][9][10]
3. 3. 역사적 의의
민수사옥은 사초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사옥(史獄)"이라고 불린다.[8][9][10] 이 사건 이후 사초를 제출할 때 사관의 이름을 적지 않는 예전 방식으로 돌아갔는데,[8][9][10] 이는 사관의 독립성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4. 특징
《세조실록》은 부록 2권에 오음약보와 16정간보로 기보된 악보가 수록되어 아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는 점, 단종 폐위로 인해 세조 즉위년을 원년으로 칭하는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한다는 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밀랍본 2책이 있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7][12]
4. 1. 악보 수록
《세조실록》 부록 2권에는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오음약보와 16정간보에 기보되었으며, 이 악보들은 아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7]
4. 2. 즉위년칭원법 사용
일반적으로 다른 실록은 왕이 즉위한 해를 즉위년으로 두고 그 이듬해를 원년으로 칭하는 유년칭원법을 사용하지만, 《세조실록》은 단종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세조가 즉위한 해를 원년으로 칭하는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한다.[7]4. 3. 규장각 소장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대한민국의 국보로 지정되지 않은 《세조실록》 밀랍본 2책이 소장되어 있으며, 제27권은 표지가 바뀐 상태이다.[12]5. 평가
《단종실록》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사실을 왜곡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세조실록》은 세조 즉위 이후의 일을 기록하여 대체로 사실대로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
5. 1. 긍정적 평가
《단종실록》은 세조의 왕위 찬탈 등에 대한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평가받으나, 《세조실록》은 세조 즉위 이후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대체로 사실대로 기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6]5. 2. 비판적 평가
《단종실록》은 세조의 왕위 찬탈 등에 대한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평가받으나, 《세조실록》은 세조 즉위 이후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대체로 사실대로 기록한 것으로 평가받는다.[6]참조
[1]
서적
세조실록 47권, 부록 편수관 명단
[2]
서적
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4월 1일 갑인 6번째기사
[3]
서적
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4월 5일 무오 2번째기사
[4]
서적
성종실록 1권, 성종 즉위년 12월 5일 갑인 6번째기사
[5]
서적
성종실록 13권, 성종 2년 12월 15일 임오 4번째기사
[6]
백과사전
세조실록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7]
백과사전
세조실록
https://terms.naver.[...]
두산백과
[8]
서적
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4월 24일 정축 1번째기사
[9]
서적
예종실록 5권, 예종 1년 4월 27일 경진 1번째기사
[10]
백과사전
민수사옥
https://terms.naver.[...]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1]
음악사전
세조실록악보
https://terms.naver.[...]
한겨레음악사전
[12]
뉴스
"<조선왕조실록> ①국보 지정서 빠진 60여책 더 찾았다"
https://news.naver.c[...]
20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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