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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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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화파는 조선 후기,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추구한 세력이다. '개화'는 '문명개화'의 줄임말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박규수와 오경석을 중심으로 한 실학 계승, 또는 역관 오경석의 새로운 사상 수입 등 기원에 대한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1870년대 김옥균을 중심으로 세력화되었으며, 고종의 친정 이후 강화도 조약, 수신사 파견 등을 통해 성장했다. 임오군란 이후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위기를 맞았다. 갑오개혁과 청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였으며,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을 겪으며 세력이 분산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수립 후, 개화파는 친일파, 독립운동가 등으로 나뉘어 활동했으며, 3·1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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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
명칭
한글개화파, 개화당, 독립당
한자開化派, 開化黨, 獨立黨
로마자 표기Gaehwapa, Gaehwadang, Dokripdang
일본어かいかは, かいかとう, どくりつとう
기본 정보
활동 시기19세기 후반
주요 인물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유길준
관련 사건갑신정변
사상적 기반
정치입헌군주제
의회민주주의
근대적 법치주의
경제상공업 진흥
자본주의 경제 체제
사회신분제 폐지
근대 교육 도입
문벌 타파
평등 사회 추구
외교쇄국정책 반대
개방 정책 주장
서양 문물 수용
군사근대식 군사 제도 도입
국방력 강화
역사적 배경
시대적 상황조선 말기 사회 변혁 요구 증대
서구 열강의 침략적 접근
주요 원인부패한 정치
봉건적인 사회 제도
열악한 경제 상황
민중 봉기 증가
특징
성격급진적 개혁 추구
친일적 성향
일본의 지원을 받음
한계미완의 개혁
외세 의존적 성격
평가
긍정적 평가근대화의 필요성을 인식
개혁 의지를 보여줌
부정적 평가미숙한 개혁 추진
국론 분열 야기
외세 의존 심화

2. 명칭

조선에서 개화(開化)라는 말은 "개물성무 화민성속"(開物成務 化民成俗)을 줄여 만들어진 말이다.[31] "개물성무"는 만물의 뜻을 통하여 천하의 일을 완수한다는 의미로 《역경》 〈계사상전〉 제11장[32]이 출전이며, 조선에서는 왕의 경연에서 종종 다루어졌다.[33] "화민성속"은 군왕이 모범을 보여 백성들의 풍속을 가꾼다는 의미로 《예기》의 〈학기〉가 출전이다.[34]

그러나 개항 시기 조선에서는 당시 일본에서 문명화의 의미로 사용되던 문명개화(文明開化)의 줄임말인 개화의 의미로 도입되어 사용되었다.[36] 후쿠자와 유키치가 영어 Civilization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문명개화를 채택하였고, 당시 청나라에서 사용되던 용례에 따라 서양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37][38]

후쿠자와의 문명개화는 1870년대 일본의 지식층 사이에서 널리 퍼져나갔으며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을 방문한 박정양 등이 이를 받아들여 조선에 전하였다.[36] 유교 경전을 출전으로 하는 문화, 문명 등의 개념은 조선의 지식인에게도 낯설지 않은 용례였기 때문에[38] 어윤중 등이 보다 변화의 의미를 강조하여 사용한 일변(一變) 양제(洋制) 등을 제치고 개화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36]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문명화를 뜻하는 개화는 개화 사상을 지지하는 세력뿐만 아니라 반대하는 세력에서도 일반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39]

3. 개화파의 기원

김옥균은 개화파 초기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개화파는 1870년대 조선에서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정치, 사회적 변혁을 추구했던 세력이다. 개화파의 기원에 대해서는 북학파 실학자인 박지원의 후손 박규수를 중심으로 보는 입장과, 역관 오경석이 중국을 왕래하며 새로운 사상을 수입한 것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40][41]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화파가 누구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박규수, 오경석, 김옥균 등이 1870년대에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개화당을 형성했다는 점은 일치한다.[42]

정확한 시작 연도는 알 수 없으나, 1870년대 초반 이후 초기 개화파들의 회합이 시작되었다.[5]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이 청나라에 대해 굴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반대하고, 명성황후와 청을 지지하는 사대당에 대항하였다. 개화파는 일본 제국메이지 유신에서 영감을 얻어 국내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3. 1. 실학 사상의 영향

개화파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북학파였던 박지원의 후손인 박규수의 역할을 중심으로 한 실학의 계승을 강조하는 주장이고[40], 다른 하나는 역관이었던 오경석이 중국 등을 왕래하며 알게 된 새로운 사상의 수입을 강조하는 주장이다.[41] 두 주장이 대치하는 지점은 김옥균 등의 급진개화파가 누구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는지에 대한 것이나, 박규수, 오경석, 김옥균 등이 1870년대에 들어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개화당을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은 일치한다.[42]

서울대학교의 김명호는 박규수의 역할을 보다 중요하게 평가하면서 실학과 연계한 자발적 근대화에 초점을 맞추고[43], 서울대학교의 김종학은 오경석 등 중인 출신 인물들의 보다 급진적인 개혁 욕구에 초점을 맞춘다.[41] 박규수와 오경석은 비록 오랜 친분이 있었고 둘 사이에 개혁에 대한 공감대 역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였을 것이나[7], 스스로를 개화당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김옥균으로 박규수와 별도로 오경석 등과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1]

3. 2. 중인 출신 지식인의 역할

1870년대 초반 이후 초기 개화파들의 회합이 시작되었다.[5] 김옥균중인 출신 개화 인사들인 이동인, 오경석, 유홍기 등과 두루 소통하였다.[44][45] 서울대학교의 김종학은 오경석 등 중인 출신 인물들의 보다 급진적인 개혁 욕구에 초점을 맞춘다.[41]

3. 3. 김옥균의 역할

김옥균은 개화파 초기의 중심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44][45] 1872년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874년 홍문관 교리로 발탁되었다. 김홍집,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과 같은 양반 출신 개화 인사들뿐만 아니라 이동인, 오경석, 유홍기 등의 중인 출신 개화 인사들과도 두루 소통하였다.[44][45]

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조선이 청나라에 굴종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명성황후와 청을 지지했던 사대당에 맞섰다. 이들은 일본 제국메이지 유신을 본받아 국내 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김옥균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후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44][45]

4. 개화파의 성장과 분화

고종은 청나라 이홍장 등이 추진하던 변법자강을 참조하여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시도하였다.

1882년 별기군에 비해 차별 대우를 받던 오군영 군사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개화 정책의 추진 책임이 여흥 민씨 세력에게 있다고 보고 명성왕후 민씨를 살해하고자 하였다. 명성왕후가 피신한 사이 흥선대원군이 다시 복권되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은 납치되고 임오군란은 막을 내린다.

임오군란 이후 개화파는 온건개화파급진개화파로 분화되었다. 김홍집을 대표로 하는 온건개화파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하여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였고, 김옥균을 대표로 하는 급진개화파는 변법자강론에 따라 급진적 개혁을 주장하며 충의계를 조직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개화당원들은 조선의 청나라에 대한 굴종적인 관계를 바꾸고자 했으며, 명성황후와 청나라를 지지했던 사대당(事大黨)에 반대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에서 영감을 얻어 국내 개혁을 추진했다. 개화당은 청불전쟁 이후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의 지원을 약속받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황문웅은 “조선이 청국의 속국이었던 것은 『만국공법』(국제법)과 당시 청과 조선의 정치·군사·외교 관계의 현실에 비추어 보면 명백한 국제 상식이었다”라며, “조선 말기에 등장한 개화파는 청에 대한 사대를 그만두고 독립을 획득하려 했기 때문에 사대파(속국파)에 대항하는 ‘독립파’라고 불렸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평하고 있다.[3]

4. 1. 흥선대원군의 하야와 고종의 친정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가장 큰 이유는 서원 철폐 정책으로 위정척사파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1873년 최익현은 상소를 올려 흥선대원군이 국왕의 권위를 침범한다는 이유로 탄핵하였다.[46] 고종이 이 상소를 받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은 하야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20세였던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섭정에서 벗어나 친정을 단행하고자 하였고 마침 위정척사파의 상소가 올라오자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고종은 자신의 친정을 도울 조력자로 위정척사파가 아니라 척족인 여흥 민씨와 개화파를 선택하였다.[47] 고종의 개화파 기용은 스스로 성군이 되려거나 개혁의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버지를 끌어내렸다는 비난에 대한 의식과 고종 자신의 친정에 대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흥선대원군의 시대 인식과 외세에 대한 대응은 위정척사파와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실제 목표는 개화가 아니라 왕권의 강화였기 때문에 이후 개화파 일부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을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48]

흥선대원군 하야 당시 김옥균 등은 아직 나이가 어린 실무 담당자였고 실제 국가적 정책의 수립은 민영익 등의 척족 출신의 몫이었다.[49]

4. 2. 강화도 조약과 수신사 파견

고종의 친정 이후 운요호 사건과 이에 따른 1875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 정국으로 접어들었다.

강화도 조약


메이지 유신 이후 수립된 메이지 정부는 1868년 조선에 서계를 보내 근대적 동등한 수교를 요구하였으나, 조선은 일본의 서계가 기존의 격식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접수를 거부하였다. 조선의 일본 국서 거부는 일본의 서계가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고 서계를 황제가 발행하는 칙서로 표현하는 등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과 성리학의 화이론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문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50]

조선이 서계를 거부하자 일본은 자신들이 미국으로부터 겪었던 포함외교를 조선에 사용하였다. 1875년 9월(음력 8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이를 빌미로 배상과 조약을 요구하였고 신헌이 교섭 대표로 나서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근대 국제법을 기반으로 한 최초의 외교 조약이었으나 포함외교 뒤에 채결되었고 조선이 세계 정세에 밝지 못하여 매우 불평등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54]

김기수는 수신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사진을 촬영하였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제1차 수신사로는 김기수가 파견되었으며[58] 그는 일본을 왕래하여 일본의 문물 등의 상황을 보고하였다.[59] 제2차 수신사로 파견된 김홍집은 보다 다각적으로 일본의 정황을 살피고 일본 주재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을 만나 《조선책략》을 건네받아 돌아왔다.[9] 고종은 《조선책략》을 간행하여 전국에 회람하도록 하였다. 이 일은 척화론을 주장하는 위정척사파를 자극하여 영남만인소의 계기가 되었다.

김홍집은 조사시찰단의 파견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척화론자의 여론을 고려하여 신사유람단이라는 명목으로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조사시찰단은 일본 정부의 각 부서와 산업, 방위 현장 등을 둘러 본 뒤 귀국하였다.

4. 3. 통리기무아문 설치와 동도서기론

고종의 친정 이후 일어난 운요호 사건과 이에 따른 1875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개항 정국으로 접어들었다. 고종은 청나라 이홍장 등이 추진하던 변법자강을 참조하여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기존의 관제와 혼용하여 새로운 문물의 도입을 시도하였다.[63]

1881년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주일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오자 이를 간행하여 전국에 회람하는 한 편 조선의 새로운 외교 방침으로 삼고자 하였다. 《조선책략》의 간행과 회람은 위정척사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 영남만인소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은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을 지속하였고 개화파는 동도서기론으로 자신들의 개화 사상을 정당화하였다.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위정척사파는 영남만인소와 같은 여론을 형성하며 반대하였다. 척화론의 이러한 반대에 대해 개화파는 동도서기론으로 반박하였다. 동도서기론은 청나라의 양무운동이 주장한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이나 일본의 개항 초기 화혼양재론(和魂洋才論)과 같은 맥락에서 기존의 세계관을 유지하면서 뛰어난 서양의 문물은 받아들이자는 주장이었다. 이는 위정척사파 등의 개화에 대한 극심한 반발을 잠재우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였다.[64] 1882년 고종은 전국의 척화비 철거를 지시하면서 유학의 근본 도리를 지키면서도 발전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고 동도서기론을 공식화 하였다.[65]

통리기무아문은 기존의 관직 체계와 중복되는 이중적 기구였다. 통리기무아문의 총리대신은 영의정이 겸임하였고 주요 사무는 신식 무기의 수입과 외교 관계의 처리 등이었다. 처음에는 척족 세력을 중용하였으나 조사시찰단이 귀국한 이후 이들을 대부분 통리기무아문에 배속시켜 개화파가 실질적인 정책 수행을 하도록 하였다.[66][67]

4. 4. 임오군란과 개화파의 분열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개화파는 온건개화파급진개화파로 분열되었다.[11] 훈련도감에 속해 있던 옛 군대는 새롭게 창설된 별기군과의 차별과 13개월에 걸친 급여 미지급에 항의하여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흥선대원군의 복위와 명성왕후 민씨의 살해를 통해 개화파의 정책을 좌초시키고자 하였다. 명성왕후 민씨가 황급히 피신한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다시 실권을 장악하고 명성왕후의 사망을 발표하며 장례까지 치렀다. 한성부의 하층민들 역시 임오군란에 합류하였는데, 이들은 개화파의 개화 정책이 조선 사회의 신분 격차를 오히려 크게 벌리는 일이라고 보았고, 당시 대다수 사람들은 여전히 위정척사파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가 황급히 일본으로 피신한 가운데 나라가 개입하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함으로써 임오군란은 몇 일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68]

임오군란을 맞으면서 이미 동도서기론과 변법자강론의 차이를 보이던 개화파 내에서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분화하게 되었다.[11] 이미 김옥균을 중심으로 별도의 비밀결사인 충의계를 결성하고 있던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의 개입을 내정 간섭이라며 반발하였고,[11] 임오군란 이후 척족 여흥 민씨의 중심 인물이었던 민영익이 개화파와 관계를 끊자 급진 개화파는 단독 정권을 수립하고자 하였다.[12] 이에 반해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하고 있던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온건 개화파는 청의 개입 이후 정부에 복귀하여 기존의 동도서기론에 따른 개화 정책을 계속하여 추진하고자 하였다.[11] 임오군란으로 위기를 맞은 개화파의 이러한 분화는 갑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5. 갑신정변

임오군란 이후 위기를 맞은 급진개화파는 정변을 계획하였다. 1883년 김옥균은 일본에서 국채를 얻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884년 12월 우정총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10]

갑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한 명인 홍영식


갑신정변으로 정부를 장악한 급진개화파는 갑신혁신정강 14개조를 발표하여 신분제 폐지, 정부기구 근대화, 국가 재정 일원화 등을 선포하였다.[69][70]

갑신정변은 청의 군사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였다. 홍영식은 고종을 호위하다 전사하였고, 김옥균, 서재필 등은 망명하였다.[10] 고종은 갑신정변 이후 망명한 급진개화파를 대역죄인으로 선포하였고 김옥균은 여러 망명지를 전전하다 암살되었다.[44]

외교적으로 조선은 다시 청의 영향권에 놓였다. 일본은 자국 공사관이 공격받은 것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하는 한편 청과 조약을 맺고 양국 군대를 철수하기로 하였다.[22] 그러나 이는 훗날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다.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는 큰 위기를 맞았고 이후 갑오년에 이르기까지 10년 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6. 갑오개혁과 청일전쟁

1894년 갑오년은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연이어 발생하며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친 해였다.[72] 전봉준, 김개남 등이 이끌었던 동학군은 서학에 반대하며 척화론 입장을 보였고, 흥선대원군과도 연계되어 있었다.[75] 개화파는 동학 농민군을 적으로 여겼고, 유학자들 역시 동학을 불온한 사상으로 간주했다.[76]

고종은 전주화약을 통해 농민군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으나, 청나라와 일본 모두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는 친일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71]

일본이 정변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높이려 하자 청나라는 이를 견제했다. 갑신정변 이전까지 일본은 청나라의 개입을 용인하며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이 시기에는 자국의 외교적 이익만을 추구했다.[17] 흥선대원군은 청나라와 일본 모두에게 이용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고, 실제로 양측에 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실권 장악을 꾀했다.

1894년 7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군함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빠른 승리를 위해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요동반도를 점령했다.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6]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으나,[80] 삼국 간섭으로 요동을 반환해야 했다.[81]

청일전쟁 당시 조선군은 지휘 체계가 분열되어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72] 한편, 일본에 의해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겉으로는 일본을 지원하는 척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했고, 일본은 이를 파악하고 대원군을 축출하려 했다.[83]

1894년 11월, 동학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 부대에 맞서 싸웠으나, 기관총 등 신식 무기에 밀려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패배했다.[84]

6. 1. 군국기무처와 갑오개혁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은 경복궁을 포위하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여흥 민씨 척족을 축출하였다. 이후 김홍집을 총재관으로 하는 군국기무처가 세워졌다. 일본이 궁궐을 점령한 가운데 이루어진 내각 개편으로 인해 김홍집과 온건개화파에게 친일 인사라는 비판이 쏟아졌다.[71]

군국기무처는 일본의 영향력 아래 갑오개혁을 진행하였으나, 농민군이 제기한 신분제 모순 해결을 비롯한 자주적인 개화 정책도 추진하고자 하였다.[78] 그러나 일본은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여 개화파의 개화 정책마저 방해물로 여겼다.[17] 당시 일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의견서에서 주장한 "이익선"(利益線) 안에 조선을 포함시켜 보호국으로 삼는 방향으로 대조선 정책을 수립하고 있었다.[79] 군국기무처는 갑오개혁을 발표하며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구성원들이 대원군의 실권에 대한 찬반으로 갈리면서 추진력을 잃었다.[19]

군국기무처는 청일전쟁 양측에 대해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취했으나, 동학 농민군 진압에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일에는 적극적이었고, 일본군 주둔 및 보급 지원도 결정하여 일본에 기울어진 내정을 하였다.[82]

6. 2. 청일전쟁과 일본의 영향력 확대

1894년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연이어 발생하며 조선의 운명이 크게 흔들렸다.[72]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내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는 친일 인사라는 비판을 받았다.[71]

풍도 해전을 묘사한 일본의 판화


일본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자 청나라는 이를 견제했다. 갑신정변 이전까지 일본은 청나라의 개입을 용인하며 개화파를 지원했지만, 이 시기에는 자국의 외교적 이익만을 추구했다.[17] 고종은 개화파와 손잡고 갑오개혁을 추진했지만, 일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 의견서에 따라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정책을 추진하며 개화파의 정책마저 방해했다.[79][17]

1894년 7월 25일,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이 청나라 군함을 공격하며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일본군은 빠른 승리를 위해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에서 청군을 격파하고 요동반도를 점령했다. 이듬해 2월까지 이어진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16]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으나,[80] 삼국 간섭으로 요동을 반환해야 했다.[81]

청일전쟁 당시 조선군은 지휘 체계가 분열되어 청나라를 지원하거나 일본군을 지원하는 등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72] 군국기무처는 중립 외교를 표방했지만, 동학 농민군 진압에 일본군의 지원을 받는 등 일본에 기울어진 내정을 펼쳤다.[82]

7.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청일전쟁 승리 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면서 온건개화파 내각을 후원하던 여흥 민씨 세력을 방해물로 보고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킨다.[20] 이로 인해 반외세 감정이 전국적으로 격앙된 가운데 김홍집의 온건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을 단행하여 위정척사파의 격렬한 반대를 불러왔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을미의병이 거병하여 주요 지방 도시를 점령하고 항일 운동을 전개하지만 조선군과 일본의 연합군에게 패배한다.[20]

개화파의 단발령에 대다수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유학자들은 고종이 먼저 상투를 자른 것을 국가적 치욕으로 여겼다.[86] 고종 역시 일본의 영향력이 점차 커져가는 군국기무처에 대한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고종은 청나라의 영향력이 사라진 가운데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1896년 병신년 개화파의 첫 정책은 그레고리력 채택이었다. 이는 단순히 양력을 도입한다는 의미를 넘어 그동안 청나라의 시헌력을 채택하여 온 조선이 시간의 기준마저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상징한다.[87]

을미사변 이후 고종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1896년 2월 11일 경운궁(훗날 덕수궁)의 비밀 통로를 이용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아관파천과 동시에 고종은 기존의 개화파 내각이 일본과 가깝다고 판단하고 이들을 모두 해임한다. 갑작스런 사태를 맞은 김홍집은 고종을 알현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종로에서 성난 군중에게 살해당한다.[88]

8. 대한제국과 개화파의 운명

고종은 1897년 아관파천을 끝내고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통해 황제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하였으나 러일전쟁으로 중단되었다.[92]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고종은 미국에 희망을 걸었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침략을 용인했다.[93]

임오군란 이후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개화파는 명성황후와 청을 지지하는 사대당에 반대하며, 메이지 유신을 본뜬 국내 개혁을 추진했다. 이들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주요 인물들은 일본이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1894년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과 개화당 정부를 수립했으나, 친러파 부상과 함께 개화당은 몰락했다. 대한제국 수립 후, 개화당은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는 정책을 추진했다.[1]

8. 1.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이후 1897년 고종은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조선을 번국으로 간주하던 전통적인 사대교린 외교 체계가 끝났음을 상징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에도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외교 정책을 지속했다.[90]

독립협회 등 개화 운동 세력은 만민공동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으나, 고종은 이를 수용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했다. 고종은 황국협회를 이용하여 만민공동회를 방해하고, 두 단체의 충돌을 명분으로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했다. 이로써 변법자강을 통한 자발적 개화를 추진하던 개화파 세력은 정부에 직접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91]

8. 2. 광무개혁과 러일전쟁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조선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에서 벗어났다. 고종은 아관파천 이후에도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다.[90]

독립협회 등 개화 운동 세력은 만민공동회를 통해 입헌군주제를 주장했지만, 고종은 이를 거부하고 황국협회를 이용해 만민공동회를 탄압했다. 이로써 개화파의 정부 참여는 어려워졌다.[91]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해 황제 중심의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러일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92]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고종은 미국에 기대를 걸었지만,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조선 침략을 묵인했다.[93]

9. 개화파의 분산과 계승

아관파천 이후 개화파는 다양한 세력으로 분산되었다. 이완용은 친러파의 대표였다가 다시 친일파로 돌아섰고, 개화파의 대표 가운데 하나였던 박영효는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한편, 서재필 등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추진하였으나 입헌군주제를 놓고 고종과 갈등하였고 결국 해산되었다. 또한 갑오년 당시 반외세를 주장하였던 동학은 3대 교주인 손병희의 갑진혁신운동을 통해 천도교로 이름을 바꾸며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독립협회의 일부와 천도교의 일부는 일진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표적인 친일파가 되었다. 이들은 경술국치 정국에서 일본과의 병합을 주장하여 일본의 강점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친일파가 된 세력들과 달리 신민회와 같이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개화 사상가들은 이후 독립운동세력이 되었다. 위정척사파를 기반으로 하는 항일의병 가운데 일부가 대한독립의군부와 같은 무장투쟁을 시작하였던 것과 같이 개화 운동 세력도 흥사단과 같은 해외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1919년 3·1 운동은 조선의 거의 모든 세력들이 결집한 독립 운동으로 개화 사상을 계승한 인물들도 다수가 이에 참여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참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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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그룹 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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