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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카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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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라파엘 카레라는 1814년 과테말라에서 태어나 메스티소 출신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내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성장했고, 1838년 콜레라 유행을 틈타 원주민과 메스티소를 이끌고 과테말라시티를 장악하여 마리아노 갈베스 정권을 무너뜨렸다. 1839년 프란시스코 모라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과테말라의 완전한 독립을 이끌었고, 1844년 대통령에 취임하여 1847년 과테말라 공화국을 선포했다. 1848년 잠시 사임했지만, 이듬해 복귀하여 1851년 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1854년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 개선, 커피 수출 증진, 가톨릭 교회 부활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1865년 사망했으며, 과테말라의 독립과 보수 정권 수립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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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 카레라 - [인물]에 관한 문서

2. 일생과 업적

1814년 10월 24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태어난 라파엘 카레라는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 프란시스코 모라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1844년1851년에 각각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강압적인 독재 정치를 펼쳤고, 1865년 사망했다.[1]

카레라는 메스티소 출신으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2] 12세에 군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3] 1837년 콜레라 유행을 계기로 농민 봉기를 주도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1838년 과테말라 시티를 장악하고 자유주의 정권을 무너뜨렸다. 1839년 프란시스코 모라산의 군대를 격파하여 과테말라의 독립을 확고히 했다.

1844년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취임한 카레라는 1847년 과테말라 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1848년 자유주의 세력의 반발로 사임하고 멕시코로 망명했지만, 1849년 귀국하여 다시 권력을 잡았다. 1851년 다시 대통령에 취임했으며, 1854년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카레라 정권은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고 커피 수출을 촉진하여 과테말라의 경제를 발전시켰다.[2] 메스티소와 원주민의 행정 및 군대 참여를 허용했다.[2] 가톨릭교회를 부활시켰으며,[2] 그의 독재적이고 폭력적인 정치는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다.[2]

국외적으로는 멕시코의 과테말라 병합 시도를 좌절시키고,[2] 영국령 온두라스의 확대를 막았다.[2]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의 자유주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보수주의 체제를 확립했으며, 윌리엄 워커와의 전쟁에 참전했다. 1863년 엘살바도르를 침공하여 자유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보수 정권을 세웠다.[3]

1840년, 벨기에는 카레라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는 '콩파니 벨즈 드 콜로니자시옹'(Compagnie belge de colonisation)을 통해 이스아발의 산토 토마스 데 카스티야를 관리하도록 했다.[3]

2. 1. 유년 시절과 군 경력

라파엘 카레라는 1814년 10월 24일 과테말라시티의 칸델라리아 바리오에서 태어났다. 미천한 출신으로 메스티소였으며 문맹이었다. 처음에는 농부로 일했다.[1]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2] 12세 때 중앙 아메리카 군에 입대하여 처음에는 고수 역할을 맡았다.[3] 1826년부터 1829년까지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 내전에 참전했다.[1]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빠르게 승진했지만,[2] 1829년 프란시스코 모라산이 이끄는 자유주의파 군이 과테말라시티를 점령하자 군을 떠나[3] 계절 노동자가 되었다.[3] 1835년 군대를 떠나 마타퀘스쿠인틀라로 이주하여 페트로나 가르시아와 결혼했고, 돼지치기로 일했다.[1]

2. 2. 권력 장악 과정

1837년 무렵, 과테말라의 자유주의 정부에 대한 농촌 대중의 불만이 커졌다.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민중 저항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콜레라 전염병의 확산은 이러한 불만에 공포를 더했고, 라파엘 카레라가 농민들을 이끌고 무장 저항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교회는 카레라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카레라는 과테말라 대부분 지역, 특히 '산'으로 불리는 동부 및 남부 지역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대규모 봉기를 이끌었다. 이 봉기는 자유주의에 의해 억압되었던 식민지 시대의 종교 기관과 전통을 되살리려는 움직임이었다.

프란시스코 모라잔은 여러 차례 카레라의 군대를 도시와 마을에서 몰아냈지만, 모라잔의 군대가 떠나면 카레라의 추종자들이 다시 그곳을 점령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카레라는 거의 10년 동안 군사 지휘관으로서 만족하며 추종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보수적인 크리오요들은 프란시스코 모라잔의 과테말라 침공 이후 잃었던 권력과 특권을 되찾기 위해 카레라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빼앗긴 과테말라 엘리트의 자리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했다.

2. 2. 1. 모라산과의 전투

카레라는 게릴라 전술과 정규 전투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전쟁 방식을 활용하여 모라산의 군대에 맞섰다.[2] 그의 병사들은 장비가 부족했지만, 지역 민병대 훈련을 통해 과테말라 및 연방 정부의 우세한 병력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2]

1838년, 프란시스코 모라잔과 호세 프란시스코 바룬디아의 자유주의 세력이 과테말라를 침공하여 카레라의 장인을 처형하고, 그의 머리를 창에 꽂아 카레라 추종자들에게 경고했다. 카레라와 그의 아내 페트로나(Petrona)는 모라산에게 복수를 맹세했다. 모라산은 초토화 작전을 펼쳤지만, 카레라군은 산속에 숨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모라산이 과테말라 시티를 점령하고 자유주의 세력은 그를 구세주로 환영했지만, 모라산은 엘살바도르로 돌아가 중앙 아메리카 연방을 지키기 위해 싸워야 했다. 카레라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살라마(Salamá)를 점령하려다 패배하고 부상당한 채 탈출했지만, 게릴라전과 정규전을 결합한 전술로 병력을 재구성했다.[3] 이후 후티아파(Jutiapa) 분견대를 공격하여 전리품을 얻고, 과테말라 시티 근처 페타파(Petapa)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1839년 4월 13일, 카레라는 카를로스 살라사르 카스트로의 선의와 프란시스코 페레라의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 시티를 기습 점령했다. 카스트로 살라사르, 마리아노 갈베스, 바룬디아는 도망쳤고, 살라자르는 농부로 위장하여 국경까지 피신했다. 카레라는 마리아노 리베라 파스를 과테말라 국가 원수로 복귀시켰다.

호세 데 에스파냐 장군 프란시스코 모라산


1840년 3월 18일, 모라산은 1,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과테말라를 다시 침공했다. 카레라는 도망치는 척하며 모라산의 군대를 유인했고, 기습 공격으로 모라산 군대에 큰 피해를 입혔다. 모라산은 페루로 망명했고, 과테말라에서 그의 군대는 몰살당했다. 이 전투로 카레라의 지위는 확고해졌고, 모라산은 몰락했다.

2. 3. 로스 알토스 병합

케찰테낭고 묘지에 있는 영웅들의 묘비에 새겨진 로스 알토스 주(州)의 문장


1838년 4월 2일, 케찰테낭고에서 분리주의 단체가 과테말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는 로스 알토스 주를 창설했다.[4] 과테말라 자유당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들과 보수 정권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로스 알토스로 이동하여 엘살바도르에서의 망명을 끝냈다. 로스 알토스의 자유주의자들은 리베라 파스(Rivera Paz)의 보수 정부를 심하게 비판하기 시작했고, 자체 신문인 ''엘 포풀라르(El Popular)''를 통해 이러한 비판에 기여했다. 로스 알토스는 이전 과테말라 주의 주요 생산 및 경제 활동 지역이었고, 로스 알토스가 없이는 보수주의자들은 과테말라가 중앙 아메리카에서 패권을 유지하게 해준 자원의 상당 부분을 잃게 되었다. 그 후, 과테말라 정부는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하려 했지만, 중앙 아메리카 연방 의회의 승인을 받은 알텐세(altenses)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과테말라 정부는 로스 알토스를 진압하기 위해 카레라를 군 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카레라는 전직 멕시코 장교인 아구스틴 구스만(Agustin Guzman) 장군을 물리치고 케찰테낭고로 진격하여 자유주의자 대신 가혹하고 적대적인 보수 정권을 수립했다. 그는 모든 의원들을 소집하여, 처음 그에게 도전한 것이므로 관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두 번째가 있다면 자비는 없을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마침내, 구스만과 로스 알토스 주 수반인 마르셀로 몰리나(Marcelo Molina)는 과테말라 수도로 보내져, 1840년 2월 17일 개선 행진에서 전쟁의 전리품으로 전시되었다. 구스만의 경우, 쇠사슬에 묶인 채 피를 흘리는 상처를 입고 노새를 타고 있었다.

2. 4. 1840년 모라산의 두 번째 과테말라 침공

은 1829년 침공하여 아킨세나 가문과 정규 수도회의 구성원을 추방한 후 1840년에 과테말라를 두 번째로 침공하려 했다. 1840년 그는 라파엘 카레라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하여 중앙 아메리카에서의 그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었다.[4]

1840년 3월 18일, 자유주의적 카우디요 프란시스코 모라산은 로스 알토스에서 일어난 모욕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1,500명의 병사를 이끌고 과테말라를 침공했다. 중앙 아메리카 연방을 유지하려는 자유주의적 노력이 종식될 것을 두려워한 과테말라는 엘살바도르와의 국경에 경비 병력을 배치했으며, 전신 서비스가 없었기에 병사들은 마지막 순간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달렸다.[4] 이 전령들의 정보로 라파엘 카레라는 도시에서 약간의 저항만을 보인 부대를 담당하는 그의 형제 소테로에게 방어 계획을 세웠다.[4] 카레라는 도망가는 척하며 몇 안 되는 병사, 몇 자루의 소총, 두 개의 낡은 대포를 가지고 애세이투노 고지로 자신의 초라한 군대를 이끌었다. 스무 개의 교회의 종이 신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울리며, 도시는 모라산의 군대의 자비에 놓였다.[4] 모라산이 수도에 도착하자 그는 쉽게 수도를 점령하고 로스 알토스 주 수반이었던 구즈만을 석방했는데, 구즈만은 즉시 케찰테낭고로 가서 카레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4] 그런 다음 카레라는 그의 적들이 믿는 것을 이용하여 도시의 중앙 공원에 포격을 집중하는 전략을 적용했고, 모라산의 군대에 막대한 사상자를 초래하여 결국 생존자들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 싸우도록 강요하는 기습 공격 전술을 사용했다.[6] 모라산의 군인들은 주도권을 잃고 이전의 수적 우위를 잃었다. 또한 도시의 낯선 환경에서 그들은 싸우고, 죽은 자를 옮기고, 부상자를 돌봐야 했으며, 엘살바도르에서 과테말라까지의 긴 행진으로 인해 분노하고 피로했다.[6] 당시 경험 많은 군인이었던 카레라는 모라산을 철저하게 물리칠 수 있었다.

자유주의적 장군에게 재앙은 완벽했다. 도시의 거리를 잘 아는 안젤 몰리나의 도움을 받아[6] 그는 "카레라 만세!"를 외치며 자신의 가장 좋아하는 병사들과 변장하고 엘살바도르로 향하는 ''엘 인시엔소'' 협곡을 통해 도망쳐야 했다.[4] 그가 부재하자 모라산은 그의 나라의 국가 원수에서 물러났고, 페루로 망명해야 했다.[6] 과테말라에서는 그의 군대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자비 없이 총살되었고, 카레라는 모라산을 성공적으로 추격하지 못했다. 이 교전으로 카레라의 지위가 굳건해졌고 모라산의 쇠퇴가 시작되었다.[4]

2. 5. 벨기에 식민지

1840년, 벨기에는 중앙아메리카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카레라의 독립 운동을 외부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의 위임을 받은 '콩파니 벨즈 드 콜로니자시옹'(Compagnie belge de colonisation, 벨기에 식민 회사)은 이스아발의 산토 토마스 데 카스티야를 관리하게 되었는데[3], 이는 영국이 실패한 중앙 아메리카 동부 해안 상업 및 농업 회사를 대체한 것이었다.[3] 비록 이 식민지는 이 지역을 괴롭히는 풍토병으로 인해 결국 붕괴되었지만, 벨기에는 19세기 중반까지 카레라를 계속 지원했으며, 영국은 카레라 정권의 주요 사업 및 정치적 파트너였다.[4]

3. 제1차 대통령 임기 (1844-1848)

1844년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7] 1847년 3월 21일 행정 명령을 통해 과테말라를 독립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7]

1847년 과테말라 공화국 건국을 기념하는 카레라 장군의 초상화


1847년 과테말라 독립 공화국 선포 기념 주화


카레라는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극심한 보수주의에서 전통적인 온건주의로 국가를 되돌리고, 원주민, 당시 유카탄 카스트 전쟁에 공포를 느꼈던 ''크리오요''[스페인계 백인]와 자신 사이에서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848년, 자유주의자들은 여러 달 동안 국가가 혼란에 빠진 후 그를 권좌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카레라는 자발적으로 사임하고 멕시코로 떠났다. 새로운 자유주의 정권은 아야세니나 가문과 동맹을 맺고, 카레라가 과테말라 땅으로 돌아올 경우 처형하라는 법령을 신속하게 통과시켰다. 케찰테낭고 출신의 자유주의 크리오요들은 마리아노 파레데스가 대통령직을 맡기 위해 과테말라 시로 소환된 후 도시를 점령한 아구스틴 구스만 장군이 이끌었다. 그들은 1848년 8월 26일에 로스 알토스가 다시 독립 국가임을 선포했다. 이 새로운 국가는 엘살바도르의 바스콘셀로스 정권과 카레라의 숙적인 비센테와 세라피오 크루즈의 반군 게릴라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임시 정부는 구스만 자신이 이끌었고, 플로렌시오 몰리나와 페르난도 다빌라 신부가 내각 구성원이었다. 1848년 9월 5일, 알텐세 크리오요들은 페르난도 안토니오 마르티네스를 수반으로 하는 정식 정부를 선출했다.

3. 1. 유카탄 카스트 전쟁 지원

과테말라 북부 유카탄에서 원주민, 혼혈, 크리오요 인구 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사유 재산 확장에 반대하는 공동 토지 방어에서 비롯되었으며, 에네켄 생산 호황으로 더욱 심화되었다.[1] 부유한 유카테코 크리오요들은 에네켄 재배를 위해 농장을 시작했고, 이 농장들은 원주민의 공유지를 침범했으며, 원주민 노동자들은 학대와 저임금에 시달렸다.[1]

반군 지도자들은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과세를 언급했다. 하친토 팟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자유이지 억압이 아니다"라고 썼으며, 세실리오 치는 반군 산티아고 이만이 공물 징수를 계속했다고 덧붙였다.[1]

1847년, 마야 ''바타브''(지도자)인 하친토 팟의 재산에 무장한 원주민과 물자가 집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란을 두려워한 멘데스는 마누엘 안토니오 아이를 체포하여 처형하고, 여러 마야 마을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해했다.[1] 세실리오 치는 산티아고 멘데스가 "모든 인디언, 크고 작은 자들을 죽이러" 왔다고 썼다.[1]

1847년 7월 30일, 세실리오 치와 하친토 팟은 테피치를 공격하여 비마야족 인구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다. 1848년 봄, 마야군은 캄페체와 메리다의 요새 도시와 남서부 해안을 제외한 유카탄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유카테코 주지사 미겔 바르바차노는 메리다 대피령을 준비했다.[1]

바르바차노 주지사는 쿠바, 자메이카, 미국에 동맹을 요청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멕시코의 권한으로 복귀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유카탄은 1848년 8월 17일에 공식적으로 멕시코와 재결합했고, 유카테코군은 멕시코의 지원을 받아 원주민을 몰아냈다.[1]

1850년까지 원주민은 동남부에 두 개의 지역을 점령했으며, "말하는 십자가"의 출현에 영감을 받아 투쟁을 계속했다. 찬타 크루스는 마야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고, 반란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찬타 크루스는 독립 마야 국가 중 가장 큰 국가의 이름이자 현재 펠리페 카리요 푸에르토 도시의 수도 이름이 되었다.[1]

유카탄 정부는 1855년에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했지만, 양측 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영국은 찬타 크루스 마야를 "사실상" 독립 국가로 인정했다.[1]

3. 2. 멕시코 망명과 귀환

1848년, 자유주의 세력의 압력으로 카레라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자발적으로 멕시코로 망명했다.[5] 당시 새로운 자유주의 정권은 카레라가 과테말라로 돌아올 경우 사형에 처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5]

1849년, 카레라는 웨웨테낭고를 통해 과테말라로 귀환했다.[6] 그는 그곳에서 원주민 지도자들을 만나 뭉쳐서 승리해야 한다고 설득했고, 지도자들은 이에 동의했다.[6] 이로써 분리된 원주민 공동체는 카레라의 지도 아래 새로운 정체성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6]

4. 제2차 대통령 임기 (1851-1865)

라파엘 카레라는 1851년 다시 대통령에 취임했고, 1854년에는 종신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1] 그는 1865년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1]

카레라 정권은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를 개선하고 커피 수출을 촉진하여 과테말라의 경제를 발전시켰다. 또한 메스티소와 원주민이 행정 및 군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카레라는 가톨릭 교회를 1854년 부활시켰다. 그의 정치는 독재적이었지만,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고 교회를 존중했기에 상류층 및 성직자들은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국외적으로는 멕시코의 과테말라 병합 시도를 2차례 좌절시키고, 영국령 온두라스의 확대를 막았다. 1853년과 1854년 엘살바도르온두라스의 자유주의 정부를 전복시키고 보수주의 체제를 확립했으며, 1856년 윌리엄 워커와의 전쟁 당시 다른 국가들과 협력하여 과테말라를 중미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여시켰다. 1863년에는 엘살바도르를 침공하여 헤라르도 바리오스 정권을 무너뜨리고 프란시스코 두에냐스를 대통령으로 세웠다.
1854년 교황청과의 협약1854년, 카레라는 교황청과 협약을 맺어 과테말라 국민 교육을 가톨릭 교회에 위임하고, 교회 재산과 수도원을 존중하며, 의무적인 십일조를 부과하고, 주교가 국내 출판물을 검열할 수 있게 했다.[1] 그 대가로 과테말라는 군 면제 등의 혜택을 받았다.[1]
벨리즈 국경 문제1850년대 영국은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 해결을 시도했다. 영국은 니카라과 모스키토 해안에서 철수하고, 온두라스에 베이 제도를 반환했으며, 윌리엄 워커와 협상하여 온두라스 침략을 막으려 했다.[2] 또한 과테말라와 벨리즈 국경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카레라 정권의 큰 실수로 평가받는다.[2]

1859년 4월 30일, 영국과 과테말라는 와이크-아이시네나 조약을 체결하여[3] 과테말라는 벨리즈 영토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했다.[2]

4. 1. 라 아라다 전투 (1851)

카레라 행정부 시대의 과테말라시티 중앙 광장


카레라가 1849년 망명에서 돌아온 후, 엘살바도르의 대통령 도로테오 바스콘셀로스는 과테말라 자유주의자들에게 망명을 허용했고, 이들은 과테말라 정부를 여러 형태로 괴롭혔다.[5] 1850년 말, 바스콘셀로스는 과테말라와의 전쟁의 느린 진전에 조바심을 느끼고 공개적인 공격을 계획했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보수적인 과테말라 정권에 대항하는 작전을 시작하며 온두라스니카라과에게 동맹을 제안했고, 후안 린도가 이끄는 온두라스 정부만이 이를 수락했다.[5]

마리아노 파레데스 대통령은 침략 계획을 미리 알고 예방 조치를 취했으며, 과테말라 대주교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가르시아 펠라에스는 평화를 위한 기도를 명령했다.[6]

1851년 1월 4일, 도로테오 바스콘셀로스와 후안 린도는 온두라스, 오코테페케에서 만나 과테말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엘살바도르군은 4,000명, 온두라스군은 2,000명으로 구성되었고, 동맹군은 메타판에 주둔했다.[5]

1851년 1월 28일, 바스콘셀로스는 과테말라 외교부에 서한을 보내 과테말라 대통령의 권력 포기와 카레라의 추방을 요구했다.[7] 과테말라 정부가 이를 거부하자, 1월 29일 동맹군은 과테말라 영토로 진입했다. 바스콘셀로스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호세 산토스 과르디올라, 라몬 벨로소, 호세 트리니다드 카바냐스, 헤라르도 바리오스 장군 등이 지휘했다. 과테말라는 카레라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2,000명의 병력을 모집했다.[5]

카레라의 전략은 퇴각하는 척하며 적군을 유인하는 것이었다. 1851년 2월 1일, 양군은 산 호세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카레라는 라 아라다의 기슭을 요새화했는데, 그 정상은 강의 수면보다 약 50m 높았다. 언덕과 강 사이에는 300m 깊이의 초원이 있었고, 초원에는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다. 카레라는 군대를 세 부분으로 나누고, 중앙 대대에 포병을 배치했다. 500명의 병력은 치키물라에 남아, 4,500명의 적을 상대로 1,500명의 과테말라 병사만 남았다.[8]

전투는 오전 8시 30분에 시작되어 세 곳에서 공격이 이루어졌다. 과테말라 포병이 침략자들을 공격하는 동안 전투는 혼전이 되었다. 카레라는 사탕수수 농장에 불을 질러 적군을 포위했다. 정면에는 과테말라의 화력, 측면에는 불길, 후면에는 강이 있어 동맹군은 퇴각하기 어려웠다. 동맹군의 중앙 부대가 공황 상태에 빠져 퇴각했고, 곧 모든 동맹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8]

동맹군의 최종 손실은 사망 528명, 포로 200명, 소총 1,000정, 탄약 13,000발, 많은 짐승과 수하물, 드럼 11개, 포병 7문이었다. 바스콘셀로스는 엘살바도르로 피신했고, 카레라는 군대를 재편성하여 엘살바도르, 산타 아나를 점령한 후, 과테말라 대통령으로부터 귀환 명령을 받았다.[8]

4. 2. 카레라 극장 건설

오페라 애호가였던 라파엘 카레라는 정부의 연인이자 전문 배우 겸 가수였던 호세파 실바[1]의 조언에 따라 자신의 이름을 딴 거대한 국립 극장인 «카레라 극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카레라 극장은 옛 중앙 광장에 위치해 있었다.[2] 옛 중앙 광장은 당시 마을보다 크지 않았던 과테말라 시티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고, 1776년 새로운 누에바 과테말라 데 라 아순시온의 첫 번째 블록을 배치하는 데 사용되었다.[3]

1832년 8월 6일, 당시 과테말라 주지사였던 마리아노 갈베스는 옛 중앙 광장 부지에 극장을 건설하라는 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자유주의 정당과 보수 정당 간의 내전이 격화되면서 갈베스가 실각하고 극장은 건설될 수 없었다.[4]

이 프로젝트는 1852년 후안 마테우와 마누엘 프란시스코 파본 아이시네나가 카레라에게 새로운 계획을 제시하면서 다시 검토되었다. 승인 후 카레라는 마테우와 미겔 루이스 데 산티스테반에게 극장 건설을 위임했다. 처음에는 엔지니어 미겔 리베라 마에스트레가 맡았지만, 몇 달 만에 그만두고 독일 전문가 호세 베커스로 교체되어 그리스 양식의 파사드를 건설하고 로비를 추가했다. 카레라 극장은 과테말라 공화국 시대에 건설된 최초의 기념비적인 건물이었으며,[4] 1850년대에 과테말라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신호였다.[5]

카레라 극장.


1858년과 1871년 사이의 과테말라 공화국 문장. 1892년 극장이 개조되기 전에 극장 앞면에 복제품이 조각되었다.

4. 3. 1854년 교황청과의 협약

1854년 협약은 라파엘 카레라와 교황청 간의 국제 조약으로, 1852년에 서명되어 1854년에 양측에 의해 비준되었다. 이 협약을 통해 과테말라는 과테말라 국민의 교육을 가톨릭 교회의 정규 수도회에 위임하고, 교회 재산과 수도원을 존중하며, 의무적인 십일조를 부과하고, 주교가 국내에서 출판되는 내용을 검열할 수 있도록 했다.[1] 그 대가로 과테말라는 군 구성원에 대한 면제를 받았고, 1829년 자유주의자들이 교회에서 몰수한 재산을 획득한 사람들이 해당 재산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교회 재산에서 발생하는 세금을 받았고, 과테말라 법에 따라 성직자들이 저지른 특정 범죄를 재판할 권리를 얻었다.[1] 이 협약은 후안 호세 데 아이시네나 이 피뇰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과테말라에서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재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강화했다.[1] 이 협약은 비센테 세르나 이 세르나 원수가 이끄는 보수 정부가 몰락할 때까지 효력을 유지했다.[1]

4. 4. 종신 대통령 선출 (1854)

1854년, 마누엘 프란시스코 파본 아이시네나의 반민주적인 발의로 카레라는 종신 대통령으로 선포되었으며, 후계자를 선택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1] 그는 1865년 4월 14일에 사망할 때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했다.[1]

카레라는 보수적인 지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제적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국내는 물론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와의 3년 전쟁 등 군사적 도전이 그의 대통령직을 지배했다.[1] 엘살바도르 대통령 헤라르도 바리오스와의 경쟁은 1863년 전쟁으로 이어졌다.[1] 코아테페케에서 과테말라 군대는 심각한 패배를 겪었고, 그 후 휴전이 이루어졌다.[1]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와,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는 과테말라와 동맹을 맺었다.[1] 이 경쟁은 결국 카레라에게 유리하게 마무리되었으며, 그는 산살바도르를 포위하고 점령했으며 온두라스와 니카라과를 지배했다.[1] 그는 성직자 정당과 협력하여 활동을 계속했고, 유럽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1] 카레라는 사망하기 전에 자신의 친구이자 충실한 군인인 육군 원수 비센테 세르나 이 세르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1]

1854년 라파엘 카레라가 과테말라 종신 대통령으로 임명된 포고령 사본

4. 5. 벨리즈 국경 문제

1840년 카레라가 집권했을 때, 벨리즈의 중요한 상업적 위치에서 과테말라의 이익을 감독하기 위해 이 지역에 과테말라 영사관을 설립했다.[1] 1855년까지 벨리즈의 상업은 번성했지만, 콜롬비아가 대양 횡단 철도를 건설하면서 상업이 태평양 항구로 더 효율적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이후 벨리즈의 상업적 중요성은 급격히 감소했다.[1]

1850년대에 영국은 중앙 아메리카 국가들과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다. 영국은 니카라과의 모스키토 해안에서 철수했고, 1894년 니카라과에 영토를 반환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온두라스에 베이 제도를 반환했으며, 미국의 필리버스터 윌리엄 워커와 협상하여 온두라스 침략을 막으려 했다.[2] 또한 과테말라와 벨리즈 국경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는데, 과테말라 사람들은 이 조약을 라파엘 카레라의 선출되지 않은 정권이 저지른 최악의 실수라고 불렀다.[2]

페드로 데 아이시네나 이 피뇰 외무부 장관은 영국 왕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859년, 윌리엄 워커의 위협이 다시 중앙 아메리카를 덮쳤고, 필리버스터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얻기 위해 카레라 정권은 영국과 벨리즈에 대한 조건을 받아들여야 했다. 1859년 4월 30일, 영국과 과테말라 대표 간에 와이크-아이시네나 조약이 체결되었다.[3] 이 조약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 첫 번째 6개 조항은 과테말라와 벨리즈의 국경을 명확하게 정의했다. 과테말라는 벨리즈 영토에 대한 영국의 주권을 인정했다.[2]
  • 일곱 번째 조항은 벨리즈 시티와 과테말라 시티 간 도로 건설에 관한 내용이었다. 벨리즈는 1855년 파나마에 대양 횡단 철도가 건설된 후 상업적 중요성을 잃어 과테말라의 태평양 해안과 소통할 방법이 필요했고, 과테말라는 대서양 해안과의 소통을 개선하기 위한 도로가 필요했기 때문에 상호 이익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도로는 건설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과테말라와 벨리즈가 도로의 정확한 위치에 합의하지 못했고, 이후 1871년 과테말라에서 보수당이 권력을 잃고 자유주의 정부가 조약을 무효화했기 때문이다.[4]

5. 사망

1865년 4월 14일 재임 중에 사망하면서,[9] 과테말라에서 보수파의 지배는 종말을 맞이했다.

6. 유산

카레라는 과테말라의 독립과 보수 정권 수립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는 독재적이고 폭력적이었지만,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는 평가도 있다.[10] 농촌 원주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지만, 자유주의자들의 자본주의적 개발로 인한 원주민 문화 파괴를 늦추었다.[10] 카레라 정권은 통합된 엘리트의 경제 통제, 군대의 사회 이동 수단 역할, 원주민 토지와 노동의 소외 등 이후 과테말라 정부의 기초를 세웠다.[10]

1854년 교황 비오 9세로부터 성 그레고리오 대교황 기사단 훈장을 받았다.[10] 그가 사망한 지 1년 후, 그의 얼굴과 "과테말라 공화국 창설자"라는 칭호가 새겨진 동전이 발행되었다.[10]

카레라는 보수 세력과 결탁하여 자유주의 개혁을 탄압하고, 원주민과 농민의 권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의 독재적인 통치 방식은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참조

[1] 문서
[2] 서적 Latin America's Martial Age. Warfare and Conflict in the Long Nineteenth Century Königshausen & Neumann 2017
[3] 서적 The Carrera Revolt and "Hybrid Warfare" in Nineteenth Century Central America Palgrave Macmillan 2017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웹사이트 1847: se funda la República de Guatemala https://www.prensali[...] 2018-03-20
[8] 문서 1854
[9] 웹사이트 Nace el general Rafael Carrera en 1814 https://www.prensali[...] 2016-04-14
[10] 문서 Biography of Rafael Carr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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