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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이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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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들라이예는 1894년 기술자 에밀 들라이예가 설립한 프랑스의 자동차 제조사이다. 초창기에는 자동차 경주에 참여했으며, 1930년대에는 고급차 시장과 모터스포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경제 침체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며, 1954년 오토모빌 홋키스에 인수되어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다. 들라이예는 1954년 말까지 개인 소유 회사로 남았으며, 다양한 모델을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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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이예 - [회사]에 관한 문서
개요
Delahaye 165
Delahaye 165
명칭들라이예
유형제조업
산업자동차
트럭
유틸리티 차량
버스
창립1894년, 투르, 프랑스
설립자에밀 들라이예
위치파리, 프랑스
해체1954년

2. 역사

들라이예는 1894년 에밀 들라이예가 자신의 첫 자동차를 제작하면서 시작되었다. 1898년 수요 증가로 시설 확장과 투자 자본 확보가 필요해지자, 에밀 들라이예는 구리 세공 사업주이자 처남인 레옹 데마레, 조지 모란과 동등한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 계약은 1898년에 정식으로 법인화되었고, 자동차 조립은 파리의 빈 공장으로 이전되었다.

1901년 에밀 들라이예는 건강 악화로 은퇴하면서 자신의 지분을 파트너들에게 매각했고, 데마레가 더 많은 지분을 매입하여 과반수를 확보했다. 데마레와 모란 가문은 결혼으로 연결되었기 때문에 1901년부터 1954년 홋키스에 인수될 때까지 가족 소유의 사업이었다.

1898년 에밀 들라이예는 샤를르 바이펜바흐를 경영 보조로, 아메데 바를레를 설계 엔지니어로 고용했다.[11] 1906년 바이펜바흐는 운영 관리자가 되었고, 1932년에는 장 프랑수아가 수석 설계 엔지니어로 고용되었다.

가족 친척인 피에르 페니는 사장이었지만, 샤를르 바이펜바흐가 실제로 회사를 운영했다. 그는 1954년 경쟁사인 홋키스와의 합병을 주도한 이후에도 이 역할을 수행했다.

1954년 말, 들라이예는 홋키스와의 합병으로 인해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으며, 브란트 그룹에 흡수되어 멸망했다.

2. 1. 설립 초기 (1894-1901)

1894년, 기술자 에밀 들라이예는 프랑스 투르에 있는 브르통 주조 및 기계 공장의 관리자로 있으면서 벨트 구동 자동차 실험을 시작했다.[1] 이 실험을 통해 그는 브르통 씨가 은퇴할 수 있도록 공장을 인수했다. 에밀은 곧 자신의 자동차를 1896년 파리-마르세유-파리 경주와 1897년 파리-디에프 경주에 출전시켰고, 1898년에는 마르세유-니스 랠리, 코스 드 페리고, 그리고 파리-암스테르담-파리 경주에 참가했다.[2]

들라이예의 자동차 회사는 1898년, 들라이예의 자동차로 마르세유-니스 랠리에 참가했던 조지 모란과 모란의 매형 레옹 데마레가 투자하여 설립되었다. 회사는 제조 시설을 투르에서 파리로 이전했고, 모란 가문 소유의 구 유압 기계 공장을 사용했다. 샤를르 바이펜바흐가 운영 관리자로 임명되었다.[2] 회사는 처음 이 위치에서 1.4리터 단기통 엔진 타입 0, 2기통 엔진 Delahaye type 1|타입 1프랑스어 및 타입 2의 세 가지 모델을 생산했다. 세 모델 모두 자전거 스타일의 틸러 조향 장치, 후방 장착 수냉식 엔진, 자동 밸브, 기화기, 그리고 트렘블러 코일 점화 시스템을 갖추었다. 구동 방식은 벨트와 체인의 조합으로, 3개의 전진 속도와 1개의 후진 속도를 갖추었다.[3]

1901년 에밀 들라이예가 은퇴하면서 데마레와 모란이 회사를 인수했다.[3]

2. 2. 실용차 생산 시기 (1902-1932)

독일 제조사 프로토스는 1907년에 들라이예 모델의 라이선스 생산을 시작했고, 1909년에는 H. M. 홉슨이 들라이예 차량을 영국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4] 미국의 제조사 화이트는 들라이예의 디자인을 표절했고,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손해 배상 청구 노력이 중단되었다.[4] 전쟁이 끝날 무렵, 들라이예의 주요 수입원은 트럭 제조였다.

전쟁 후, 들라이예는 1927년에 FAR 트랙터 회사와 셰나르 & 왈케르 자동차 제조사, 그리고 소형 가족용 자동차를 생산하는 엔트리 레벨 제조사인 로젠가르트와의 삼자 협정을 통해, 조립 라인 생산 방식을 도입하여 이윤을 늘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생산하려는 차량의 범위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너무 다양하며, 실질적인 표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4] 이 협력은 오래가지 못했고,[4] 판매량 감소로 회사의 생존이 위협받았다. 1931년까지 삼두 동맹은 해체되었다.

2. 3. 고급차 시장 진출 (1933-1939)

1933년 파리 살롱에서 장 프랑수아가 제작한 신형차 '들라이예 쉬페르 뤼크스' 12CV와 18CV가 발표되었다. 이 모델들은 튼튼한 트럭 엔진과 크로스 멤버를 갖춘 견고한 섀시를 기반으로, 전차축에 가로 배치 리프 스프링 독립 현가 장치를 채용하고, 옵션으로 싱크로메시 기어 박스를 제공하는 등 당시 최첨단 기술을 자랑했다. 같은 해, 몽레리 서킷에서 스피드 트라이얼을 실시하여 18개의 내구 속도 기록을 세우며 들라이예의 이미지를 쇄신했다.[4]

1934년에는 특수 제작된 18 Sport로 몽틀레리에서 18개의 클래스 기록을 세웠다.[4] 또한, 2.15리터 4기통 엔진의 12마력 134N과 3.2리터 6기통 엔진의 18마력 138형을 출시했는데, 이들은 모두 성공적인 트럭 엔진을 기반으로 개발되었다. 1935년 알핀 트라이얼에서의 성공은 스포츠형 135형 "쿠페 데 알프" 출시로 이어졌다. 같은 해 말까지 들라이예는 18개의 소규모 프랑스 스포츠카 행사와 여러 힐클라임에서 우승했으며, 르망에서 5위를 차지했다.[5]

1936년, 들라이예는 160hp의 차량 4대를 울스터 TT에 출전시켜 부가티에 이어 2위를 차지했고, 벨기에 24시간 레이스에 4대를 출전시켜 알파 로메오에 이어 2-3-4-5위를 기록했다.[5] 이러한 경주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1935년에는 자동차 제조업체인 들라지를 인수했다.[4]

thumb took second place at the 1936 몬테카를로 랠리 with a Delahaye 18CV Sport.]]

미국의 상속녀 루시 오'레일리 쉘은 랠리와 레이스를 위한 짧은 "Competition Court" 2.7m 휠베이스의 135형 차량 개발 비용을 지불하고 12대를 구매하여 절반을 자신의 Ecurie Bleue 아마추어 레이싱 팀에 사용했다.[7]

1937년, 르네 르 베그와 훌리오 퀸린이 들라이예를 몰고 몬테카를로 랠리에서 우승했으며, 르망에서 1위와 2위를 차지했다.[3] 독일 정부의 후원을 받는 메르세데스-벤츠와 아우토 유니온에 맞서, 들라이예는 복잡한 4.5L V12(12기통 엔진)을 탑재한 145형을 출전시켰다.[3] "밀리언 프랑 들라이예"로 불린 이 차량은 밀리언 프랑 레이스에서 우승한 후, 르네 드레이푸스가 1937년 몽틀레리에서 91.07mph의 평균 속도로 200km 이상을 달려 200000FRF의 정부 포상을 받았다.[5] 드레이푸스는 1938년 포에서 Ecurie Bleu 145형으로 승리하여 연료 효율로 메르세데스-벤츠 W154를 이겼고, 다른 145형 차량은 같은 레이스에서 3위를 차지했다.[5]

이러한 승리들은 프랑스의 애국심과 결합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의 독일 점령까지 들라이예 차량에 대한 수요를 보장했다.[5]

2. 4. 모터스포츠에서의 활약 (1935-1939)

이 시대의 고성능차 제조사들처럼, 들라이예도 모터스포츠에 다시 도전했다.

1930년대 중반 이후의 유럽 그랑프리에서는 총통 아돌프 히틀러의 의지에 따른 나치 독일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아우토 우니온과 메르세데스-벤츠가 압도적인 강세를 보였다. 이 무서운 강적에 대항하여 기세를 떨친 것이 프랑스에서는 부갓티와 들라이예였다.

독일차 대항마로 들라이예가 내놓은 것이, 레이스 상금에 따라 "100만 프랑의 들라이예"라고 불린 V형 12기통 4.5리터 238hp, 최고 속도 260km/h의 고성능 레이서 "145"이다. 1938년, 르네 드레퓌스가 몰았던 들라이예 145는 벨기에의 포에서 열린 레이스에서 명 드라이버 루돌프 카라치올라가 조종하는 메르세데스를 꺾고 우승했다. 또한 "145"를 기반으로 화려한 로드스터 바디를 더한 공도용 모델 "165"가 극소량 제작되었다.

들라이예 타입 145 (1937년)


또한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서는, "135"의 배기량 확대·강화판인 3.6리터의 "135M", "135MS"가 활약을 보였다. 1937년에는 2위·3위, 그리고 다음 1938년에는 외젠 샤보프랑스어 / 장 트레물레프랑스어 조가 우승했다. 다만 1938년 레이스에는 프랑스의 최강호인 부가티가 출전하지 않았고, 들라이예 자체는 레이스 중 기어 박스 문제로 톱 기어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선두를 대폭 리드하며 독주하던 명차 알파로메오 8C 2900에 타고난 강인함으로 쫓아가 2위를 유지했으며, 알파로메오가 후반에 정교한 DOHC·8기통 엔진에 트러블을 일으키면서, 트럭에서 개조한 6기통·OHV 엔진으로 "끈기 승리"를 얻었다. 빅 타이틀을 많이 얻지는 못했지만, 135 시리즈는 부유한 프라이베이터들에 의해 많은 레이스에서 활약하고 있다.

2. 5. 제2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40-195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의 고급차 제조업체들은 침체된 경제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퐁 장군의 5개년 재건 계획(퐁 플랜)은 생산 차량의 대부분을 수출용으로 할당하고, 엔진이 큰 차량을 포함하여 사치스러운 비필수품에 대한 처벌적인 세금 제도를 도입했다.[8] 1947년, 들라이예 생산량의 88%가 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프랑스 식민지로 수출되었다. 1948년 들라이예의 생산량(573대)은 시장 선두업체인 시트로엥의 34,164대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8]

전후 들라이예의 새로운 디자인은 산업 디자이너 필리프 샤본노가 자체적으로 스타일링했다. 구식 전전 모델인 Type 135와 148L의 생산은 현금 흐름을 재개하고, Type 175와 이보다 더 긴 휠베이스를 가진 두 가지 버전이 출시될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1946년에 재개되었다.[5] Type 175는 1938년에 구상되었을 때는 매우 현대적이었지만, 전쟁, 전후 부족, 그리고 디자이너의 사망으로 인해 생산이 1948년까지 지연되었다.

라이선스 계약이 체결되었고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들라이예는 Type 175의 생산을 진행했다. 그러나 서스펜션 부품이 치명적인 고장을 겪었고, 들라이예는 소송을 피하기 위해 다수의 차량을 다시 사들여야 했다. 부정적인 홍보의 위험이 너무 커서 회사는 이러한 사건에 대한 기록을 보관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효과적으로 억제될 수 없었고 잠재 구매자들 사이에서 무관심을 초래했다. Type 175, 178 및 180 모델은 개발 및 생산 비용을 회수할 만큼 충분한 판매량을 창출할 수 없었다.[5] 이들의 생산은 1951년 중반에 중단되었다.

1951년 초까지, 회사의 경정찰 차량 (VLR)에 대한 프랑스 군대의 지속적인 수요로 인해 회사는 운영을 유지할 수 있었다. Delahaye Type 163|들라이예 타입 163de 트럭에 대한 작지만 꾸준한 수요로 사업은 지급 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9]

1톤 용량의 경트럭(나중에 회사의 Type 235 고급차와 3.5리터 6기통 오버헤드 밸브 엔진을 공유)이 1949년 파리 모터쇼에서 Type 171로 데뷔했다.[9] 그 후 12개월 동안 Type 171은 구급차 및 9인승 "familiale" 변형을 포함하여 여러 브레이크 바디 버전을 파생시켰다. 이 차량은 프랑스의 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되었으며, 큰 바퀴와 높은 지상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브라질에도 수출되었다. 1952년까지, 매달 30대의 Type 171이 생산되었다.

1950년대 프랑스 군대 버전 VLR


들라이예의 마지막 완전한 새 모델인 들라이예 VLR (Véhicule Léger de Reconnaissance Delahaye)로 알려진 2리터 지프와 유사한 차량이 1951년에 출시되었다.[9] 프랑스 군대는 이 차량이 당시 전통적인 미국산 지프보다 많은 장점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1953년 동안, 회사는 1,847대의 VLR과 537대의 "특수" 군용 차량을 생산했다. 그 해에 36대 이하의 들라이예 또는 들라주 브랜드 승용차가 등록되었다.

1953년, Type 235가 출시되었다. 페르난드 르쿠르는 열정적인 소수의 공장 직원들과 함께, 바이펜바흐에게 기계식 브레이크 대신 유압식 브레이크를 장착하고, 3.6리터 Type 135 엔진의 트리플 Solex 탄화수소 버전을 장착한 Type 135의 업데이트된 버전을 도입하도록 설득했다.[5] 이 출력은 이전 시리즈와 거의 같았다. Type 235는 84대만 제작되었다.

들라이예의 경쟁업체인 홋키스는 카이저-윌리스 모터스와 라이선스 계약을 협상하고, 프랑스에서 윌리스 MB '지프'를 제조할 수 있는 승인을 얻었다. 프랑스 군대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는 더 단순한 기계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고, 더 정교한 들라이예 VLR에 대한 계약을 취소했다. 1953년 8월, 회사는 200명 이상의 직원을 해고했다.[10] 유사한 문제에 직면한 홋키스와의 합병이 논의되었다. 1954년 3월 19일, 들라이예 사장 피에르 페이네와 홋키스 사장 폴 리차드가 계약을 체결했다.[10]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6월 9일, 들라이예 주주들은 홋키스에 의한 들라이예의 인수를 수락했고,[10] 그 후 홋키스(Hotchkiss et Cie)는 즉시 들라이예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다. 1954년 말까지, 홋키스-들라이예 명판을 가진 트럭을 짧은 기간 판매한 후, 합병된 회사는 브란트에 의해 인수되었다. 1956년까지, 들라이예, 들라주, 홋키스 브랜드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5]

들라이예 타입 180 (1948년). 175의 롱 휠베이스 버전 대형 세단이지만, 이 클래스 시장은 전후 축소되었다


전쟁 전후에는 트럭 생산에 집중했던 들라이예였지만, 1948년에 「135」의 제조를 재개하며 승용차 분야에 복귀했다. 게다가 배기량을 4.5리터로 확대한 강력한 차량 「175」도 출시되었다.

전후의 들라이예는 전전의 「플람보아양」보다는 상식적으로 억제되었지만, 전후에도 잔존한 몇몇 카로셰에 의해 모던한 풀 와이즈 바디가 가공되었고, 자동 클러치식 코탈 프리셀렉터 기어박스 등의 장비와 더불어 프랑스를 대표하는 고급차로서의 지위를 나타냈다. 하지만 섀시 주변의 진보는 늦어져 브레이크 계통은 유압식이 아닌 전전 이래의 기계식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전 고급차 시장을 지탱해 온 왕후 귀족이나 부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대부분 몰락했다. 이에 더해, 전후의 프랑스에서는 부흥을 위한 생산이 우선시되었고, 고급차·고성능차에 대한 사치세적인 고액 과세가 이루어지게 되어 과세 출력 15CV를 넘는 클래스의 자동차는 쉽게 보유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1940년대 말기 이후 프랑스에서는 15CV 클래스의 대표차인 2.9리터의 시트로엥 트락시옹 아방 15CV-six (이것은 원래 고급차라기보다는 어퍼 미들 클래스의 실용차이지만)가 현실적인 오너카의 상한이 되었고, 대배기량으로 고가인 들라이예는 더 이상 유력한 시장을 잃어버렸다. 유압 브레이크나 듀보네식 전륜 독립 현가, 후륜에 드 디옹 액슬 도입 등 업데이트가 시도되었지만, 들라이예의 승용차 생산은 해마다 침체되었다.

들라이예 마지막 뉴 모델은 군용으로 1951년에 개발된 지프 타입의 사륜구동차였다. 실적 악화로 인해, 1954년에는 중견 메이커 오치키스(Hotchkiss)에 합병되어 승용차 생산은 중단되었다.

오치키스는 그 후 1년도 안 되는 동안, 연명의 「오치키스·들라이에」(Hotchkiss-Delahaye) 브랜드의 트럭을 생산했지만, 곧 「들라이에」라는 이름은 빠졌고, 이것으로 들라이예의 브랜드는 자동차 업계에서 소멸되었다.

3. 주요 모델


  • Delahaye type 1|들라예 1프랑스어 – 1895–1901
  • 들라예 44 – 1911–1914 – 최초의 양산 V6[4]
  • 들라예 134 – 1933–1940
  • 들라예 135 – 1935–1954
  • 들라예 138
  • 들라예 148
  • 들라예 168 – 1938–1940
  • 들라예 175 – 1948–1951
  • 들라예 178
  • 들라예 180
  • 들라예 235 – 1951–1954
  • 들라예 VLR – 1951–1954

4. 갤러리

들라이예 135 (1948)


들라이예 카브리올레 (1937)


들라이예 135


들라이예 135 카브리올레 푸르투(Pourtout)


들라이예 135M

참조

[1] 서적 Delahaye: Famous on Road and Race Track Orbis
[2] 인용
[3] 인용
[4] 인용
[5] 인용
[6] 인용
[7] 서적 Delahaye - La belle carrosserie française
[8] 간행물 Automobilia Histoire & collections
[9] 간행물 Automobilia Histoire & collections
[10] 간행물 Toutes les voitures françaises 1954 (Salon 1953) Histoire & collections
[11] 웹사이트 Bonhams : c.1906 Delahaye 10/12 CV Type 28 Roi-des-Belges 2062 https://www.bonhams.[...] 201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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