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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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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나 난다는 불교, 자이나교, 푸라나, 그리스-로마 기록 등 다양한 역사적 자료에서 언급되는 인물이다. 불교 기록에 따르면 그는 9명의 난다 왕 중 마지막 왕으로, 찬드라굽타에 의해 전복되었다. 자이나교 기록에서는 "난다"로 언급되며, 찬야키아가 난다 왕조를 전복하려 했다고 묘사한다. 그리스 기록에서는 아그라메스 또는 잔드라메스로 불리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지배자로 묘사된다. 다나 난다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지만, 신하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 의해 패배하고 마우리아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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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 난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다나 난다의 제국 가능 범위
다나 난다의 제국
재위기원전 329년 ~ 기원전 321년 경
이전카이바르타
계승찬드라굽타 마우리아(마가다 황제)
왕조난다 왕조
아버지마하파드마 난다
사망기원전 321년 경
이름
원래 이름धनानन्दः (데바나가리 문자)

2. 불교 기록

불교 경전인 마하밤사는 다나 난다를 포함한 9명의 난다 왕이 모두 형제였으며, 총 22년 동안 차례로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

불교 전통에 따르면, 다나 난다는 찬드라굽타가 푸푸파푸라(푸슈파푸라)에서 열린 시주 행사에서 그의 흉한 외모 때문에 그를 모욕하고, 집회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찬드라굽타는 그 후 왕을 저주했고, 왕은 그의 체포를 명령했다. 찬드라굽타는 도망쳐 왕의 아들 파바타와 친구가 되었고, 왕자를 부추겨 왕위를 찬탈하도록 했다. 왕자가 준 인장반지의 도움으로 찬드라굽타는 난다 궁전을 탈출했다. 다나 난다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한 그는 1개의 동전을 8개의 동전으로 바꾸는 비밀 기술을 사용하여 군대를 모을 재산을 얻었다.

찬드라굽타는 다나 난다를 대체할 두 명의 후보자로 파바타와, 전 왕족 출신인 찬드라굽타를 좁혔다. 그는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그들 각자에게 양모 실로 목에 걸 수 있는 부적을 주었다. 어느 날, 찬드라굽타가 잠든 동안 그는 파바타에게 찬드라굽타를 깨우지 않고 양모 실을 끊지 않고 제거하라고 요청했다. 파바타는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얼마 후, 파바타가 잠들었을 때 찬드라굽타는 찬드라굽타에게 같은 임무를 완수하도록 도전했다. 찬드라굽타는 파바타의 머리를 잘라 양모 실을 회수했다. 그 후 7년 동안 찬드라굽타는 찬드라굽타를 훈련시키고 지도했다. 찬드라굽타가 성인이 되자 그의 재산을 사용하여 군대를 소집했다.

군대는 다나 난다의 수도를 침공했지만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해산되었다. 그 후, 찬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는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국경 마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그들은 난다 수도 파탈리푸타(파탈리푸트라)로 진격하여 다나 난다를 죽였다. 찬드라굽타는 어부를 통해 다나 난다의 보물을 찾아 찬드라굽타를 새로운 왕으로 임명했다.

2. 1. 아홉 형제 왕

마하밤사sa에 따르면 아홉 명의 난다 왕은 모두 형제였으며, 총 22년 동안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1] 이들은 다음과 같다.

순서이름
1우그라세나 (우가세나pi)
2판두카
3판두가티
4부타팔라
5라슈트라팔라
6고비샤나카
7다샤시드다카
8카이바르타
9다나 난다


3. 자이나교 기록

자이나교 전통에는 불교 전설과 유사점이 많은 전설이 있지만 "다나 난다"라는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다. 자이나교 경전은 찬야키아의 경쟁자를 단순히 "난다"라고 부른다.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찬야키아는 왕에게 기부를 요청하기 위해 난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방문했지만, 왕의 시종에게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이후 난다 왕조를 전복시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찬드라굽타를 발견하고 가르쳤으며,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난다 군대를 물리치는 군대를 양성했다. 그러나 불교 전통과 달리 자이나교 전통에서는 난다 왕이 패배 후 수도를 살아있는 채로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말한다. 왕의 딸은 찬드라굽타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했다. 이 전설은 이 딸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나중에 두르다라가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의 어머니라고 밝힌다.

난다의 재상은 사카달라였으며, 그의 아들로 스툴라바드라(기원전 297-198년)와 스리카야가 있었다. 스리카야는 왕의 개인 경호원이 되었다. 스툴라바드라는 왕실 무용가 루파코사를 사랑했고 그녀와 12년 동안 함께 살았다. 사카달라는 그의 정치적 경쟁자 바리치의 음모로 살해되었고, 그 후 그의 아들 스리카야가 재상이 되었다.

4. 푸라나 기록

불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푸라나 또한 9명의 난다 왕이 있었다고 언급한다.[1] 하지만 그들은 이 왕들 중 첫 번째 왕을 마하파드마라고 지칭하며, 다음 8명의 왕은 그의 아들이었다고 언급한다. 푸라나는 이 아들들 중 수칼파 한 명의 이름만을 언급한다. 18세기 푸라나 주석가인 둔디-라자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사르바타-시디라는 난다 왕의 손자였다고 주장하지만, 이 주장은 푸라나 자체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5. 그리스-로마 기록

그리스 기록은 인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의 지배자를 아그라메스 또는 잔드라메스로 언급하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마지막 난다 왕으로 보고 있다. "아그라메스"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아우그라사이나" (문자 그대로 "우그라세나의 아들 또는 후손"이라는 뜻으로, 우그라세나는 불교 전통에 따르면 왕조의 창시자 이름이다)의 그리스어 표기일 수 있다.[1]

모든 역사적 기록은 마지막 난다 왕이 신하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디오도루스 시켈루스에 따르면, 포루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당시 난다 왕이 "가치 없는 인물"이었고, 낮은 출신으로 여겨져 신하들에게 존경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 또한 포루스의 말을 인용해 난다 왕이 신하들에게 멸시받았다고 진술한다.[1] 플루타르코스는 안드로코토스(찬드라굽타로 확인됨)가 알렉산드로스를 만났다고 주장하며, 안드로코토스는 나중에 난다 왕이 사악하고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미움을 받고 멸시를 받았으므로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영토(강가리다이와 프라시)를 쉽게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선언했다.[1] 스리랑카 불교 전통은 난다 왕조가 탐욕스럽고 억압적인 세금을 부과했기 때문이라고 비판한다. 인도의 푸라나는 난다 왕조를 ''adharmika''로 묘사하는데, 이는 그들이 ''다르마''(정당한 행동 규범)를 따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5. 1. 다나 난다의 군대 (그리스 기록)

그리스-로마 전통에 따르면 난다 왕조는 두 명의 왕만을 가졌다고 하는데, 쿠르티우스에 따르면 이 왕조의 창시자는 이발사 출신이었고 그의 아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전복되었다.[1]

인도의 왕 포루스(Porus the Elder)와 페겔레스(바갈라)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아그라메스가 신하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을 알렸다고 한다. 로마 역사가 퀸투스 쿠르티우스 루푸스에 따르면, 다나 난다의 군대는 보병 20만 명, 기병 2만 명, 라타(Ratha) 2천 대(네 마리 말이 끄는), 전쟁 코끼리 3천 마리를 보유하고 있었다.[1] 그리스 기록은 아그라메스를 강가리다이 (갠지스 계곡)와 프라시 (아마도 산스크리트어 단어 ''prachya''s, 문자 그대로 "동부인")의 통치자로 묘사한다. 강력한 난다 군대에 맞서야 할 상황에 직면했을 때,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그가 인도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1]

6. 다나 난다에 대한 평가

다나 난다는 기원전 329년부터 마가다를 통치했다. 당시 마가다 왕국은 보병 20만 명, 기병 2만 명, 전차 2000대, 전투 코끼리 3000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다.[1] 이 때문에 알렉산드로스 3세가 펀자브 지역을 점령했을 때 탁실라의 교수 차나키야가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다나 난다는 모욕을 주며 거절했다.

이에 원한을 품은 차나키야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함께 기원전 322년 난다 왕조에 맞서 봉기하여 수도 파탈리푸트라로 진격했고, 다나 난다는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했다. 이로써 난다 왕조는 멸망하고 마우리아 제국이 건국되었다.

다나 난다와 난다 왕조에 대한 평가는 불교, 자이나교, 푸라나, 그리스-로마 등 다양한 역사 기록에서 나타난다.

다나 난다와 난다 왕조에 대한 평가
источни내용
불교 기록
자이나교 기록
푸라나 기록
그리스 기록



종합적으로, 다나 난다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했지만, 신하와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고, 결국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몰락한 왕으로 평가된다.

7. 대중문화

다나 난다는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또는 차나키아의 삶을 그린 인도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 거의 모든 편에서 주요 적대자로 등장한다.[1]

드라마 제목배우
차나키아 (TV 시리즈)수라즈 차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2011 TV 시리즈)수라즈 타파르
찬드라 난디니로케시 바타
포루스


8. 생애

다나 난다는 기원전 329년부터 마가다를 통치하였다. 당시 마가다 왕국은 보병 20만 명, 기병 2만 명, 전차 2000대, 전투 코끼리 3000마리로 구성된 대군을 지니고 있었다.[1] 이 때문에 당시 펀자브 지역이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점령당할 때 탁실라의 교수인 차나키야로부터 지원군 요청을 받았지만, 다나 난다는 그에게 모욕을 주면서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원한을 품은 차나키야찬드라굽타 마우리아와 함께 기원전 322년에 난다 왕조에 맞서 거병한 후 수도인 파탈리푸트라로 진격하였으며, 다나 난다는 이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과 함께 마가다 왕국과 난다 왕조가 막을 내리고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마우리아 제국으로 대체되었다.

불교 경전인 ''마하밤사''에 따르면, 9명의 난다 왕은 모두 형제였으며 총 22년 동안 차례로 통치했다. 첫 번째 왕은 우그라세나였고, 마지막 왕은 다나 난다였다.

불교 전통에 따르면, 다나 난다는 찬드라굽타가 푸푸파푸라(푸슈파푸라)에서 열린 시주 행사에서 그의 흉한 외모 때문에 그를 모욕하고, 집회에서 쫓아내라고 명령했다. 찬드라굽타는 그 후 왕을 저주했고, 왕은 그의 체포를 명령했다. 찬드라굽타는 도망쳐 왕의 아들 파바타와 친구가 되었고, 왕자를 부추겨 왕위를 찬탈하도록 했다. 왕자가 준 인장반지의 도움으로 찬드라굽타는 난다 궁전을 탈출했다. 다나 난다를 전복시키기로 결심한 그는 1개의 동전을 8개의 동전으로 바꾸는 비밀 기술을 사용하여 군대를 모을 재산을 얻었다.

찬드라굽타는 다나 난다를 대체할 두 명의 후보자를 좁혔다: 파바타와, 전 왕족 출신인 찬드라굽타. 그들을 시험하기 위해, 그는 그들 각자에게 양모 실로 목에 걸 수 있는 부적을 주었다. 어느 날, 찬드라굽타가 잠든 동안 그는 파바타에게 찬드라굽타를 깨우지 않고 양모 실을 끊지 않고 제거하라고 요청했다. 파바타는 이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얼마 후, 파바타가 잠들었을 때 찬드라굽타는 찬드라굽타에게 같은 임무를 완수하도록 도전했다. 찬드라굽타는 파바타의 머리를 잘라 양모 실을 회수했다. 그 후 7년 동안 찬드라굽타는 찬드라굽타를 훈련시키고 지도했다. 찬드라굽타가 성인이 되자 찬드라굽타는 그의 재산을 사용하여 군대를 소집했다.

군대는 다나 난다의 수도를 침공했지만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해산되었다. 그 후, 찬드라굽타와 찬드라굽타는 새로운 군대를 일으켜 국경 마을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점차적으로 그들은 난다 수도 파탈리푸트라로 진격하여 다나 난다를 죽였다. 찬드라굽타는 어부를 통해 다나 난다의 보물을 찾아 찬드라굽타를 새로운 왕으로 임명했다.

자이나교 전통에는 불교 전설과 유사점이 많은 전설이 있지만 "다나 난다"라는 이름은 언급하지 않는다. 자이나교 경전은 찬야키아의 경쟁자를 단순히 "난다"라고 부른다. 자이나교 전통에 따르면 찬야키아는 왕에게 기부를 요청하기 위해 난다의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방문했지만, 왕의 시종에게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이후 난다 왕조를 전복시키겠다고 맹세했다. 그는 찬드라굽타를 발견하고 가르쳤으며, 처음에는 실패했지만 난다 군대를 물리치는 군대를 양성했다. 그러나 불교 전통과 달리 자이나교 전통에서는 난다 왕이 패배 후 수도를 살아있는 채로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다고 말한다. 왕의 딸은 찬드라굽타와 사랑에 빠져 그와 결혼했다. 이 전설은 이 딸의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나중에 두르다라가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의 어머니라고 밝힌다.

난다의 재상은 사카달라였으며, 그의 아들로 스툴라바드라(기원전 297-198년)와 스리카야가 있었다. 스리카야는 왕의 개인 경호원이 되었다. 스툴라바드라는 왕실 무용가 루파코사를 사랑했고 그녀와 12년 동안 함께 살았다. 사카달라는 그의 정치적 경쟁자 바리치의 음모로 살해되었고, 그 후 그의 아들 스리카야가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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