녕왕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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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녕왕의 난은 명나라 정덕제 시기에 녕왕 주신호가 일으킨 반란이다. 주신호는 군사력을 키우고 정덕제를 몰아내려 했지만, 1519년 왕양명의 활약으로 진압되었다. 녕왕은 자결하고, 정덕제는 사망했으며, 반란 관련자들은 처벌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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녕왕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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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정보 | |
갈등 | 녕왕의 난 |
부분 | 없음 |
![]() | |
이미지 설명 | 녕왕 군대의 진격 녕왕 군대의 후퇴 왕양명 군대의 진격 왕양명 군대의 후퇴 |
날짜 | 1519년 7월 10일 – 1519년 8월 20일 |
장소 | 현재의 장시성, 중국 남부 |
명분 | 알 수 없음 |
영역 | 알 수 없음 |
결과 | 녕왕 패배 |
교전 세력 | |
교전 주체 1 | 녕왕 |
교전 주체 2 | 명나라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주진호 이사시 유양정 |
지휘관 2 | 왕양명 오문정 장문진 |
명칭 | |
중국어 (번체) | 寧王之亂 |
중국어 (간체) | 宁王之乱 |
병음 | Níng wáng zhīluàn |
2. 배경
홍무제의 17번째 아들 주권은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베이징 북쪽에 위치한 녕왕의 봉토와 녕왕 지위를 하사받았다. 이후 영락제에 의해 녕왕의 봉토는 난창에서 장시성으로 옮겨졌다. 주신호는 주권의 5대손으로 방종한 생활과 미신을 신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덕제는 녕왕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경고를 받고 대비하기 시작했다. 녕왕이 봉지로 군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는 소문과 함께, 관례적으로 금지되어왔던 지방군 세력을 증강시키고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녕왕은 정덕제의 신하들을 매수하여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1507년 녕왕은 유근에게 거금을 주고 경호원을 사들이려 했으나, 1510년 9월 유근이 역모죄로 사형되면서 실패했다. 1514년 녕왕은 한량들을 군사로 영입하고, 백성들의 땅과 재산을 압류하고, 세금을 무단으로 인상했다. 이후 재상들과 대신들에게 뇌물을 바쳐 사병을 키우는 것을 허락받았다.
당시 정덕제는 후사가 없었고, 녕왕은 이를 기회로 삼아 황위에 오르려 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으나, 정덕제는 이를 무시하고 대신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1514년 말, 녕왕은 반란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자신을 황제라 칭하며, 자신의 명령을 '황실 칙령'이라고 선포했다. 그러나 정덕제가 반응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2. 1. 녕왕 주신호
녕왕 주신호는 홍무제의 17번째 아들인 주권의 5대손이었다. 그는 장시성 난창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미신을 신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신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뇌물로 유력 인사들을 매수하려 했다. 처음에는 환관 유근에게 접근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장현, 노완, 전녕 등에게 의존하여 개인 경호대를 만들고 지역 군사 주둔지와 황족 구성원에 대한 권위를 얻었다.그는 지역의 "강자"들을 모아 무장 부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도적 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땅 몰수, 세금 징수, 관리 위협 등을 일삼았고, 지역 관리들의 반발을 샀다. 심지어 자신의 거처를 황궁이라 칭하고 스스로를 통치자라 부르는 등 황실의 특권을 남용했다. 난징의 감찰관들을 비롯한 지역 관리들의 불만이 커졌지만, 왕족이 사소한 범죄로도 엄하게 처벌받는 상황에서도 그의 행동은 묵인되었다. 그는 권력을 이용해 지역 권력자들을 위협했고,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폭력을 행사했다.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베이징에 있는 그의 동맹자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모함을 받아 제거되었다.
녕왕을 지지한 지역 향신 중에는 이사시와 유양정이 있었다. 이사시는 은퇴한 관리로, 감찰원의 수장을 지냈으며, 강태공과 제갈량을 본떠 군사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다. 유양정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문학적 능력과 군사 지식으로 존경받았다.
녕왕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얻으려 했다. 1516년 봄, 정덕제가 후사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 전녕 등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장남을 황태자 후보로 베이징에 데려오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무력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한 그는 난창 인근 지역에서 난민, 도둑, 산적들을 모아 정착시켰다. 그의 무장 단체들은 시골을 약탈하여 추가 수입을 제공했다. 그는 호수와 기타 공공 재산을 몰수하고, 지역의 소금 및 후추 무역을 이용했으며, 국가 쌀을 판매하여 자금을 확보했다. 광시성 산맥의 부족장들에게 거액을 주고 "늑대 부대"를 모집하고, 무기, 갑옷, 군수품 제조를 위한 재료를 수집했다. 1517년에는 화기(불랑기총)를 사적으로 제조했다는 기록도 있다.
1518년, 그의 부하들은 전 내각 대학사였던 비홍의 집을 공격했다. 정부는 손수를 난창으로 보내 폭력을 진압하려 했으나, 왕자는 병사들에게 도시를 습격하여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1519년 봄, 손수는 왕자의 배신과 반역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지만, 왕자의 요원들이 가로챘다.
2. 2. 정덕제 시기 명나라의 상황
정덕제는 녕왕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경고를 받고 이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녕왕이 봉지로 군대를 불러 모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관례적으로 금지되어왔던 지방군 세력들을 증강시키고 있다는 첩보가 속속 도착하였다. 녕왕은 정덕제의 신하들도 점차 매수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정덕제를 쫓아낸 이후 조정을 효과적으로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1507년, 그는 조정의 대신이었던 유근에게 거금을 주고 경호원들을 사들이려 하였으나, 유근이 역모죄로 1510년 9월에 사형되면서 실패하였다. 1514년에 녕왕은 길거리에 떠도는 한량들을 군사로 영입하고, 백성들의 땅과 재산들을 압류한 다음, 세금을 황실의 동의 없이 인상하였다. 이후 재상들과 대신들에게 적극적인 뇌물을 바친 후 개인적인 사병들을 키우는 것을 허락받았다.당시 정덕제는 후사가 없었고, 녕왕은 이를 기회로 삼아 자신이 대신 황위에 오르려 하였다. 이같은 풍문들은 끊임없이 나돌았으나, 정덕제는 이를 무시하였고 대신들의 경고를 듣지 않았다. 1514년 말, 녕왕은 반란을 거의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자신을 황제라 칭하게 하고, 자신이 내리는 개인적인 명령들을 '황실 칙령'이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이 또한 정덕제가 반응하지 않음에 따라 아무 일도 없었다.
2. 3. 녕왕의 권력 강화
주신호는 명나라 홍무제의 17번째 아들 주권의 5대손이다. 그는 장시성 난창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녕왕은 1507년부터 1510년까지 베이징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던 환관 유근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어 자신의 경호원들을 사들이려 했으나, 유근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실패했다. 이후 녕왕은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음악가 장현, 병부 상서 노완, 금의위 사령관 전녕 등에게 뇌물을 바쳐 개인 경호대를 설립하고 지역 군사 주둔지와 황족 구성원에 대한 권위를 얻었다.
녕왕은 지역의 "강자"들을 모집하여 자신의 무장 부대를 건설했는데, 이들은 종종 도적 행위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땅을 몰수하고, 세금을 징수하고, 관리들을 위협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심지어 자신의 거처를 황궁이라고 부르고 스스로를 통치자라고 칭하는 등 황실의 특권을 참칭하기에 이르렀다.
녕왕을 지지한 지역 향신들 중에는 감찰원의 수장을 지낸 은퇴한 관리 이사시(李士實|이사시중국어)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문학적 능력과 군사 지식으로 존경받았던 유양정(劉養正|유양정중국어)이 있었다.
녕왕은 비폭력적인 수단을 통해 권력을 얻으려 했다. 1516년 봄, 그는 정덕제가 자녀가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전녕 등에게 뇌물을 주어 자신의 장남을 잠재적 황태자 후보로 베이징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결국 실패했다.
그는 이후 무력 반란에 의존했다. 그의 부하들은 난창 인근 지역에서 난민, 도둑, 산적들을 모집하여 정착시켰다. 그의 수하에 있는 이러한 무장 단체들은 시골을 약탈하여 그에게 추가 수입을 제공했다. 그는 또한 호수와 기타 공공 재산을 몰수하고, 지역의 소금 및 후추 무역을 이용하여, 국가 쌀을 판매하여 자금을 확보했다. 그는 "늑대 부대"로 알려진 군대를 모집하기 위해 장시성 남부와 푸젠성 남서부, 그리고 광시성 산맥의 부족장들에게 거액의 돈을 보냈다. 그는 또한 무기, 갑옷, 군수품 제조를 위한 재료를 수집했다. 1517년에는 화기(불랑기총)를 사적으로 제조했다.
정덕 14년, 환관 장충과 어사 소회가 그의 죄상을 고발하자 정덕제는 호위병을 해산하고, 강탈한 토지를 반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 4. 녕왕의 반란 준비
녕왕은 명나라의 방계 혈족으로, 홍무제의 17번째 아들 주권의 5대손이었다. 그는 장시성의 수도인 난창에 거주하며 권력욕에 사로잡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녕왕은 1507년부터 1510년까지 베이징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했던 환관 유근에게 뇌물을 주는 등, 처음에는 뇌물로 유력 인사들을 매수하려 했다. 유근이 몰락한 후에는 황제의 총애를 받는 음악가 장현, 병부 상서 노완, 금의위 사령관 전녕 등에게 의존했다. 이들의 지원으로 그는 개인 경호대를 설립하고 지역 군사 주둔지와 황족 구성원에 대한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지역의 "강자"들을 모집하여 자신의 무장 부대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종종 도적 행위에 연루되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땅 몰수, 세금 징수, 관리 위협 등으로 지역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자신의 거처를 황궁이라 부르고 스스로를 통치자라 칭하는 등 황실의 특권을 전용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 관리들과 부수도인 난징의 감찰관들로부터 불만이 증가했다. 왕족이 사소한 범죄로도 엄하게 처벌받는다는 사실에도 그의 행동은 간과되었다. 그는 권력을 사용하여 지역 권력자들을 위협했고,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폭력을 행사했다.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베이징의 동맹자들에 의해 살해되거나 죄를 뒤집어쓰고 지위를 잃었다.
녕왕을 지지한 지역 향신 중에는 이사시(李士實|이사시중국어)와 유양정(劉養正|유양정중국어)이 있었다. 이사시는 은퇴한 관리로, 감찰원의 장관(1512–1513년)을 지냈다. 그는 강태공, 제갈량처럼 군사 전문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또한 그는 자녀의 결혼으로 왕자와 관계가 있었다. 유양정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지만 문학적 능력과 군사 지식으로 존경받았다.
녕왕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얻으려 했다. 1516년 봄, 정덕제가 자녀가 없다는 점을 이용해 전녕 등에게 뇌물을 주어 그의 장남을 잠재적 황태자 후보로 베이징에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했다.
이후 그는 무력 반란에 의존했다. 그의 부하들은 난창 인근 지역에서 난민, 도둑, 산적들을 모집하여 정착시켰다. 이 무장 단체들은 시골을 약탈하여 그에게 추가 수입을 제공했다. 그는 호수와 기타 공공 재산을 몰수하고, 지역의 소금 및 후추 무역을 이용하고, 국가 쌀을 판매하여 자금을 확보했다. 그는 "늑대 부대"를 모집하기 위해 장시성 남부, 푸젠성 남서부, 광시성 산맥의 부족장들에게 거액을 보냈다. 또한 무기, 갑옷, 군수품 제조를 위한 재료를 수집했다. (1518년에는 포르투갈 대포를 획득했을 수도 있다.)
1518년, 그의 부하들은 동장시성에 거주하던 전 내각 대학사 비홍의 집을 공격했다. 비홍의 불만 제기 후, 정부는 손수(孫燧|손수중국어; 1460–1519, 진사 1493년)를 난창으로 보내 군사 총독인 총병관으로 임명했다. 그의 임무는 폭력 진압이었다. 손수는 산적들을 체포하여 난창에 투옥했다. 그러나 왕자는 그들의 증언 가능성을 우려해 병사들에게 도시를 습격하여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지역은 홍수로 당국이 시골 통제력을 잃게 되었다. 1519년 봄, 손수는 왕자의 배신과 반역에 대한 일곱 번째 보고서를 썼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다. 왕자의 요원들이 보고서를 가로챈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왕자는 황태자와의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설 것을 바라며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3. 반란
1519년 6월 14일, 녕왕 주신호는 정덕제가 전 황제인 홍치제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난징을 점거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으나, 안칭시 공격에 실패했다.
왕양명은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고, 1519년 8월 13일 녕왕의 수도 난창을 재점령하였다. 녕왕 군대는 1519년 8월 20일 왕양명이 이끄는 관군에 패배, 42일 만에 반란은 막을 내렸다. 녕왕은 전투 후 사로잡혔다.
녕왕 주신호는 홍무제의 17번째 아들 주권의 5대손이다. 그는 환관 유근 등에게 뇌물을 주어 호위병을 회복하고 사병을 양성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정덕제에게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아들을 정덕제의 계승자로 삼아 황위를 찬탈하려 했다.
정덕 14년, 환관 장충과 어사 소회가 그의 죄상을 고발하자 정덕제는 호위병 해산 및 강탈 토지 반환 명령을 내렸다. 이에 주신호는 1519년 6월 14일 난창에서 10만 명의 병사로 거병, 강서순무 손수와 강서안찰부사 허규를 살해하고 조정을 비난하며 정덕 연호를 고쳐 각지에 격문을 보냈다.
3. 1. 반란의 발발
1517년 화기(불랑기총)를 사적으로 제조하던 녕왕 주신호는, 1519년 6월 14일, 정덕제가 전 황제인 홍치제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황태후가 자신에게 정덕제를 폐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지만, 강서 순무 손수와 강서 부감찰어사 허괴(許逵)가 황태후의 칙서를 요구하자 이를 제공하지 못하고 그들을 처형했다.녕왕은 군사를 일으켜 남경을 점령하려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즉시 군대를 모아 사흘 안에 남경으로 진격하겠다는 과감한 약속을 했다. 산적들을 불러 모으고 군대를 동원하여 200척의 배에 8,000명의 선발대를 강 북쪽으로 보냈다. 이 선발대는 이틀 만에 남강, 이틀 뒤에 구강시 두 곳의 지(知)현을 점령했다. 반군은 두 지현의 현(縣)에도 공격을 가했으나, 성공 여부는 다양했다.
반군 선봉대는 양쯔 강을 따라 진격, 7월 23일 안경시를 포위했다. 남경에서 약 270km 떨어진 안칭은 지현 장문금(張文錦)과 지역 군사 위원 최문(崔文)이 방어했다. 소수 병력에도 불구, 주민들을 동원하여 효과적으로 도시를 방어했다.
당시 왕양명은 총독 겸 순무 직위에 있었으며, 부총어사 직함을 가졌다. 그는 강서성 남부 간저우시에 근거지를 두었다. 우연히 남창으로 가던 길에 예상치 못한 곳에 들러 녕왕의 생일 연회에서 체포를 면했다. 봉기는 남창에서 남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봉성에서 발생했다.
왕양명은 봉성에서 지안(吉安)으로 급히 후퇴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1,000장이 넘는 전단, 나무 패, 깃발을 배포하며 운명이 반군에 대한 입장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침착하게 지역 지도자 지시에 따르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지원하며, 정부군에 용감한 사람들을 입대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군대가 없었기에, 남경 당국과 정부가 방어 및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반군을 지연, 혼란시키기로 결정했다. 군사 경험이 없는 녕왕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정부가 광서와 광동 남부 지방 군대를 남창으로 진격시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그들이 오고 있다는 내용의 위조 편지를 썼다.
신중한 녕왕은 계획대로 군대를 이끌지 않고 남창에 머물렀다. 그는 20,000명 훈련된 군인, 10,000명 넘는 산적, 다양한 징집병을 모아 총 60,000~70,000명 병력을 확보했다. 이 병력은 임강, 신간현, 봉성시, 봉신현 주변 현을 약탈하고 있었다.
3. 2. 왕양명의 대응
왕양명은 당시 총독 겸 순무의 지위에 있었으며, 부총어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서성 남부에 위치한 간저우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우연히 그는 남창으로 가는 길에 예상치 못한 곳에 들러 녕왕의 생일 연회에서 체포되는 것을 간신히 피했다. 봉기가 발생한 곳은 봉성으로, 남창에서 남쪽으로 120리(약 60km) 떨어진 곳이었다. 강서성 최고위 관리인 녕왕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천 명의 병사를 봉성으로 보냈다.왕양명은 봉성에서 지안으로 급히 후퇴했다. 지안부의 지(知)현인 오문정(伍文定)이 왕양명의 첫 번째 부관이 되었다. 왕양명은 민심을 얻기 위해 1,000장이 넘는 전단, 나무 패, 깃발을 백성들에게 배포하며 그들의 운명이 반군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지역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르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지원하고, 정부군에 용감한 사람들을 입대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당시 왕양명은 군대가 없었으므로, 남경 당국과 정부가 방어 및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반군을 지연시키고 혼란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사 경험이 없는 녕왕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군을 더욱 속이기 위해 그는 정부가 이미 광서와 광동의 남부 지방에서 군대를 남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이 오는 중이라는 내용의 위조 편지를 썼다.
신중한 녕왕은 계획대로 군대를 이끌지 않고 남창에 머물렀다. 왕양명에 따르면, 녕왕의 망설임은 전투, 진척, 보상을 갈망하는 그의 열정적인 병사들의 사기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반군 지도자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왕양명은 24만 명의 병사가 모든 방향에서 강소성으로 동원되고 있으며, 더 많은 부대가 뒤따를 것이라는 병부의 보고서를 위조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녕왕에게 주거나, 녕왕의 간첩들이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자를 붙잡도록 했다. 또한 왕양명은 위조된 문서에 따르면 정부군이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으로 이 부대의 선두를 가장한 집단을 보냈다. 그는 녕왕의 측근인 이시시와 유양정과의 서신을 조작하여 그들이 녕왕을 배반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녕왕은 그들이 결국 남경으로 진격하라고 조언했을 때, 왕양명과 공모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1519년 7월 20일, 왕양명은 여러 군에 격문을 보내 난창을 함락시켰다. 주신호는 난창을 구원하기 위해 회군하여 7월 24일 황가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7월 26일, 왕양명은 적의 연합 선단에 불을 질러 3만여 명의 장병을 격파하고 주신호 일족을 사로잡았다.
3. 3. 안칭 전투
녕왕 주신호는 즉시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고, 사흘 안에 남경으로 진격하겠다는 과감한 약속을 했다. 그는 산적들을 불러 모으고 군대를 동원하여 200척의 배에 8,000명의 선발대를 강 북쪽으로 보냈다. 이 선발대는 이틀 만에 남강, 이틀 뒤에 구강시 두 개의 지(知)현을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그 결과, 관리들은 도망치고 도시들은 약탈당했다. 반군은 또한 두 지현의 현(縣)에 공격을 가했으며, 성공의 정도는 다양했다.녕왕의 군대 동원은 성과가 엇갈렸다. 일부 군인 출신 농민들은 즉시 군 복무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현(縣) 치안판사가 녕왕의 사절을 살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녕왕은 이틀 만에 남창에 상당한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여기에는 그의 개인 호위대 8,000명, 두 개의 남창 경비대, 그리고 약 25,000명의 무장 병사들이 산적과 동원된 남창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진충(秦忠)이 이끄는 2,000명의 음악가와 부랑자, 그리고 더 작은 그룹들이 있었다. 녕왕은 봉기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그 이유를 설명하는 선언문을 천 부 인쇄했다. 그는 또한 그들을 노동과 세금에서 면제하여 백성들을 얻으려 했다.
녕왕은 원래 봉기가 시작된 지 사흘 후에 출발하여 5일 후에 남경에 도착하여 공식적으로 즉위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계획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왕양명의 심리 전술 때문에 시작을 연기했다.
신중한 녕왕은 계획대로 군대를 이끌지 않고 남창에 머물렀다. 그는 점차적으로 20,000명의 훈련된 군인과 10,000명이 넘는 산적, 그리고 다양한 징집병들을 모아 총 60,000~70,000명의 병력을 갖게 되었다. 이 병력은 현재 임강, 신간현, 봉성시, 봉신현의 주변 현을 약탈하고 있었다. 한편, 반군 선봉대는 양쯔 강을 따라 진격하여 7월 23일 안칭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경에서 약 270km 떨어진 안칭은 지현 장문금(張文錦)과 지역 군사 위원 최문(崔文)이 방어했다. 소수의 병력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도시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왕양명의 말에 따르면, 녕왕의 망설임은 전투, 진척, 보상을 갈망하는 그의 열정적인 병사들의 사기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반군 지도자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왕양명은 240,000명의 병사가 모든 방향에서 강소성으로 동원되고 있으며, 더 많은 부대가 뒤따를 것이라는 병부의 보고서를 위조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녕왕에게 주거나, 녕왕의 간첩들이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자를 붙잡도록 했다. 왕양명은 또한 위조된 문서에 따르면 정부군이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으로 이 부대의 선두를 가장한 집단을 보냈다. 그는 또한 녕왕의 측근인 이시시와 유양정과의 서신을 조작하여 그들이 녕왕을 배반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들이 결국 남경으로 진격하라고 조언했을 때, 녕왕은 그들이 왕양명과 공모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7월 초 주신호는 난징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수군을 이끌고 안칭으로 진격했다.
3. 4. 난창 전투
정덕제에게 반란을 일으켜 자신의 아들을 정덕제의 계승자로 삼아 황위를 찬탈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던 주신호는 1519년 6월 14일 난창에서 10만 명의 병사로 거병하여, 강서순무 손수와 강서안찰부사 허규를 살해하고 조정을 비난하며, 정덕 연호를 고쳐 각지에 격문을 보냈다.7월 초 주신호는 난징을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수군을 이끌고 안칭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강서첨도어사 왕양명(왕수인)은 난의 발생을 듣고, 여러 군에 격문을 보내 7월 20일 난창을 함락시켰다. 당시 왕양명은 총독 겸 순무의 지위에 있었으며, 부총어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강서성 남부에 위치한 간저우시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王陽明|왕양명중국어의 이전 군사적 성공으로 그는 지방 관리들 사이에서 높은 권위를 얻었다. 우연히 그는 남창으로 가는 길에 예상치 못한 곳에 들러 녕왕의 생일 연회에서 체포되는 것을 간신히 피했다. 봉기가 발생한 것은 봉성에서였다. 봉성은 남창에서 남쪽으로 60km 떨어진 곳이었다. 강서성 최고위 관리인 녕왕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천 명의 병사를 봉성으로 보냈다.
왕양명은 봉성에서 지안(吉安)으로 급히 후퇴했다. 지안부의 지(知)현인 오문정(伍文定)이 왕의 첫 번째 부관이 되었다. 민심을 얻기 위해 왕은 1,000장이 넘는 전단, 나무 패, 깃발을 백성들에게 배포하며 그들의 운명이 반군에 대한 그들의 입장에 달려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그들에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지역 지도자들의 지시에 따르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을 지원하고, 정부군에 용감한 사람들을 입대시키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왕은 이 시점에서 군대가 없었으므로, 남경 당국과 정부가 방어 및 반격을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반군을 지연시키고 혼란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는 군사 경험이 없는 녕왕을 능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반군을 더욱 속이기 위해 그는 정부가 이미 광서와 광동의 남부 지방에서 군대를 남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이 오는 중이라는 내용의 위조 편지를 썼다.
신중한 녕왕은 계획대로 군대를 이끌지 않고 남창에 머물렀다. 그는 점차 20,000명의 훈련된 군인과 10,000명이 넘는 산적, 그리고 징집병들을 모아 총 60,000~70,000명의 병력을 갖게 되었다. 이 병력은 임강, 신간현, 봉성시, 봉신현의 주변 현을 약탈하고 있었다. 한편, 반군 선봉대는 양쯔 강을 따라 진격하여 7월 23일 안경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남경에서 약 270km 떨어진 안경은 지현 장문금(張文錦)과 지역 군사 위원 최문(崔文)이 방어했다. 소수의 병력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도시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다.
왕양명에 따르면, 녕왕의 망설임은 전투, 진척, 보상을 갈망하는 병사들의 사기를 약화시켰을 것이다. 반군 지도자들을 혼란시키기 위해, 왕양명은 240,000명의 병사가 모든 방향에서 강소성으로 동원되고 있으며, 더 많은 부대가 뒤따를 것이라는 병부 보고서를 위조했다. 그는 이 보고서를 녕왕에게 주거나, 녕왕의 간첩들이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자를 붙잡도록 했다. 왕양명은 또한 위조된 문서에 따르면 정부군이 도착할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으로 이 부대의 선두를 가장한 집단을 보냈다. 그는 또한 녕왕의 측근인 이시시와 유양정과의 서신을 조작하여 그들이 녕왕을 배반하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들이 결국 남경으로 진격하라고 조언했을 때, 녕왕은 그들이 왕양명과 공모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주신호는 난창을 구원하기 위해 회군하여 7월 24일 황가도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7월 26일, 왕양명은 적의 연합 선단에 불을 질러 3만여 명의 장병을 격파하고 주신호 일족을 사로잡았다.
4. 반란 이후
1521년 1월 13일, 녕왕은 사형 집행 전에 자살하였다. 녕왕을 따르던 관리들과 장관들은 모두 사형을 언도받았다. 반란 발생 2년 후, 정덕제는 사망하였다.
4. 1. 녕왕의 최후
녕왕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인 1521년 1월 13일에 자살하였다. 녕왕의 편에 섰었던 관리들과 장관들은 모두 사형이 언도되었다. 반란 발생 2년 후, 정덕제는 사망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낚시를 하다가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고 한다.4. 2. 정덕제의 죽음
정덕제는 반란 발생 2년 후 사망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낚시를 하다가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고 한다. 녕왕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인 1521년 1월 13일에 자살하였다. 녕왕의 편에 섰었던 관리들과 장관들은 모두 사형이 언도되었다.4. 3. 정치적 영향
녕왕은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형이 집행되기 전인 1521년 1월 13일에 자살하였다. 녕왕의 편에 섰었던 관리들과 장관들은 모두 사형이 언도되었다. 반란 발생 2년 후, 정덕제는 낚시를 하다가 술에 취해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는 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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