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고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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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고리가는 1697년 니시키오리 모토히사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에도 시대에는 30석의 가록을 받았으며, 6대 니시키오리 히사타카는 정신 팔십 팔경 열참 사건에 연루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 제도가 시행되면서 자작위를 받았고, 귀족원 의원을 역임했다. 니시키오리 자작가의 저택은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유이가하마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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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시고리가 | |
|---|---|
| 니시고리 가문 | |
![]() | |
| 본성 | 우라베씨 요시다 서류 하기와라 서류 |
| 가조 | 니시고리 무네히사 |
| 종별 | 공가 (반가) 화족 (자작) |
| 출신지 | 야마시로국 |
| 근거지 | 야마시로국 가나가와현가마쿠라정유이가하마 |
| 인물 | 니시고리 히사타카 |
2. 역사
니시키오리 가문은 1645년부터 1710년까지 살았던 정3위 하기와라 가즈무네의 둘째 아들 니시키오리 모토히사(1697년 ~ 1755년)를 시조로 한다. 한가에 속하며, 정3위비참의를 최고 관직으로 삼았다. 6대손인 니시키오리 히사타카(1820년 ~ 1882년)는 정신 팔십 팔경 열참 사건에 연루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30석의 가록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메이지 2년) 6월 17일 행정관령에 따라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만들어지면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이 시행되면서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귀족원에서 자작 의원으로 활동했다.
니시키오리 자작 가문의 저택은 가나가와현가마쿠라정유이가하마에 있었다.
2. 1. 가문의 기원과 성립
정3위 하기와라 가즈무네(1645년 – 1710년)의 차남 종2위 탄정대필 니시키오리 모토히사(1697년 – 1755년)를 시조로 한다. 가문은 한가이다. 정3위비참의를 극위극관으로 한다. 6대 니시키오리 히사타카(1820년 – 1882년)는 정신 팔십 팔경 열참 사건에 관련된 공가 중 한 명이다.에도 시대의 가록은 30석이다.
2. 2. 막말과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메이지 2년) 6월 17일 행정관령으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면서 니시키오리 가문도 구 공가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1] 1884년(메이지 17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대납언 직임의 예가 없는 구 도조 가[2]로서 7대 노리히사에게 자작위가 수여되었다. 노리히사는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2. 3. 근현대
정3위 하기와라 가즈무네(1645년 – 1710년)의 차남 종2위 탄정대필니시키오리 모토히사(1697년 – 1755년)를 시조로 한다.가문은 한가이다. 정3위비참의를 극위극관으로 한다. 6대 히사타카(1820년 – 1882년)는 정신 팔십 팔경 열참 사건에 관련된 공가 중 한 명이다.
에도 시대의 가록은 30석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2년(1869년) 6월 17일의 행정관령으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함에 따라 니시키오리 가문도 구 공가로서 화족에 들어갔다. 메이지 17년(1884년) 7월 7일의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자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대납언 직임의 예가 없는 구 도조 가로서 7대 노리히사에게 자작위가 수여되었다[1][2]. 노리히사는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니시키오리 자작가 저택은 가나가와현가마쿠라정유이가하마에 있었다.
3. 계보
wiki
| 하기와라 카즈요리 |
| 니시키오리 모리히사① |
| 모리후사②[1] |
| 모리츠나③ |
| 모리히라④ |
| 히사오⑤[2] |
| 히사타카⑥ |
| 노리히사⑦ (츠치미카도 하루히데의 아들) |
| 에이히사⑧ |
| 야스치카⑨ |
참조
[1]
문서
萩原兼武の末男
[2]
문서
萩原従言の次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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