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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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수인(王守仁)은 명나라 시대의 유학자로, 양명학을 창시했다. 저장성 위야오 시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과거 급제 후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환관과의 갈등으로 유배를 겪었다. 유배지에서 심즉리(心卽理)와 지행합일(知行合一)을 깨닫고 양명학을 정립했다. 그의 사상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성인 양지를 강조하며, 앎과 실천의 일치를 주장했다. 양명학은 명나라 후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사상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로는 《전습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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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수인 - 양명학
양명학은 명나라 시대 왕양명에 의해 창시된 유교의 한 학파로, 심즉리, 치양지, 지행합일을 핵심 사상으로 하며 동아시아에 영향을 미쳤으나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왕수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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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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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왕수인 |
자 | 수인 (守仁) |
호 | 양명자 (陽明子) |
시호 | 문성 (文成) |
작위 | 신건백 (新建伯) |
출생 | 1472년 10월 26일 |
출생지 | 여요시, 저장 성 |
사망 | 1529년 1월 9일 |
사망지 | 간저우시 난안부 (현재의 간저우시) |
직업 | 서예가, 군인, 철학자, 정치인, 작가 |
철학 정보 | |
학파/전통 | 유교 |
주요 사상 | 양명학, 지행합일, |
영향 | 공자 맹자 육구연 |
영향을 받은 인물 | 사실상 이후의 모든 중국 철학 |
관직 | |
관직명 | 양광총독 |
임기 시작 | 1527년 |
임기 종료 | 1529년 |
전임자 | 요모 (姚鏌) |
후임자 | 장징 |
관직명 | 남경 병부상서 |
임기 시작 | 1521년 |
임기 종료 | 1527년 |
관직명 | 감주 순무 |
임기 시작 | 1472년 |
임기 종료 | 1529년 |
전임자 | 문서 (文森) |
후임자 | 섭헌 (聶賢) |
개인 정보 | |
배우자 | 주씨 (朱氏) |
2. 배경
왕양명이 태어난 명 중기는 정치적으로 환관들의 전횡과 부패가 심했고, 사회적으로는 오이라트(Oirat), 타타르(Tatar), 투르판(Turfan), 묘족(苗族) 등 이민족의 침입과 도적들의 폭동이 빈번했다. 학문적으로는 남송(南宋) 이후 주자학(朱子學)이 교조화되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왕양명이 새로운 사상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3]
왕수인(王守仁)은 저장성 위야오 시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관료로 봉사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왕화(1446년-1522년)는 1481년 과거에서 수석(狀元)을 차지했고, 예부 차관까지 올랐으나, 이후 환관 유근에게 반항하여 관직에서 강등되고 파면되었다.
왕양명의 조상은 산동(山東) 낭야(琅琊) 출신 진(晉)나라 광록대부(光祿大夫) 왕람(王覽)이며,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는 왕람의 증손자이다. 부친 왕화(王華)는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남경이부상서(南京吏部尙書)에 이르렀으며, 조상 대대로 벼슬과 학문을 겸비한 명문가였다.
3. 생애
왕수인은 1492년에 거인 자격을 얻었고, 1499년에는 진사 자격을 얻었다. 이후 여러 정부 부서에서 행정 보좌관으로 근무하다가 1506년 환관을 모욕하여 파면되었다.[3] 장시성의 지사가 되면서 그의 전문적인 경력을 재개했다.[4]
왕화의 적장자로 소흥부 여요현(현재의 저장성 닝보시 여요시)에서 태어났다.[8] 초명은 운(雲)이다. 아버지 왕화는 성화 17년(1481년)에 과거를 장원으로 통과했다. 왕수인은 조부 왕륜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5세가 되도록 말을 못했고, 어떤 승려의 지적에 따라 왕수인으로 개명했다.
11세에 시를 지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홍치 5년(1492년)에 21세로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되었으나, 회시에는 실패하여 고향 여요로 돌아왔다.
홍치 12년(1499년) 회시와 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준현에서 명장의 분묘를 짓는 직책을 맡아 훌륭한 지휘를 했으나, 폐병으로 직을 사임하고 고향에서 요양하며 도교와 불교에 경도되었다.
33세에 병이 나아 산둥성에서 향시 시험관이 되었다. 이후 병부주사가 되어 도성으로 돌아왔다. 홍치제 붕어 후 정덕제가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환관이 권력을 잡았다. 왕수인은 환관에게 저항했으나, 매질 형벌을 받고 유근에게 미움을 받아 귀주 룡장역(현재의 귀주성구이양시수문현)으로 좌천되었다. 이곳에서 수양하며 양명학을 만들었다.
50세에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했으나, 부친상과 간신들의 모함으로 6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56세에 광서(廣西) 지역 도적 토벌 명령을 받고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귀환 도중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임종 시 "내 마음이 밝으니, 또 무엇을 말하겠는가(吾心光明,亦復何言)"라는 유언을 남겼다.[3]
3. 1. 31세까지: 방황과 모색
어린 시절 왕수인은 가정에서 조부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5살 때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8] 11세 때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던 중 지은 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조숙하고 비판 정신과 독창력이 뛰어났다.[9][10][11] 12살 때 스승이 "책을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으뜸"이라고 말하자, 왕수인은 "책을 공부해 성인이 되는 것이 으뜸"이라고 답하며 당시 통념과 다른 생각을 보여주었다.
17세에 결혼했으나, 결혼 당일 도사를 만나 밤새도록 양생설을 논하다가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을 정도로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이듬해, 주자학자 누량을 만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받고 주자학에 심취했다. 21세에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 낙제한 후, 주자의 책을 구해 공부하며 '격물'을 실천하려 했으나, 7일 만에 병을 얻어 그만두면서 주자학의 방법론에 회의를 느꼈다.[9][10][11]
이후 왕수인은 사장(문장과 시가), 불교, 노장사상, 병법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방황했다. 26세 때는 변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무예와 병법학에 열중하기도 했다. 28세에 회시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건강 문제와 회의감으로 31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절강성 양명동에 집을 짓고 도교의 도인술을 수련했다.
그러던 중, 왕수인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인간 본래의 마음이며, 성인의 가르침은 인정(人情)의 자연스러움에 따르는 반면, 도교나 불교는 이를 억지로 끊으려 한다고 생각하여 유학으로 복귀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써 20년간의 방황에 종지부를 찍었다.[9][10][11]
3. 2. 50세까지: 관직 생활과 양명학의 발전
1504년, 33세에 병이 나아 산둥에서 향시의 시험관이 되었다. 이후 병부주사가 되어 도성으로 돌아와 성리학을 강의하며, 주자학의 교조화된 현실을 비판하고 유학의 본래 취지를 설파했다.[9][10][11] 이때 왕수인을 흠모하여 입문하는 문도가 늘어났으며, 40세가 될 때까지 문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1505년 홍치제가 붕어하고 정덕제가 즉위하자, 조정에서는 환관이 권력을 잡았다. 왕수인을 비롯한 관료들은 환관에 저항했으나, 많은 수가 투옥되었다. 왕수인도 1506년 환관을 모욕하여 파면되고,[3] 매질 40대의 형벌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후 환관 유근에게 미움을 받아 귀주성구이양시수문현 룡장으로 좌천되었다.
룡장은 이족이 사는 변방 지역이었다. 왕수인은 이곳에서 생사의 공포를 초월하려 했고, 어느 날 종자 3명이 병에 걸리자, 땔나무를 패고 물을 길어 종자에게 죽을 먹이고, 시와 고향 여요의 속요를 부르며 격려했다. 이때 생사의 공포를 잊은 왕수인은 "지금 이 자리에 성인이 있다면 어떻게 행동할까. 분명히 자신과 똑같이 지낼 것이다. 자신은 지금 성인과 똑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라고 깨달아, 격물치지의 의미를 깨닫고 심즉리, 지행합일을 주장하며 양명학의 기초를 만들었다.[9][10][11]
유근이 처형된 후, 1510년 왕수인은 여릉(廬陵, 현재의 장시성 지안시) 지현(知縣, 현령)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남경형부주사, 고시원외랑 등을 거쳐 남경태복시소경으로 승진했다. 1514년에는 남경홍려시경이 되었다.
1516년, 왕수인은 도찰원 첨도어사로 승진하여 남간순무가 되었다. 강서, 복건 남부에서 농민 반란과 산적들이 출몰하자, 왕수인은 상선을 징발하여 수로로 진군하고 민병을 조직하여 이들을 진압하고 치안 유지에 힘썼다.
1519년, 녕왕의 난이 발발하자 왕수인은 즉시 군을 돌려 의병을 조직했다. 녕왕 주진호의 군이 남경 공략을 위해 부재중이던 반란군 본거지 남창을 급습하여 함락시키고, 돌아온 녕왕군을 격파하여 주모자인 녕왕을 사로잡았다. 이 공으로 1521년 10월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졌다.
이 시기 왕수인은 '사상마련'을 강의하며 치양지설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가르침은 자유분방하여 많은 제자를 양성했지만, 녕왕의 난 평정 공을 시기한 환관들의 모함을 받기도 했다.
3. 3. 만년: 양명학의 확립과 죽음
왕수인은 50세에 신건백(新建伯)에 봉해지고 남경병부상서(南京兵部尙書)를 겸하게 되었으나, 부친상과 간신들의 모함으로 6년간 고향에서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3] 이 시기에 양지(良知) 학설을 확립하고, 강학(講學) 활동을 통해 양명학을 널리 전파했다.
56세에 광서(廣西) 지역의 도적 토벌 명령을 받고 병든 몸을 이끌고 출정하여 큰 공을 세웠으나, 귀환 도중 57세의 나이로 병사했다.[3] 임종 시 "내 마음이 밝으니, 또 무엇을 말하겠는가(吾心光明,亦復何言)"라는 유언을 남겼다.[3]
4. 사상
왕수인(王守仁)은 남송 육구연(육상산)이 창시한 양명학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맹자의 고전 유학을 지식과 행위가 일치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주자학은 지식 습득이 완료된 후 행동으로 이어진다고 보았지만, 왕수인은 이에 반대했다.
왕수인은 마음이 세상에 이성을 부여하며, 모든 이성의 근원은 마음뿐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것을 타고난 도덕적 선함과 선에 대한 이해, 즉 내면의 빛(양지,良知)으로 보았다.[5]
왕수인은 인간의 마음이 이기적인 욕망에 의해 흐려질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불교의 선(Zen) 명상과 유사한 "고요한 휴식" 또는 "가만히 앉기"(靜坐, jingzuo중국어) 명상 수행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모토오리 노리나가 등 일본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그의 학파('요메이가쿠(Ōyōmei-gaku)', 'Ō'는 "왕(王)", 'yōmei'는 "양명(陽明)", 'gaku'는 "학파")는 일본 사무라이 윤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1]
왕수인의 유교 해석은 현대 중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중국 군벌 옌시산은 산시성에서 유교를 부흥시키기 위해 왕수인의 철학을 모델로 삼았다.[5]
러일 전쟁 당시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는 왕수인의 영향을 받아 "일생 동안 양명을 본받았다"(一生低首拜陽明)라는 문구가 새겨진 도장을 만들었다. 구마자와 반잔, 사이 고 다카모리, 다카스기 신사쿠, 나카에 도주 등 많은 일본 학자와 정치인(일본에서 "요메이가쿠샤"(陽明学者)로 알려짐)이 왕양명의 학파(''오요메이가쿠'')에서 배출되었다. 나카에 도주는 일본 ''오요메이가쿠''의 창시자로 여겨진다.[6]
4. 1. 심즉리(心卽理)
心卽理|심즉리중국어는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가 인간의 마음을 성(性, 이理)과 정(情, 현실 마음의 작용)으로 나누고 정을 규제해야 한다고 본 것에 반대한다. 왕수인은 인간은 이미 정 안에 '양지'가 갖추어져 있으며, 자연스러운 심정으로 행동하면 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5]4. 2. 지행합일(知行合一)
왕수인(王守仁)은 지식을 얻으면 그 지식을 실천해야 한다는 당시 중국의 전통적인 믿음 때문에 지식만을 순수하게 탐구하는 것을 거부했다. 이는 다음 두 가지 가능성을 전제한다.- 행동에 앞서거나 행동 없이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
왕수인은 이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철학인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발전시켰다. 왕수인은 오직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서만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고, 다른 모든 지식 습득 방식을 부인했다. 그에게는 지식을 얻은 후에 사용할 방법이 없었는데, 지식과 행동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얻은 지식을 ''나중에 실천''하는 것은 망상이나 허위로 간주되었다.[3]
4. 3. 치양지(致良知)
양지(良知)는 맹자가 "깊은 궁리를 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 왕양명은 양지를 하늘(天)이자 하늘의 이치(天理)인 동시에 인간 마음의 본체로서,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판단하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다. 이는 '양심'에 가까운 개념이다.왕양명은 모든 사람이 선과 악의 차이를 태어날 때부터 안다는 '양지(良知)' 개념을 발전시켰다.[1] 그는 이러한 앎이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직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1] 왕양명의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은 이후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같은 일본의 저명한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1] 모토오리 노리나가는 신토의 신들 덕분에 일본인만이 복잡한 합리화 없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직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1] 왕양명의 학파는 일본어로 '요메이가쿠(Ōyōmei-gaku)'라고 불리며, 일본 사무라이 윤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1]
5. 영향
양명학은 사후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어 실천하는 주체를 소홀히 하는 관념적·공상적인 이론으로 흘렀는가 하면, 착실한 면학수양(勉學修養)을 경시하는 풍조까지 빚어냈지만, 명나라 시대의 사상은 양명사상(陽明思想)의 전개(우파/右派와 좌파/左派로 나뉜다)에서 개성이 발휘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왕양명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은 이탁오가 있다. 이탁오의 유명한 저작물은 《분서》와 그 속편 격인 《속 분서》가 있다.
조선 중기 이후 한국 사상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주류였던 주자학의 신유학에서 왕양명은 모든 사람이 선과 악의 차이를 태어날 때부터 안다는 '양지(良知)'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왕양명은 이러한 앎이 직관적이지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왕양명의 이러한 혁신적인 사상은 이후 모토오리 노리나가와 같은 저명한 일본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는데, 그는 신토의 신들 때문에 일본인만이 복잡한 합리화 없이 선과 악을 구별하는 직관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학파(일본어로 王陽明|오요메이일본어 학파)는 일본 사무라이 윤리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저서
- 전습록[1]
- * 한정길, 정인재 역 / 청계
- * 김동휘 역 / 신원
- * 정차근 역 / 평민사
- 유언록(양명선생유언록) - [소나무출판 / 정지욱 옮김]
- 왕문성공전서영어[2]
7. 기타
장제스는 타이완의 국립 명승지인 양명산을 왕수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으며, 난창의 한 도로도 장제스의 영향을 받은 지방 관리들에 의해 '양명로'(Yangming Road)로 명명되었다.[7] 또한, 타이완의 국립 양명 교통 대학교 역시 이 철학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Wang Yangming (Wang Shou-Jen) |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https://iep.utm.edu/[...]
[2]
서적
Sourcebook in Chinese Philosophy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0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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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Chan 1963: 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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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Needham, Volume 5, Part 7,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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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Gillin 60
[6]
문서
Benesch, 2009
[7]
뉴스
Forget Marx and Mao. Chinese City Honors Once-Banned Confucian.
https://www.nytimes.[...]
2017-10-18
[8]
웹사이트
デジタル大辞泉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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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Harvnb 安岡 1974 pp=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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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nb 安岡 1974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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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nb 安岡 1974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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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nb 島田 1975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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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Harvnb 安岡 2014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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