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메네크 발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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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메네크 발마냐는 스페인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에는 지로나와 FC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했으며, 카탈루냐 대표팀으로도 4경기에 출전했다.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 등의 경력을 쌓았다. 감독으로서는 짐나스틱, 지로나, 레알 사라고사, 레알 오비에도 등을 거쳐 FC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고 코파 델 레이와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을 이끌었다. 발렌시아, 레알 베티스, 말라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등을 거치며 1966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라리가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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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메네크 발마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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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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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본명 | 도메네크 발마냐 페레라 (Domènec Balmanya Perera) |
출생일 | 1914년 12월 29일 |
출생지 | 지로나, 스페인 |
사망일 | 2002년 2월 14일 |
사망지 | 바르셀로나, 스페인 |
포지션 | 미드필더 |
클럽 경력 | |
연도 | 1933–1935 |
클럽 | 지로나 |
연도 | 1935–1937 |
클럽 | 바르셀로나 |
연도 | 1937–1941 |
클럽 | 세트 |
연도 | 1941–1944 |
클럽 | 바르셀로나 |
출장 (골) | 48 (5) |
연도 | 1944–1948 |
클럽 | 힘나스틱 |
출장 (골) | 3 (0) |
연도 | 1948–1949 |
클럽 | 산트 안드레우 |
연도 | 1949–1950 |
클럽 | 힘나스틱 |
출장 (골) | 6 (1) |
국가대표 경력 | |
연도 | 1935–1944 |
국가대표팀 | 카탈루냐 |
출장 (골) | 4 (0) |
감독 경력 | |
연도 | 1949–1952 |
클럽 | 힘나스틱 |
연도 | 1952 |
클럽 | 지로나 |
연도 | 1952–1953 |
클럽 | 사라고사 |
연도 | 1954–1955 |
클럽 | 오비에도 |
연도 | 1956–1958 |
클럽 | 바르셀로나 |
연도 | 1958–1960 |
클럽 | 세트 |
연도 | 1960–1962 |
클럽 | 발렌시아 |
연도 | 1963–1964 |
클럽 | 베티스 |
연도 | 1964–1965 |
클럽 | 말라가 |
연도 | 1965–1966 |
클럽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연도 | 1966–1968 |
클럽 | 스페인 |
연도 | 1970–1971 |
클럽 | 사라고사 |
연도 | 1972–1974 |
클럽 | 카디스 |
연도 | 1974–1976 |
클럽 | 산트 안드레우 |
연도 | 1980 |
클럽 | 산트 안드레우 |
2. 선수 경력
도메네크 발마냐는 1930년대부터 1950년까지 스페인과 프랑스 리그에서 활약한 축구 선수이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FC 바르셀로나에서 보냈으며, 스페인 내전과 같은 격동의 시기를 겪기도 했다. 또한 카탈루냐 대표팀으로도 활동했다.
2. 1. 클럽 경력
카탈루냐 지로나 출신인 발마냐는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하기 전, 고향 클럽인 지로나 FC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1][2] 1935년 11월 10일, 그는 패트릭 오코넬 감독의 지휘 아래 RCD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바르사 소속으로 라리가 데뷔전을 치렀으나, 팀은 0-1로 패배했다.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는 동안 그는 공식 경기 111경기에 출전했으며, 당시 팀 동료로는 주안 주제프 노게스, 주제프 에스콜라, 엔리케 페르난데스 등이 있었다. 첫 시즌인 1935-36 시즌에 그는 소속팀의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과 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 진출에 기여했다.다음 시즌인 1936-37 시즌에는 스페인 내전 발발로 스페인 축구가 중단되었다. 그러나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공화파 점령지의 클럽들은 지중해 리그에 참가했고, 발마냐와 오코넬 감독은 바르셀로나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1937년, 발마냐, 에스콜라, 오코넬 감독을 포함한 바르셀로나 선수단은 구단 기금 마련을 위해 멕시코와 미국 순회 경기를 떠났다. 멕시코에서는 클루브 아메리카, 아틀란테 FC, 네칵사, 그리고 멕시코 대표팀 등과 총 14경기를 치렀다. 미국에서는 '브루클린 대표팀', '뉴욕 대표팀', '히브리 대표팀'이 참가한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뒤 미국 대표팀과도 경기를 가졌다. 이 순회 경기는 구단의 재정 안정화에 기여했지만, 오코넬 감독을 따라 스페인으로 복귀한 선수는 4명뿐이었다. 나머지 선수들은 망명길에 올랐고, 발마냐와 에스콜라는 프랑스의 세트에 합류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자, 프랑코 정권은 망명한 선수들의 스페인 복귀를 6년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이었던 엔리케 피녜이로는 선수들의 사면을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발마냐와 에스콜라는 1941년에 추방령 대상에서 제외되어 바르셀로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복귀 첫 시즌, 주안 주제프 노게스가 감독을 맡은 바르셀로나는 레알 무르시아와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며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 리그에서의 부진과는 대조적으로, 같은 해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에서는 아틀레틱 빌바오를 연장전 끝에 4-3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발마냐는 카탈루냐 대표팀 소속으로 4경기에 출전했다. 1936년 1월 19일에는 캄 데 레스 코르츠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의 SK 시데니체와의 주제프 사미티에르 헌정 경기에 출전했으며, 당시 사히바르바 등도 함께 뛰었다.
바르셀로나를 떠난 후에는 짐나스틱 타라고나와 UE 산 안드레우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기간 | 클럽 | 국가 |
---|---|---|
19xx–1935 | 지로나 FC | 스페인 |
1935–1937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
1937–1941 | FC 세트 34 | 프랑스 |
1941–1944 | FC 바르셀로나 | 스페인 |
194x–1948 | 짐나스틱 타라고나 | 스페인 |
1948–1949 | UE 산 안드레우 | 스페인 |
1949–1950 | 짐나스틱 타라고나 | 스페인 |
2. 2. 국가대표팀 경력
1935년과 1944년 사이, 발마냐는 카탈루냐 대표팀 경기에 4번 출전했다. 1936년 1월 19일, 캄 데 레스 코르츠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 시네디체와의 주제프 사미티에르 헌정 경기에 출전했다. 이 경기에 카탈루냐 대표팀 선수로 출전한 선수들 중에는 사히바르바가 있었다.3. 감독 경력
발마냐는 선수 생활을 마친 후 호세프 노게스를 따라 짐나스틱으로 이적하여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1949년 지휘봉을 잡았으나, 그의 감독 첫 해인 1950년에 짐나스틱이 강등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이후 지로나와 레알 사라고사를 거쳐 1954년 오비에도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오비에도를 이끌고 세군다 디비시온 1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감독으로서 성공을 맛보았으나, 승격 플레이오프 리그전에서 3위에 그쳐 승격에는 실패했다.
1956년부터 1958년까지 두 시즌 동안 바르셀로나 감독직을 역임했다. 당시 팀에는 벨라스코, 주안 세가라, 안토니 라마예츠, 쿠벌러 라슬로, 루이스 수아레스, 그리고 에바리스투와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1957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우승과 1958년 초대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을 달성했다. 그러나 라 리가에서는 두 시즌 모두 3위에 머물렀고, 1958년에 엘레니오 에레라가 그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바르셀로나를 떠난 후, 1958년부터 2년간 프랑스의 세트 감독을 맡았다. 1960년에는 라 리가로 복귀하여 발렌시아의 감독이 되었다. 1961년에는 발렌시아가 주최한 여름 대회인 ''트로페오 나란하''에서 우승을 이끌었다. 당시 초청 선수였던 코치시 샨도르는 보타포구와 바르셀로나와의 두 경기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했다. 발마냐는 발렌시아를 이끌고 1962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결승전까지 진출시켰다. 하지만 결승전 일정이 1962년 FIFA 월드컵과 겹쳐 연기되었고, 실제 결승전이 열릴 때에는 이미 발마냐가 팀을 떠난 상태였다. 발렌시아는 그의 부재 속에서도 바르셀로나를 합계 6-3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63-64 시즌에는 베티스의 감독을 맡아 팀을 라 리가 3위로 이끌었다. 다음 행선지는 말라가였다. 1964-65 시즌에 말라가를 세군다 디비시온 2조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레반테를 꺾으며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이후 1965-66 시즌에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엔리케 코야르, 미겔 존스, 아델라르도, 그리고 루이스 아라고네스 등이 포함된 선수단을 이끌고, 감독 경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발마냐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아 11경기를 이끌었다.
이후에도 레알 사라고사(1970-1971), 카디스 CF(1972-1974), UE 산 안드레우 등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기간 | 국가 | 클럽 |
---|---|---|
1949–195x | 스페인 | 짐나스틱 데 타라고나 |
1952–1953 | 스페인 | 지로나 FC |
1953–1954 | 스페인 | 레알 사라고사 |
1954–1955 | 스페인 | 레알 오비에도 |
1956–1958 | 스페인 | FC 바르셀로나 |
1958–1960 | 프랑스 | FC 세트 34 |
1960–1962 | 스페인 | 발렌시아 CF |
1963–1964 | 스페인 | 레알 베티스 |
1964–1965 | 스페인 | CD 말라가 |
1965–1966 | 스페인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1966–1968 | 스페인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
1970–1971 | 스페인 | 레알 사라고사 |
1972–1974 | 스페인 | 카디스 CF |
197x–197x | 스페인 | UE 산 안드레우 |
4. 수상 내역
4. 1. 선수
발마냐는 카탈루냐 지로나 출신으로,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하기 전 고향 클럽 지로나 FC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2] 1935년 11월 10일, 패트릭 오코넬 감독 아래 RCD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라리가 데뷔전을 치렀으며, 경기는 0-1로 패배했다. 바르셀로나 시절 후안 호세 노게스, 주제프 에스콜라, 엔리케 페르난데스 비올라 등과 함께 뛰며 총 111번의 공식 경기에 출전했다. 입단 첫 해인 1935-36 시즌에는 팀의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우승과 코파 델 레이 준우승에 기여했다.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면서 전국 리그는 중단되었으나, 공화파 지역의 클럽들이 참여한 지중해 리그가 열렸다. 발마냐는 오코넬 감독과 함께 바르셀로나의 1936-37 시즌 지중해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1937년, 바르셀로나 선수단은 재정난 해결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멕시코와 미국 순회 경기를 떠났다. 멕시코에서는 클루브 아메리카, 아틀란테 FC, 클루브 네칵사, 멕시코 축구 국가대표팀 등과 총 14경기를 치렀다. 미국에서는 '브루클린 대표팀', '뉴욕 대표팀', '히브리 대표팀'이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하고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과도 경기를 가졌다. 이 순회 경기로 구단 재정은 안정되었지만, 스페인 내전의 여파로 오코넬 감독과 4명의 선수만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발마냐를 포함한 나머지 선수들은 망명길에 올랐고, 그는 에스콜라와 함께 프랑스의 FC 세트 34로 이적했다.
1939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자, 망명 선수들에게 6년간 스페인 입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엔리케 피녜이로 케랄트 당시 바르셀로나 회장의 노력으로 일부 선수들이 사면되었고, 발마냐와 에스콜라는 1941년 바르셀로나로 복귀할 수 있었다. 복귀 첫 시즌, 후안 호세 노게스가 감독을 맡은 팀은 레알 무르시아와의 플레이오프 끝에 간신히 강등을 면했다. 하지만 같은 해 코파 델 레이에서는 아틀레틱 빌바오를 연장전 끝에 4-3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카탈루냐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4경기에 출전했다. 1936년 1월 19일에는 캄 데 레스 코르츠에서 열린 주제프 사미티에르 헌정 경기(체코슬로바키아 시네디체 팀 상대)에 에밀리오 사히 리냔 등과 함께 카탈루냐 대표로 뛰었다.
'''우승 기록'''
4. 2. 감독
발마냐는 선수 생활 말년에 노게스를 따라 짐나스틱으로 이적하여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감독 경력을 시작했다. 1949년에 짐나스틱의 지휘봉을 잡았으나, 감독 첫 해인 1950년에 팀이 강등되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이했다. 이후 지로나와 레알 사라고사를 거쳐 오비에도에서 처음으로 감독으로서 성공을 경험했다. 그는 오비에도를 이끌고 세군다 디비시온 1조에서 준우승(1954-55)을 차지했지만, 승격 플레이오프 리그전에서 3위에 머물러 승격에는 실패했다.1956년부터 1958년까지 2년 동안 바르셀로나 감독직을 맡았다. 당시 바르셀로나에는 벨라스코, 주안 세가라, 안토니 라마예츠, 쿠벌러 라슬로, 루이스 수아레스, 그리고 에바리스투와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 발마냐는 이 선수단을 이끌고 1957년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와 1958년의 초대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을 달성했다. 하지만 라 리가에서는 두 시즌 연속 3위에 그쳤고, 1958년에 엘레니오 에레라에게 감독직을 넘겨주었다.
프랑스의 세트에서 2년(1958-1960)을 보낸 후, 발마냐는 1960년 발렌시아의 감독으로 스페인 무대에 복귀했다. 1961년에는 구단이 주최한 여름 토너먼트인 ''트로페오 나란하''에서 우승했다. 이 대회에서는 초청 선수였던 코치시 샨도르가 보타포구와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발마냐는 발렌시아를 이끌고 1961-62 시즌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결승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결승전 일정이 1962년 FIFA 월드컵과 겹쳐 연기되었고, 실제 결승전이 열릴 때 발마냐는 이미 다른 팀으로 옮긴 상태였다. 발렌시아는 그의 후임 감독 체제에서 바르셀로나를 꺾고 우승했다.
1963-64 시즌에는 베티스의 감독을 맡아 팀을 라 리가 3위로 이끌었다. 다음 행선지는 말라가였는데, 1964-65 시즌에 세군다 디비시온 2조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여 승격 플레이오프 자격을 얻었고, 레반테를 꺾고 팀을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이후 1965-66 시즌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했다. 엔리케 코야르, 미겔 존스, 아델라르도, 루이스 아라고네스 등이 포함된 선수단을 이끌고 감독 경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발마냐는 1966년부터 1968년까지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11경기를 지휘했다. 국가대표팀 감독직 이후에는 레알 사라고사(1970-1971), 카디스 CF(1972-1974), UE 산 안드레우 등의 감독을 역임했다.
'''감독 경력'''
기간 | 팀 |
---|---|
1949-195? | 짐나스틱 데 타라고나 |
1952-1953 | 지로나 FC |
1953-1954 | 레알 사라고사 |
1954-1955 | 레알 오비에도 |
1956-1958 | FC 바르셀로나 |
1958-1960 | FC 세트 34 |
1960-1962 | 발렌시아 CF |
1963-1964 | 레알 베티스 |
1964-1965 | CD 말라가 |
1965-1966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1966-1968 |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
1970-1971 | 레알 사라고사 |
1972-1974 | 카디스 CF |
197?-197? | UE 산 안드레우 |
'''수상 내역'''
클럽 | 대회 | 시즌 / 연도 |
---|---|---|
레알 오비에도 | 세군다 디비시온 1조 준우승 | 1954-55 |
FC 바르셀로나 | 코파 델 헤네랄리시모 | 1957 |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 1955-58 | |
발렌시아 CF | 트로페오 나란하 | 1961 |
CD 말라가 | 세군다 디비시온 2조 준우승 | 1964-65 |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 라리가 | 1965-66 |
참조
[1]
웹사이트
Adéu 'Mingu'
http://hemeroteca.mu[...]
Mundo Deportivo
2002-02-15
[2]
웹인용
Adéu 'Mingu'
http://hemeroteca.mu[...]
Mundo Deportivo
200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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