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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정척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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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정척사파는 '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천주교와 서양 세력의 침략에 반대하며 쇄국 정책을 주장한 유학자들을 지칭한다. 성리학적 화이론에 입각하여 서양을 오랑캐로, 조선을 소중화로 인식하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배척했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천주교 탄압과 쇄국 정책을 주도했으며, 개항 이후에는 개화파와 대립하며 항일 의병 운동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화서학파, 노사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 등 여러 학파들이 위정척사 사상을 공유하며 활동했다.

2. 명칭

'위정척사'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 정조 시기에 처음 등장한다. 천주교를 도입한 이승훈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에 대한 정조의 비답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3]

:"조정에서 물리치고 배척하고 금지하고 죄주는 것을 어찌 너희들의 말을 기다려서야 하겠으며, 또 혹시라도 어찌 너희들보다 소홀하게야 하겠는가. …… 요청한 대로 조사 결과가 나오면 마땅히 수종(首從)을 가려 밝게 처분을 내리겠으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아 더욱 열심히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방책에 힘쓰도록 하라." (〈정조실록〉, 33권, 정조 15년 11월 6일 정축)

그러나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묶인 학맥에 따라 서로를 학파로서 구분하였을 뿐, 이들을 통틀어 하나의 집단으로 부르는 명칭은 없었다. 해방 이후 화서학파, 노사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 등이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걸어 갑오의병과 을미의병을 일으킨 점을 들어[11] 이들을 위정척사파로 분류하게 되었다.

최초로 위정척사파를 정의하고 분류한 논문은 1949년에 발표되었고, 이후 이이화 등이 척사위정파라는 명칭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위정척사파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12]

3. 배경

위정척사(衛正斥邪)는 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로, 그 사상적 근간은 성리학의 화이론(華夷論)이다.[2] 조선은 스스로를 소중화로 인식하였으며, 새롭게 위협으로 등장한 서양 세력이나 일본을 오랑캐로 여겼다.[13]

17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제국주의 세력의 식민주의 정책에 따른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으나, 조선이 이들과 직접 맞닥뜨리게 된 것은 18세기 말 이후의 일이다.[14] 서양 열강의 포함외교를 앞세운 통상 요구에 쇄국으로 대응한 조선은 위정척사를 국론으로 삼게 된다.

3. 1. 사상적 배경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송나라금나라에 밀려 남송으로 위축되던 시기에 살았다. 주희는 금나라와 화친을 맺는 것은 송나라가 약화되는 길일 뿐이라는 주전파였으며, 황제에게 올린 〈임오응조봉사〉에서 금나라와 화친을 맺은 것은 "싸우기도 전에 지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5] 주희는 송나라는 중화이며 금나라는 오랑캐이니 서로 어울려 살 수 없다는 화이론을 주장하였다.[16]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시기 고려에 성리학이 성행하였다. 고려의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불교를 그릇된 것으로 배척하고 유교를 나라의 근간으로 삼고자 하였다.[17] 새로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을 국교로 삼았고 사대교린을 기본적인 외교 정책으로 삼았다.[18]

1636년 병자호란과 오랫동안 계속되던 명청전쟁 와중에 명나라가 이자성의 난으로 무너지고 1644년 청나라가 베이징을 점령한 일은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동안 오랑캐로 여기던 여진후금을 이은 청나라를 이전의 명나라와 같은 중화로 인정할 수 없었다.[19]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은 명나라가 멸망하였어도 조선이 중화를 계승하였다는 소중화 사상을 펼쳤다. 송시열의 소중화 사상은 이후 화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의 기반이 되었다.[20]

18세기에 들어 붕당 정치가 서인남인의 구도가 되자 서인들은 주요 남인들이 연루되어 있던 천주교를 비롯한 서학을 그릇된 학문으로 규정하고 위정척사를 내세워 배격하였다. 위정척사의 논리로 서학을 배격한 대표적 인물은 노론 산림의 오희상과 홍직필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윤종의 등과[44] 화서학파의 이항로 등이 있으며,[21] 병인양요 이후 이항로가 척화를 주장하면서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다.[22]

3. 2. 시대적 배경

서학으로 불리던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의 여러 문물은 이미 조선 중기에 알려져 있었다. 실학자 이익은 《성호전집》에서 마테오 리치가 지은 《천주실의》를 소개하기도 하였다.[23] 남인의 주요 인사들이 서학을 연구하고 일부는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자 서인 노론은 이를 남인을 공격하기 위한 빌미로 삼았다. 1791년 정조 시기 일어난 신해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첫 대규모 박해였으나, 정조는 탕평책의 안정을 위해 천주교 탄압을 확대하지 않았다. 다만 정조는 성리학이 올바른 도학(道學)이고 천주교를 비롯한 서학은 그릇된 사학(邪學)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순조 시기가 되자 위정척사를 내건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이 일어났다. 1801년 일어난 신유박해로 천주교인 3천여 명이 처형되었다.[24] 이 시기 위정척사란 성리학을 지키고 천주교를 배척하는 것이었다. 신유박해로 큰 타격을 입은 천주교인 가운데는 프랑스를 끌어들여 종교의 자유를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프랑스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황사영 백서는 사전에 발각되었고, 이로써 천주교인은 역모를 꾸민 무리라는 낙인을 받게 되었다.[25]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에서는 외세에 대한 경각심이 커졌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도 조선의 집권층은 새롭게 등장한 서양 세력을 무조건 배척하려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러시아의 동진에 압박감을 느낀 흥선대원군은 이전의 천주교 박해 사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연대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며,[26]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당사자인 박규수는 개화론의 시조로 평가될 만큼 외부와의 교류를 중요하게 여겼다.[27]

병인양요 이후 위정척사가 국론으로 부상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우고 이전의 서양에 대한 유화적 입장을 버리고 강경한 쇄국론을 펼치게 된다. 이후 신미양요가 일어나자 척화비 건립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위정척사를 국론으로 삼았다.

4. 전개

조선 후기 위정척사 운동은 초기에는 천주교 배척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서양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반외세 운동으로 성격이 변화하였다. 사료에 위정척사라는 용어가 직접 기록된 것은 정조 시기 천주교를 도입한 이승훈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에 대한 정조의 비답에서였다.[3] 정조는 학업을 닦아 더욱 열심히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방책에 힘쓰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유학자들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묶인 학맥에 따라 서로를 학파로서 구분하였을 뿐, 이들을 통틀어 하나의 집단으로 부르는 명칭은 없었다. 해방 이후 화서학파, 노사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 등이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걸어 갑오의병과 을미의병을 일으킨 점을 들어[11] 이들을 위정척사파로 분류하게 되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조선 후기 사회에서 위정척사란 서학, 특히 천주교에 대한 배척 운동이었다. 이들은 올바른 학문인 성리학을 지키고 그릇된 학문인 서학을 배격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차례 천주교 박해 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서학 배격의 바탕에는 서인남인의 붕당 정치 갈등이 있었다.[28]

신미양요가 일어날 무렵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로 전국의 유학자와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건립하고 위정척사를 표방하자 유학자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강화도 조약으로 쇄국을 포기한 조선은 고종이 친정에 나서며 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파가 득세하였다. 이후 위정척사와 개화의 대립 구도가 형성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잠시 복귀하면서 위정척사파 역시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았으나, 곧이어 청나라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은 더 이상 조선의 정치에 개입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조선의 조정에서 개화파의 영향력이 커졌으나 갑신정변으로 오히려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일본의 영향력이 날로 커지는 가운데 위정척사파는 더 이상 정치의 중심에 설 수 없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일어난 을미의병은 위정척사를 내건 유학자들이 지도자가 되고 평민들이 의병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침탈되자 위정척사파는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서울 근처까지 진군하였으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이탈하자 허무하게 와해되었다.

4. 1. 천주교 박해

조선 후기 위정척사 운동은 천주교에 대한 배척으로 시작되었다. 순조 1년인 1801년 일어난 신유박해는 천주교도 3천여 명이 처형되는 대규모 박해였다.[24] 이로써 군자당과 소인당으로 서로를 나누던 붕당 정치의 프레임[29] 정파와 사파의 구분으로 이전되었다. 천주교와 연루된 남인은 이른바 사문난적으로 몰리면서 몰락하게 되었고, 조선 지배층의 사고는 유교에 대한 단 하나의 해석만을 인정하면서 경직되었다.[30]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이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에게 서신을 몰래 보내려다 발각되는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났다. 황사영은 비밀 편지에서 조선 천주교 신자들의 상황을 알리고 종교의 자유를 위해 프랑스에서 군대를 파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외국에 군대를 요청하는 일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역모로 취급되었고, 이후 천주교는 완전히 금지되었다.[31] 천주교 신자들은 경기도와 강원도의 산골로 피난하여 마을을 이루고 몰래 신앙생활을 계속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0년 경신박해, 1866년 병인박해로 끊임없이 천주교를 탄압하였다.[32]

조선 최초의 신부였던 김대건은 1846년 병오박해 당시 순교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붕당 정치의 종말을 가져와 조정은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강화되었다. 순조 이후 헌종으로 이어진 19세기 조선의 정치계는 벽파마저 몰락한 가운데 인맥에 의한 세도정치가 맹위를 떨쳤다. 호락논쟁의 한 축이었던 한원진의 호론은 세도정치 시기 몰락하였으나, 이후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한다.[33]

4. 2. 양이(洋夷) 배척 운동

17세기 무렵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은 저마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인도동남아시아에서 제국주의에 기반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34] 아편 전쟁 이후 러시아베이징 조약에 개입하여 연해주를 점령하였고,[45] 이후 러시아는 두만강을 통해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해 와 조선은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였다.[50]

남연군의 묘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전후로 조선에서는 서양 세력을 "양이"(洋夷, 서양 오랑캐)로 부르며 경계하게 되었다.[52] 1868년에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남연군 분묘 도굴 사건을 벌였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자 고종의 할아버지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서양 오랑캐가 국체를 뒤흔든 사건으로 인식되었다.[56]

미군에 노획된 어재연의 장군기


1866년 병인박해 과정에서 일어난 프랑스 선교사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명분으로 프랑스 극동 함대가 침공한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하고 방화와 약탈을 일삼았다.[58] 1871년에는 미국이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진상 조사를 구실로 조선을 침공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다.[59]

병인양요 후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쇄국과 위정척사를 국론으로 삼고, 신미양요가 끝나자 척화비를 전국에 건립하였다.[58][59]

4. 3. 정치 세력화

두 차례의 양요 이후 위정척사의 개념은 쇄국과 반외세로 변화되었다.[61]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였는데,[62] 이 상소는 조선의 정치를 뒤흔들어 결국 흥선대원군의 실각을 불러왔다. 이로써 위정척사파는 흥선대원군과는 다른 독자적인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63]

흥선대원군 하야 당시 고종은 만 20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 고종을 지지할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고종은 외척인 민씨 일가와 위정척사파, 개화파 등을 흥선대원군 하야를 위한 동맹 세력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고종의 친정 이후 정국은 외척인 민씨 세력의 부상과 위정척사파와 개화파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개항을 맞이하게 된다.[64]

화서학파를 비롯한 위정척사파의 세계 인식은 정통 도학인 성리학의 세계가 서양 오랑캐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서양이 요구하는 통상 교섭에 응하게 되면 결국 천주교와 같은 그릇된 사학이 넘쳐나 조선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화서학파의 입장에서 보면 왕조의 강화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리학적 세계관의 고수였다.[61] 한편 개화파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주장하여 위정척사파의 화이론을 비판하였다. 조선의 사상은 지키되 서양의 발달된 문물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었다.[65]

고종의 친정 이후 외척인 민씨 세력과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파가 적극적으로 정권에 참여한 것과 달리, 위정척사파는 과거 유학자들의 관습에 따라 여전히 산림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 내에서 위정척사를 대표하는 관료는 드물었다. 위정척사파는 재야(在野)로 불리며 외곽 정치 세력으로 활동하다가 훗날 항일 의병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61]

4. 4. 개항 이후

강화도 조약으로 쇄국을 포기한 조선은 고종이 친정에 나서며 흥선대원군이 실각하고 개화파가 득세하였다. 이후 위정척사와 개화의 대립 구도가 형성된다.[28]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개항한 이후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개화파가 약진하고 위정척사파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외부적으로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비롯하여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등의 열강과 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다. 위정척사파는 통상조약과 정부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를 망국의 징조로 파악하였다.

강화도 조약에 앞서 최익현은 일본과 서양이 한 통속이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조약을 반대하였으나 거부되었다.[73] 최익현은 도끼를 앞에 두고 상소를 올려 죽음을 각오하였다는 뜻을 보임으로써 이후 위정척사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고, 이로서 위정척사 운동은 일본과의 대립을 공식화하였다.[74]

1881년의 영남만인소는 《조선책략》을 가져온 김홍집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이었다.[77] 고종은 《조선책략》을 간행하여 전국에 유포하게 하였는데, 이를 본 위정척사파는 성리학적 질서의 붕괴라는 이유로 극렬히 저항하였다. 특히 이만손을 대표로 하는 영남의 정재학파는 만인소를 주도하며 개화 정책을 반대하였다.[78]

갑신정변은 위정척사파 입장에서 개화파의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고, 이후 이어진 갑오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은 망국의 징조였지만, 혼란한 정국의 변화 속에서 위정척사파는 결집하지 못하였다.

5. 항일 의병 운동

을미사변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파는 다시 결집하였다. 을미의병의 지휘부는 주로 위정척사파에 속하는 양반이었고, 병사로는 하층민을 포함한 여러 계층이 참여하였다. 을미의병은 존화양이론에 입각하여 일본을 오랑캐로 보았고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걸었다. 이들은 갑오개혁 이후 개화파의 정책을 왜화(倭化)로 규정하였다.[90] 을미의병은 단발령을 조선의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왕후 시해를 주권 침탈로 여겼으나, 여전히 성리학적 질서를 중시하였다. 충주 전투에서 맹활약한 평민 김백선이 양반을 범했다며 처단된 사례에서 보이듯 의병 내에서도 양반과 상민에 대한 차별에 따른 갈등이 벌어졌다.[91]

1905년 을사늑약이 채결되어 주권이 침탈당하자 을사의병이 일어났고,[92] 군대가 해산된 1907년에는 정미의병이 일어났다.[93]

정미의병에 참여한 의병들
정미의병은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한양 진격을 시도하였으나,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핑계로 이탈하여 와해되었다.[94] 이후 일본은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 의병 활동을 탄압하였고, 이로서 더 이상 국내의 무장항일투쟁은 어렵게 되었다.[95]

대한제국 말 항일의병운동의 구심점은 위정척사파였다. 이들은 세계의 변화에 어둡고 전근대적 기득권을 옹호하였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스스로의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행동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96]

6. 학파

위정척사파는 스승과 제자의 인연으로 형성된 여러 학파들이 그 근간을 이루었다. 이들은 서원 등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대표적인 학파로는 화서학파, 노사학파, 정재학파, 남당학파 등이 있었다.

6. 1. 화서학파

화서(華西)는 이항로(1792년~1868년)의 호이다.[97] 김평묵, 최익현, 박문일, 유중교, 유인석, 홍재구, 홍재학 등이 이항로를 스승으로 하여 화서학파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풍양 조씨의 지원과 재력가 유명오의 후원 아래 안동 김씨에 대항하는 논객으로 성장하였고, 송시열의 학맥을 이었다고 자부하였다.[98] 화서학파는 전통적인 화이론과 척사 사상을 바탕으로 대표적인 위정척사파로서 활동하였다.

화서학파는 중요 시기마다 상소를 올려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였고, 이들의 상소는 큰 영향을 미쳤다. 이항로는 병인양요가 있던 1866년 상소를 통해 쇄국과 위정척사를 주장하였고[60], 최익현은 1873년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으며[62], 홍재학은 1881년 《조선책략》 논란이 한창일 때 개화파가 들여온 《중서문견(中西聞見)》, 《태서문견(泰西聞見)》, 《만국공법(萬國公法)》 등을 금하고, 제도 개혁을 통해 설치된 기무아문(機務衙門)을 철폐하고 옛 오위(五衛) 제도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99]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화서학파의 최익현은 의병을 일으켜 거병하였다.[100]

6. 2. 노사학파

노사(蘆沙) 기정진 (1798년~1879년)을 기원으로 하는 노사학파는 기호학파의 한 갈래이다. 기정진은 호남에서 566명의 문인을 제자로 길러 호남 유학의 태두가 되었다. 조선 유학의 최대 논쟁이었던 이기론호락논쟁사칠논쟁 논쟁에 대해 율곡 이이의 학풍을 계승하면서도 이(理)만을 본성으로 인정하는 화서학파와 달리 이와 기(氣)를 서로 나눌 수 없는 연결체로 파악하는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은 말년에 이이의 학설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잘못된 것이라 주장하여 유학계에 파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101]

1866년 병인양요 시기 기정진 역시 상소를 올려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였다. 기정진은 서양 오랑캐가 통상을 주장하는 진짜 목적은 제2차 아편 전쟁에서 보인 베이징의 유린과 같이 조선을 속국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군사를 기르고 내정을 단속하여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2] 기정진은 호남 지역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사후에 최익현이 묘소 옆에 척사위정비를 세웠다.[103]

6. 3. 정재학파

정재(定齋) 류치명 (1777년~1861년)은 이황의 학문인 퇴계학의 맥을 이은 안동의 유학자이다. 명단에 올린 제자만 6백여 명에 달하는 영남 유학계의 거두였다.[104] 사단칠정 논쟁에서 류치명은 이이의 주리론을 비판하면서 이를 활물(活物,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규정하고, 이 자생적인 움직임이 우주 만물의 실제라고 주장하였다.[105]

정재 류치명을 스승으로 하는 정재학파는 19세기 무렵 "영남 남인"의 상징이 되었다. 이들은 영남 만인소의 주축으로 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단행하자 크게 반발하였다. 정재학파의 김도화, 권세연의병장이 되어 활동하였고, 류필영은 파리장서 사건에 개입하였다. 이들의 다음 세대인 이상룡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역임하였다.[106]

6. 4. 남당학파

남당학파는 한원진(1682년 ~ 1751년)을 스승으로 하는 학파로, 율곡 이이의 적통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하였다. 한원진은 춘추대의에 따른 엄격한 화이론을 주장하여 청나라를 오랑캐로, 조선명나라의 문화적 명맥을 이은 중화로 파악하는 준별론을 펼쳤다.[107] 그는 호락논쟁에서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사람과 그 외의 자연은 본성이 다르다는 주장)을 주장한 대표적인 호론 주장자로 노론에 속하였다.[108]

남당학파의 인물성이론은 중화를 계승한 곳만이 사람이고 오랑캐는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어 대표적인 척화주전론자가 되었다. 이들의 화이론은 매우 극단적이어서, 위정척사를 공유하는 기정진 마저 사문난적으로 단정할 정도였다. 을사의병 때 여주에서 거병한 민종식은 호락논쟁 이후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던 기호 노론계 유학자들을 결속하여 존왕양이라는 대의로 함께 의병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였다.[109]

7. 연표

연도사건
1801년신유박해
1840년제1차 아편 전쟁
1855년제2차 아편 전쟁
1860년베이징 조약
1866년제너럴셔먼호 사건 / 병인박해 / 병인양요
1868년조일 서계 분란
1871년신미양요
1873년흥선대원군 하야
1875년운요호 사건
1876년강화도 조약
1880년조선책략》 논란
1881년영남 만인소
1882년임오군란 / 제물포 조약
1884년갑신정변
1894년갑오농민전쟁 / 갑오경장 / 청일전쟁
1895년을미사변 / 을미의병
1897년대한제국 수립
1904년러일전쟁
1905년을사늑약 / 을사의병 / 13도 창의군
1907년정미의병
1909년13도 의군
1910년경술국치
1912년대한독립의군부


참조

[1] 백과사전 위정척사 사상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간행물 위정척사 사상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3] 사료 관학 유생 송도정 등이 이승훈 등 사학을 믿는 자들의 처벌을 청하다 http://sillok.histor[...] 조선왕조실록 1791-11-06
[4] 뉴스 대원군①…위정척사파와 손잡고 洋夷와 전쟁 http://www.atlasnews[...] 아틀라스뉴스 2020-02-10
[5] 간행물 대일 강경책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6] 백과사전 개화정책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간행물 갑오·을미의병의 사회적 기반과 성격 http://contents.hist[...] 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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