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쓰카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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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카쓰카사가는 가마쿠라 시대에 창설된 일본의 귀족 가문으로, 고노에 이에자네의 아들 다카쓰카사 가네히라가 창시했다. 가문의 이름은 가네히라의 저택이 있던 다카쓰카사 무로마치에서 유래되었으며, 모란 문양을 사용했다. 센고쿠 시대에 단절되었다가 니조 하루요시의 아들 다카쓰카사 노부후사가 오다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재건했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쇼군가의 오토다이도코로를 배출했고, 마쓰다이라 노부히라의 후손들은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 가문을 형성하여 요시이 번주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공작 작위를 받았으며, 다카쓰카사 히로미치의 차남 다카쓰카사 노부히로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현재 당주는 다카쓰카사 나오타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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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섭관가 - 섭가
섭가는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유신 시대까지 섭정과 관백을 배출한 고노에 가, 구조 가, 니조 가, 이치조 가, 다카쓰카사 가의 다섯 후지와라 북가 가문을 지칭하며, 메이지 유신 이후 섭정 제도가 폐지되며 섭가로서의 기능은 상실되었으나 화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 섭관가 - 구조가
구조 가문은 후지와라 북가의 후손인 구조 가네자네를 시조로 하는 일본의 귀족 가문으로, 그가 섭정과 관백을 역임하며 권세를 누린 오섭가 중 하나이며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위를 받았다. - 다카쓰카사가 - 다카쓰카사 노부코
다카쓰카사 노부코는 도쿠가와 마사코를 고미즈오 천황의 중궁으로 삼는 데 관여하고, 도쿠가와 쓰나요시와 결혼하여 에도 성 오오쿠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일화를 남겼으며, 쓰나요시 사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 다카쓰카사가 - 다카쓰카사 가즈코
쇼와 천황과 고준 황후의 셋째 딸인 다카쓰카사 가즈코는 1950년 평민과 결혼하여 황적을 이탈하고 이세 신궁의 사이슈를 지냈으며, 결혼 후 남편의 죽음과 자택 침입 등 불행을 겪었다. - 일본의 공작가 - 시마즈씨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일본의 공작가 - 도쿠가와씨
도쿠가와 씨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가 창시한 성씨로, 에도 시대에 도쿠가와 막부를 통해 일본을 통치했으며, 미나모토 씨의 후예를 자칭하며, 가문의 문장인 세 겹의 아욱 문장은 에도 시대를 상징한다.
2. 역사
후지와라노 가네히라(1228-1294)는 고노에 이에자네의 여섯째 아들로 가마쿠라 시대 중기인 1252년(겐초 4년)에 섭정·등씨장자 선하를 받고, 고노에가 영지인 장원을 분할 상속받았다. 후에 누나인 나가코(다카쓰카사 인, 고호리카와 천황중궁)의 소유지도 상속받아[15] 다카쓰카사 가를 창설했다.[1]
가문명은 가네히라의 저택이 다카쓰카사 무로마치(다카쓰카사 코지, 현재의 시모초자마치 거리와 무로마치 거리가 교차하는 곳)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센고쿠 시대의 다카쓰카사 타다후유에게 후사가 없어, 1546년(덴분 15년) 그의 죽음으로 다카쓰카사 가는 한 번 단절되었다. 이후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니조 하루요시의 셋째 아들인 노부후사가 1579년(덴쇼 7년)에 가문을 재건했다.[4][5] 노부후사의 딸 다카코는 3대 도쿠가와 쇼군인 이에미쓰와 결혼했다.
1884년, 다카쓰카사 가문의 당주 히로미치는 화족 제에서 공작이 되었다.[1] 1950년, 가즈코는 히로히토의 셋째 딸로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지만, 그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5]
2. 1. 중세
후지와라노 가네히라(1228-1294)는 고노에 이에자네의 여섯째 아들로 가마쿠라 시대 중기인 1252년(겐초 4년)에 섭정·등씨장자 선하를 받고, 고노에가 영지인 장원을 분할 상속했다. 후에 누나인 나가코(다카쓰카사 인, 고호리카와 천황중궁)의 소유지도 상속하여[15] 다카쓰카사가를 창설했다.[1]가문명은 가네히라의 저택이 다카쓰카사 무로마치(다카쓰카사 코지, 현재의 시모초자마치 거리와 무로마치 거리가 교차하는 곳)에 있었던 데서 유래한다. 요바이코지에 면한 이노쿠마 전도 전령했기 때문에 요바이 전이라고도 불렸다.
가문 문장은 다카쓰카사 모란 문양이다. 고노에 모란 문양이 모란의 수술을 정면에서 내려다본 형태인 데 반해, 다카쓰카사가는 측면에서 본 형태이며, 5개의 수술이 디자인되어 있다. 가문 문장은 꽃 다이아몬드이다.
센고쿠 시대의 다카쓰카사 타다후유에게 후사가 없어, 1546년(덴분 15년) 그의 죽음으로 다카쓰카사가는 한 번 단절되었다.
2. 2. 근세
오다 노부나가의 주선으로 니조 하루요시의 셋째 아들인 노부후사가 1579년(덴쇼 7년)에 가문을 재건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친분이 두터웠던 다카쓰카사 가문에는 히데요시가 애용하던 다구(茶道具)가 전해졌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공습으로 소실되었다.에도 시대의 영지 표고는 오다 노부나가 시대에는 300석이었고, 에도 시대 초기에는 1000석, 에도 중기에는 1500석이었다.
에도 막부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의 오토다이도코로는 타카코였고,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오토다이도코로는 노부코였으며, 1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오토다이도코로는 타미코로, 모두 다카쓰카사 가문의 딸이었다.
노부후사의 넷째 아들(타카코의 동생)인 노부히라는 에도로 내려와 막신이 되어 마쓰다이라 성을 받고 7000석을 지행했다. 노부히라의 손자인 노부키요 대에 1만 석이 되어 다이묘제후에 올랐다(야타 번, 후 요시이 번의 주군).
에도 시대에는 부자간의 가독 상속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제18대 후사히로와 19대 나오스케가 고노에 가문에서 양자로 들어왔고, 20대 모토테루는 이치조 가에서 양자가 되었다. 모두 후사가 없어 칸인노미야 나오히토 친왕의 넷째 왕자(준미야)가 양자로 들어왔다(다카쓰카사 스케히라).
2. 3. 근대 이후
1884년, 다카쓰카사 가문의 당주 히로미치는 화족 제에서 공작이 되었다.[1] 1950년, 가즈코는 히로히토의 셋째 딸로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지만, 그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5]막부 말기의 관백이었던 후키는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행차했을 때 수행하여, 황거 한조몬 근처의 기신 저택을 하사받았지만, 익숙한 교토를 그리워하여 결국 이 저택을 반납하고 귀향했다. 옛 신하를 써서 유채유의 제조 판매점을 시작했지만, 실패하여 몇 년 만에 폐업하였고, 다시 도쿄로 이주하여 아자부 혼무라 정 (현재 핀란드 대사관 및 요정·아리스가와 기요미즈[16])에 저택을 소유했다. 후에 메구로구가미메구로에 저택을 옮겼다 (가미메구로의 저택은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군의 공습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노부스케의 정실 부인 스이코가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차녀였기 때문에) 센다가야의 도쿠가와 종가 저택 옆으로 이사하여, 전후에 쓰다주쿠대학의 교사로 대여된 시기가 있다.[17]
1869년 6월 17일의 행정관 달에서 공가와 다이묘 가문이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다카쓰카사 가문도 옛 공가로서 화족에 포함되었다. 후키의 후계자 스케마사는 막부 말기인 1867년에 22세로 사망했고, 구조 가에서 히로미치가 양자로 들어가, 1872년 8월 20일에 가독을 상속했다.
1870년 12월 10일에 정해진 가록은 현미로 526석 7두였다. 1876년 8월 5일의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하여 가록과 교환하여 지급된 금록 공채의 액수는 1만 8455엔 2전 9리였다. 메이지 전기의 히로미치의 주거는 도쿄부고지마치구가미니반초 25였다. 당시의 가부는 이소무라 사다유키였다.
1884년에 화족이 오작 제도가 되자 히로미치는 옛 섭가로서 공작에 서임되었다. 1905년에는 히로미치의 차남 다카쓰카사 노부히로가 분가로서 남작에 서임되었다. 또한 분가인 요시이 번주였던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 가는 유신에 즈음하여 '마쓰다이라'에서 '요시이'로 개성했고, 자작에 서임되었다.
히로미치는 고묘 천황 황후 (에이쇼 황태후)의 친동생이며, 쇼와 천황국모인 테이메이 황후에게는 숙부에 해당하며, 육군 소장으로, 다이쇼 천황의 시종장을 지냈다.
아들 노부스케는 '새의 공작'이라고 불린 조류학자로, 『일본 조류사』, 『사조』 등의 저작이 있으며, 유고인 『조류지』와 『오무고』는 해외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쇼와 천황과는 가까운 친척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생물학을 통해 신뢰가 깊은 사이였다. 메이지 신궁의 궁사도 지냈다.[18]
노부스케의 아들 히라미치는, 1950년에 쇼와 천황의 셋째 황녀가즈코 내친왕와 결혼했다. 옛 오섭가·공작가의 적자라고는 하지만 일본 교통공사의 샐러리맨으로서 만원 전철로 통근했던 히라미치와 내친왕이 결혼한 것은, 전후의 열린 황실로서 큰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히라미치는, 1966년에 자주 가던 긴자의 바 마담과 가스 중독으로 사망했다.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고, 양자 나오타케 (히라미치의 여동생 쇼코와 마쓰다이라 노리타케 부부의 장남, 히라미치의 조카)가 당주를 이었다. 현재의 다카쓰카사 가는, 오기 마쓰다이라 가에서 더 나아가 나베시마 씨를 거쳐, 혈연상으로는 쇼니 씨의 남자 후손이 되고 있다. 나오타케는 NEC 관련 회사 사장 등을 역임한 후[18], 이세 신궁대궁사를 거쳐, 2018년부터 신사 본청 통리를 맡고 있다. 나오타케의 장남에게 나오미치 (1974년 6월 6일 생)가 있다.
3. 역대 당주
다카쓰카사가는 다카쓰카사 종가와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 가문(요시이 가문)으로 나뉜다.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 가는 다카쓰카사 노부후사의 막내 아들인 마쓰다이라 노부히라에 의해 창설되었으며,[8] 메이지 시대에 요시이 번의 이름을 따서 요시이로 성씨를 변경했다.[11][12]
[13]
다카쓰카사 노부히로 가는 다카쓰카사 히로미치 공작의 차남 다카쓰카사 노부히로(1892년~1981년) 남작에 의해 시작되었다.
3. 1. 다카쓰카사 종가
후지와라노 카네히라(1228년 ~ 1294년)에 의해 창설되었으며, 그는 고노에 이에자네의 여섯째 아들이었다. 그는 또한 가문의 이름인 다카쓰카사를 처음 사용했으며,[1] 이 이름은 가문이 거주했던 교토의 지역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다카쓰카사가는 13대 당주인 타다후유가 1546년에 사망한 후 센고쿠 시대에 처음으로 단절되었다. 이후 1579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4] 니조 하루요시의 셋째 아들이 다카쓰카사 노부후사의 이름을 이어받아 가문을 부활시켰다.[5] 노부후사의 딸 다카코는 3대 도쿠가와 쇼군인 이에미쓰와 결혼했다.1884년, 다카쓰카사 가문의 당주 히로미치는 화족 제에서 공작이 되었다.[1] 1950년, 히로히토의 셋째 딸 가즈코는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지만, 그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5]
3. 2.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 가 → 요시이 가
'''다카쓰카사 마쓰다이라 가문'''(鷹司松平家)은 기슈 도쿠가와 가문과 다카쓰카사 가문의 분가로, 다카쓰카사 노부후사의 막내 아들인 마쓰다이라 노부히라에 의해 창설되었다.[8] 노부히라의 누이가 162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결혼했기 때문에, 노부히라는 1650년 에도로 이주했다. 이에미쓰는 매형을 환영하며 하타모토의 지위를 하사했다.[9][10] 이에미쓰의 후계자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주선으로 1653년 노부히라는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둘째 딸 마쓰히메와 결혼했다.[11] 도쿠가와 씨족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노부히라는 이듬해 '''마쓰다이라'''라는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10][12] 메이지 시대에는 가문의 이름을 에도 시대의 가문의 영지였던 요시이 번의 이름을 따서 '''요시이'''(吉井)로 변경했다.[11][12]3. 3. 다카쓰카사 노부히로 가
4. 계보
고노에 이에자네의 여섯째 아들인 후지와라노 카네히라(1228-1294)가 다카쓰카사가를 창설했다.[1] 그는 가문의 이름인 다카쓰카사를 처음 사용했는데, 이 이름은 가문이 거주했던 교토의 지역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센고쿠 시대에 타다후유가 1546년에 사망한 후 다카쓰카사가는 일시적으로 단절되었다. 이후 1579년에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니조 하루요시의 셋째 아들이 다카쓰카사 노부후사의 이름을 이어받아 가문을 부활시켰다.[4][5] 노부후사의 딸 다카코는 3대 도쿠가와 쇼군인 이에미쓰와 결혼했다.
1884년, 히로미치는 화족 제에서 공작이 되었다.[1] 1950년, 히로히토의 셋째 딸인 가즈코는 다카쓰카사 도시미치와 결혼했지만, 그 부부에게는 자녀가 없었다.[5]
다카쓰카사가는 다음과 같은 가계도를 가지고 있다.
'''다카쓰카사-마쓰다이라 가문'''(鷹司松平家)은 기슈-도쿠가와 가문과 다카쓰카사 가문의 분가로, 다카쓰카사 노부후사의 막내 아들인 마쓰다이라 노부히라에 의해 창설되었다.[8] 노부히라의 누이가 1623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쓰와 결혼했기 때문에, 노부히라는 1650년 에도로 이주했다. 이에미쓰는 매형을 환영하며 하타모토의 지위를 하사했다.[9][10]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주선으로 1653년 노부히라는 도쿠가와 요리노부의 둘째 딸 마쓰히메와 결혼했다.[11] 도쿠가와 씨족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노부히라는 이듬해 '''마쓰다이라'''라는 성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10][12] 메이지 시대에는 가문의 이름을 에도 시대의 가문의 영지였던 요시이 번의 이름을 따서 '''요시이'''(吉井)로 변경했다.[11][12]
다카쓰카사-마쓰다이라 가문은 다음과 같은 가계도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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近衛家熙の三男、房熙の実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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閑院宮直仁親王第4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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