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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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지연은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1894년 진사에 급제하고 황성신문 주필, 사장을 역임하며 독립협회에서 활동했다. 을사늑약 규탄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여 투옥되기도 했으며, 애국 계몽 운동에도 참여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고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후 역사 연구에 종사했다. 그러나 친일 의혹으로 인해 건국훈장 국민장이 취소되었으며, 최근에는 말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지휘했다는 일본 외무성 문서가 발견되어 재평가 논란이 있다. 저서로는 증보대한강역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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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장지연 |
한자 이름 | 張志淵 |
로마자 표기 | Jang Ji-yeon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64년 11월 30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상주 |
사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마산 |
본관 | 인동(仁同) |
아호 | 위암(韋庵) |
학력 | 1894년 식년시 진사 3등급 |
종교 | 유교(성리학) |
정당 | 무소속 |
거주지 | 조선 경상도 상주 대한제국 한성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마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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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
직책 | 대한제국 사례소 예하 내부주사 |
임기 | 1898년 1월 ~ 1898년 2월 |
군주 | 고종 이형 |
주요 경력 | 전직 개화파 간부 출신 언론인 후에 친일로 변절 |
2. 생애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1894년 과거 진사시에 합격했다. 1899년 황성신문 주필이 되었고, 광문사를 설립해 정약용의 『목민심서』 등을 간행했다. 1902년 황성신문 사장에 취임했고, 1905년 11월 20일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하여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 일본 관헌에 의해 투옥되었다. 황성신문은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2] 1906년 대한자강회에 참여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전개했고, 1910년 한일 병합 이후에는 『조선유교연원』(1917년)을 발표하는 등 역사 연구에 힘썼다.[2]
2. 1. 생애 초반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 향시 응제과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다. 이후 3~4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1894년 식년시 진사에 합격했다. 그러나 이 무렵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하자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낙향하여 이후 후학 양성과 계몽 운동을 하였다.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부터 내부주사를 겸직하다가 1898년 10월에 의면했다.
2. 2. 언론, 독립운동
1898년 4월 장지연은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에는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장지연은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으며, 같은 해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으나 수개월 후 그만두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을 간행했다. 1901년 봄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에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경장에 관한 주요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8] 같은 해 11월, 장지연은 "이 날에 소리쳐 크게 통곡하노라"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한일협약의 체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여, 일본 관헌에 의해 투옥되었고, 황성신문은 이듬해 2월까지 정간되었다.[2]
1906년 대한자강회의 설립에 참여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10년의 한일 병합 후에는 『조선유교연원』(1917년)을 발표하는 등 역사 연구에 종사했다.[2]
2. 3. 을사늑약 전후
1905년 4월 장지연은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 윤치호, 이달용 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 해 11월 20일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흘 후 황성신문에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8]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시일야방성대곡〉이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으며, 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재팬크로니클 등의 언론이 이 명문을 인용했다.[8] 장지연이 사장직에 있던 황성신문은 통감부의 압력에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 정간되었다.[8]1906년 1월 장지연은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8] 이후 교육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아갔고,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 등을 조직하여 친일단체 일진회와 정면 대립을 전개하기도 했다.[8] 1904년 11월에는 "이 날에 소리쳐 크게 통곡하노라"라는 사설을 게재하여 한일협약의 체결이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여 일본 관헌에 의해 투옥되었고, 황성신문은 이듬해 2월까지 정간되었다.[11]
2. 4. 생애 후반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며 1년가량 머물렀고, 귀국하여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이 신문은 1910년 경술국치 체결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 복간되는 과정을 거쳤다.[1]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에서 공직 제의가 왔으나 사양하였다.[1]1918년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사설이 실린 것이 마지막 글로, 이후 병으로 요양하던 중 1919년 4월 경남 양산을 유람했다.[1] 1921년 1월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져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며 치료했지만,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1]
3. 사상
장지연은 동이(東夷)족이 다른 민족들과 달리 독자성과 우수성을 지녔다고 강조하며, 유교의 근본이 조선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箕子)가 조선에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래함으로써 유교가 조선에 뿌리내렸다고 보았다.
장지연은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공자가 유교의 도가 행해지지 않는 중국을 떠나 조선에 오고 싶어 했다고 해석했다. 비록 공자의 조선 방문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장지연은 만약 공자가 조선에 왔다면 조선이 유교의 중심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2]
3. 1. 기자(箕子)와 유교 전래
장지연은 사(四夷) 중에서 동이(東夷) 외에는 한자 표기 안에 "충(虫)"이나 "견(犬)"에 해당하는 글자가 들어가지만, 동이(=조선 민족)에는 "충(虫)"이나 "견(犬)" 등의 글자가 들어가 있지 않고 "활의 사람"이며, 중국의 주변 민족과는 달리 그 독자성·우수성을 강조했다.(="그 성품이 어질고 착함")[2][2]장지연은 기자조선을 건국한 중국 은나라의 정치가 기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2][2][2]
기자는 은주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은나라의 왕족이었고, 단군조선 말기에 주나라를 피하여 한반도에 왔다. 그리고 "홍범구주(洪範九疇)"에 의해 조선 민족을 교화했다.[2] 태극기는 《역》의 원리로 그려져 있다. 홍범구주는 《역》의 원리이자 유교의 근본 교의이며, 기자는 그것을 주 무왕에게 전함과 동시에 조선에도 가져와 팔조지교(八條之教)로 조선 민족을 교화했다. 이는 《사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장지연은 "홍범구주(洪範九疇)"로 보고 있다.[2][2]
《역》 명이(明夷)의 해석에 빗대어 조선이 "유교 종조지방(儒教宗祖之邦)"이라고 말해도 좋다고 단언하며,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조선에 가져온 것으로부터, 공자가 태어나기 전에 유교의 근본 교의가 조선에 전해졌다는 결론을 내린다.[2][2]
《논어》에 보이는 중국에서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에 대한 공자의 탄식과, 기자가 조선에서 성공한 것에 기뻐하여 해외로 나가고 싶어하고 구이(九夷)(동이)에라도 있으려고 했다는 해석은 조선에서는 통설이었다. 그러나 공자의 조선 방문은 실현되지 못했고, 이에 대해 장지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2][2]
4. 친일 행적 의혹 및 서훈 논란
장지연은 경술국치 이후 친일 행적 의혹과 국가보훈처 서훈 논란에 휩싸였다.
경술국치 이후 장지연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를 기고하고[4] 논설 주필로서 730여 편의 글을 기고했다고 알려져 있다.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활동하면서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5]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사의 내부분열로 신문사를 퇴사한 이후, 조선총독부 인사인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로 매일신보에서 활동하게 되었으며, 당시 유림,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장지연은 객원으로서 특정 내용에 한정하여 외부에서 원고를 작성하고,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활동을 중단한다는 조건으로 활동했다고 변명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적인 내용이 상당수 존재했다.[6]
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없지만, 친일인명사전에는 부일협력자로서 등재되었다.[7]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으나, 매일신보 주필 활동 의혹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고, 국가보훈처의 이 달의 독립운동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름이 빠졌다.
1910년대 초반에 특별한 동기 없이 일본 천황을 찬양하고 총독을 칭송하는 행적을 보였다는 점, 친일 증거물 중 그가 쓴 것으로 의심받는 《경남일보》의 시나 기사에는 기명 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글쓴이의 이름이 없어 장지연의 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등은 논란의 이유가 되고 있다.[8][9][10][11][12]
최근 1921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지휘했다는 일본 외무성 문서가 발견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1921년 5월 5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김경천의 초대로 온 장지연이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13] 연세대학교 박애경 교수는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았지만, 수원대학교 박환 교수는 다른 자료와 비교 대조하는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친일 논란으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이 취소되었고, 후손의 소송도 1심에서 승소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2015년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다.
4. 1. 친일 행적 의혹
경술국치 이후 장지연은 황현의 절명시 필화 사건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를 기고하고[4] 논설 주필로서 730여 편의 글을 기고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기고 활동은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5]장지연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사의 내부분열로 신문사를 퇴사한 이후, 조선총독부 인사인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보는 그 당시 유림, 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장지연은 이러한 비난에 대해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작성 원고는 일사, 유사, 종교, 풍속 등의 내용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세 가지 조건에 입각해 매일신보에서 활동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그의 논설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적인 내용이 상당수 존재한다.[6]
장지연의 친일 의혹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는 장지연이 포함되지 않았다. 다만,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물과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선정한(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은 동일한지 궁금합니다만약 동일하다면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선정한 친일인물을 기반으로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것인지 궁금합니다
>
> 답변:
>
> 동일하지 않습니다. 위원회는 죄질이 무거운 반민족행위자를 선정대상으로 한 반면 연구소는 반민족행위자는 물론 부일협력자까지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7]
즉, 장지연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부일협력자로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것이다. 따라서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선정에서는 제외되었지만, 친일인명사전에는 포함되었다.
4. 2. 서훈 취소와 논란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1914년~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사 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하여 700여 편의 친일한시 및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또한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름이 빠졌다.[8][9][10][11][12]경술국치 이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대 초반에 특별한 동기 없이 일본 천황을 찬양하고 총독을 칭송하는 행적을 보였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 또한, 친일 증거물 중 그가 쓴 것으로 의심받는 《경남일보》의 시나 기사에는 기명 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글쓴이의 이름이 없어 장지연의 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도 논란의 이유 중 하나이다.
최근에는 장지연이 말년에 '1921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지휘했다.'고 기록한 일본 외무성 문서가 발견되었다. 1921년 5월 5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러시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이끈 김경천의 초대로 온 장지연이 주우찌하(블라디보스토크 인근으로 추정)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13]
이 자료를 발굴한 연세대학교 국문과 박애경 교수는 "매일신보 기고자였던 장지연을 매일신보 기자라고 오기한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원대학교 박환 교수는 "불령단관계잡건이 신빙성 있는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령의 장지연이 의병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려면 일본 병무청 문서 등 다른 신빙성 있는 자료와 비교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친일 논란으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이 취소되었다. 후손의 소송도 1심에서 승소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결국 2015년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다.
4. 3. 반론과 재평가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1914년~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사 매일신보 주필로 활동하며 700여 편의 친일 한시 및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으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국가보훈처에서 운영하는 이 달의 독립운동가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름이 빠졌다.[8][9][10][11][12]이러한 선정은 여러 논란을 야기했다. 경술국치 이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한 점, 지방에서 기고 위주로 활동하여 말년 행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점, 일반적인 전향 친일 인사들과 달리 1910년대 초반에 이미 일본 천황을 찬양하고 총독을 칭송하는 행적을 보인 점, 친일 증거물 중 《경남일보》의 시나 기사에 글쓴이 이름이 기재되지 않아 장지연의 글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의 주된 이유였다.
최근에는 장지연이 1921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지휘했다는 일본 외무성 문서가 발견되었다. 1921년 5월 5일 작성된 이 문서에는 김경천의 초대로 온 장지연이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이 문서를 발굴한 연세대학교 박애경 교수는 매일신보 기고자였던 장지연을 매일신보 기자로 오기한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원대학교 박환 교수는 이 자료만으로는 장지연의 의병 활동을 명확히 입증하기 어렵다며, 다른 신빙성 있는 자료와 비교 대조하는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13]
친일 논란으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서훈이 취소되었다. 후손의 소송도 1심에서 승소하였으나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되어 결국 2015년 서훈 취소가 확정되었다.
5. 저술
6. 묘소
장지연의 묘소는 경상남도 창원시 현동에 위치하고 있다.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4호로 지정되었으나, 장지연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1년 7월 28일을 기해 지정 해제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장지연(張志淵)
http://encykorea.aks[...]
2022-07-18
[2]
뉴스
조선유교사상으로 본 한국의 대일관 ―일한 상호불이해의 연원을 찾다―
https://ippjapan.org[...]
평화정책연구소
2019-09-18
[3]
웹사이트
장지연 - 네이버
http://100.naver.com[...]
[4]
뉴스인용
위암 장지연 친일시 공개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5-14
[5]
뉴스인용
친일인사 ‘장지연의 비극’ 거듭되는가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7-01
[6]
서적
한국사 시민강좌
일조각
2010
[7]
웹인용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인물에 대해서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https://www.minjok.o[...]
2020-11-24
[8]
뉴스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장지연, 마지막까지 '고심' -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 재평가 논란 일 듯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5-08-29
[9]
뉴스
장지연 후손 `친일행적 의혹' 제기자 고소
연합뉴스
2005-05-29
[10]
뉴스
다시 친일 논란에 휩싸인 장지연
연합뉴스
2005-08-29
[11]
뉴스
성급한 친일판정 언론사 왜곡우려
http://www.gnnews.co[...]
경남일보
2005-09-05
[12]
뉴스
정대수씨 "장지연 친일 인정 어려워" - 언론학회 학술대회서 진상규명 제안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05-10-08
[13]
뉴스
친일 논란 위암 장지연 말년에 의병 지휘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9-04-16
[14]
논문
문헌해제 1. 張志淵, 『萬國事物紀元歷史』
http://has.hallym.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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