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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즈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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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모즈루 사건은 1934년 3월 12일, 일본 제국 해군의 어뢰정 '도모즈루'가 훈련 중 전복되어 승무원 10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사고이다.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인해 제한된 함정 건조를 보완하기 위해 소형 선체에 과도한 무장을 탑재한 것이 사고의 주요 원인으로 밝혀졌다. 조사 결과, 무게 중심 상승으로 인한 복원성 저하와 당시 복원성 이론의 한계가 지적되었으며, 이후 일본 해군은 함정의 복원성 기준을 강화하고, 기존 함정의 개수를 통해 안전성을 확보했다. 또한, 이 사건은 소설과 만화 등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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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모즈루 사건

2. 사건의 배경

1930년 런던 해군 군축 조약 체결 결과, 일본 제국 해군은 주력함뿐만 아니라 순양함, 구축함 등 보조 함정 건조에도 제약을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 해군은 전력 손실을 보충하고자 조약 규정 외였던 기준 배수량 600톤 이하 선체에 구축함 이상의 중무장을 탑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2. 1.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영향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 일본 제국 해군전함, 항공모함 뿐만 아니라 순양함, 구축함과 같은 보조 함정 건조에도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 제약으로 인한 전력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일본 해군은 조약의 규제를 받지 않는 기준 배수량 600톤 이하 선체에 구축함 이상의 중무장을 탑재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그 결과, 소형 구축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지도리급 어뢰정을 건조하게 되었으며, '도모즈루'는 이 지도리급 어뢰정 중 하나였다.[1]

2. 2. 지도리급 어뢰정 건조

일본 해군은 1930년에 체결된 런던 해군 군축 조약으로 전함, 항공모함 뿐만 아니라 순양함, 구축함과 같은 보조함정 건조에도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 제약으로 인한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조약 대상 밖이었던 기준 배수량 600톤 이하 선체에 구축함 이상의 중무장을 장비하여 소형 구축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어뢰정을 건조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도모즈루'가 속한 지도리급 어뢰정이다.

3. 사건의 발생

1934년 3월 12일, 어뢰정 '도모즈루'가 훈련 중 악천후 속에서 전복되었다.[1] 이 사고로 일본 해군은 함선의 의장과 복원 성능에 관한 문제점을 발견하고 재검토를 실시하였다. 도모즈루를 설계한 후지모토 기쿠오 조선소장은 이 사고의 책임을 지고 근신 처분을 받았고, 이듬해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의 구 해군 묘지 히가시 공원에는 이 사고로 순직한 병사들의 위령비가 있다.

3. 1. 훈련 당시 상황

연습 당일은 마침 거친 날씨에 파도가 심했다. 당시 어뢰정은 계산상 90~110도 정도의 경사에 견딜 수 있는 복원력을 갖도록 설계되었으나, 오전 4시 12분경 '도모즈루'는 약 40도의 경사에서 전복되었다.[1] 이후 수색으로 발견된 도모즈루는 수반함인 사세보 경비전대 기함 '다쓰타'에 예인되어 다음 날 3월 13일 사세보 해군 공창의 드라이 도크에 입거, 배수 작업을 한 결과, 선내 생존자 13명이 구조되었다.[1] 결과적으로 총원 113명 중 100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3. 2. 사고 경과

연습 당일은 마침 악천후로 파도가 높았다. 어뢰정은 계산상으로는 90도에서 110도 정도의 경사에서도 전복되지 않도록 복원력을 갖춘 설계가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전 4시 12분경, "도모즈루"는 40도 정도의 경사에서 전복되었다. 이후 수색으로 발견된 도모즈루는 수반하던 사세보 경비전대 기함 "다쓰타"에 예인되어 다음 날 3월 13일에 사세보 해군 공창의 드라이 도크에 입거, 배수 작업을 한 결과, 선내의 생존자 13명이 구조되었다[1]。 결과적으로 총원 113명 중 사망 및 행방불명 100명이라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4. 사건의 원인 및 대책

요나이 미쓰마사 사령장관의 명령에 따라, 도모즈루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이 이루어졌다.[1] 조사 결과, 도모즈루는 과도한 무장과 미숙한 제작 기술로 인해 무게중심이 상승하고 복원성이 부족했던 것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설계 측은 용병 측의 무리한 요구에 따라 근본적인 결함을 가진 함선을 다수 건조한 상황이었다.

현대의 함선은 선체의 폭을 넓히거나(평저선이나 쌍동선 제외), 자이로(소형 선박)나 핀 안정기 등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4. 1. 복원성 문제

요나이 미쓰마사 사세보 진수부 사령장관의 명령으로 도모즈루 사고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이 이루어졌다. 계산상으로는 충분한 복원 성능을 갖추고 있던 도모즈루는 실제로는 과대 무장과 공업 기술 부족으로 인해 중량이 초과되어 무게중심이 상승, 복원 성능이 떨어진 것이 사고의 원인으로 판명되었다.[1]

후지모토 기쿠오 소장은 사령부의 무리한 요구에 따라 지도리급 어뢰정 뿐만 아니라 소형 선체에 중무장을 올린 함정을 다수 건조하였다. 이 사고로 인해 후부키급 구축함이나 하쓰하루급 구축함 등에도 무장을 줄이거나 상부 구조물 조정, 현측 벌지 장착 등의 조치를 취해 복원 성능을 향상시키고 무게중심을 낮추는 대책이 실시되었다. 이후 전함, 항공모함은 60도, 순양함은 90도, 구축함 및 어뢰정은 90~110도 이상의 복원력을 갖도록 하였다. 도모즈루도 개수를 받고 다음 해 1935년 5월에 재취역하여 1945년 침몰할 때까지 활동하였다.

최근 연구에서는 당시 복원성 이론 자체의 한계, 즉 '정적' 복원성 이론에 대한 풍압이나 선회 원심력 경사를 포함한 '동적' 복원성 해석의 미발달도 지적되고 있다. 쫓기는 파도 아래에서의 급선회에서는 선회의 원심력에 더해 종요(피칭)가 횡요(롤링)로 변환된 경사 모멘트에, 쫓아오는 바람의 풍압도 더해져 배를 선회 원의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는 큰 외력을 받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정적' 복원성을 넘어서는 경사 모멘트가 작용하여 전복에 이르렀다고 보여진다.

4. 2. 기술적 문제점

최근의 연구에서는 당시 복원성 이론 자체의 한계, 즉 '정적' 복원성 이론에만 초점을 맞추고 풍압이나 선회 원심력 경사를 포함한 '동적' 복원성 해석이 미발달했음이 지적되고 있다. 쫓기는 파도 아래에서의 급선회에서는 선회 원심력에 더해 종요(피칭)가 횡요(롤링)로 변환된 경사 모멘트에, 쫓아오는 바람의 풍압도 더해져 배를 선회 원의 바깥쪽으로 향하게 하는 큰 외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정적' 복원성을 넘어서는 경사 모멘트가 작용하여 전복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1]

4. 3. 후속 조치

요나이 미쓰마사 사세보 진수부 사령장관의 명령으로 도모즈루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원인 규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계산상으로는 충분한 복원 성능을 갖추었어야 할 도모즈루가 실제로는 과도한 무장과 당시 부족했던 공업 기술로 인해 중량이 초과되어 무게중심이 높아졌고, 이로 인해 복원 성능이 떨어진 것이 사고의 원인으로 밝혀졌다.[1]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해군은 함정의 복원성 기준을 강화하였다. 대형함은 60도, 중형함은 90도, 소형함은 90~110도 이상의 복원력을 갖도록 기준이 강화되었다. 후부키급 구축함, 하쓰하루급 구축함 등 기존 함정들에 대해서는 무장을 줄이거나 상부 구조물을 조정하고, 현측에 벌지를 장착하는 등의 개수를 통해 복원성을 향상시키고 무게중심을 낮추는 조치가 실시되었다. 도모즈루 역시 개수를 받고 1935년 5월에 재취역하여 1945년까지 활동하였다.

최근 연구에서는 당시 복원성 이론 자체의 한계, 즉 '정적' 복원성 이론에 대한 '동적' 복원성 해석의 미발달도 사고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다. 현대 함선에서는 선체 폭을 넓히거나, 자이로(소형 선박)나 핀 안정기 등의 대책을 통해 무게중심 상승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5. 사건의 영향 및 평가

도모즈루 사건은 일본 해군 역사상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되며, 군함 설계와 복원성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의 구 해군 묘지 히가시 공원에는 순직한 병사들의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요시무라 아키라의 소설 《전복》(「공백의 전선」수록)과 미타 노리후사의 만화 《아르키메데스의 대전》에서 '미네즈루'라는 함명으로 묘사되는 등 문학 작품에서도 다루어졌다.

5. 1. 위령비 건립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의 구 해군 묘지 히가시 공원에는 이 사고로 순직한 병사들의 위령비가 건립되었다.

5. 2. 사건을 다룬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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