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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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1월,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창설된 나치 독일의 무장 친위대 소속 군단이다. 이 군단은 주로 라트비아 경찰대대와 징집병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부 전선에서 독일군을 위해 싸웠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강제 징집된 군인들은 예외로 했지만, 라트비아 군단의 구성원 일부가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었다는 의혹과 전쟁 범죄 연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매년 3월 16일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지만, 이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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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트비아 군단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 |
| 표어 | 신이여, 라트비아를 축복하소서! |
| 기본 정보 | |
| 명칭 (라트비아어) | Latviešu leģions |
| 명칭 (독일어) | Lettisch Legion |
| 활동 기간 | 1943년 1월 ~ 1945년 |
| 국가 | 라트비아 |
| 소속 | '* 무장친위대' '** VI SS 군단 (라트비아)' '*** 제15 SS 무장 척탄병 사단 (제1 라트비아)' '*** 제19 SS 무장 척탄병 사단 (제2 라트비아)' |
| 병과 | 보병 |
| 규모 | 1944년 7월 1일 기준 87,550명; 국방군 보조병력 23,000명 추가 |
| 지휘부 | |
| 주요 지휘관 | 카를 페퍼-빌덴브루흐 힌리히 슐트 프리드리히-빌헬름 보크 카를 프리드리히 폰 퓌클러-부르크하우스 루돌프스 방게르스키스 카를리스 로베 볼데마르스 베이스 아르비츠 크리펜스 볼데마르스 스카이스틀라우크스 아우구스트스 압시티스-압세 빌리스 야눔스 |
| 전투 및 작전 | |
| 주요 전투 | 동부 전선 (제2차 세계 대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포메른 공세 쿠를란트 포위전 베를린 전투 모레 교구 전투 탄넨베르크 선 전투 93.4 고지 전투 |
| 기타 | |
| 군가 | Zem mūsu kājām lielceļš balts (우리 발 아래 흰 고속도로) Trīnīte |
2. 창설 배경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1월 나치 독일 SS 수장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창설했다. 군단의 초기 핵심은 1941년부터 보안 임무를 위해 편성되어 국방군 지휘 아래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라트비아 경찰대대였다. 홀로코스트 가해자 아라이스 코만도는 반 게릴라 및 반 유대인 활동에서 해산된 후 전쟁 후반기인 1944년 12월에 군단에 합류했다.[8][9]
1941년 12월 로젠베르크 노동 칙령에 따라, 독일은 1942년 초부터 라트비아인을 징집하여 노동 봉사 또는 경찰대대에 가입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10] 군단 창설 한 달 후, 라트비아 주둔 독일 당국은 군사 연령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징집병은 국방군에 종속된 무장 친위대 군단 복무, 국방군 보조병 복무, 독일 노예 노동 수용소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 두 가지 옵션을 모두 피하려 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11] 그 결과, 군단 복무 남성의 15~20%만이 실제 자원병이었다.[12] 리투아니아와 달리, 라트비아의 잠재적 군단 징집병들은 징집에 대한 공식적인 보이콧을 조직하지 않았으나, 일부 라트비아인들은 나치 전쟁 노력에 복무하는 것 대신 탈영했다.[1]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징집은 점점 더 많은 라트비아인에게 확대되었다. 1943년 첫 징집은 1919년부터 1924년 사이에 태어난 모든 라트비아 남성에게 적용되었고, 이후 징집은 1906년에서 1928년 사이에 태어난 라트비아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사단 지휘관과 대부분의 참모는 독일 SS 장교였으며, 개별 전투 연대는 일반적으로 라트비아 장교가 지휘했다.
붉은 군대가 1943년 11월 제1 발트 전선을 따라 네벨에서 독일 전선을 돌파하여 라트비아로 진격하자, 라트비아 자치 행정부는 11월 13일에 독일로부터 동원령을 넘겨받았다. 1944년 6월 26일까지 라트비아 라트갈레 출신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7,671명이 라트비아 군단의 다양한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이 지역 남성의 10%였다.[13] 1944년 7월 1일, 라트비아 군단은 87,55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다른 23,000명의 라트비아인들은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11]
2. 1. 독일의 라트비아 점령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1월, SS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에 따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창설되었다. 군단의 초기 핵심은 1941년부터 보안 임무를 위해 편성되어 이미 국방군 지휘 아래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던 라트비아 경찰대대로 구성되었다. 홀로코스트 가해자인 아라이스 코만도의 구성원들이 나중에 군단에 합류했지만,[8] 이는 코만도가 반 게릴라 및 반 유대인 활동에서 해산된 후 전쟁 후반기인 1944년 12월에 첫 번째 아라이스 부대가 군단에 배속되면서 이루어졌다.[9]
1941년 12월 로젠베르크 노동 칙령에 따라, 독일은 이미 1942년 초부터 라트비아인을 징집하기 시작하여 노동 봉사 또는 경찰대대에 가입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10] 부대 창설 한 달 후, 라트비아 주둔 독일 당국은 군단을 위해 특히 군사 연령의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징집병은 국방군에 종속된 무장 친위대 군단에서 복무하거나,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거나, 독일의 노예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는 선택권을 받았다. 두 가지 옵션을 모두 피하려 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11] 그 결과, 군단에서 복무하는 남성의 15~20%만이 실제 자원병이었다.[12] 리투아니아와 달리, 라트비아의 잠재적 군단 징집병들은 징집에 대한 공식적인 보이콧을 조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라트비아인들은 나치 전쟁 노력에 복무하는 것 대신 탈영했다.[1]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징집은 점점 더 많은 라트비아인들에게 확대되었다. 1943년의 첫 번째 징집은 1919년부터 1924년 사이에 태어난 모든 라트비아 남성에게 적용되었다. 이후 징집은 결국 1906년에서 1928년 사이에 태어난 라트비아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사단 지휘관과 대부분의 참모는 독일 SS 장교였다. 개별 전투 연대는 일반적으로 라트비아 장교가 지휘했다.
붉은 군대가 1943년 11월 제1 발트 전선을 따라 네벨에서 독일 전선을 돌파하여 라트비아로 진격하자, 라트비아 자치 행정부는 11월 13일에 독일로부터 동원령을 넘겨받았다. 6월 26일까지 라트비아의 라트갈레 출신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7,671명이 라트비아 군단의 다양한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이 지역 남성의 10%를 차지했다.[13] 1944년 7월 1일, 라트비아 군단은 87,55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다른 23,000명의 라트비아인들은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11]
2. 2. 힘러의 요청과 히틀러의 승인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1월, SS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창설되었다. 군단의 초기 핵심은 1941년부터 보안 임무를 위해 편성되어 국방군 지휘 아래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라트비아 경찰대대였다. 홀로코스트 가해자인 아라이스 코만도는 반 게릴라 및 반 유대인 활동에서 해산된 후 전쟁 후반기인 1944년 12월에 처음으로 군단에 합류했다.[8][9]
1941년 12월 로젠베르크 노동 칙령에 따라, 독일은 1942년 초부터 라트비아인을 징집하여 노동 봉사 또는 경찰대대 가입 선택권을 부여했다.[10] 군단 창설 한 달 후, 라트비아 주둔 독일 당국은 군단을 위해 군사 연령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징집병은 국방군에 종속된 무장 친위대 군단 복무, 국방군 보조병 복무, 독일 노예 노동 수용소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두 가지 옵션을 모두 피하려 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11] 그 결과, 군단 복무 남성의 15~20%만이 실제 자원병이었다.[12] 리투아니아와 달리, 라트비아의 잠재적 군단 징집병들은 징집에 대한 공식적인 보이콧을 조직하지 않았으나, 일부 라트비아인들은 나치 전쟁 노력에 복무하는 것 대신 탈영했다.[1]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징집은 점점 더 많은 라트비아인에게 확대되었다. 1943년 첫 징집은 1919년부터 1924년 사이에 태어난 모든 라트비아 남성에게 적용되었고, 이후 징집은 1906년에서 1928년 사이에 태어난 라트비아인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사단 지휘관과 대부분의 참모는 독일 SS 장교였으며, 개별 전투 연대는 일반적으로 라트비아 장교가 지휘했다.
붉은 군대가 1943년 11월 제1 발트 전선을 따라 네벨에서 독일 전선을 돌파하여 라트비아로 진격하자, 라트비아 자치 행정부는 11월 13일에 독일로부터 동원령을 넘겨받았다. 6월 26일까지 라트비아 라트갈레 출신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7,671명이 라트비아 군단의 다양한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이 지역 남성의 10%였다.[13] 1944년 7월 1일, 라트비아 군단은 87,550명이었다. 다른 23,000명의 라트비아인들은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11]
2. 3. 초기 구성원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1월, 나치 독일 SS 수장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창설했다. 군단의 초기 핵심은 1941년부터 보안 임무를 위해 편성되어 국방군 지휘 아래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던 라트비아 경찰대대였다. 홀로코스트 가해자 아라이스 코만도의 구성원들은 나중에 군단에 합류했다.[8] 이는 코만도가 반 게릴라 및 반 유대인 활동에서 해산된 후 전쟁 후반기였으며, 1944년 12월에 첫 번째 아라이스 부대가 군단에 배속되었다.[9]1941년 12월 로젠베르크 노동 칙령에 따라, 독일은 1942년 초부터 라트비아인을 징집하여 노동 봉사 또는 경찰대대에 가입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10] 군단 창설 한 달 후, 라트비아 주둔 독일 당국은 군사 연령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징집병은 국방군에 종속된 무장 친위대 군단 복무, 국방군 보조병 복무, 독일 노예 노동 수용소행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두 가지 옵션을 모두 피하려 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11] 그 결과, 군단 복무 남성의 15~20%만이 실제 자원병이었다.[12] 리투아니아와 달리, 라트비아의 잠재적 군단 징집병들은 징집에 대한 공식적인 보이콧을 조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라트비아인들은 나치 전쟁 노력에 복무하는 것 대신 탈영했다.[1]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징집은 점점 더 많은 라트비아인들에게 확대되었다. 1943년 첫 징집은 1919년부터 1924년 사이에 태어난 모든 라트비아 남성에게 적용되었다. 이후 징집은 1906년에서 1928년 사이에 태어난 라트비아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사단 지휘관과 대부분의 참모는 독일 SS 장교였다. 개별 전투 연대는 일반적으로 라트비아 장교가 지휘했다.
붉은 군대가 1943년 11월 제1 발트 전선을 따라 네벨에서 독일 전선을 돌파하여 라트비아로 진격하자, 라트비아 자치 행정부는 11월 13일에 독일로부터 동원령을 넘겨받았다. 6월 26일까지 라트비아 라트갈레 출신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7,671명이 라트비아 군단의 다양한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이 지역 남성의 10%였다.[13] 1944년 7월 1일, 라트비아 군단은 87,55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다른 23,000명의 라트비아인들은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11]
2. 4. 강제 징집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1월, SS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에 따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창설되었다. 군단의 초기 핵심은 1941년부터 보안 임무를 위해 편성되어 이미 국방군 지휘 아래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던 라트비아 경찰대대였다. 홀로코스트 가해자인 아라이스 코만도의 구성원들이 나중에 군단에 합류했지만,[8] 이는 코만도가 반 게릴라 및 반 유대인 활동에서 해산된 후 전쟁 후반기인 1944년 12월에 첫 번째 아라이스 부대가 군단에 배속되면서 이루어졌다.[9]
1941년 12월 로젠베르크 노동 칙령에 따라, 독일은 이미 1942년 초부터 라트비아인을 징집하기 시작하여 노동 봉사 또는 경찰대대에 가입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10] 이 부대가 창설된 지 한 달 후, 라트비아 주둔 독일 당국은 군단을 위해 특히 군사 연령의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징집병은 국방군에 종속된 무장 친위대 군단에서 복무하거나,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거나, 독일의 노예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는 선택권을 받았다. 두 가지 옵션을 모두 피하려 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11] 그 결과, 군단에서 복무하는 남성의 15~20%만이 실제 자원병이었다.[12] 리투아니아와 달리, 라트비아의 잠재적 군단 징집병들은 징집에 대한 공식적인 보이콧을 조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라트비아인들은 나치 전쟁 노력에 복무하는 것 대신 탈영했다.[1]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징집은 점점 더 많은 라트비아인들에게 확대되었다. 1943년의 첫 번째 징집은 1919년부터 1924년 사이에 태어난 모든 라트비아 남성에게 적용되었다. 이후 징집은 결국 1906년에서 1928년 사이에 태어난 라트비아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사단 지휘관과 대부분의 참모는 독일 SS 장교였다. 개별 전투 연대는 일반적으로 라트비아 장교가 지휘했다.
붉은 군대가 1943년 11월 제1 발트 전선을 따라 네벨에서 독일 전선을 돌파하여 라트비아로 진격하자, 라트비아 자치 행정부는 11월 13일에 독일로부터 동원령을 넘겨받았다. 6월 26일까지 라트비아의 라트갈레 출신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7,671명이 라트비아 군단의 다양한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이 지역 남성의 10%를 차지했다.[13] 1944년 7월 1일, 라트비아 군단은 87,55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다른 23,000명의 라트비아인들은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11]
3. 편제 및 지휘 체계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1월 SS 수장 하인리히 힘러의 요청에 따라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으로 창설되었다. 군단의 초기 핵심은 1941년부터 보안 임무를 위해 편성되어 이미 국방군 지휘 하에 동부 전선에서 복무하고 있던 라트비아 경찰대대였다. 홀로코스트 가해자인 아라이스 코만도는 나중에 군단에 합류했지만,[8] 이는 코만도가 반 게릴라 및 반 유대인 활동에서 해산된 후 전쟁 후반기였으며, 1944년 12월에 첫 번째 아라이스 부대가 군단에 배속되었다.[9]
1941년 12월 로젠베르크 노동 칙령에 따라, 독일은 1942년 초부터 라트비아인을 징집하여 노동 봉사 또는 경찰대대에 가입할 수 있는 선택권을 부여했다.[10] 군단 창설 한 달 후, 라트비아 주둔 독일 당국은 군단을 위해 군사 연령의 남성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징집병은 국방군에 종속된 무장 친위대 군단에서 복무하거나,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거나, 독일의 노예 노동 수용소로 보내지는 선택권을 받았다. 이 두 가지 옵션을 모두 피하려 한 사람들은 체포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11] 그 결과, 군단 복무 남성의 15~20%만이 실제 자원병이었다.[12] 리투아니아와 달리, 라트비아의 잠재적 군단 징집병들은 징집에 대한 공식적인 보이콧을 조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라트비아인들은 나치 전쟁 노력에 복무하는 것 대신 탈영했다.[1]
나치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하자, 징집은 점점 더 많은 라트비아인들에게 확대되었다. 1943년의 첫 번째 징집은 1919년부터 1924년 사이에 태어난 모든 라트비아 남성에게 적용되었고, 이후 징집은 1906년에서 1928년 사이에 태어난 라트비아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붉은 군대가 1943년 11월 제1 발트 전선을 따라 네벨에서 독일 전선을 돌파하여 라트비아로 진격하자, 라트비아 자치 행정부는 11월 13일에 독일로부터 동원령을 넘겨받았다. 1944년 7월 1일, 라트비아 군단은 87,550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다른 23,000명의 라트비아인들은 국방군 "보조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11] 6월 26일까지 라트비아의 라트갈레 출신 라트비아의 러시아인 7,671명이 라트비아 군단의 다양한 부대에서 복무했는데, 이는 이 지역 남성의 10%를 차지했다.[13]
3. 1. 독일군 장교의 지휘
사단 지휘관과 대부분의 참모는 독일 SS 장교였다. 개별 전투 연대는 일반적으로 라트비아 장교가 지휘했다.[13]
4. 주요 전투 및 활동
라트비아 군단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여러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1943년 3월, 제2 라트비아 SS 여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투입되어 풀코보 천문대 인근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1943년 11월에는 제15 무장 SS 사단이 창설되어 프스코프주와 노브고로드주 등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1944년 2월 말, 두 부대는 소로타 강과 벨리카야 강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격렬한 전투를 이어갔다.
1944년 4월, 군단은 오포치카 인근으로 이동했으나, 6월에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여 7월 17일에는 라트비아-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1944년 8월과 9월, 제15 사단은 프로이센에서 재편성된 후 1945년 1월부터 단치히 근처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포메라니아로 후퇴했다.
1944년 10월, 제19 SS 무장척탄병 사단은 쿠를란트 포켓에 고립되어 1945년 5월까지 소련군과 격전을 벌였다. 특히 1944년 12월에는 소련군 소속 라트비아 부대와 교전하기도 했지만, 서로 총격전을 꺼리는 모습을 보였다.
4. 1. 동부 전선 투입
1943년 2월, 최초의 라트비아 군단 부대인 제2 라트비아 SS 여단이 창설되었다.[14] 1943년 3월 18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풀코보 천문대를 마주보고 첫 전투를 치렀으며, 1944년 1월 독일군이 후퇴할 때까지 레닌그라드 주변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1943년 11월, 제15 무장 SS 사단이 창설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처음에는 프스코프주의 오스트로프, 노보소콜니키 지역으로 보내졌지만, 독일군이 그곳에서 실패를 겪은 후 1944년 1월 노브고로드주의 벨레벨카 지역으로 이동했다가 한 달 뒤 후퇴했다. 1944년 2월 말, 두 부대는 소로타 강과 벨리카야 강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으며, 제2 여단은 제19 무장 SS 사단으로 개명되었다.[14] 이후 두 달 동안 이 진지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1944년 4월, 군단은 다른 부대로 교체되어 오포치카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바르도보-쿠데베르의 비교적 활동이 적은 지역으로 이동했다. 1944년 6월 그곳에서 공격을 받아 1944년 7월 10일에 후퇴했으며, 7월 17일에 라트비아-러시아 국경을 넘었다.
1944년 8월과 9월, 제15 사단은 새로운 신병 충원을 위해 프로이센으로 이동했다. 이 부대는 1945년 1월 22일에 전투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단치히 근처에서 훈련을 받았다. 당시 사단은 약 15,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1월과 2월에 단치히 근처에서 전투를 벌였고, 3월 초에 포메라니아로 후퇴했다. 4월 초에 사단은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약 1,000명이 쿠를란트 포켓의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해상으로 보내졌고, 나머지는 전투에서 사망했다. 4월 11일, 사단은 사단 전체를 쿠를란트로 이전하려는 계획에 대해 들었다. 전쟁이 끝났음을 알고 쿠를란트로 보내지면 결국 소련에 항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사단은 필요할 경우 독일의 반대 명령을 어기고 서방 연합군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
제19 사단은 라트비아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 1944년 10월,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의 진격으로 인해 쿠를란트 포켓의 모든 부대가 독일군 본대와 분리되었다. 이 부대는 1944년과 1945년 쿠를란트 포켓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에 벌어진 6번의 전투에 참여했다. 1944년 12월에 벌어진 세 번째 전투에서 소련군의 상대 부대에는 소련 점령 동라트비아에서 징집된 신병으로 구성된 제43 사단과 제308 사단 등 두 개의 라트비아 사단이 포함되었다. 전선 양쪽에서 라트비아 부대가 서로 마주쳤을 때, 그들은 매우 꺼렸고 때때로 총 한 발도 쏘지 않고 교전을 중단했다. 소련 사령부는 며칠 후 라트비아 사단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제19 사단은 쿠를란트 포켓의 다른 부대와 함께 1945년 5월 9일 전쟁이 끝날 때 소련군에 항복했다.[14] 그 후 거의 5만 명의 라트비아 병사들이 필터링 또는 굴라그 수용소에서 소련군 포로가 되었다.[7] 군단 병사 중 일부는 전쟁이 끝난 후 최대 10년 동안 숲의 형제들로 소련군과 계속 싸웠다.[15]
4. 2. 레닌그라드 포위전
1943년 3월 18일, 최초의 라트비아 군단 부대인 제2 라트비아 SS 여단은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풀코보 천문대를 마주보고 첫 전투를 치렀다. 이 부대는 1944년 1월 독일군이 후퇴할 때까지 레닌그라드 주변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14]4. 3. 쿠를란트 포켓 전투
1944년 10월,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의 진격으로 쿠를란트 포켓에 있던 제19 사단을 포함한 라트비아 군단 병력은 독일군 본대와 분리되었다.[14] 이들은 1944년과 1945년에 걸쳐 쿠를란트 포켓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에 벌어진 6번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1944년 12월에 벌어진 세 번째 전투에서는 소련군 측에 소련 점령하의 동부 라트비아에서 징집된 병사들로 구성된 제43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과 제308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등 두 개의 라트비아 부대가 포함되어 있었다.[14] 전선 양쪽에서 라트비아 부대들이 서로 마주치자, 이들은 서로 싸우기를 꺼려했으며 때로는 총격 없이 전투를 중단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을 인지한 소련군 사령부는 며칠 후 라트비아 부대들을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켰다.[14]
제19 사단은 쿠를란트 포켓에 고립된 다른 부대들과 함께 1945년 5월 9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소련군에 항복했다.[14] 항복 후, 약 5만 명의 라트비아 병사들이 소련군 포로가 되어 필터링 캠프나 굴라그 수용소로 보내졌다.[7] 일부 군단 병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최대 10년 동안 숲의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소련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다.[15]
4. 4. 종전
제19 SS 무장척탄병 사단은 라트비아에서 계속 전투를 벌였다. 1944년 10월, 리투아니아에서 소련군의 진격으로 쿠를란트 포켓의 모든 부대가 독일군 본대와 분리되었다.[14] 이 부대는 1944년과 1945년 쿠를란트 포켓에서 소련군과 독일군 사이에 벌어진 6번의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1944년 12월에 벌어진 세 번째 전투에서 소련군 측에는 제43 근위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과 제308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등 두 개의 라트비아 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소련 점령하의 동라트비아에서 징집된 신병으로 구성되었다. 전선 양쪽에서 라트비아 부대가 서로 마주쳤을 때, 그들은 교전을 꺼렸고 때로는 총 한 발도 쏘지 않고 교전을 중단하기도 했다. 소련 사령부는 며칠 후 라트비아 사단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제19 사단은 쿠를란트 포켓의 다른 부대와 함께 1945년 5월 9일 전쟁이 끝날 때 소련군에 항복했다.[14] 그 후 거의 5만 명의 라트비아 병사들이 소련군 포로가 되어 필터링 또는 굴라그 수용소로 보내졌다.[7] 일부 군단 병사들은 전쟁이 끝난 후 최대 10년 동안 숲의 형제들이라는 이름으로 소련군에 맞서 싸웠다.[15]5. 라트비아 군단병의 동기
라트비아 군단병들은 조국 독립에 대한 열망, 소련 재점령에 대한 깊은 두려움, 그리고 서방 연합군의 지원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있었다. 1940년과 1941년 사이 소련 점령기 "공포의 해"(Baigais gads|공포의 해lv) 동안 수만 명의 라트비아 가족들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된 경험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17]
군단병들은 1918~1920년의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서처럼 붉은 군대를 몰아내고, 나아가 나치 독일에도 맞설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제복 안에 라트비아 국기를 지니고 다니며, "우리는 그 이가 득실거리는 자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 그 후에 우리는 그 푸른 회색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20][21] (볼셰비키와 독일인을 완곡하게 표현함)[12]라는 노래를 부르며 독립 의지를 다졌다.
또한, 라트비아인들은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영국을 비롯한 서방 열강이 1918~1920년처럼 그들을 지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944년 11월 영국 지휘부로부터 발트해에 영국-미국 합동 함대가 진입할 때까지 쿠르란트를 지키라는 통신을 받은 것은 이러한 믿음을 더욱 강화했다.[23]
5. 1. 소련 재점령에 대한 저항

제15사단 사령관 아돌프 악스는 1945년 1월 27일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라트비아인이다. 그들은 지속 가능한 라트비아 민족 국가를 원한다. 독일과 러시아 중 선택해야 했을 때, 그들은 서구 문명과의 협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독일을 선택했다. 독일의 통치는 그들에게 두 악 중 덜한 것으로 보인다."[16] 이러한 관점은 1940년과 1941년 사이의 소련 점령 ("공포의 해"(Baigais gadslv))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발생했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라트비아 가족들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으며, 저항을 꺾기 위해 남자들은 여자와 아이들로부터 분리되었다.[17]
군단 지휘부는 라트비아인들이 소련의 재점령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강조했다. 징집병들은 신의 이름으로 독일군과 그 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에게 복종하고, 용감해지며, "볼셰비즘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맹세했다.[18] 군단병들은 라트비아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때까지 붉은 군대를 격퇴하고, 1918~1920년의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서 라트비아군이 볼셰비키와 독일군을 모두 몰아냈던 것처럼 나치 독일을 상대로 돌아서기를 희망했다. 군단병들은 이러한 희망의 상징으로 제복 안에 라트비아 국기를 지니고 다녔다.[19] 이러한 정서는 가장 인기 있는 군단 노래 중 하나에도 반영되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그 이가 득실거리는 자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 그 후에 우리는 그 푸른 회색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20][21] (볼셰비키와 독일인을 완곡하게 표현함).[12] 연합군은 1943년 이른 시기에 이를 확인했는데, 당시 영국 조사단은 라트비아인들이 소련 점령군과 독일 점령군 모두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2]
라트비아인들은 에스토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느 정도 리투아니아인들도 그랬듯이, 서방 열강, 특히 영국이 1918~1920년처럼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희망은 1944년 11월에 연합군으로부터 받은 통신으로 강화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 지휘부가 발트해에 영국-미국 합동 함대가 진입할 때까지 쿠르란트를 지키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23]
5. 2. 독립 국가 수호
제15사단 사령관 아돌프 악스는 1945년 1월 27일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라트비아인이다. 그들은 지속 가능한 라트비아 민족 국가를 원한다. 독일과 러시아 중 선택해야 했을 때, 그들은 서구 문명과의 협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독일을 선택했다. 독일의 통치는 그들에게 두 악 중 덜한 것으로 보인다."[16] 이러한 관점은 1940년과 1941년 사이의 소련 점령 ("공포의 해", Baigais gads|공포의 해lv)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발생했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라트비아 가족들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으며, 저항을 꺾기 위해 남자들은 여자와 아이들로부터 분리되었다.[17]
군단 지휘부는 라트비아인들이 소련의 재점령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강조했다. 징집병들은 신의 이름으로 독일군과 그 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에게 복종하고, 용감해지며, "볼셰비즘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맹세했다.[18] 군단병들은 라트비아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때까지 붉은 군대를 격퇴하고, 1918~1920년의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서 라트비아군이 볼셰비키와 독일군을 모두 몰아냈던 것처럼 나치 독일을 상대로 돌아서기를 희망했다. 군단병들은 이러한 희망의 상징으로 제복 안에 라트비아 국기를 지니고 다녔다.[19] 이러한 정서는 가장 인기 있는 군단 노래 중 하나에도 반영되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그 이가 득실거리는 자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 그 후에 우리는 그 푸른 회색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20][21] (볼셰비키와 독일인을 완곡하게 표현함).[12] 연합군은 1943년 이른 시기에 이를 확인했는데, 당시 영국 조사단은 라트비아인들이 소련 점령군과 독일 점령군 모두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2]
라트비아인들은 에스토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느 정도 리투아니아인들도 그랬듯이, 서방 열강, 특히 영국이 1918~1920년처럼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희망은 1944년 11월에 연합군으로부터 받은 통신으로 강화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 지휘부가 발트해에 영국-미국 합동 함대가 진입할 때까지 쿠르란트를 지키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23]
5. 3. 서방 연합군의 지원 기대
제15사단 사령관 아돌프 악스는 1945년 1월 27일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라트비아인이다. 그들은 지속 가능한 라트비아 민족 국가를 원한다. 독일과 러시아 중 선택해야 했을 때, 그들은 서구 문명과의 협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독일을 선택했다. 독일의 통치는 그들에게 두 악 중 덜한 것으로 보인다."[16] 이러한 관점은 부분적으로 1940년과 1941년 사이의 소련 점령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이 기간을 "공포의 해"(Baigais gadslv)라고 불렀다. 이 기간 동안 수만 명의 라트비아 가족들이 처형되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으며, 저항을 꺾기 위해 남자들은 여자와 아이들로부터 분리되었다.[17]군단 지휘부는 라트비아인들이 소련의 재점령에 맞서 싸우고 있음을 강조했다. 징집병들은 신의 이름으로 독일군과 그 사령관 아돌프 히틀러에게 복종하고, 용감해지며, "볼셰비즘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맹세했다.[18] 군단병들은 라트비아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을 때까지 붉은 군대를 격퇴하고, 1918~1920년의 라트비아 독립 전쟁에서 라트비아군이 볼셰비키와 독일군을 모두 몰아냈던 것처럼 나치 독일을 상대로 돌아서기를 희망했다. 군단병들은 이러한 희망의 상징으로 제복 안에 라트비아 국기를 지니고 다녔다.[19] 이러한 정서는 가장 인기 있는 군단 노래 중 하나에도 반영되었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우리는 그 이가 득실거리는 자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 그 후에 우리는 그 푸른 회색들을 물리칠 것이다 – 다시, 다시"[20][21] (볼셰비키와 독일인을 완곡하게 표현함).[12] 연합군은 1943년 이른 시기에 이를 확인했는데, 당시 영국 조사단은 라트비아인들이 소련 점령군과 독일 점령군 모두에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22]
라트비아인들은 에스토니아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어느 정도 리투아니아인들도 그랬듯이, 서방 열강, 특히 영국이 1918~1920년처럼 그들을 도울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희망은 1944년 11월에 연합군으로부터 받은 통신으로 강화되었는데, 그 내용은 영국 지휘부가 발트해에 영국-미국 합동 함대가 진입할 때까지 쿠르란트를 지키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23]
6. 전후 처리 및 논란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소련은 라트비아 군단이 1943년 나치 독일에 의해 불법적으로 징집되었으며, 전쟁 범죄나 홀로코스트에 연루된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28] 1960년대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소련 영화 ''모든 것을 기억한다, 리처드''는 소련 선전물이지만, 군단병들이 강제 징집된 최전선 병사들이며 나치 이념 지지자나 홀로코스트 가담자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라트비아 군단을 전범으로 비난하며 라트비아에 대한 정치적 압력 수단으로 사용하는 러시아의 입장과는 다르다.
1946년, 스웨덴 사회민주당 정부는 국내외 반발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으로 피신한 라트비아 군단, 에스토니아 군단, 리투아니아 병사들을 소련으로 강제 송환했다. 1990년대 스웨덴 정부는 이를 실수로 인정하고, 1994년 생존 발트해 참전 용사들을 초청하여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과 마르가레타 아프 우글라스 외무장관이 과거 송환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29]
레아니드 카지리츠키는 라트비아 군단 징집 절차의 특이성 때문에 강제성을 확신할 수 없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규정한 범죄 조직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30]
6. 1. 뉘른베르크 재판

1946년 뉘른베르크 재판은 무장 친위대를 범죄 조직으로 선언했지만, 강제로 징집된 사람들은 예외로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발트 군단에서 복무한 사람들은 자원병이 아닌 징집병으로 판결했다.[24]
1950년 4월 13일, 존 J. 맥클로이가 서명한 연합고등판무관부(HICOG)의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시지는 발트 군단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들은 '운동', '자원' 또는 'SS'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그들은 일반적으로 SS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훈련, 세뇌 및 입단을 받지 않았다."[25]
미국 이재민 위원회는 1950년 9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발트 친위대 부대(발트 군단)는 독일 SS와 목적, 이념, 활동 및 구성원 자격 측면에서 별개로 구분되어야 하며, 따라서 위원회는 그들을 미국 정부에 적대적인 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26]''
이 결정 이전에도 약 1,000명의 전 라트비아 군단 병사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을 경비하는 경비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그들은 베를린 공수 작전과 관련된 연합군 시설을 확보하는 데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미 육군 본부를 경비하기도 했다.[12][27]
6. 2. 미국의 입장
1950년 4월 13일, 존 J. 맥클로이가 서명한 연합고등판무관부(HICOG)의 국무장관에게 보낸 메시지는 발트 군단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그들은 '운동', '자원' 또는 'SS'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요컨대, 그들은 일반적으로 SS 구성원에게 주어지는 훈련, 세뇌 및 입단을 받지 않았다".[25]뉘른베르크 재판소와 연합고등판무관부의 전적인 지원을 받아, 미국 이재민 위원회는 1950년 9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 ''"발트 친위대 부대(발트 군단)는 독일 SS와 목적, 이념, 활동 및 구성원 자격 측면에서 별개로 구분되어야 하며, 따라서 위원회는 그들을 미국 정부에 적대적인 운동으로 간주하지 않는다."[26]''
이 결정 이전에도 약 1,000명의 전 라트비아 군단 병사들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나치 전범들을 경비하는 경비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그들은 베를린 공수 작전과 관련된 연합군 시설을 확보하는 데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미 육군 본부를 경비하기도 했다.[12][27]
6. 3. 소련의 입장
뉘른베르크 재판은 무장 친위대를 범죄 조직으로 선언했지만, 강제로 징집된 사람들은 예외로 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발트 군단 복무자들이 자원병이 아닌 징집병으로 판결했다.[24]소련 시대 동안, 라트비아 군단은 1943년 나치 독일에 의해 불법적으로 징집되었으며, 전쟁 범죄자이거나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었다는 징후는 없다고 묘사되었다.[28] 예를 들어, 1960년대(냉전 시대)에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소련 영화 ''모든 것을 기억한다, 리처드''(무삭제판에서는 ''바위와 부스러기''로도 알려짐)는 소련 선전 선동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군단 병사들과 관련하여 몇 가지 필수적인 측면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최전선 병사였고, 대부분 강제로 징집되었으며, 나치 이념의 지지자가 아니었고, 홀로코스트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는 라트비아 군단을 무장 친위대 전범으로 비난하고, 군단 문제를 라트비아에 대한 정치적, 이념적 압력을 가하는 데 사용하는 러시아의 탈소련 시대 입장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1946년,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스웨덴 연립 정부는 스웨덴 사회의 많은 부문에서 강력한 항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으로 도망쳐 그곳에 억류된 라트비아 군단 병사들(일부 에스토니아 군단 및 리투아니아 병사 포함)을 소련으로 송환했다. 1990년대에 스웨덴 정부는 이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했다. 생존한 발트해 참전 용사들은 1994년에 스웨덴으로 초청받았으며, 그곳에서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와 스웨덴 외무 장관 마르가레타 아프 우글라스를 만났고, 송환 관련 행사에 참여했다. 국왕과 외무 장관 모두 스웨덴이 과거에 발트해 군단 병사들을 소련으로 송환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29]
6. 4. 전쟁 범죄 연루 의혹
일부 라트비아 군단 구성원들이 과거 홀로코스트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특히 아라이스 코만도 소속 600명, 라트비아 극민족주의자 단체 ''페르콘크루스'' 구성원,[31] 및 기타 홀로코스트 관련자[32][8][33][34] 들이 군단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국제 군사법상 군단이 범죄 조직 기준을 충족하거나, 구성원 상당수가 전쟁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비난으로 이어졌다. 1945년 포드가지에서 발생한 폴란드 전쟁 포로 학살에 군단 병사들이 연루된 사실도 확인되었다.[35][30]하지만 빈스 헌트가 장교 및 병사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저술한 ''The Road of Slaughter; The Latvian 15th SS Division in Pomerania, January-March 1945''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강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핀란드 언론인이자 작가인 유카 리스라키는 아라이스 코만도 및 라트비아 보조 경찰 대대 소속 일부 구성원의 과거 전쟁 범죄를 근거로 57,000명에 달하는 모든 군단 구성원을 전쟁 범죄자로 낙인찍는 것은 전형적인 '연좌제'의 예라고 지적했다.[36]
7.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 추모의 날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 추모의 날은 매년 3월 16일에 열리는 기념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무장 친위대 소속이었던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들을 추모한다.
이 날은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와 러시아계 단체 간의 갈등을 야기하며,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기도 한다. 유럽 평의회의 인종 차별 및 불관용 반대 위원회(ECRI)는 라트비아 정부에 무장 친위대 관련 기념 행사를 비난하고 나치즘을 정당화하는 행위를 금지할 것을 권고했다.[40][41][42][43] 리처드 하위트 유럽 의회 의원은 이 날의 기념 행위가 나치즘을 기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44][45]
7. 1. 제정 배경
전쟁 이후, 16일은 서방으로 망명한 라트비아 군단 재향 군인 단체인 Daugavas Vanagi|다우가바스 바나기lv에 의해 라트비아 군단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제15 및 제19 무장 친위대 사단이 벨리카야강 동쪽 강둑의 "93.4" 언덕에서 벌인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9/90년부터 라트비아에서 공개적으로 기념되어 왔다.[37] 1998년 세이마는 이 날을 "라트비아 군인 추모의 날"로 공식 인정했다. 이는 "라트비아 군단 추모의 날" 제정을 추진하던 조국과 자유/LNNK와 라트비아의 국제적 평판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연립 정부 구성원들 사이의 타협안이었다.[38]최근 몇 년 동안 16일 행사는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예: 국민 연합, 국가 권력 통일)와 주로 러시아계 단체(라트비아 러시아 연합) 간의 대립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들은 라트비아 군단을 지지하는 행진을 벌이는 반면, 러시아계 단체들은 항의 시위를 벌이며 행진을 막으려 시도했다. 1998년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 추모의 날 공식 기념과 관련하여 특히 격렬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라트비아 관리들은 공식적인 기념을 자제하고 있다. 현재 라트비아 당국의 공식 입장은 이 날이 주로 재향 군인과 그 친족들의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39]
2012년 2월 21일, 유럽 평의회의 인종 차별 및 불관용 반대 위원회는 라트비아에 대한 보고서(4차 모니터링 주기)를 발표하여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비난했다.[40] ECRI는 매년 3월 16일에 열리는 무장 친위대의 라트비아 부대에서 싸운 군인들을 기념하는 모임 허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리가 나치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7월 1일에) 열리는 행사를 법원에서 허가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명했다.[41] 또한 전 외무 장관이 행진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42] ECRI는 "라트비아 당국이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난해야 한다. ECRI는 또한 당국이 나치즘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는 모든 모임이나 행진을 금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권고했다.[43] 2014년 3월 13일, 영국 노동당 유럽 의회 의원 리처드 하위트(유럽 의회 인권 소위원회 대변인)는 "지역 소년들이 강제로 친위대 제복을 입었든 자원했든, 그들의 행동을 기념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기억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나치즘 자체를 기리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44] 하위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무장 친위대 행진을 언급하며, 보수당이 라트비아 정부의 민족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은 것을 비판했다.[45]
7. 2. 공식 기념
전쟁 이후, 16일은 서방으로 망명한 라트비아 군단 재향 군인 단체인 Daugavas Vanagi|다우가바스 바나기lv에 의해 라트비아 군단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제15 및 제19 무장 친위대 사단이 벨리카야강 동쪽 강둑의 "93.4" 언덕에서 벌인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1989/90년부터 라트비아에서 공개적으로 기념되어 왔다.[37] 1998년 세이마는 이 날을 "라트비아 군인 추모의 날"로 공식 인정했다. 이는 "라트비아 군단 추모의 날" 제정을 추진한 조국과 자유/LNNK와 라트비아의 국제적 평판에 미칠 영향을 우려한 연립 정부 구성원들 간의 타협안이었다.[38]최근 몇 년 동안 16일 행사는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국민 연합, 국가 권력 통일)와 러시아계 단체(라트비아 러시아 연합) 간의 대립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들은 라트비아 군단을 지지하는 행진을 벌이는 반면, 러시아계 단체들은 항의 시위를 벌이며 행진을 막으려 시도한다. 1998년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 추모의 날 공식 기념식과 관련하여 특히 격렬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라트비아 관리들은 공식적인 기념을 자제하고 있다. 현재 라트비아 당국의 공식 입장은 이 날이 주로 재향 군인과 그 친족들의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39]
2012년 2월 21일, 유럽 평의회의 인종 차별 및 불관용 반대 위원회는 라트비아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비난했다.[40] ECRI는 매년 3월 16일에 열리는 무장 친위대의 라트비아 부대에서 싸운 군인들을 기념하는 모임 허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리가 나치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7월 1일에) 열리는 행사를 법원에서 허가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명했다.[41] 또한 전 외무 장관이 행진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42] ECRI는 "라트비아 당국이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난해야 한다. ECRI는 또한 당국이 나치즘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는 모든 모임이나 행진을 금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권고했다.[43] 2014년 3월 13일, 영국 노동당 유럽 의회 의원 리처드 하위트는 "지역 소년들이 강제로 친위대 제복을 입었든 자원했든, 그들의 행동을 기념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기억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나치즘 자체를 기리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44] 하위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무장 친위대 행진을 언급하며, 보수당이 라트비아 정부의 민족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은 것을 비판했다.[45]
7. 3. 논란
전쟁 이후, 서방으로 망명한 라트비아 군단 재향 군인 단체인 Daugavas Vanagi|다우가바스 바나기lv는 3월 16일을 라트비아 군단의 날로 지정했다. 이 날은 제15 및 제19 무장 친위대 사단이 벨리카야강 동쪽 강둑의 "93.4" 언덕을 놓고 벌인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9/90년부터 라트비아에서 공개적으로 기념되기 시작했다.[37] 1998년 세이마는 이 날을 "라트비아 군인 추모의 날"로 공식 인정했다. 이는 "라트비아 군단 추모의 날"로 제정하려는 조국과 자유/LNNK 정당과 이러한 움직임이 라트비아의 국제적 평판에 미칠 잠재적 영향력을 우려하는 연립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 사이의 타협안이었다.[38]최근 몇 년 동안 3월 16일 행사는 매우 대립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민 연합 및 국가 권력 통일과 같은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들은 라트비아 군단을 지지하는 행진을 벌이는 반면, 라트비아 러시아 연합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 단체들은 항의 시위를 벌이며 행진을 막으려 시도했다. 1998년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 추모의 날 공식 기념식과 관련하여 특히 격렬한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라트비아 관리들은 공식적인 기념을 자제하고 있다. 현재 라트비아 당국의 공식 입장은 이 날이 주로 재향 군인과 그 친족들의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39]
2012년 2월 21일, 유럽 평의회의 인종 차별 및 불관용 반대 위원회(ECRI)는 라트비아에 대한 보고서(4차 모니터링 주기)를 발표하여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비난했다.[40] ECRI는 매년 3월 16일에 열리는 무장 친위대의 라트비아 부대에서 싸운 군인들을 기념하는 모임 허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리가 나치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7월 1일에) 열리는 행사를 법원에서 허가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명했다.[41] 또한 전 외무 장관이 행진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42] ECRI는 "라트비아 당국이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난해야 한다. ECRI는 또한 당국이 나치즘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는 모든 모임이나 행진을 금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권고했다.[43]
2014년 3월 13일, 영국 노동당 유럽 의회 의원 리처드 하위트 유럽 의회 인권 소위원회 대변인은 "지역 소년들이 강제로 친위대 제복을 입었든 자원했든, 그들의 행동을 기념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기억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나치즘 자체를 기리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44] 하위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무장 친위대 행진을 언급하며, 보수당이 라트비아 정부의 민족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은 것을 비판했다.[45]
7. 4. 국제 사회의 비판
전쟁 이후, 서방으로 망명한 라트비아 군단 재향 군인 단체인 다우가바스 바나기(Daugavas Vanagilv)는 3월 16일을 라트비아 군단의 날로 지정했다. 이 날은 제15 및 제19 무장 친위대 사단이 벨리카야강 동쪽 강둑의 "93.4" 언덕에서 벌인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1989/90년부터 라트비아에서 공개적으로 기념되기 시작했다.[37] 1998년 세이마는 이 날을 "라트비아 군인 추모의 날"로 공식 인정했다. 이는 조국과 자유/LNNK 정당과 연립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 사이의 타협안이었다.[38]최근 몇 년 동안 3월 16일 행사는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와 주로 러시아 단체 간의 대립을 야기했다. 라트비아 민족주의 단체들은 라트비아 군단을 지지하는 행진을 벌였고, 러시아 단체들은 이에 항의하며 행진을 막으려 했다. 1998년 라트비아 군단 전몰자 추모의 날 공식 기념식과 관련하여 특히 격렬한 논란이 있었고, 라트비아 관리들은 공식적인 기념을 자제하고 있다. 현재 라트비아 당국의 공식 입장은 이 날이 주로 재향 군인과 그 친족들의 사적인 문제라는 것이다.[39]
2012년 2월 21일, 유럽 평의회의 인종 차별 및 불관용 반대 위원회는 라트비아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하여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행사를 비난했다.[40] ECRI는 매년 3월 16일에 열리는 무장 친위대의 라트비아 부대에서 싸운 군인들을 기념하는 모임 허가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리가 나치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7월 1일에) 열리는 행사를 법원에서 허가한 것에 대해 실망감을 표명했다.[41] 또한 전 외무 장관이 행진을 비난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42] ECRI는 "라트비아 당국이 무장 친위대에서 싸우고 나치와 협력한 사람들을 기념하려는 모든 시도를 비난해야 한다. ECRI는 또한 당국이 나치즘을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하는 모든 모임이나 행진을 금지할 것을 권고한다."고 권고했다.[43] 2014년 3월 13일, 영국 노동당 유럽 의회 의원 리처드 하위트는 "지역 소년들이 강제로 친위대 제복을 입었든 자원했든, 그들의 행동을 기념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기억을 모욕할 뿐만 아니라 나치즘 자체를 기리는 것이다."라는 견해를 담은 성명을 발표했다.[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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