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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창선대교 붕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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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해 창선대교 붕괴사고는 1992년 7월 30일 남해군 창선면과 삼동면을 연결하는 창선대교의 교각 2개가 붕괴된 사건이다. 이 사고로 4명의 사상자(사망 2명, 부상 2명)가 발생하고, 재산 피해와 함께 교통이 두절되었다. 사고 원인은 부실 시공과 해수 염분에 의한 콘크리트 부식으로 밝혀졌으며, 사고 후 신 창선대교가 건설되었다. 사고 이후 유속이 심한 해상 구조물에 대한 콘크리트 중성화 대책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영세업체의 시공과 현장 여건을 고려하지 않은 시공의 위험성을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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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창선대교 붕괴사고 - [지명]에 관한 문서
교량 정보
이름창선대교(昌善大橋)
공식 명칭창선대교(昌善大橋)
횡단삼동면과 창선면 사이 지족해협
위치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지족리 ~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관리부산지방국토관리청
교통 시설구 국도 제3호선
구조거더교
길이440m
너비8.5m
운행 높이7m
착공일1973년 10월 0일
완공일1980년 6월 5일
개통일1980년 6월 5일
폐쇄일1992년 7월 30일

2. 사고 발생

1992년 7월 30일, 경상남도 남해군창선면삼동면 사이 지족해협을 잇는 창선대교의 일부 구간이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이 사고는 인명 및 재산 피해와 함께 지역 교통망에 큰 혼란을 야기했다.

2. 1. 위치 및 제원

wikitext

창선대교 기본 정보
항목내용
위치경상남도 남해군 창선면, 삼동면 [https://web.archive.org/web/20191008061513/http://tour.namhae.go.kr/00002830/00002831/00002841.web 지족해협]
관리기관부산지방국토관리청, 진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
건설업체부산 소재 경인건설 (당시 경진건설)
건설 기간1975년 10월 ~ 1980년 6월
형식게르버식 T형 교각 4개, 단순보 교각 7개, 우물통 기초
제원교장 440m, 교폭 8.5m (왕복 2차선)


2. 2. 사고 내용

1992년 7월 30일 오후 5시 20분경 남해군 창선면삼동면을 연결하는 창선대교의 4번, 5번 교각이 무너지면서 붕괴되었다.[1] 이 사고로 총 4명의 인명 피해(사망 2명, 부상 2명)가 발생했으며, 막대한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1] 또한, 남해군 삼동면창선면을 잇는 교량의 통행이 끊겨 하루 약 2,000대의 교통량이 두절되는 결과를 낳았다.[1]

사상자 현황[1]
사망자부상자
국적인원인원
대한민국22
합계22


3. 사고 원인 및 경과

창선대교 붕괴 사고는 건설 단계부터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공사 대금 부족으로 시공사가 세 차례나 변경되었고, 최종 시공사는 경험이 부족한 영세업체였다. 이러한 부실 시공은 빠른 유속과 깊은 수심 환경에서 교각 기초의 위치 선정 오류와 심도 부족 문제를 야기했다.[1][2] 또한, 해수의 염분콘크리트부식시켜 교각의 내구성을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80년 6월 완공 이후, 교량에는 균열과 흔들림 등 부실 징후가 꾸준히 나타났으며, 주민들의 안전 점검 요구가 이어졌다. 특히 1990년대 들어 대형 차량 통행 증가로 위험 징후가 심화되었으나, 사고 직전 실시된 안전 진단에서는 '위험 없음' 판정을 받았고, 관리 당국의 소극적인 대처와 보수 공사 부재 속에 결국 1992년 7월 30일 교량 일부가 붕괴되는 사고로 이어졌다.

3. 1. 사고 원인

건설교통부와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방명석 박사 등이 참여한 창선교 사고조사반의 1차 조사 결과, 사고는 붕괴교각의 기반이 '''바닷물'''의 '''염분'''에 의해 점차 부식되면서 콘크리트가 부식되고 탈락한 데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붕괴 사고의 구체적인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되었다:

  • '''부실 시공''': 경험이 부족한 '''영세업체'''가 시공을 담당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유속(V=2.76m/sec)이 빠른 수중에 우물통 기초의 위치를 부정확하게 시공하여 편심이 발생했고, 우물통 기초의 심도 역시 충분히 깊지 않았다.
  • '''염분 부식''': 해수에 포함된 염분 성분콘크리트의 중성화를 일으켜 교량의 기초가 부식되는 결과를 낳았다.


건설교통부는 이에 따라 전문 구조분석기관에 의뢰하여 붕괴교각해저 부분에서 채취한 콘크리트 조각을 분석해 정확한 사고 원인을 밝히는 한편, 나머지 교각들에 대해서도 정밀 안전 진단을 실시하였다.

3. 2. 사고 경과

창선대교는 공사 대금이 부족하여 시공사가 대림산업, 진경토건, 경인종합개발 순으로 세 차례나 바뀌는 등 건설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1975년 처음 공사를 시작한 대림산업은 진입도로 공사와 교각 일부를 시공했지만, 공사 조건이 좋지 않아 1977년 공사를 포기했다. 최종 시공사인 경인종합개발이 받은 공사 금액은 총 8.1434억으로, 이는 실제 공사 비용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당시에는 공사 전체가 아닌 매년 확보된 예산 범위 내에서 입찰을 진행하는 방식도 부실의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1980년 6월 완공된 창선대교는 개통 직후부터 교각과 상판에 균열이 발생하는 등 부실공사의 징후를 보였고, 이에 대한 주민들의 안전 점검 요구 민원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 레미콘, 덤프트럭과 같은 대형 차량의 통행이 잦아지고 전체 통행량이 증가하면서, 차량 통행 시 교량이 눈에 띄게 흔들리고 교량 위에서 바닷물이 보일 정도로 틈새가 벌어지는 등 붕괴 위험이 심각해졌다. 불안감을 느낀 주민들은 교량 통행을 꺼릴 정도였다.

상황이 악화되자 사고 발생 불과 한 달 전인 1992년 7월 초, 부산지방국토관리청은 안전 진단을 실시했으나 '위험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교량 관리·보수 책임이 있는 진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 역시 교각 모서리 균열 등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당장의 붕괴 위험은 없다'고 판단하여, 일부 대형 차량의 통행을 제한하는 소극적인 조치 외에는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남해군부산지방국토관리청과 진주국도유지건설사무소에 지속적으로 보수공사를 건의했지만, 완공 후 12년간 단 한 차례의 보수공사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는 결국 1992년 7월 30일 창선대교 붕괴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4. 사고 후 조치 및 대책

사고 직후, 붕괴된 창선교를 대체할 새로운 교량 건설 계획이 수립되었고, 완공 전까지 주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한 임시 교통 대책이 시행되었다. 여기에는 바지선, 군 수송선, 페리선 투입과 생필품 공급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사고 책임과 관련하여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이 직위 해제되었다.

이 사고는 교량 건설 및 관리 시스템 전반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유속이 빠른 해상 환경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상의 문제점과 예산 절감을 우선시하여 영세업체에 시공을 맡기고 현장 여건을 무시한 무리한 공사를 진행한 관행 등이 주요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향후 유사 사고를 방지하고 안전한 사회 기반 시설 구축을 위한 중요한 교훈으로 남았다.

4. 1. 사고 직후 조치

붕괴 사고 이후 새로운 창선교를 건설하기로 계획하였다. 새 다리가 건설되는 동안 주민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차량과 사람, 화물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자주식 대형 바지선을 항상 준비해 두었다.

경상남도는 창선면 주민 약 1만 명이 유람선이나 도선으로 육지를 오가는데, 배 한 척당 탈 수 있는 인원이 3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아 불편을 겪자 임시 교통 대책을 마련했다. 군 수송선(LGM) 8척을 추가로 투입하기로 하고 국방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며, 2.5억을 들여 차량 10대와 승객 50명을 태울 수 있는 40ton 규모의 페리선을 새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또한, 기름, 생필품, 가스 등은 도선을 이용해 하루 두 차례 공급하여 주민 불편을 줄이기로 했다.

사고 책임을 물어 최내영 부산지방국토관리청장은 1992년 8월 1일 자로 직위 해제되었다.

4. 2. 사고 후 대책 및 교훈

이 사고는 유속이 빠른 바닷물 환경에 놓인 구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구조물과 동일한 개념으로 설계하고 콘크리트 중성화 대책을 별도로 세우지 않았던 기존의 잘못된 관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예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영세업체가 시공을 맡는 것이 결과적으로 구조물의 하자를 촉진시킨 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현장 상황과 여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시공, 예를 들어 가이드 파일 등을 제대로 갖추지 않아 발생한 편심 위치의 부정확성 등이 결국 큰 사고로 이어졌다는 교훈을 남겼다.

5. 새로운 창선대교 건설

기존 교량의 복구 대신 새로운 대체 교량을 신설하기로 결정되어, '''새 창선대교'''[2]가 건설되었다. 새로운 창선대교는 기존 교량 위치에서 남해 방면으로 50m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구분내용
위치경상남도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 창선면 지족리
총 연장1452m (교량 480m, 접속도로 972m)
교량 제원폭 14.5m, 길이 480m, 교각 5개
(교량 양측 교각 간격 60m, 중심부 교각 간격 90m 확보로 대형 선박 통행 가능)
특징기존 교량 대비 길이 40m 증가, 양측에 보도 신설, 접속도로 개수 및 포장
공법강상판형 공법 (교량 상판에 두꺼운 철판을 깔고 아스팔트 포장)
건설사한진종합건설 (한진그룹 계열사)
예산당초 170억 (보상금 10억 제외) 투입 예정이었으나, 1993년 4월 27일 공개 입찰을 통해 153.45억에 낙찰
공사 기간1993년 4월 30일 (기공) ~ 1995년 12월 20일 (완공)


참조

[1] 뉴스 경남 남해군 창선대교 붕괴사고 붕괴위험 무시[지종간] http://imnews.imbc.c[...]
[2] 뉴스 南海 昌善대교 파괴 9개월만에 새교량 착공 https://news.nave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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