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미 마쓰다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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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미 마쓰다이라가는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아들 마쓰다이라 미쓰치카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미쓰치카는 무공을 세워 아이치현 오카자키시 노미를 영지로 삼아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가문은 마쓰다이라 시게요시의 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세력을 키웠고, 시게카쓰의 후손들은 다이묘로 성장하여 여러 번을 다스렸다. 특히 시게카쓰의 후손인 마쓰다이라 지카타카는 기쓰키 번 지사를 거쳐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지카노부는 귀족원 자작 의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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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미 마쓰다이라씨 - 산조번
에치고국 산조에 위치했던 산조번은 호리 나오마사 입성 후 여러 다이묘 가문이 다스렸으나, 이나가키 가문의 이봉 이후 막부 직할령이 되며 폐지되었다. - 노미 마쓰다이라씨 - 가미노야마번
가미노야마번은 에도 시대 데와국(현재 야마가타현 가미노야마시)에 존재했던 번으로, 여러 번주 가문이 교체되다 마쓰다이라 노부미치 이후 안정되었으나, 막부 말기 보신 전쟁에서 패배하여 폐번치현되었다. - 마쓰다이라씨 -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마쓰다이라 노부미쓰는 무로마치 시대 마쓰다이라 씨의 당주로서 사료에서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인물이며, 가문 기반을 다지고 세력을 확장하여 센고쿠 다이묘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고, 많은 자녀를 통해 도쿠가와 막부의 기반을 닦았다. - 마쓰다이라씨 - 고이 마쓰다이라가
고이 마쓰다이라가는 미카와국 고이 지역을 발상지로 하는 마쓰다이라 씨의 지류로, 마쓰다이라 타다카게를 시조로 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며 에도 시대에 요리아이 가문으로 성장했고, 이후 분가에서는 막신과 봉행 등을 배출했다.
노미 마쓰다이라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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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정보 | |
가문 이름 | 노미 마쓰다이라가 (能見松平家) |
가문 문장 | 오엽설조 (五葉雪笹, 기쓰키사사) |
![]() | |
본성 | 칭, 청화 겐지 |
시조 | 마쓰다이라 미쓰치카 |
종류 | 무가, 화족 (자작) |
출신지 | 미카와국 누카타군 노미 |
근거지 | 미카와국 누카타군 노미 |
2. 역사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여덟째 아들 미쓰치카(지로에몬)를 시조로 한다고 『간세이 중수 제보』에 기록되어 있다. 미쓰치카는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누카타 군 노미(현재의 아이치현오카자키시노미 정)나 아치와 등을 영지로 삼았다. 노미를 영지로 삼았기 때문에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이라고 칭한다.
『관정보』에서 구체적인 사적이 전해지는 것은 3대째로 여겨지는 시게요시와 그의 숙부 아치와 겐테쓰부터이다. 시게요시는 마쓰다이라 마사야스(오쿠사 마쓰다이라 가)의 천거로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의 측근이 되었고, 이후 히로타다, 이에야스의 3대에 걸쳐 섬겼다. 마쓰다이라 가문이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어 이에야스가 순푸에서 생활하던 시대에는 도리이 다다요시와 함께 총봉행을 맡았다.
시게토시(쇼자에몬)와 시게모치(한냐스케, 한야스케)는 전사하였고, 시게토시의 아들 마쓰다이라 마사토시는 숙부 마쓰다이라 시게카쓰에게 양육되었다. 마사토시의 아들 마쓰다이라 마사요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미쓰를 섬겨 루스이반 등을 맡아 1630석을 영지로 받았다. 시게요시의 삼남 주헤이의 아들 오zawa 다다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를 섬겨 사자반·메츠케·후시잉 봉행 등을 역임, 1500석을 영지로 받았다.
마쓰다이라 시게카쓰는 나가시노 전투와 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게이초 17년(1612년)에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가신이 되었지만, 다다테루가 개역된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소환되어 겐나 3년(1617년)에 시모사 국세키야도 번 2만 6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마쓰다이라 미쓰치카의 차남 마쓰다이라 지카토모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다. 지카토모의 아들 타다쓰네(지로자에몬)는 마쓰다이라 지카타다의 명을 받아 "불충"한 기무라 신쿠로를 쳐서 요시히라, 나시노, 스기키 3개 마을을 받았다.
2. 1. 발상
마쓰다이라 노부미쓰의 여덟째 아들인 미쓰치카(지로에몬)를 시조로 한다고 『간세이 중수 제보』에 기록되어 있다. 미쓰치카는 여러 차례 무공을 세워 누카타 군 노미(현재의 아이치현오카자키시노미 정)나 아치와 등을 영지로 삼았다고 한다. 노미를 영지로 삼았기 때문에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이라고 칭한다.2. 2. 마쓰다이라 시게요시 시대
『관정보』에서 구체적인 사적이 전해지는 것은 3대째로 여겨지는 시게요시와 그의 숙부로 여겨지는 아치와 겐테쓰부터이다.시게요시는 에이쇼 9년(1512년) 15세 때 싸움에 참전하여 수급을 올렸다. 마쓰다이라 마사야스(오쿠사 마쓰다이라 가)가 이에 감탄하여 마쓰다이라 기요야스에게 권해 기요야스의 측근이 되었고, 이후 히로타다, 이에야스의 3대에 걸쳐 섬겼다. 마쓰다이라 가문이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어 이에야스가 순푸에서 생활하던 시대에는 도리이 다다요시와 함께 총봉행을 맡았다. 에이로쿠 원년(1558년) 테라베 성 전투(이에야스의 첫 출진)에서는 이에야스로부터 군공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받았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로부터도 감사장을 받았다. 덴쇼 원년(1573년)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첫 출진(아스케 성 공격)에서는 노부야스에게 갑옷을 입히는 역할을 맡았다. 덴쇼 3년(1575년) 후타마타 성 전투에서는 76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선봉에 서서 성 아래로 밀려드는 무훈을 세웠다.
아치와 겐테쓰에 대해서는 겐키 2년(1571년) 다케다 씨에 호응한 이키 세력의 오카자키 공격을 아오야마 다다카도와 함께 막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겐테쓰와 그의 아들은 모두 전사했고, 『관정보』에는 그 자손에 대한 기술은 없지만, 겐테쓰의 딸이 혼다 다다카쓰의 아내가 되었다.
2. 3. 시게요시의 장남, 차남, 삼남 계통
마쓰다이라 시게토시(쇼자에몬)는 1560년 오케하자마 전투의 전초전(일설에는 마루네 요새)에서 24세에 전사했고, 차남 노미 시게모치(한냐스케, 한야스케)는 1558년 테라베 성 전투에서 17세에 전사했다.[1]시게토시의 아들 마쓰다이라 마사토시는 아버지의 전사 후에 태어났으며, 숙부(시게요시의 넷째 아들)인 마쓰다이라 시게카쓰가 후견인이 되었다. 마사토시는 일시적으로 기요미즈 성을 칭했다고 전해지지만, 마사토시의 아들 마쓰다이라 마사요시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이에미쓰를 섬겨 루스이반 등을 맡아 1630석을 영지로 받았다. 마사요시는 사가미국 가마쿠라군 이즈미 마을(요코하마시이즈미구이즈미 정)에 호신지를 건립하여 보리사로 삼았으며, 나카노미야 사바 신사를 재흥하여 기원소로 삼았다. 이 가문은 그 후 분할을 거듭하여 930석의 하타모토(당주는 마쓰다이라 미쓰토미, 오코쇼구미에 속함)가 되었다.[1]
시게요시의 삼남 주헤이에 대해서는 사적이 전해지지 않지만, 주헤이의 아들로 오자와 성을 칭한 오zawa 다다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를 섬겨, 사자반·메츠케·후시잉 봉행 등을 역임, 1500석을 영지로 받았다. 이 오자와 가문은 다다시게 때 일시적으로 개역(직무상의 "편사"에 의해), 그 아들 시게나가 때 일시적으로 원류(분할에서 비롯된 형제 간의 싸움에 의해)와 부침을 반복하여, 시게나가의 손자인 오자와 사다카즈의 대에 불행한 행실로 개역되었다. 서류는 존속하고 있다.[1]
2. 4. 시게요시의 넷째 아들 시게카쓰 계통
마쓰다이라 시게카쓰는 16세에 오반가시라를 맡았고, 나가시노 전투와 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게이초 17년(1612년)에 마쓰다이라 다다테루의 가신이 되었지만, 다다테루가 개역된 후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소환되어 겐나 3년(1617년)에 시모사 국세키야도 번 2만 6000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도토미 국요코스카 번으로 옮겨졌다.시게카쓰의 장남 마쓰다이라 시게타다는 겐나 8년(1622년) 데와 국가미야마 번 4만 석으로 가전봉을 받았다. 시게타다의 남동생 3명은 별가를 세웠는데, 그중 마쓰다이라 시게노리(시게카쓰의 셋째 아들, 가즈사 국 햐쿠슈 번→시모노 국 미나가와 번)와 마쓰다이라 가쓰타카(시게카쓰의 넷째 아들, 가즈사 국 사누키 번)가 다이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시게노리의 계통은 무사 단절, 가쓰타카의 계통은 개역되어 (후에 하타모토로 재흥) 다이묘의 지위를 오래 유지하지 못했다.
시게타다의 양자 마쓰다이라 시게나오(시나노 국 마쓰모토 번 주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넷째 아들·모계의 증조부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그 후, 셋쓰 국 미타 번에서 분고 국류오 번으로 옮겨졌다. 시게나오의 아들 마쓰다이라 히데치카는 쇼호 2년(1645년)에 분고 국 기쓰키 번으로 3만 2천 석으로 옮겨졌고, 이후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은 기쓰키에 정착했다.
마지막 번주 마쓰다이라 지카타카는 메이지 2년(1869년) 6월 19일 반적봉환에 의해 기쓰키 번 지사에 임명되었고, 메이지 4년(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메이지 2년(1869년) 6월 17일 행정관 달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도 다이묘 가문으로 화족에 올랐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 지사로서 지카타카의 아들 지카노부가 자작에 서임되었다. 지카노부는 귀족원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그 아들 지카요시는 육군성 및 택식성, 귀족원 사무국 등에 촉탁으로 근무했으며, 『[https://dl.ndl.go.jp/pid/1462192/1/1 국가와 군대]』를 저술했다. 지카요시 대에 노미 마쓰다이라 자작 가문의 저택은 도쿄시나카노구 가타마치에 있었다.
2. 5. 미쓰치카의 차남 지카토모 계통
마쓰다이라 미쓰치카의 차남 마쓰다이라 지카토모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다. 지카토모(초명은 시게토모)는 지로자에몬, 도쇼노스케라고 불렸으며, 미카와국 나베타, 히로토시, 우타이시, 츠바키이, 키코이, 누마코이, 타와, 시모카와치 등의 마을을 다스렸고, 어느 해에 전사했다.지카토모의 아들 타다쓰네(지로자에몬)는 마쓰다이라 지카타다의 명을 받아 "불충"한 기무라 신쿠로를 쳐서 요시히라, 나시노, 스기키 3개 마을을 받았다. 타다쓰네의 장남 타다즈미(신스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고지 원년(1555년) 오와리국 카니에 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타다즈미의 차남 지카쓰구(세이이몬)는 다리 질환으로 미카와에서 칩거했고, 그의 아들 스즈키 시게히로(곤베에, 마쓰다이라를 꺼려 어머니 쪽 성을 칭함)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출사하여 붓글씨를 담당했으나, 이 집안은 후에 후사가 끊겼다. 타다쓰네의 차남 타다시게(스케구로)는 토리이 모토타다에게 소속되어 덴쇼 10년(1582년) 가이국 구로코마에서 전사했다. 타다시게의 아들 시게카네(스케자에몬)는 "이유가 있어서" 무사시 마쓰야마에 칩거한 후, 유키 히데야스를 섬겨 마쓰야마 성을 칭했고, 그 후 토리이 타다마사를 섬겼다.
타다즈미의 적손(타다쓰나의 아들) 지카마사(신스케)는 도쿠가와 요리후사(미토번)에 소속된 후 마쓰다이라 요리시게(다카마쓰번)의 가신이 되어 자손을 이어갔다.
2. 5. 1. 이설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의 친족 계통에 관해서는 여러 이설(異說)이 전해지며, 『간세이보(寛政譜)』는 이러한 이설들을 고찰 대상으로 삼고 있다.『간세이보』 편찬 당시, 카지(梶) 가문에서 제출한 계보에 따르면, 다다즈미(忠澄)의 차남 "가쓰타다(勝忠)"가 카지 가문의 선조라고 한다. 다다즈미의 장남 다다쓰나(忠綱)는 어머니 쪽 가문인 카지 씨를 칭했지만(다다즈미의 아내가 카지 고로베에(梶五郎兵衛)의 딸이라는 것은 『간에이보(寛永譜)』 본문에도 기록되어 있다), 다다쓰나의 자손이 시게히로(重弘) 대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다다쓰나의 동생 "가쓰타다"가 가문을 이었다고 한다. 『간세이보』 편찬자는 카지 가문의 선조로 여겨지는 "가쓰타다"가 『간에이보』에서 카지 마사미치라고 기록된 인물이며, 『간에이보』 시점에서 카지 가문이 헤이(平) 씨를 칭하고 있었던 점을 들어,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과 연결시킨 가전(家傳)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또한 "혹설"에서는 미카와국 사사키(三河国佐々木, 오카자키시上佐々木町)의 영주 마쓰다이라 다다무네(산자에몬(三左衛門))를 이 계통의 인물로, 시게히로의 형이라고 한다. 다다무네(忠倫)는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와 내통하여 가미와다 성(岡崎市上和田町)에 근거지를 두고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広忠)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덴분 16년(1547년)에 살해되었다. 다다무네, 시게히로의 동생 중 한 명인 마쓰다이라 다다나리는 미카와 잇코잇키에서 잇키 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사이고쿠(西国)로 도망쳤고, 그 후 가토 기요마사를 섬겨 가토 다이스케(加藤大助)를 칭했으며, 덴쇼 14년(1586년) 아마쿠사 잇키와의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간세이보』에서는 다다무네와 시게히로의 연대가 너무 차이난다는 점을 들어 형제라는 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3. 가문
가문에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원래는 둥근 세 葵 문장을 사용했다고 하나, 게이초 연간에 사용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간세이 종가보』에 기재된 각 가문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가문 | 문장 |
---|---|
지로에몬 미쓰요시 가 | 둥근 꽃 葵, 둥근 괭이밥, 이이다사, 구슬 분동, 고시치 기리 |
신파치로 마사나 가 | 둥근 꽃 葵, 둥근 괭이밥, 구슬 분동, 고시치 기리 |
주자에몬 마사토시 가 | 꽃 葵, 둥근 괭이밥, 이이다사, 구슬 분동, 고시치 기리 |
센지로 미쓰노부 가 | 꽃 葵, 둥근 괭이밥, 구슬 분동, 고시치 기리 |
오자와 효쿠노스케 시게미쓰 가 | 꽃 葵, 둥근 괭이밥, 이이다사, 분동, 고시치 기리, 둥근 생강 |
센키쓰 요시히데 가 | 둥근 괭이밥, 다섯 잎 눈 대나무 |
오자와 신주로 타다야스 가 | 둥근 괭이밥, 둥근 이이다사, 구슬 분동, 둥근 안은 생강 |
오자와 세헤이 사다카즈 가 | 둥근 이이다사 |
스루가노카미 지카타카 가(키즈키 번주 가) | 눈 대나무, 분동, 칠요 |
도시카쓰마사 가 | 눈 대나무, 칠요 |
민부 타케사토 가 | 눈 대나무, 칠요 |
하치로에몬 마사미쓰 가 | 둥근 눈 대나무, 칠요 |
덴지로 시게토시 가 | 둥근 눈 대나무, 분동 |
덴사부로 가쓰오키 가 | 둥근 눈 대나무, 분동 |
오스미노카미 가쓰타케 가 | 둥근 눈 대나무, 분동 |
후지 고로 마사히로 가 | 구슬 분동, 고시치 기리 |
스즈키 곤에몬 가 | 시모후지 |
4. 가계도
'''범례'''
- 굵은 선은 친자, 가는 선은 양자.
마쓰다이라 노부미쓰 | |||
---|---|---|---|
미쓰치카 | 지카타다 | ||
시게치카 | |||
시게요시 | |||
시게카쓰 | |||
시게타다 | 시게나가 | 시게노리 | 가쓰타카 |
시게나오[1] | 시게마사 | 시게하루[2] | |
히데치카 | 시게토시 | ||
시게요시 | |||
시게야스 | |||
지카즈미[3] | |||
지카미쓰 | |||
지카사다 | 지카카타 | ||
지카아키라 | |||
지카요시 | |||
지카타카 | 나가이 나오야 |
참조
[1]
문서
松本藩主・小笠原秀政四男
[2]
문서
高家旗本・品川高如長男、勝隆の外孫
[3]
문서
麻生藩主・新庄直詮十三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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