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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러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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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러동지회는 1903년, 러시아의 만주 주둔에 반발하여 고노에 아쓰마로를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의 단체이다. 고노에가 메이지 정부의 강경책 요구가 거부되자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고, 이후 대외경동지회를 거쳐 대러동지회로 발전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전국 대회 개최, 정부 압박 등이 있었으며, 1904년 고노에의 사망과 러일 전쟁 발발로 해산되었다. 해산 후, 남은 간부들은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하여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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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러동지회

2. 결성 배경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일본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고노에는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하기도 했다.[1]

1903년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일본 내 대외 강경파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고노에와 그를 따르는 국수주의자 및 강경파 인사들은 활동을 재개하여 '対外硬同志会|다이가이코 도지카이일본어'(대외경동지회)를 결성했고, 이후 7박사 건백 사건 등 러시아에 대한 강경론이 확산되는 분위기 속에서 같은 해 8월, 조직을 확대하여 '''対露同志会|다이로 도지카이일본어'''(대러동지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는 러시아의 만주 정책에 대한 반발과 일본 정부의 대러 강경 노선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조직이었다.[1]

2. 1. 의화단 운동과 러시아의 만주 주둔

의화단 운동 이후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일본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고노에는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02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만주 반환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그러나 고노에의 이러한 행동은 국수주의자와 대외 강경파의 주목을 받아, 이들이 고노에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03년에 들어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고노에와 그 주변 인물들 사이에서 다시 활동하려는 움직임이 커져 '''대외경동지회'''(対外硬同志会)를 결성하고, 4월 8일 우에노 공원의 매천루에서 대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사소(猶興會)와 선양회(鮮満問題同志会) 등에서 고노에와 접촉했던 도쿄 제국대학 교수 도미즈 히로토 등이 7박사 건백 사건을 일으키자, 이에 고무된 고노에 등도 활동을 활발히 하여 8월 9일 간다의 킨키칸에서 다시 대회를 열고 '''대로동지회'''(対露同志会)를 출범시켰다.

고노에는 병으로 활동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의 대리 역할을 할 책임자로 전 내각법제국장관인 神鞭知常|간베 도모쓰네일본어를 위원장으로 세웠다. 대로동지회에는 토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히라오카 고타로 등 우익 거물들과, 훗날 러일 전쟁에서 활동하게 되는 하나다 나카노스케와 같은 주전론자 군인들을[1] 회원으로 받아들였고, 토야마 미쓰루 등 7명을 상담역으로 두었다. 10월 5일에는 가부키자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소문을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04년 1월 1일 회장 고노에가 갑자기 사망했고, 같은 해 2월 6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러일 전쟁이 시작되자, 대표자의 부재와 최초의 목적 달성을 이유로 대로동지회는 해산되었다. 위원장이었던 神鞭知常|간베 도모쓰네일본어 역시 전쟁 중인 1905년 6월 2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대로동지회의 남은 간부들은 러일 전쟁을 마무리 짓는 포츠머스 회의가 열리자, 다른 대외 강경파 세력들과 함께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講和問題同志連合会)를 결성하여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

2. 2. 노청 협약과 일본의 반발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고노에는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02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만주 반환에 관한 노청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그러나 고노에의 이러한 행동은 국수주의자와 대외 강경파의 주목을 받아 그 주변으로 세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03년에 들어 러시아가 철병 계획을 중단하자, 고노에와 그 주변 세력들은 활동을 재개할 움직임을 보이며 '''대외경동지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4월 8일 우에노 공원의 매천루에서 대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에 고노에와 접촉했던 도스이 히로토 등이 7박사 건백 사건을 일으키자, 고노에 등도 활동을 더욱 활발히 하여 8월 9일 간다의 킨키칸에서 다시 대회를 열고, 단체 이름을 '''대러동지회'''로 바꾸어 공식 출범시켰다. 하지만 고노에는 병중이었기 때문에, 전 내각법제국장관인 진변 지상이 위원장으로서 대리 역할을 맡았다. 대러동지회에는 토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히라오카 고타로우익 인사들과, 훗날 러일 전쟁에서 활동하게 되는 하나다 나카노스케와 같은 주전론자 군인[1]들이 참여했으며, 토야마 등 7명의 상담역을 두었다. 10월 5일에는 가부키자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주를 결의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04년 1월 1일, 회장인 고노에가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2월 6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대러동지회는 대표 부재와 최초 목적 달성을 이유로 해산되었다. 위원장이었던 진변 지상 역시 전쟁 중인 1905년 6월 2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남은 간부들은 포츠머스 회의 개최를 앞두고 대외 강경파 세력들을 모아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하고,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3. 결성 과정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군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러시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노에는 대러 강경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으나, 1902년 청나라와 러시아 간 만주 반환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 해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내 국수주의자들과 대외 강경파들이 고노에를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03년 러시아가 철병 계획을 중지하자, 고노에와 그 주변 세력들은 활동을 재개하여 '''대외경동지회'''를 결성했다. 이후 도스이 히로토 등이 주도한 7박사 건백 사건으로 대러시아 강경 여론이 더욱 고조되자, 같은 해 8월 대외경동지회는 조직을 확대하여 '''대로동지회'''를 출범시켰다.[1] 이는 러일 전쟁 발발을 앞두고 일본 내 주전론(主戰論)이 강화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 1. 국민동맹회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군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러시아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고노에는 대러 강경 여론을 일으키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02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만주 반환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하지만 고노에의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 내 국수주의자들과 대외 강경파들의 주목을 끌었고, 이들이 고노에 주변으로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3. 2. 대외경동지회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일본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고노에는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02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만주 반환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하지만 고노에의 이러한 행동은 국수주의자들과 대외 강경파들의 주목을 받아 그의 주변으로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1]

1903년 들어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 계획을 중단하자, 고노에와 그를 따르는 세력들 사이에서 활동을 재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들은 '''대외경동지회'''를 결성하고, 같은 해 4월 8일 도쿄 우에노 공원의 매천루에서 대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전에 고노에와 접촉했던 도스이 히로토 등이 7박사 건백 사건을 일으키며 대러시아 강경론을 주장하자, 고노에 등 대외경동지회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결국 8월 9일, 도쿄 간다의 킨키칸에서 다시 대회를 열고 조직을 확대하여 '''대러동지회'''를 출범시켰다.[1] 이로써 대외경동지회는 대러동지회로 발전하며 그 활동을 이어가게 된다.

3. 3. 대로동지회 결성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 군대가 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고노에는 여론을 환기하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02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만주 반환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그러나 고노에의 이러한 행동은 국수주의자와 대외 강경파의 주목을 받아 그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03년에 들어 러시아가 철군 계획을 중단하자, 고노에와 그 주변 인물들은 활동 재개 움직임을 보이며 '''대외경동지회'''를 결성했다. 4월 8일에는 우에노 공원 매천루에서 대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사소와 선양회 등에서 고노에와 접촉했던 도스이 히로토 등이 7박사 건백 사건을 일으키자, 고노에 등도 활동을 활발히 하여 8월 9일 간다 킨키칸에서 다시 대회를 열고, '''대로동지회'''(對露同志會)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고노에는 병중에 있었기에, 그의 대리 역할을 맡을 책임자로서 전 내각법제국장관인 진변 지상(神鞭知常)을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대로동지회에는 토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히라오카 고타로 등 우익 거물과, 후의 러일 전쟁에서 활약하는 하나다 나카노스케 등 주전론자 군인[1]을 안았으며, 토야마 등 7명의 상담역을 두었다. 10월 5일에는 가부키자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대러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주를 하는 결의를 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04년 1월 1일에 회장 고노에가 급사하고, 2월 6일에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함에 따라, 대표 부재와 최초의 목적 달성을 이유로 해산되었다. 게다가 위원장인 진변도 전쟁 중인 1905년 6월 21일에 병사하고 만다. 그러나 남은 간부는 포츠머스 회의 개최에 즈음하여 대외 강경 여러 파를 결집하여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하여,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4. 주요 활동

대러동지회는 1903년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고노에 아츠마로를 중심으로 결성된 대외 강경파 단체이다. 이들은 우에노 공원간다 등지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7박사 건백 사건과 연계하여 메이지 정부에 러시아에 대한 강경 대응과 선전 포고를 강력히 요구하는 활동을 전개했다.[1] 특히 10월 5일 가부키자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는 대러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주를 결의하며 여론을 동원하고 정부를 압박했다.

1904년 초 회장 고노에의 사망과 러일 전쟁 발발로 인해 조직은 해산되었으나, 주요 간부들은 이후 포츠머스 조약 체결 과정에서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4. 1. 전국 대회 개최

1903년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 계획을 중지하자, 고노에 아츠마로와 그 주변 세력은 활동을 재개하여 '대외경동지회'를 결성하고 4월 8일 우에노 공원 매천루에서 대회를 열었다. 이후 도스이 히로토 등이 7박사 건백 사건을 일으키자, 고노에 등도 활동을 강화하여 8월 9일 간다 킨키칸에서 다시 대회를 열고 '''대러동지회'''를 공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고노에는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전 내각법제국장관이었던 진변 지상(神鞭知常|진변 지상일본어)이 위원장으로서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다. 대러동지회에는 토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히라오카 고타로와 같은 우익 거물들과, 훗날 러일 전쟁에서 활동하게 되는 하나다 나카노스케 등 주전론을 주장하는 군인들도 참여했다.[1] 또한, 토야마 등을 포함한 7명의 상담역을 두었다.

대러동지회는 10월 5일 가부키자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주를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는 러시아에 대한 일본 내 강경 여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4. 2. 정부 압박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군이 만주에 주둔하게 되자, 당시 귀족원 의장이었던 고노에 아츠마로는 메이지 정부에 강경한 대응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고노에는 정부를 압박하고 여론을 모으기 위해 국민동맹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1902년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만주 반환에 관한 노청 협약이 체결되면서 일단 해산되었다. 그러나 고노에의 이러한 움직임은 국수주의자와 대외 강경파의 주목을 받았고, 이들이 고노에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03년 러시아가 만주에서의 철병 계획을 중단하자, 고노에와 그를 따르는 세력들은 다시 활동을 재개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대외경동지회를 결성하고 4월 8일 우에노 공원 매천루에서 대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스이 히로토 등이 7박사 건백 사건을 일으키며 정부에 더욱 강경한 대외 정책을 요구하자, 고노에 등도 활동을 본격화했다. 8월 9일에는 간다 킨키칸에서 다시 대회를 열고 조직을 대로동지회로 확대 출범시켰다.

당시 고노에는 병중이었기 때문에, 전 내각법제국장관인 진변 지상(神鞭知常)이 위원장을 맡아 실질적인 운영을 책임졌다. 대로동지회에는 토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히라오카 고타로와 같은 우익 성향의 주요 인물들과, 훗날 러일 전쟁에서 활동하게 되는 하나다 나카노스케 등 전쟁을 주장하는 군인들도 참여했다.[1] 또한 토야마 등을 포함한 7명의 상담역을 두었다. 대로동지회는 10월 5일 가부키자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주를 결의하며 정부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그러나 다음 해인 1904년 1월 1일, 회장인 고노에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2월 6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로동지회는 대표자의 부재와 조직의 초기 목표였던 대러 개전이 달성되었다는 이유로 해산되었다. 위원장이었던 진변 지상 역시 전쟁 중인 1905년 6월 2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대로동지회의 남은 간부들은 포츠머스 회의 개최를 앞두고 다시 모여 대외 강경 노선을 주장하는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했고,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5. 해산과 영향

1904년 1월 1일 회장 고노에 아츠마로가 급사하고, 같은 해 2월 6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로동지회는 대표 부재와 최초의 목적 달성을 이유로 해산되었다.[1] 위원장이었던 진변 지상(神鞭知常) 또한 전쟁 중인 1905년 6월 21일에 병사했다.[1]

그러나 남은 간부들은 러일 전쟁 종결을 위한 포츠머스 회의 개최에 즈음하여 다른 대외 강경파 세력들을 결집하여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하고,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다.[1]

5. 1. 고노에 아쓰마로의 사망과 러일 전쟁 발발

1903년에 들어 러시아만주에서의 철병 계획을 중지하자, 고노에 아츠마로와 그 주변 인물들은 활동 재개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대외경동지회'''를 결성하고, 4월 8일 우에노 공원 매천루에서 대회를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사소와 선양회 등에서 고노에와 접촉했던 도스이 히로토 등이 7박사 건백 사건을 일으키자, 고노에 등도 활동을 활발히 하여 8월 9일 간다 킨키칸에서 다시 대회를 열고 '''대로동지회'''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고노에는 병중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대리 역할을 맡을 책임자로 전 내각법제국장관인 진변 지상(神鞭知常)을 위원장으로 삼았다. 대로동지회에는 토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히라오카 고타로 등 우익 거물과, 훗날 러일 전쟁에서 활약하는 하나다 나카노스케 등 주전론자 군인[1]들이 참여했으며, 토야마 등 7명의 상담역을 두었다. 10월 5일에는 가부키자에서 전국 대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에 대한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주를 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04년 1월 1일, 회장인 고노에 아쓰마로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2월 6일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로동지회는 대표 부재와 최초의 목적 달성을 이유로 해산되었다. 위원장이었던 진변 지상 역시 전쟁 중인 1905년 6월 21일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남은 간부들은 포츠머스 회의 개최를 앞두고 대외 강경파 세력들을 모아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하고,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5. 2.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 결성

대로동지회는 회장 고노에 아츠마로가 1904년 1월 1일 급사하고,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대표 부재와 전쟁 개시라는 목적 달성을 이유로 해산되었다.[1]

그러나 러일 전쟁 종결을 위한 포츠머스 회의가 열리자, 대로동지회의 남은 간부들은 다른 대외 강경파 세력들과 힘을 합쳤다.[1] 이들은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하여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다.[1]

5. 3. 영향

대러동지회는 비록 단명했지만, 7박사 건백 사건 등과 연계하여 활동하며 일본 내 대러 강경 여론을 형성하고 정부의 대러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특히 1903년 10월 5일 가부키자에서 전국 대회를 열어 대러 선전 포고를 요구하는 상주 결의를 이끌어내는 등[1], 러일 전쟁 발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데 일조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과 함께 해산되었으나, 남은 간부들은 포츠머스 회의를 앞두고 다른 대외 강경파들과 연합하여 '''강화 문제 동지 연합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러시아에 대한 양보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며, 이후 일본의 대외 정책 기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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