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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계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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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전 계족산성은 대전광역시 동구에 위치한 산성으로, 백제 시대에 축조되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백제의 웅진을 방어하고 신라의 침입을 막는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성내에서 백제, 신라, 고려, 조선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어 오랜 기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금강 하류의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문의와 청주 방면으로의 감시 기능을 수행했다. 성벽, 문터, 봉수대, 집수지, 곡성, 건물지 등 다양한 유적이 남아 있으며, 인근에 여러 산성이 분포하여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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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계족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계족산성
명칭대전 계족산성 (大田 鷄足山城)
종류사적
지정 번호355
지정일1991년 10월 25일
면적85,501m²
주소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85번지 외
시대삼국시대

2. 역사

계족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에 위치하여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산성이었다.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부흥군이 이곳을 근거지로 신라군에 저항하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토기와 자기 조각이 출토되어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1. 백제 시대

계족산과 식장산에 이르는 산지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으로 백제의 산성이 많이 존재하였다. 백제의 수도 웅진(현 공주시)은 이곳으로부터 38km에 불과하여 이 산성들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계족산성은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으로 추정되며, 백제 토기 조각과 연꽃무늬 수막새기와 등이 출토되어 백제 시대에 축조되었음을 뒷받침한다.[1] 백제 멸망 후에는 백제 부흥군이 계족산성을 거점으로 신라군에 저항하기도 하였다.[1]

2. 2. 신라 시대

신라는 계족산성을 점령한 후, 백제 지역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활용했다. 성내에서 신라 시대 토기 조각 등이 출토되어 신라가 계족산성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1]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은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하기도 하였다.[1]

2. 3. 고려 및 조선 시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계족산성은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다. 성 안에서 고려청자 조각, 조선 시대 토기 및 자기 조각 등이 출토되어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 후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하기도 하였으며,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3. 지리적 중요성

계족산성은 문의와 청주로 가는 길목, 보은, 옥천, 대전, 공주에 이르는 웅진도로를 감시할 수 있었다.[3] 식장산과 계족산 사이의 산지에는 16km 거리에 13개의 산성이 분포하고 있으며, 계족산성과 질현성 사이에는 작은 보 6개소, 삼정동 산성 남쪽에 보 1개소가 축조되어 있어 이 지역의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준다.[3]

4. 유적

대전 계족산성 성내에는 6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남쪽, 서쪽, 동쪽에 문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에는 2곳의 우물터가 발견되었고, 남문터에서 북쪽으로 약 7m 떨어진 봉우리에는 봉수대와 저수지가 있었다.

4. 1. 성벽

현존하는 성벽의 안쪽 높이는 3.4m, 외벽 높이는 7m, 상부 너비는 3.7m이다. 성벽은 붕괴 및 유실된 부분이 있어 현재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1]

4. 2. 문터

성내에는 6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남쪽, 서쪽, 동쪽에 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터는 서쪽 성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있다. 서쪽 성벽은 계족산성에서 가장 높은 산 능선의 바깥 비탈에 있다. 문터 바닥에는 황갈색 모래층 위에 납작한 판석(板石)을 깔았으며, 성 안쪽으로 이어져 있다. 서문 바깥벽은 성벽이 밀리지 않게 2.5m 높이로 쌓은 기단보축(基壇補築) 위에 5m 정도의 성벽을 쌓고 그 위에 문터 바닥면을 설치했다. 서문터 바닥면에서 5개의 대형 주춧돌이 확인되어 이를 복원하면 전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門樓)가 있는 성문이 건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문터 조사 과정에서 백제 양식의 연꽃무늬 수막새기와(와당) 2점과 내면에 통쪽을 가로로 묶은 굵은 선의 흔적과 돗자리 무늬 문양이 새겨진 백제 시대 평기와 조각이 많이 나와 문루가 있었음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고 있다. 또한 이것은 계족산성이 백제 시대에 쌓은 성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근거 자료가 된다.[2]

계족산성 남문


남문은 서쪽의 주 능선에서 동쪽으로 약간 비켜서 있는 어긋문 형태로 설치되었다. 1·2차 문터 바닥은 평편한 돌을 깔아 드나들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아래에는 배수 시설이 있다. 1차 문터에는 남문으로 모여드는 물을 일단 모아서 배출하는 지름 1m 내외, 깊이 60cm 정도 규모의 집수정(集水井)이 있고, 2차 문터에는 덮개돌이 있는 암거형(暗渠形)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1차 문터는 2차 문터보다 50cm 정도 아래에 있고, 문터에서 성 내부 약 2.5m 지점까지 문터와 동일하게 평편한 돌을 깔아 놓았다.

남문터의 너비는 5.2m 정도이며, 양쪽 옆벽의 바닥면은 바위까지 노출시킨 뒤 성벽을 쌓았다. 남문터 동쪽 옆벽 바깥에는 2단, 서쪽 옆벽 바깥벽에는 3단의 석축을 보강하였다. 이와 같은 보강석축은 문터 옆벽을 보강하는 목적뿐만 아니라, 밖으로 현저히 돌출시켜 적의 동정을 살피고 성문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2]

4. 3. 봉수대

봉수란 밤에는 횃불로, 낮에는 연기로 변방의 긴급한 군사 정보를 중앙에 전달하는 군사 통신 제도이다. 우리나라의 봉수제는 삼국시대부터 군사적 목적으로 시행되었으나, 고려 시대에 이르러 확립되었다.[2]

계족산 봉수경상도 방면에서 도착한 긴급한 소식을 청주충주를 거쳐 서울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봉수대는 남문 안쪽 능선 정상부에 있으며, 길이 11m, 최대 너비 22.8m의 방호벽을 쌓고 그 내부를 두 구역으로 나누었다. 동쪽에는 길이 11m, 너비 5.2~7.8m 규모의 평평한 사다리꼴 모양으로 봉수 시설을 설치하였고, 중앙부에는 길이 12m, 너비 9.8m 규모의 내부 석축을 쌓아 연료 창고 및 봉수군들이 묵을 건물을 배치하였다. 내부 석축의 남쪽 중앙부에는 너비 1.3m, 길이 7.8m의 출입 시설이 남아 있었는데, 양쪽 석축 시설의 규모는 너비 1~1.8m, 높이 0.5~1.1m였다.[2]

4. 4. 집수지

집수지는 산성 내 우물에서 넘쳐흐른 물과 빗물을 모아서 병사들이 마실 물과 화재 때 방화수로 사용하고, 홍수 때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의 속도를 줄여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쌓은 것이다.

집수지는 위가 열려 있기 때문에 처음 세울 때부터 사용하던 유물들이 들어가 있어, 산성의 내력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해 준다.

1차 집수지는 성벽과 함께 백제가 쌓은 것으로 규모는 남북 25m, 동서 5.2m이며, 북쪽은 급한 경사면에 접해 있기 때문에 수압 등 압력을 감안하여 반원형으로 쌓았다. 이는 이제까지 국내에서 확인된 집수지 중에서는 최대 규모이다. 2차 집수지는 신라가 쌓은 것으로 규모는 상부 너비가 남북 20m, 동서 8m이다. 바닥에서는 100개 이상의 백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계족산성을 처음 쌓은 시기가 백제 시대라는 것이 명확하게 확인되었다.[2]

4. 5. 곡성

곡성은 성벽 밖으로 돌출된 둥근 모양의 방어 시설이다. 꿩이 자신의 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는 모습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2] 계족산성에는 곡성이 하나 있는데, 동북쪽 능선에 설치되어 적의 접근을 막는 역할을 한다.[2]

4. 6. 건물터

계족산성 내부에는 건물터로 짐작되는 9개의 평탄면이 확인된다. 건물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지어졌는데, 하나는 평탄한 지형 주변을 깎아내어 지었고, 다른 하나는 외벽을 돌로 쌓고 성돌과 산 경사면 사이에 흙을 정교하게 채워 넣어 평탄면을 형성하여 지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북벽 부근의 제2건물터를 조사한 결과, 덮개 흙을 제거하자 건물터 구조가 드러났다. 이곳에서는 담장, 건물 바닥, 문터, 계단 시설, 돌을 갈아 만든 길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확인되었다. 처음 쌓은 후 확장하여 고쳐 쌓은 건물의 규모는 가로 15.8m, 세로 6.8m이며, 정면 2~3칸, 측면 1칸 구조로 온돌 구조가 잘 남아 있다. 이 건물터 내부에서는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의 청자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발견되어 고려 시대 건물터로 파악된다.[2]

5. 인근 산성

계족산과 식장산 사이의 산지에는 16km 거리에 13개 산성이 분포하고 있고, 계족산성과 질현성 사이에는 작은 보 6개소가 있으며, 삼정동 산성 남쪽 50m에 1개의 보가 축조되어 있어 모두 20여 개소의 산성과 보가 분포한다.

계족산성 북북동쪽 6km 지점에는 성치산성이 있고, 북쪽 1.3km 지점에는 이현동 산성이 있다. 동남쪽으로 1.3km에는 견두산성이 있으며, 장동 산디마을 동북쪽, 계족산성과 같은 산 능선에 장동산성(장동 산 75, 장동 산 59-1 일대)이 있다. 동북쪽에는 마산동 산성(녹동산성)이 있으며, 마산동 산성 북북서쪽엔 노고산성이 있다. 백제 우술군의 읍치인 우술성이라고 추정하기도 하는 연축동 산성은 계족산성에서 서쪽으로 3km 떨어져 있다.[3]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명칭 변경 및 지정·해제 고시 문화재청장 2011-07-28
[2]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3] 논문 대전지역의 산성에 관한 역사지리학적 고찰 청주대학교 교육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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