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로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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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로돔은 앙두옹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860년 왕위에 올랐으나 이복동생의 반란과 시암의 간섭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캄보디아에서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징세권 등을 넘겨주었고, 후계자 문제로 시암으로 망명했다가 1904년 사망했다. 그는 행정 개혁, 예술 진흥, 왕립 해군 창설 등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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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로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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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주 칭호 | 캄보디아 국왕 |
| 재위 기간 | 1860년 10월 19일 – 1904년 4월 24일 |
| 즉위식 | 1864년 6월 3일, 프놈펜 |
| 출생명 | 앙 보데이 |
| 출생일 | 1834년 2월 3일 |
| 출생지 | 앙코르 보레이, 캄보디아 |
| 사망일 | 1904년 4월 24일 |
| 사망지 | 프놈펜, 캄보디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
| 종교 | 테라바다 불교 |
| 인물 정보 | |
| 배우자 | 47명 |
| 자녀 | 61명 (노로돔 유칸토르 포함) |
| 아버지 | 앙 두옹 |
| 어머니 | 카스트레이 펜 |
| 왕가 | 노로돔 가문 |
| 통치 정보 | |
| 선임자 | 앙 두옹 |
| 후임자 | 시소와트 |
2. 생애
노로돔의 왕실 이름은 '''노로돔 프롬바리락'''(នរោត្ដម ព្រហ្មបរិរក្សkm)이었으며, 이전에는 '''앙 레아체아보데이'''(អង្គរាជាវតីkm)였다. 그의 사후 시호는 '''프레아 카루나 프레아 소반나코트'''(ព្រះករុណាព្រះសុវណ្ណកោដ្ឋkm)이다.

노로돔은 앙두옹의 장남으로, 1850년 이복 동생 시소와스와 함께 방콕으로 유학을 떠나 시암 왕족들과 함께 성장했다. 1857년 시암 왕립군에서 군사 고문으로 복무하며 백상 훈장을 받기도 했다.
1860년 아버지 앙두옹 왕이 사망하고 노로돔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여러 반란과 시암(태국)의 견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1863년 프랑스와 보호 조약을 맺고 프랑스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나, 시암은 캄보디아 왕관 보물을 보유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프랑스의 군사적 압력 이후 시암은 왕관 보물을 반환했고, 1867년 노로돔은 캄보디아를 시암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했다.
1884년 프랑스는 노로돔에게 공공 수입, 관세, 공공 사업 통제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이로 인해 전국적인 반발이 일어났고, 1885년 이복 형제 시 보타 왕자가 반란을 일으켰다. 노로돔은 프랑스의 제안을 캄보디아인들에게 알리며 반란을 진정시켰고, 이후 일시적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청불 전쟁 (1884–1885) 이후,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안남, 통킹, 코친차이나 (오늘날의 베트남 구성)와 캄보디아 왕국을 포함하여 형성되었다.
노로돔은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다. 1904년 사망하기 전 아들 노로돔 유칸토르 왕자를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지만, 유칸토르는 프랑스와 불화를 겪어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노로돔은 1904년 프놈펜 왕궁에서 사망했으며, 1906년 불교 방식으로 화장되었다. 그의 이복 형제 시소와트가 왕위를 계승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앙두옹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앙 바티'''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복 형제로는 시소왓과 앙 시보타가 있었다.1850년, 노로돔은 시소와스와 함께 아버지 앙두옹의 명으로 방콕으로 유학을 떠나 태국어, 정치, 군사, 불교, 고대 팔리어를 배웠다. 이 기간 동안 시암 왕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학업을 마친 후, 노로돔은 '''프롬 보리락'''이라는 태국식 이름으로 시암 왕립군에서 군사 고문으로 복무했으며, 이후 백상 훈장을 수여받았다.
2. 2. 즉위와 초기 통치
1860년, 아버지 앙두옹 왕이 사망하자 노로돔이 왕위 계승자가 되었지만, 캄보디아를 자국 내에 묶어두고 싶어했던 시암(태국) 궁정은 이를 승인하지 않아 대관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참족의 반란과 1861년 왕위를 노리던 이복동생 시보타의 반란으로 인해, 노로돔은 수도 우동에서 바탐방을 거쳐 시암의 방콕으로 피신했다.혼란을 막기 위해 시암 궁정은 노로돔을 캄보디아의 지배자로 인정하고 시보타의 반란을 진압한 후, 1863년 방콕의 왓 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시암은 캄보디아 왕관을 방콕에 보관하고 노로돔을 바탐방에 거주하게 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1863년 8월 11일, 프랑스와 캄보디아는 "수호, 통상 및 프랑스국의 보호에 관한 조약"을 체결하여 캄보디아는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었다. 이는 인접국 태국이나 베트남의 압력을 견디다 못한 캄보디아 측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1867년 7월 15일, 프랑스는 시암과 "캄보디아 왕국의 지위를 정하기 위한 프랑스국 暹羅국 간 조약"을 체결하고 캄보디아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인정받았다. 시암에 보류되어 있던 왕관이 캄보디아로 반환되었고, 1868년에 노로돔은 프랑스 아래에서 두 번째 대관식을 거행했다.
2. 3. 프랑스 보호령 시기
1866년, 노로돔 왕은 프놈펜에 왕궁을 건설하고 수도를 우동에서 이전했다. 현재 프놈펜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은탑사는 노로돔 왕에 의해 건립되었다.[1]1884년 6월 17일, 프랑스의 코친차이나 지사 샤를 톰슨은 왕궁에 갑자기 나타나 수면 중이던 노로돔 왕에게 새로운 내용의 보호 조약 체결을 강요했다. 이 조약은 1867년에 체결된 조약과는 달리, 캄보디아 정부의 징세권, 관세권 및 공공 사업 실시권을 프랑스에 귀속시키고 국왕의 권력과 국가 주권을 명목상으로만 남기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노로돔 왕은 "만약 서명을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가?"라고 질문했고, 톰슨은 왕궁 앞 톤레사프 강에 집결한 프랑스 군함을 가리키며 "서명하지 않으면 군함으로 끌고 가겠다"고 협박했다.[1]
결국 노로돔 왕은 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고, 캄보디아는 완전히 프랑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캄보디아 국내에서는 관리들을 중심으로 반프랑스 감정이 높아졌고, 1884년부터 1887년까지 각지에서 반란이 잇따랐다. 1885년에는 왕제 시 보타가 다시 군사를 일으켰다. 이 반란은 노로돔 왕이 프랑스로부터 양보를 얻어냄으로써 진정되었고, 노로돔 왕은 어느 정도 권력을 회복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노로돔 왕이 시 보타를 뒤에서 지원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감시를 강화했다.[1]
청불 전쟁 (1884–1885)에서 승리한 프랑스는 1887년 대통령령을 통해 통킹 (베트남 북부, 프랑스 보호령), 안남 (베트남 중부, 응우옌 왕조가 프랑스 보호국으로 존속), 코친차이나 (베트남 남부, 프랑스 직할령)와 함께 캄보디아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시켰다 (1893년에는 라오스도 추가되었다).[1]
노로돔 왕의 통치 후반기, 캄보디아는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나 다름없었다. 이 시기 프랑스는 캄보디아의 전통적인 관습을 폐지하고 서구식으로 바꾸려 했기 때문에, 노로돔 왕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1]
2. 4. 말년과 사망
만년에 노로돔 왕은 아들 유칸토르 왕자를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으나, 유칸토르 왕자는 프랑스와 사이가 좋지 않아 프랑스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 프랑스가 친프랑스적인 왕제(이복동생) 시소왓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노로돔 왕은 이에 분노하여 샴으로 출국했다.[1]1904년, 노로돔 왕은 방콕에 머물던 중 70세로 사망했다.[1] 유해는 캄보디아로 돌아와 1906년에 불교식으로 장례가 치러졌다.[1] 후계 국왕으로는 프랑스의 의도대로 시소왓이 즉위했다.[1]
3. 개혁과 업적
노로돔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행정 및 사법 개혁이 왕국에서 개선되었다. 행정 비용 절감을 위해 지방 축소가 시행되었다. 그는 또한 쭐랄롱꼰 대왕의 뒤를 이어 상업 독점, 노예 제도, 왕족의 시민 명부를 폐지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빈랑, 후추, 설탕과 같은 특정 농산물의 가격이 인하되었다.
노로돔 국왕은 예술에 대한 그의 감상과 애정으로 기억되었다. 1892년 그의 감독 하에 은탑사가 건설되었으며, 1875년 6월 6일 우동 사원이 봉헌되었다. 노로돔이 1860년 왕위에 올랐을 때, 고전 무용은 고대 명성을 어느 정도 회복했다. 곧 궁정 관리, 대신, 그리고 고위 인사들이 자녀들을 궁의 무용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 큰 영광이 되었다.
1872년, 노로돔은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를 공식 방문했다. 마닐라에서 국왕은 필리핀인들의 음악적 기량에 깊은 인상을 받아, 현대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 일부 음악가들을 캄보디아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노로돔의 관대함은 여러 국적의 예술가들을 캄보디아로 끌어들이기 시작했고, 그들은 항상 왕궁과 궁정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 대부분은 왕립 발레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크메르 음악과 춤을 배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얻었다.
노로돔 국왕 치하에서 영토 보호를 위해 왕립 크메르 해군의 시초가 세워졌다.
4. 논란과 비판
노로돔은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협력하여 캄보디아의 자주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884년 6월 17일, 프랑스는 노로돔에게 공공 수입, 관세, 공공 사업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하도록 압박했다. 왕궁 밖에 프랑스 군함이 정박해 있는 상황에서 노로돔은 어쩔 수 없이 서명해야 했다.[1]
이러한 프랑스의 조치는 캄보디아 전국적인 분노를 일으켰다. 1885년, 노로돔의 이복 형제인 시 보타 왕자는 프랑스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노로돔이 시 보타의 행동을 비밀리에 지원하고 반란을 선동했다고 의심했다. 노로돔이 캄보디아인들에게 프랑스가 자신에게 양보를 제안했다고 안심시키자 반란은 끝났다.[1]
1885-1886 반란 진압 이후, 노로돔은 일시적으로 권력을 강화했다. 프랑스는 또 다른 반란을 막기 위해 국왕을 다시 궁지에 몰아넣는 것을 꺼렸다.[1]
청불 전쟁 (1884–1885) 이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1887년 10월 안남, 통킹, 코친차이나 (오늘날의 베트남 구성)와 캄보디아 왕국에서 형성되었다. 노로돔은 통치 기간 동안 프랑스의 꼭두각시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더불어민주당은 노로돔의 친프랑스 정책이 캄보디아의 식민지화를 가속화했다고 비판한다. 보수 진영 역시 노로돔이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국익을 훼손했다고 비판한다.
5. 유산
노로돔의 통치는 캄보디아 역사에 여러 영향을 남겼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예술과 문화 발전에 기여한 점을 들 수 있다. 노로돔은 예술을 사랑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1892년 은탑사 건설을 감독하고 1875년 6월 6일 우동 사원을 봉헌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1] 1860년 왕위에 올랐을 때, 고전 무용은 그의 지원으로 고대 명성을 어느 정도 회복했으며, 궁정 관리, 대신, 고위 인사들이 자녀들을 궁의 무용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 큰 영광이었다.[1] 1872년 홍콩, 마닐라, 싱가포르를 공식 방문했을 때, 필리핀 음악가들의 기량에 감명을 받아 현대 음악을 가르치기 위해 이들을 캄보디아로 초청하기도 했다.[1] 그의 관대함은 여러 국적의 예술가들을 캄보디아로 끌어들였고, 이들은 왕궁과 궁정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왕립 발레에 관심을 가지고 크메르 음악과 춤을 배우는 기회를 얻었다.[1]
그러나 노로돔의 통치는 프랑스 식민 통치의 시작이라는 부정적인 유산도 남겼다. 1884년 6월 17일, 프랑스는 노로돔에게 공공 수입, 관세 및 공공 사업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하여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1885년 노로돔의 이복 형제 시 보타 왕자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노로돔은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전락했고,[1] 그의 사후 캄보디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로 편입되었다.[1]
현대 캄보디아에서 노로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예술 후원과 문화 발전 기여는 긍정적으로 평가되지만, 프랑스 식민 통치를 초래한 점은 비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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