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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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1987년 민주화 이전에는 반공주의, 권위주의, 개발주의로 특징지어졌으며, 이후 신자유주의와 새로운 우파로 재편되었다. 개화기에는 개화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임시정부 내에서 다양한 노선으로 갈등을 겪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 시기와 이승만 정부를 거치며 반공주의를 강화했고,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경제 개발과 권위주의가 두드러졌다. 전두환 정부는 5.18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갔으며, 노태우 정부는 3당 합당을 통해 보수 세력을 결집했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를 표방하며 개혁을 추진했지만, IMF 외환 위기를 겪었다.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을 추진하며 남북 관계 개선에 힘썼고, 노무현 정부는 친일 진상 규명과 개혁 입법을 시도했다. 이명박 정부는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며 경제 살리기에 집중했고, 박근혜 정부는 규제 개혁과 기업 중심 정책을 펼쳤으나, 탄핵으로 조기 퇴진했다. 문재인 정부는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보수 세력과 대립했고, 현재 보수주의는 사회보수주의, 반공주의를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국가 안보를 중시하며, 반공주의, 신자유주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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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파 - 우파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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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파(주사파)는 주체사상을 지도 이념으로 삼는 세력으로, 1980년대 대한민국 학생운동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반미,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종북 논란과 함께 제도권 정당으로 진출하거나 뉴라이트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으며,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나 단체를 싸잡아 부르는 용어 오용 문제도 존재한다.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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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주의 | |
가치관 | 보수주의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녹색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기독교 보수주의 신보수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보수자유주의 반공주의 의회주의 대의민주제 |
스펙트럼 | 우익(중도우파~극우) |
관련 정당 | 한국독립당 대한국민당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한국국민당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 바른정당 바른미래당 우리공화당 새로운보수당 자유공화당 미래한국당 미래통합당 국민의힘 |
관련 단체 | 여의도연구원 뉴라이트 전국연합 어버이연합 박사모 자유주의연대 |
인물 | 김구 송진우 김규식 이승만 안재홍 박정희 박종홍 김종필 선우휘 김동길 이회창 이명박 박근혜 유승민 정병국 남경필 박형준 황교안 홍준표 |
보수주의 | |
주요 운동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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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 | (1772년 ~ 18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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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널드 | (1822년 ~ 188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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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레스 | (1862년 ~ 192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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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야나 | (1863년 ~ 19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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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턴 | (1874년 ~ 193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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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Jr. | (1925년 ~ 20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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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빔비 | (1934년 ~ 200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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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웰 | (1939년 ~ ) |
주요 이론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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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 (1709년 ~ 178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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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 | (1711년 ~ 17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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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 | (1729년 ~ 179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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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어 | (1745년 ~ 183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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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트르 | (1753년 ~ 182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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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날 | (1754년 ~ 18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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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토브리앙 | (1768년 ~ 184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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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 | (1772년 ~ 183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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뮐러 | (1779년 ~ 182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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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 | (1795년 ~ 18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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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먼 | (1801년 ~ 189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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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빌 | (1805년 ~ 18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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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 | (1821년 ~ 18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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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 | (1828년 ~ 1893년) |
스트라우스 | (1899년 ~ 197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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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숏 | (1901년 ~ 1990년) |
키널트레딘 | (1909년 ~ 199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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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크 | (1918년 ~ 199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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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클리 | (1925년 ~ 2008년) |
워 | (1939년 ~ 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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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러턴 | (1944년 ~ 20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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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친스 | (1951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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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슨 | (1962년 ~ ) |
주요 정치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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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스 | (1735년 ~ 18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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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람진 | (1766년 ~ 18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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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닝 | (1770년 ~ 182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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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테르니히 | (1773년 ~ 18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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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레일리 | (1804년 ~ 18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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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 (1815년 ~ 18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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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라스 | (1868년 ~ 19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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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 (1874년 ~ 196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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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자르 | (1889년 ~ 19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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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 | (1890년 ~ 19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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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 | (1892년 ~ 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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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 | (1911년 ~ 20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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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 (1912년 ~ 199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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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 (1925년 ~ 201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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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 | (1930년 ~ 2017년) |
2. 역사
1870년대에 태동한 개화파는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시작으로 여겨진다.[15][37] 1896년 서재필,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 개화파는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안경수, 박정양 등 정부 고위 관료와 남궁억, 안창호 등 지식인도 참여했다. 이완용도 독립협회에 참여했으나 제명당했다.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을 취했으며,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다. 당시 개화파는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는데,[15] 이는 당시 국가와 사회의 주류였던 수구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진보하자는 의미였다.
1907년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경희, 김구, 최광옥,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가 발전되었다. 신민회는 공화제를 이상향으로 설정하고,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데 기여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방식에 대한 대립이 생겼다. 민족주의 세력은 일본 제국에 대한 투쟁을, 공산주의 세력은 계급투쟁을 주장했다.[38] 같은 해 9월 11일에는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민주공화국 체제와 대통령제,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독립운동 방법론, 이념, 지역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임시정부는 창조파, 개조파, 임정고수파로 분열되었고, 김구는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39]
임시정부가 계파 갈등으로 위축되자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 및 면직되었다.[39]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932년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몬 사건), 윤봉길 의거(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했다. 훙커우 공원 사건을 계기로 임시정부와 중화민국의 제휴가 이루어졌다. 1940년에는 한국 광복군이 결성되었다.
해방 후 미군정기인 1945년 9월 16일, 김병로, 김준연, 백남훈, 송진우, 원세훈, 조병옥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김성수, 장덕수, 윤보선 등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되었다.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보수주의, 반공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하지만 친일파 정당[18][19][29]이란 비판을 받았다. 한민당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은 한민당이 '좌우합작 7원칙'을 비난하는 당론을 채택하자 약 1년만에 대부분 탈당했다.[28][42][43][44][45]
1945년 10월 23일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친일파 배제문제가 공전하자 좌파의 정당·단체들은 1945년 12월 13일과 14일 독촉중협에서 모두 탈퇴하였다.[48][49]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협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인사들은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는 자택에서 한현우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 1946년 4월 8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등을 체포하였다.
1946년 1월 2일 좌익진영은 신탁통치 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다.[53][54][55] 이로써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56]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
1946년 2월 9일, 북한은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토지 무상분배와 생산시설 국유화 등 공산화를 진행하였다. 이는 북한주민 상당수가 월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이승만, 김구 세력에 들어가거나 한민당에 들어갔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1946년 5월 6일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62][66] 1946년 7월 25일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다. 1947년 3월 1일 이승만이 도미 외교를 하는 동안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국민의회로 개칭하고, 독촉국민회는 국민의회를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봉대하였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으나 결렬되었다.[68][69] 1947년 9월 17일 미국 국무부 장관 조지 마셜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71]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설치를 결의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군정은 국민의회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소환하였다.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75] 1948년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은 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협상을 제안하였다.[77] 이는 이승만의 단선단정론에 대립하는 것이었으며 민족진영의 분열이었다.
1948년 3월 8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78]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여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사건 등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웠고,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9월 22일 제헌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사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이승만 정부의 방해와 친일세력의 이념공세로 인해 실패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 김구의 사망으로 인해 남북통일에 앞선 민족진영 3영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결합은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94]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이승만의 김성수 천거 무시와 농지개혁법 제정으로 한민당은 반이승만 노선으로 완전히 갈아탔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고, 6.25 전쟁 중인 1951년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이승만은 1951년 12월 17일 자유당을 결성하고 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한민당(민주국민당)과 연을 끊었다. 자유당은 보수주의·반공주의·권위주의·일민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독도를 확실하게 지켰다.
1952년 1~2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인해 이승만 정부는 민심을 잃었다. 국회로부터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진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꺼내들었다.
1952년 5월 25일 이승만 정부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반대세력을 헌병대에 연행하여 보복한 소위 부산 정치 파동이 벌였다.
1952년 7월 4일 오후 8시, 군경들은 무력충돌에 대비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였다. 의석정수 210석 중 166명이 출석한 가운데 기립투표 결과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101] 7월 7일 공포하였다.
1952년 8월 5일 직접선거제로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되었다.
한국 전쟁이 장기화되고 중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자 미국은 휴전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52년 3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이 북진통일론을 들고 나오자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휴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국이 공격당할 경우 미국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는 점을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약 25,000명의 반공 포로를 직권 석방시켰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앞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지 않으면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는 대신 휴전에 응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1953년 10월 1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108]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민 100만명 이상, 국군 28만여 명이 학살 당했고, 국민 30만여 명, 국군 70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수많은 국민들이 납북 당했으며(일부는 스스로 월북), 남한 내 공업 기반 절반과 국부의 1/4이 손실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초등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 등을 진행하여 1945년 78%였던 문맹률을 1958년 4.1%로 급감시켰고,[109] 총 학령아동의 취학률은 1957년 90%를 넘겼고, 1959년에는 96% 목표를 달성하였다.[110]
1954년 4월 20일, 제1차 교육과정이 제정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은 본인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제2차 개헌안(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켰고, 이에 김영삼은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1955)에 합류하였다. 이 개헌을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자유당은 집권 연장의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반대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5년 제네바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개최되면서 국내에 원자력이 처음 소개되었다. 원자력의 필요성을 느낀 이승만은 원자력요원의 양성을 지원하였고, 1차적으로 네 명의 원자력연수생들을 미국 알곤국립연구소에 파견하였다. 동시에 장기적인 원자력 인력양성을 위하여 1958년 4월 한양대학교에 40명 정원으로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였고, 이듬해 서울대학교에서 20명을 모집하였다.[112]
1956년 5월 13일 유엔 한국 위원회 대표 전원이 선거 감시 차 각 지방에 파견되었다. 1956년 5월 15일 직접 선거로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3선)되었으며,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6.25 전쟁의 결과로 대한민국으로 편입된 수복지구 유권자들이 참여한 첫 선거이기도 했다. 1956년 8월 15일 제3차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였다.
1958년 1월 1일 국회는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협상선거법은 자유당과 민주당의 이해가 절충된 법안이었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 삽입은 자유당이 본격적으로 부정선거를 기획할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으며,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에서 의도한 대로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고, 무소속과 군소정당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113]
195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주로 미국의 무상원조로 이루어졌고, 그만큼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은 원조 공여국이었던 미국의 목표대로 추진되는 측면이 컸다. 이승만 정부는 중공업 중심의 성장정책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한국을 일본 공산품시장으로 위치지우기 위해 안정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1955년부터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고 확대되기 시작하자 미국의 원조자금은 베트남을 향했다. 1957년 미국은 개발차관기금(Development Loan Fund)을 설치하여 대한민국 정부, 기업과 개인 사업자가 미국으로부터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이에 이승만 정부는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1962)을 완성했다. 시장 경제 원칙 하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사회기반시설을 조성하고 중공업 중심의 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혁명이 일어나고 4월 26일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동시에 자유당도 와해되고 민주당(1955) 주도로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1960년 제3차 개헌으로 내각 책임제가 채택되었다. 같은 해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고,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으나, 윤보선과 장면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했고, 이는 5·16 군사 정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다.[117]
1963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반공주의, 국가주의를 표방했다.[5] 제6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복구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5]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추진하여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다. 1967년에는 신민당이 창당되어 자유주의,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민주화를 요구했고, 김영삼, 김대중 등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공표하여 민족주의와 민족 주체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근대화를 추진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남북 간 대화의 물꼬를 텄으나, 같은 해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간접선거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총통제(總統制)를 실시했다.[5]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소를 준공하여 에너지 자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165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사망하고 3,139명의 민간인이 부상을 입는 등 대한민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118]
이러한 정치·사회적 혼란은 2차 석유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던 대한민국 경제에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1978년 9.3%였던 경제성장률은 1979년 6.8%, 1980년에는 -1.5%로 급락했다. 특히 1980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8.7%에 달해 서민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18]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제9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간접 선거와 7년 단임제를 도입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통금 해제, 교복 자율화 등 유화 정책을 펼쳤지만,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여 보수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이어갔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과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제10차 헌법 개정에서는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가 도입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 명시되었다. 이러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1987년 평화민주당이 창당되어 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반면, 신민주공화당은 보수주의와 충청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창당되었다.
1987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였다. 이들은 보수주의, 반공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되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스스로를 문민정부(文民政府)라 칭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하나회를 숙청하고,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다. 1995년에는 지방 자치제를 전면 실시하여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였다. 같은 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1997년 IMF 사태를 맞이하면서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창당되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연립정부인 DJP연합을 통해 IMF 사태를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였다.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되었으며, 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사회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참여민주주의, 실용주의, 개혁주의, 제3의 길 등의 이념을 표방하였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가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주도로 이루어졌으나, 국민들의 반발로 역풍을 맞았다. 2005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가 발족되었고, 2007년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표방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11]
2008년에는 광우병 촛불 시위가 발생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이 추진되었다.[11]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 발생하여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다.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규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2014년에는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다. 2016년에는
2. 1. 개화기
일반적으로 대한민국의 보수주의 시작은 1870년대에 태동한 개화파로 본다.[15][37]1896년 서재필, 이상재, 이승만, 윤치호 등 개화파가 주도하고 안경수, 박정양 등 정부 고위 관료와 남궁억, 안창호 등 지식인이 참여한 독립협회가 결성되었다. 이완용도 독립협회에 몸담았으나 제명당했다. 개화파는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던 시기에 반청(反淸) 입장에 섰으며, 미국,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에 우호적이며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제기하였다. 이들은 '정동파' 또는 '외국인파'로도 불렸다. 당시 개화파는 '진보'라는 말을 좋아해 기회 있을 때마다 진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15] 이는 당시 국가와 사회의 주류였던 수구주의에서 보수주의로 진보하자는 의미였다.
1907년 이회영, 전덕기, 이동녕, 이시영, 이동휘, 안창호, 윤치호, 양기탁, 이경희, 김구, 최광옥, 김규식 등을 중심으로 기독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항일 비밀결사 조직 신민회가 발전되었다. 신민회는 실력 양성론 및 독립 전쟁론에 입각하여 공화제를 이상향으로 두었다. 신민회의 표면적 활동은 교육 계몽, 신식 학교 설립, 신학문 수용 등이 주 목적이었으며, 활동 지원은 상동감리교회 교인뿐만 아니라 주변 시장 상인, 개신교계에서 비밀리에 지원하였다. 또한 만주에 한국 독립군을 훈련할 신흥무관학교 훈련 기관 설립에 뿌리를 마련하였고, 이후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구성하는 역할을 하였다.
2. 2. [[일제강점기]]
1919년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 방식에 대한 대립이 생겼다. 민족주의 세력은 모든 조선 민족이 힘을 합쳐 일본 제국에 투쟁하자고 주장하며 애국계몽운동, 비밀 항일결사 운동, 해외 외교 활동 등을 전개했다. 공산주의 세력은 계급투쟁을 주장하며 주로 만주에서 항일파르티잔 활동을 했다.[38]1919년 3·1 운동 직후 여러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같은 해 9월 11일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상하이를 거점으로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헌법을 제정하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고, 민주공화국 체제와 대통령제, 3권 분리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초기부터 독립운동 방법론(외교독립론 대 실력양성론 대 무장독립론), 이념(민주주의,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 공산주의), 지역(기호파 대 서북파)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1919년 국제 연맹 위임통치 청원서 내용이 알려지자 무장독립론자들은 외교독립론자들을 비난했다. 1919년 제1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사회주의 세력 내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대립했고, 1921년 제2차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으로 민족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이 대립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주의 세력인 대한독립군단이 큰 피해를 입고 반공주의를 갖게 되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임시정부는 창조파, 개조파, 임정고수파로 분열되었고, 김구는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39]
임시정부가 계파 갈등으로 위축되자 1925년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 및 면직되었다.[39] 이승만은 구미위원부를 유지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1932년 이승만은 임시정부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고, 1933년 무임소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에 복귀하였다.
1931년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1932년 이봉창 의거(사쿠라다몬 사건), 윤봉길 의거(훙커우 공원 사건) 등을 지휘했다. 훙커우 공원 사건은 전 세계에 보도되며 큰 주목을 받았다. 김구는 중화민국 정부와 장제스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고,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와 중화민국의 제휴가 이루어졌다.
1940년 한국 광복군이 결성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25년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해체되었다.[40]
2. 3. 해방 후 [[한국의 군정기|미군정기]]
1945년 9월 16일, 김병로, 김준연, 백남훈, 송진우, 원세훈, 조병옥 등 국내 독립운동가들과 김성수, 장덕수, 윤보선 등 지주층을 중심으로 한 보수 우파정당인 한국민주당(한민당)이 결성되었다.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의 직접적인 전신으로, 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보수주의, 반공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하지만 1947년 미 군정의 적산 불하 정책을 찬성하였으며, 좌우합작 7원칙 반대[28] 및 일부 친일인사 구성[19] 때문에 친일파 정당[18][19][29]이란 비판을 받았다. 한민당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들은 한민당이 '좌우합작 7원칙'을 비난하는 당론을 채택하자 약 1년만에 대부분 탈당했다.[28][42][43][44][45] 한민당은 이 탈당 사태로 당내 결속을 강화하고 일원적인 당운영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당이 왜소화되어 이후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박태균 교수는 "이들이 독재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야당으로서의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된 이후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46][47] 미군정은 맥아더 포고령 제2조를 근거로 일제에 부역행위를 한 친일 관료, 경찰, 군인 출신 등 반민족인사들을 대거 고용하여 편입하였고, 우익 중에서는 한민당을 특히 지원하였다.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승만은 좌익, 우익, 임정 요인이 총망라된 독촉중협으로 미군정을 인수하고자 하였다. 이승만은 독촉중협에 조선공산당의 참여를 요구하였으나, 박헌영은 독촉중협의 집행부가 한국민주당과 국민당의 반동적이고 친일적인 인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꺼려하였다. 이승만이 그러한 인사들을 배제하겠다고 약속하자 조선공산당은 독촉중협에 참여하였다.[18]
그러나 이후의 독촉중협 회담에서 논의된 친일파 배제문제가 공전하자 박헌영이 반기를 들었다. 좌파의 정당·단체들은 그 최고사령탑인 박헌영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정도 유연성을 보이던 기타 좌익단체들까지 1945년 12월 13일과 14일 독촉중협에서 모두 탈퇴하였다.[48][49] 한편 임정 세력도 임정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정을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특별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49]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3상회의)에서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미·소·영·중 4개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를 협의하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인사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벌였다. 반면 한민당 송진우는 신탁통치 불가피론을 역설했는데 이것이 김구 세력의 반감을 샀다. 1945년 12월 30일, 송진우는 자택에서 한현우 등에 의해 암살되었다. 사건 전날의 정황상 한국민주당 측도 김구를 배후로 의심하였고, 그래서 사건의 진실과 무관하게 임시정부 측과 민주당 측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1946년 4월 8일 경기도경찰부는 송진우 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을 체포하였다. 경찰은 한현우가 국민대회준비위원회에서 송진우를 돕고 있던 자인데 그의 지휘하에 유근배, 김의현이 권총을 발사하여 송진우를 암살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50][51]
1945년 12월 30일 임정과 공산진영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점에 있어서 의견이 전부 일치하였었다.[52] 그런데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공화국 등 좌익진영은 3상회의 직후인 1946년 1월 2일을 기점으로 신탁통치 찬성(찬탁)으로 일제히 돌변했다.[53][54][55] 이로써 좌익과 우익의 분열이 노골화하였다.[56] 좌익의 찬탁표명에 대해서는 모스크바와 평양으로부터의 지령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57] 민족진영은 외세를 적이라고 보았고, 공산진영은 동족을 포함한 지주·자본가를 적이라고 보았다.[58]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정례기자단회견에서 3상회의 지지 즉 찬탁으로 급선회한 공산주의자들을 친일파와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결별을 선언하였다.
민족진영을 필두로 한 반탁진영이 활발히 갖춰졌다. 1946년 1월 21일 독촉중협과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통합하여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하고 이승만과 김구를 공동영수로 추대하였다.[59]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60] 1946년 2월 8일 독촉중협과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를 결성하고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였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로 개편되었고 이승만이 의장에 추대되었다.[61] 한편 '임시정부의 우익 편향화'를 운운하며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했던 세력들은 고스란히 찬탁진영이자, 민주의원의 반대진영이자, 좌익진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9일, 북한은 남한과의 협의없이 일방적으로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수립하고, 토지 무상분배와 생산시설 국유화 등 공산화를 진행하였다. 이는 북한주민 상당수가 월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조선인민당과 같은 공산주의 좌익세력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대부분 이승만, 김구 세력에 들어가거나 장덕수의 한민당에 들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1946년 11월 30일에 월남자들을 중심으로 서북청년단이 발족하기도 하였다.
1946년 3월 20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미국 측은 민주의원 중심으로 임시정부(과도정부)를 구성하자고 주장했고, 소련 측은 반탁세력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고 제안했다.[62] 1946년 4월 18일 과도정부 수립에 참여할 정당과 단체는 모스크바 3상회의 협정에 대한 지지를 약속하는 선언서에 서명해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공동성명, 즉 '공동성명 제5호(제5호 코뮤니케)'가 발표되었고,[63] 이어서 1946년 4월 27일 존 하지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더라도 반탁의견 발표를 보장하겠다는 특별성명을 냈다.[64] 1946년 5월 2일 비상국민회의, 독촉국민회,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한국독립당, 한국민주당 등 25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가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되 탁치를 전제로 한 일체 문제는 절대 배격한다"고 발표하며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하였다.[65] 그러나 소련은 '공동성명 제5호'에 서명했어도 신탁 통치 반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협의할 용의가 없다고 하였다. 결국 1946년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는 무기 휴회에 들어갔다.[62][66]
1946년 7월 25일 중도좌파 여운형과 중도우파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수립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때 미군정은 이승만, 김구가 아니라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했는데, 이는 좌익진영을 극좌파와 중도좌파로 구분하여 조선공산당과 같은 극좌파를 고립시키고 여운형 중심의 중도좌파 진영을 견인하여 우익 주도의 정국 구도를 짜기 위함이었다.[67] 1946년 10월에 한민당 대표로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한 원세훈, 김병로, 김약수 등 중앙위원 백여명을 비롯하여 평당원 수백여명이 좌우합작운동을 적대시하는 한민당의 정책 노선에 반발해 대량 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한민당은 이 탈당 사태로 당내 결속을 강화하고 일원적인 당운영이 가능하게 되었지만, 당이 왜소화되어 이후 상당한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었다. 박태균 교수는 "이들이 독재정권에 대항할 수 있는 야당으로서의 활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55년 민주당이 창당된 이후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46]
1947년 3월 1일 이승만이 도미 외교를 하는 동안 김구는 비상국민회의를 국민의회로 개칭하고, 독촉국민회는 국민의회를 임시정부의 법통으로 봉대하고, 같은 날 우익계 청년단체인 반탁전국학생연맹도 임시정부의 봉대를 결의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김구는 미군정 브라운 소장에게 정부를 임시정부에게 이양해달라고 했지만 거부 당했다. 4월 21일 귀국한 이승만도 임정법통론이나 임정봉대론은 적절한 시기가 올 때까지 일시보류하자고 하였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다. 1947년 7월 8일 소련은 제1차 미소공위 때와 마찬가지로 반탁세력을 과도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된다고 주장해서 미국과 이견을 보였고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었다.[68][69] 1947년 8월 28일 미군정은 한국문제를 미·영·중·소 4개국 외상회의에 넘겨 해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38선 이북에서 확고한 정권기초를 마련한 소련은 4개국 외상회의를 거부하였다.[70] 1947년 9월 17일 미국 국무부 장관 조지 마셜은 한국문제를 유엔에 이관했다고 발표했다.[71] 1947년 9월 21일, 유엔 총회에서 미국안이 가결되어서 분단문제는 유엔으로 이관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유엔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설치를 결의하였다.
이 당시에는 좌익과 우익 간에는 물론이고 우익 스펙트럼 내에서도 신탁통치 찬반문제와 단독정부수립 찬반문제 등으로 인한 각종 갈등과 분열이 있었다. 그럼에도 우익세력들 간에 합작하려는 노력은 꾸준히 있었다. 그렇지만 김구 세력과 한민당 간의 관계는 친일파 문제와 1947년 장덕수 피살 사건 등을 계기로 파탄났고, 호형호제 하던 이승만과 김구의 관계는 단정단선론 대 남북협상론의 노선 차이로 대립관계에 놓였으며,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 관계는 1948년 내각인선 과정에서의 갈등, 1950년 농지개혁법, 그리고 1951년 이승만의 자유당 창당을 계기로 완전히 파탄났다.
1947년 12월 2일, 장덕수 피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미군정은 국민의회와 김구를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고 소환하였다. 동시에 국민의회와 민대의 합동대회를 금지하였다. 1947년 12월 22일, 회동이 금지된 가운데 민대가 일방적으로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상대할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가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1947년 12월 26일 이승만과 김구가 이에 대해 원만히 합의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72][73]
1948년 1월 16일 "영도적 문제와 이념의 차이로 아직 원만한 합동을 보지 못하고," "합동이 된다 하여도 국민의회측에서 임정법통을 고집하고 민대측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려 함이 부동한 쌍방의 근본 주장인만큼 장래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보도가 나왔다.[74]
1948년 1월 23일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 소련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75] 그러자 1948년 1월 28일 김구는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에게 '미소양군이 철수하여 군정의 간섭없이 유엔 치안 하에 자유스러운 선거를 치러야 하며,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보냈다.[76] 1948년 2월 9일 김구와 김규식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의 크리슈나 메논에게 남북한 동시 총선거 성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재차 제안하였다.[77] 이는 남한 단독 총선거를 통해 국제적으로 공인된 정부를 수립한 뒤 압도적인 득표율을 근거로 소련을 쫓아내고 통일을 이루려던 이승만의 단선단정론에 대립하는 것이었으며 민족진영의 분열이었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단체와 언론이 남북협상론에 회의적이었다.
1948년 3월 8일 김구가 장덕수 피살 사건과 관련하여 재판정에 출석하자, 이승만은 김구의 장덕수 피살 사건 관련설을 믿을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78]
2. 4. [[이승만 정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이 시기에는 좌익과 우익 간의 대립이 극에 달하여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4월에는 남로당 김달삼의 주도 하에 제주 4·3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제주 4·3 사건 진압을 명령 받은 국군 제14연대가 남로당 김지회, 지창수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 여수·순천 사건이 발생했다. 이승만 정부는 좌우익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사회질서를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반공주의 정책을 내세웠다. 그리고 1948년 12월 1일에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9월 22일 제헌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였다. 1949년 1월 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본격적으로 사무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부는 노익환, 서용길 등 반민특위 위원과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 부의장 김약수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을 구속하였다. 1949년 6월 6일에는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 소속 특별경찰대를 습격하였다. 1949년 7월 6일 이인은 반민특위법 공소시효를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말일까지로 단축하는 반민법 개정안을 제출하였고, 이는 재석의원 136명 가운데 찬성 74표, 반대 9표로 가결되었다. 이에 위원장 김상덕을 비롯한 반민특위원들이 일제히 사임하였다. 1949년 10월 4일, 반민특위·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가 모두 해체되었다.
반민특위 실패의 일차적인 원인은 이승만 정부의 방해와 친일세력의 이념공세였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은 총회 결의 195(III)호에서,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통제 아래 대다수 주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선거가 치러진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그러한 합법 정부"'''임을 결의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승만은 7월 4일 경교장에 조문을 하였다. 김구의 장례식은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김구의 사망으로 인해 남북통일에 앞선 민족진영 3영수 이승만·김구·김규식의 재결합은 실패했고, 반민특위는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를 잃었다.[94]
1949년 6월 21일, 이승만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내각 구성 당시 이승만이 김성수의 천거를 무시했던 일에 더하여 농지개혁법까지 제정되자 한민당은 분노하여 반이승만 노선으로 완전히 갈아탔다.
1949년 12월 31일, 이승만 정부는 교육법을 제정하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구, 김규식 계열의 남북협상파와 무소속 계열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고, 6.25 전쟁 중인 1951년 발생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 등으로 인해 이승만 정권은 지지 기반이 약화되어갔다. 1951년 3월 14일 내각제개헌안에 대한 국회 무기명 투표 결과 재석 179인 중 찬성 79, 반대 33, 기권 66, 무효 1표로 부결되었지만,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였기 때문에 재선가도에 차질이 생겼다.[98] 대립 속에서 이승만은 1951년 12월 17일 자유당을 결성하고 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한민당(민주국민당)과 연을 끊었다. 자유당은 보수주의·반공주의·권위주의·일민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포하여 독도를 확실하게 지켰다.
1952년 1~2월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에 대한 미흡한 대처로 인해 이승만 정부는 민심을 잃었다. 국회로부터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진 이승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꺼내들었다.
1952년 5월 25일 이승만 정부가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반대세력을 헌병대에 연행하여 보복한 소위 부산 정치 파동이 벌였다.
1952년 7월 4일 오후 8시, 군경들은 무력충돌에 대비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였다. 의석정수 210석 중 166명이 출석한 가운데 기립투표 결과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101] 7월 7일 공포하였다.
1952년 8월 5일 직접선거제로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되었다.
한국 전쟁이 2년 이상 장기화되고 중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전선이 고착화하자 미국에서는 '무의미한 전쟁, 질질 끌지 말고 휴전협정 맺고 빨리 끝내자'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소련 및 중공과 휴전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52년 3월 분단 상태에서의 휴전은 한국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민족국가로 생존하기 위해 단독으로라도 계속해 싸워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승만이 북진통일론을 들고 나오자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휴전협정 체결 이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협상을 시작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휴전이 일단 성사되면 자신의 대미 협상력이 현저히 약화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휴전협정 체결 이후가 아닌 체결 이전에 '한국이 공격당할 경우 미국이 도와주러 올 것'이라는 점을 명시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미국에 북진통일론을 계속 주장하는 한편, 1953년 6월 18일 약 25,000명의 반공 포로를 직권 석방시켰다. 이승만은 휴전협정에 앞서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주지 않으면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이에 미국은 상호방위조약을 맺는 대신 휴전에 응할 것을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고, 1953년 10월 1일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었다.[108]
한국 전쟁에서 대한민국 국민 100만명 이상, 국군 28만여 명이 학살 당했고, 국민 30만여 명, 국군 70만여 명이 부상을 입었고, 수많은 국민들이 납북 당했으며(일부는 스스로 월북), 남한 내 공업 기반 절반과 국부의 1/4이 손실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초등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 등을 진행하여 1945년 78%였던 문맹률을 1958년 4.1%로 급감시켰고,[109] 총 학령아동의 취학률은 1957년 90%를 넘겼고, 1959년에는 96% 목표를 달성하였다.[110]
1954년 4월 20일, 제1차 교육과정이 제정되었다.
1954년 5월 20일, 이승만은 본인의 종신 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제2차 개헌안(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켰고, 이에 김영삼은 '이 당은 안 되겠다' 결심하고 동지들을 모아 10명과 함께 자유당을 탈당하여 민주당(1955)에 합류하였다. 이 개헌을 토대로 이승만은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3선 대통령의 뜻을 이루었고, 자유당은 집권 연장의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 자유당 내 양심적 의원들이 탈당하면서 점차 당의 정당성과 위력이 붕괴되어 갔다. 반대로 야당세력은 호헌동지회를 설립하면서 한데 뭉쳐 강력한 야당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955년 제네바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제회의가 개최되면서 국내에 원자력이 처음 소개되었다. 원자력의 필요성을 느낀 이승만은 원자력요원의 양성을 지원하였고, 1차적으로 네 명의 원자력연수생들을 미국 알곤국립연구소에 파견하였다. 동시에 장기적인 원자력 인력양성을 위하여 1958년 4월 한양대학교에 40명 정원으로 원자력공학과를 신설하였고, 이듬해 서울대학교에서 20명을 모집하였다.[112]
1956년 5월 13일 유엔 한국 위원회 대표 전원이 선거 감시 차 각 지방에 파견되었다. 1956년 5월 15일 직접 선거로 실시된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재선(3선)되었으며, 제4대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6.25 전쟁의 결과로 대한민국으로 편입된 수복지구 유권자들이 참여한 첫 선거이기도 했다. 1956년 8월 15일 제3차 이승만 정부가 출범하였다.
1958년 1월 1일 국회는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협상선거법은 자유당과 민주당의 이해가 절충된 법안이었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 삽입은 자유당이 본격적으로 부정선거를 기획할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으며,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선거에서 의도한 대로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고, 무소속과 군소정당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113]
195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 발전은 주로 미국의 무상원조로 이루어졌고, 그만큼 대한민국의 경제정책은 원조 공여국이었던 미국의 목표대로 추진되는 측면이 컸다. 이승만 정부는 중공업 중심의 성장정책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한국을 일본 공산품시장으로 위치지우기 위해 안정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런데 1955년부터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고 확대되기 시작하자 미국의 원조자금은 베트남을 향했다. 1957년 미국은 개발차관기금(Development Loan Fund)을 설치하여 대한민국 정부, 기업과 개인 사업자가 미국으로부터 낮은 이자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였고, 이에 이승만 정부는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1960~1962)을 완성했다. 시장 경제 원칙 하에서도 국가가 개입하여 사회기반시설을 조성하고 중공업 중심의 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1960년 4.19 혁명으로 계획은 전면 중단되고, 제2공화국에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재수립된다.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4.19 혁명이 일어나고 4월 26일에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동시에 자유당도 와해되고 민주당(1955) 주도로 허정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2. 5. [[대한민국 제2공화국]]
1960년 제3차 개헌으로 내각 책임제가 채택되었다. 같은 해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었고,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으나, 윤보선과 장면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했고, 이는 5·16 군사 정변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대한민국 제2공화국은 붕괴되었다.[117]2. 6. [[박정희 정부]]
1963년 대선에서 승리한 박정희는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보수주의, 국민보수주의, 반공주의, 국가주의를 표방했다.[5] 제6차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복구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실시했다.[5]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추진하여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다. 1967년에는 신민당이 창당되어 자유주의, 보수주의,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민주화를 요구했고, 김영삼, 김대중 등이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공표하여 민족주의와 민족 주체성을 강조했다. 1970년대에는 새마을 운동을 통해 농촌 근대화를 추진했다.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여 남북 간 대화의 물꼬를 텄으나, 같은 해 10월 유신을 단행하여 헌법을 개정하고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간접선거제를 도입하고 대통령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는 총통제(總統制)를 실시했다.[5]
1978년 고리원자력발전소를 준공하여 에너지 자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유신 체제는 붕괴되었다.
2. 7. [[최규하 정부]]
12·12 군사 반란과 5·17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165명, 군인 23명, 경찰 4명이 사망하고 3,139명의 민간인이 부상을 입는 등 대한민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다.[118]이러한 정치·사회적 혼란은 2차 석유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던 대한민국 경제에 더욱 큰 타격을 주었다. 1978년 9.3%였던 경제성장률은 1979년 6.8%, 1980년에는 -1.5%로 급락했다. 특히 1980년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8.7%에 달해 서민 경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18]
2. 8. [[전두환 정부]]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전두환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제9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통령 간접 선거와 7년 단임제를 도입했다. 전두환의 제5공화국은 통금 해제, 교복 자율화 등 유화 정책을 펼쳤지만, 민주정의당을 창당하여 보수주의, 권위주의,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권위주의적 통치를 이어갔다.1987년 6월 민주 항쟁과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제10차 헌법 개정에서는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가 도입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이 명시되었다. 이러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1987년 평화민주당이 창당되어 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반면, 신민주공화당은 보수주의와 충청지역주의를 기반으로 창당되었다.
2. 9. [[노태우 정부]]
1987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하였다. 이들은 보수주의, 반공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를 표방하였다.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가 시행되었다.2. 10. [[김영삼 정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되어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스스로를 문민정부(文民政府)라 칭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강조하였다. 하나회를 숙청하고,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였다. 1995년에는 지방 자치제를 전면 실시하여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실시하였다. 같은 해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1997년 IMF 사태를 맞이하면서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하여 한나라당이 창당되었다.2. 11. [[김대중 정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당선되어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다.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연립정부인 DJP연합을 통해 IMF 사태를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였다. 2000년에는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같은 해 새천년민주당이 창당되었으며, 자유주의, 중도개혁주의, 사회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를 이념으로 삼았다.2. 12. [[노무현 정부]]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었다.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는데, 자유주의, 사회자유주의, 참여민주주의, 실용주의, 개혁주의, 제3의 길 등의 이념을 표방하였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가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한나라당 주도로 이루어졌으나, 국민들의 반발로 역풍을 맞았다. 2005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반민규명위)가 발족되었고, 2007년에는 대통합민주신당이 출범하였다.2. 13. [[이명박 정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어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였다. 이명박 정부는 '작은 정부, 큰 시장'을 표방하며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였다.[11]2008년에는 광우병 촛불 시위가 발생하였고, 4대강 정비 사업이 추진되었다.[11]
2010년에는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이 발생하여 남북 관계가 경색되었다.
2. 14. [[박근혜 정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규제 개혁을 추진하였다. 2014년에는 통합진보당이 해산되었다. 2016년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발생하여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2017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이루어졌다.2. 15. [[문재인 정부]]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였다. 문재인 정부는 NL 계열과 PD 계열 인사를 중용하였다.[5]2020년에는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이 통합하여 미래통합당이 출범하였다. 미래통합당은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반공주의를 표방하였다. 이후 미래통합당은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13]
3. 가치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 대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법치주의, 삼권분립, 국가안보, 점진적 개혁 등을 지향한다.[15] 시대에 따라 반공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적 정치관이 추가되기도 하였다.[15]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며, 이승만 정부부터 전두환 정부까지는 국가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김영삼 정부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을 보인다.[15][200]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문화보수주의를 중시하지만, 기독교 유입이나 급격한 도시화 등에 따른 사회와 문화의 급격한 변화에는 순응하는 편이었다.[201][202][203][204]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북한 민간인은 환영하지만,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반민족세력으로 간주한다.[205][206] 남북통일 방략으로는 상호주의와 호혜주의를 주장한다.[207][208][209]
자신의 뿌리를 한국사에서 찾는다면 개화파 3세대(1890),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를 주로 지목하며, 한국인물사에서는 이승만, 김구를, 근현대 정당사에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1946), 자유당(1951)을 주로 지목한다.[116][178][179][210][211][212]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추구한다.
3. 1. 정치·경제관
고전적 자유주의, 대의 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법치주의, 삼권분립, 국가안보, 점진적 개혁 등을 지향한다.[15] 시대상에 따라 반공주의, 권위주의, 국가주의적 정치관이 추가되기도 하였다.[15]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시장경제 등을 지향한다.[15] 이승만 정부부터 전두환 정부까지는 국가자본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김영삼 정부 이후로는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을 보인다.[200]
성과주의와 복지주의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 더 좋은 성과를 낸 사람이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이 정의롭다고 본다.
- 우파는 부의 분배는 개인 성과에 비례하되, 인권과 복지는 개인 성과에 무관해야 한다고 본다.
- 극우파는 부의 분배, 인권, 복지 모두 개인 성과에 비례하여 차등적으로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3. 2. 사회·문화·세계·통일·역사관
자유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문화보수주의 등을 중시한다.[201] 사회보수주의와 문화보수주의를 중시하지만, 기독교 유입이나 급격한 도시화 등에 따른 사회와 문화의 급격한 변화에는 순응하는 편이었다.[202][203][204]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인다.[205] 북한 민간인은 환영하지만, 북한 정권과 북한군은 반민족세력으로 간주한다.[206] 남북통일 방략으로는 상호주의와 호혜주의를 주장한다.[207][208][209]
대한민국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뿌리를 한국사에서 찾는다면 개화파 3세대(1890),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를 주로 지목한다.[116] 한국인물사에서는 이승만, 김구를 주로 지목하며,[178][179] 근현대 정당사에서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1946), 자유당(1951)을 주로 지목한다.[210][211][212]
합리주의와 실용주의를 추구한다.
4. 비판
대한민국의 보수주의는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는다.
-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게 아니라는 비판'''
자유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경제적 자유는 인정하는 반면, 공산주의를 추종하려는 개인과 집단의 정치적 자유는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또한, 정치적 자유를 제한했던 권위주의 정권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여 진정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는 비판을 받는다.
반공주의와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와 냉전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안보를 지켜준 핵심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NLPDR 계열은 반공주의와 한미동맹으로 인해 개인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다.
- '''신자유주의 기조에 대한 비판'''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 및 1980년대의 재정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장 원리 강조, 구조조정, 민영화, 재벌 중심의 감세를 특징으로 하는 전 세계적 변화에 따라 한국 사회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행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권위주의 시대에 이어 현 시대에도 유산층을 위해 서민과 중산층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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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동지"라고 불러준 DJ,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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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보수세력 뿌리는 19세기말 개화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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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상하이로 건너간 이승만… 김구를 처음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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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탄핵’ 내용 담긴 독립신문 호외 최초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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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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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정국 3년] ⑤박헌영·여운형 ‘조선인민공화국’ 시도 물거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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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총무 원세훈, 합작7원칙 등에 대한 이념相違로 탈당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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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 청년부장 朴明煥 등 16명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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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順鐸, 한민당 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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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수, 손영극외 89인 한민당 탈당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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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당, 당원 탈당을 인정하고 당내 결속 위해 기구개혁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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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한국민주당 구성원의 성격과 조직개편(박태균) >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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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식의 정치비사] 대통령 스토리 이승만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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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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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 한현우, 유근배, 김의현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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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경찰부, 송진우암살범들의 취조결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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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앙 임정 외무부장, 반탁국민총동원위원회의 성격과 운영방침 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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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공, 3상회의결정지지 담화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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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 중앙인민위원회, 3상회의 결정 지지 전문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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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탁대회가 친탁대회로 취지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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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정당, 조공과 인공의 2일의 찬탁대회 반박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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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해방후 정당의 난립과 권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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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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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정치회의주비회, 독촉을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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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국민회의 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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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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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5주년] ⑩두 차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분단의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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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위 공동성명 제5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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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공위가 요청한 정당 및 사회단체의 선언서명에 관해 특별 담화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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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국민회의 및 휘하 단체, 공위 제 5호성명에 서명 합작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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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미소공위무기휴회에 관해 특별성명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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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합작위원회(左右合作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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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위 39·40차 본회의, 구두협의 대상문제로 격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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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공위경과에 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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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문제 유엔총회 상정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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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보부, 마샬이 유엔총회에서 행한 연설내용 전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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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김구간에 우익진영 통일 노력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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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회와 한국민족대표자대회, 명년 1월 8일에 합동대회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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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조선임위의 활동에 따른 각 정당단체의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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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 조선위원단의 북한 입경 정식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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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와 김규식, 메논의장에게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한 서신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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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김구의 장덕수살해사건 관련설 일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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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남북정치협상은 蘇각본-蘇민정사령관 레베데프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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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50차 국회본회의, 국회의장의 반민족행위자 정부위원 임명 승인에 반발하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 전원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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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世一의 비교 評傳 (110) 한국 민족주의의 두 類型 - 李承晩과 金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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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善 서울시 경찰국장, 金尙德·金相敦·盧鎰煥·金明東 등 반민특위 위원 4명을 가택침입 등 혐의로 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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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敦 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부위원장, 가짜조사관 문제에 대한 담화를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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審計院,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부정회계 사실을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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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民族行爲特別調査委員會, 金相敦 부위원장이 반민족행위처벌법에 해당된다는 소문을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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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相敦 과실치사사건 제1회 공판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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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의 노력, 실패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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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金九·金奎植 3영수 합작운동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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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奎植, 신년인사차 李承晩 대통령을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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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 개헌과 민족진영 통합 등의 정국 현안에 대해 기자와 문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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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과 金九, 덕수궁에서 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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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九, 李承晩·金奎植과의 3영수합작으로 민족단결이 시급하다고 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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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 대통령, 金九 서거에 대해 애도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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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청산의 노력, 실패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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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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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두 논란으로 바라본 6.25 남침전쟁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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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60년] 커밍스, 남침유도설 30년만에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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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52차 국회본회의, 내각제개헌안을 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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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개헌안 통과를 둘러싼 정계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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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발췌개헌안 통과와 개헌 내용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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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상과 한국내정에 관한 미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 앨리슨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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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논쟁] 대통령 결선투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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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동아/10월 27일] ‘대통령 직선제 도입’ 현행 헌법 개헌 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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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대통령 “임기내 개헌 완수”…정치권 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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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언제부터 '직접' 뽑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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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중국 공산당을 그냥 두고는 한국도 아시아도 세계도 평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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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진통일 위협과 미국의 이승만 제거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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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알아도 글 못 읽는 아이러니…'문맹률 제로' 신화 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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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무상교육]고교만 빠진 무상교육…2022년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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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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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 본 79년 이후 경제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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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도 1919년 임시정부 인정…독립공채 상환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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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당 탈당 도미노..창당 이래 최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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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대량해직'설립부터 취소'법외노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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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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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3인 자민련 입당]'의원 꿔주기'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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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원 해임안 가결… DJP 공조 파기,자민련 교섭단체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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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제주도지부, 김총장 발언 유감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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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부탁해]“DJ도 제주 4·3은 공산폭동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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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소대가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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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北에 구걸 말라…햇볕정책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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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박진 의원 “바이든 캠프, 햇볕정책 취지 좋지만 결과는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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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촌 김성수 선생, 각계 지도자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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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전라도 태생이라 집요하군요” 김대중 “김 위원장도 전주 김씨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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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돈·박원순 ‘권력형 성범죄’ 맞냐” 질문에 여가부 장관 ‘동문서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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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盧정부 반면교사 10년]‘정권 확성기’ 자임한 공영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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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미애, "盧 탄핵사유는 줄여도 책을 만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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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균, "친북반민족세력이 친일 조사해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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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국보법-친일법 둘러싸고 '치열한 5분 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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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규명법 개정안 만장일치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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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NL주사파 운동권 핵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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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령 의혹 김진홍 목사, 22억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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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란 대통령감 있어 2년 전 뉴라이트 운동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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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규명위 친일인사 704명 추가 발표(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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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민주, 분열=공멸 위기감에 “재결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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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민주당, 통합 떼고 '민주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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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 만들겠다" ‥ 李 당선자, 문재인 실장 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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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로 재조명 '4대강 사업' 효과는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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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 네번째 `4대강 감사`…"MB 위법성 판단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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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들 속은 타 들어가요"…전국 농민 '4대강 보 해체 반대' 상경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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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억 쏟아붓고 왜 허무나" 엔지니어가 본 4대강 보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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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뿌리이자 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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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현직 대통령 사상 첫 ‘독도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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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선동' 이석기 징역 9년 확정…'내란음모' 무죄(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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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드레스덴 구상'은 흡수통일 위한 대결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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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대통령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대한민국 법통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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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분석] NL(민족해방)계 출신 요직 장악 PD(민중민주)계 출신이 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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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정부 교육계 주류는 ‘전교조 네트워크’… 교육정책 ‘좌지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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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에 동의한다"…여성 62% vs 남성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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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지소미아 종료 비판은 신친일파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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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민주당, 친문 이해찬 수렴청정…허수아비 이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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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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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 안 한다” 정부 발표에 SNS선 “실망”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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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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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미아 종료.. 美, 韓정부에 방위비 폭탄 던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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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한국당 ‘영입 1호’ 김예지 “이해찬의 장애인 편견 없애드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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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더시민 대표 “이용수 할머니, 기억 왜곡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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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생각난다" 한마디에…'윤미향 지키기'로 일제히 돌아선 與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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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향 논란에 단체행동 나선 민주당…“친일세력의 부당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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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프레임 짜는 친문들 "정의연 공격하면 토착 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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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020-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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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망난 할망구" 친문 총궐기에…원희룡 "가해자 옹호하는 몰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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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당 극우와 달라" 강경 보수층과 선 긋는 통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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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한국남성, 베트남 여성 선호”…야당 “정신 나간 망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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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또 장애인 비하?…“선천적 장애인 의지 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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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라하다"는 이해찬…이번엔 서울 두고 "천박한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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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비정규직 정규화 멈춰라"…靑 청원 하루만에 20만 넘어(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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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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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부동산 증세 3법' 기재위 기습 상정… 통합당 "의회 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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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秋 증인채택 거부는 180석 의회 독재…국민은 몰라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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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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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부동산정책 더는 안믿어" 민주당원 탈당 인증샷 잇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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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33.4%, 통합 36.5%…탄핵 이후 지지율 첫 역전"[리얼미터](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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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비판 불식·당 색깔 바꾸기…백범 김구 추모식 찾은 통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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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영 "건국 이념 못지켜 자괴감"···이승만 55주기 추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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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기본소득, 사회주의 배급제도와 다름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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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희룡 "기본소득, 재정은 다 잡아먹고 복지효과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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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
뉴스
김종인 “기본소득제, '저소득층 최소 생계비'로 수정 도입해야”
https://news.naver.c[...]
2020-08-01
[183]
뉴스
이인영 "우리의 국부는 이승만 아닌 김구가 됐어야 했다"
https://news.naver.c[...]
2020-08-21
[184]
뉴스
"대한민국 만든 두 國父… 그들은 敵 아닌 협력자"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15-09-16
[185]
웹인용
김구, 3·1기념식에서 남한선거에 불응할 것 천명
http://db.history.go[...]
[186]
뉴스
"애국가 교체"…‘친일 논란’ 다시 불지피는 여당
https://news.naver.c[...]
2020-08-21
[187]
뉴스
"애국가 수정ㆍ교체 주장은 부당"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6-04-07
[188]
뉴스
하태경 “김원웅 발언 가장 미소지을 사람은 日극우”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189]
뉴스
秋비호에 "쿠데타 세력"꺼낸 홍영표…野 "민주당은 친일파 한민당 후예냐"
https://news.naver.c[...]
조선비즈
[190]
뉴스
"뿌리가 친일 지주"…윤영석, '쿠데타 세력' 발언 홍영표에 '멍군'
https://news.naver.c[...]
데일리안
2020-09-17
[191]
뉴스
조국·윤미향·추미애 '내로남불'에 민심 싸늘
https://news.naver.c[...]
매일신문
2020-09-15
[192]
뉴스
靑 '조국 지키기'에 진영 대결 극한 치달아…국론 분열 키웠다
https://news.naver.c[...]
한국경제
2019-09-29
[193]
뉴스
금태섭 민주당 전격 탈당 "편가르기, 내로남불, 말뒤집기" 비판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20-10-21
[194]
뉴스
진보논객 강준만 “文 내로남불, 정리하다 포기...거의 다 해당”
https://news.naver.c[...]
조선일보
[195]
뉴스
600m 가는데 6번 검문...시민들 “80년대 독재시절 거리 보는듯”
https://news.naver.c[...]
조선일보
2020-10-03
[196]
뉴스
외신기자 “이런 건 평양서도 못본 장면… 말 그대로 미쳤다”
https://news.naver.c[...]
조선일보
2020-10-10
[197]
뉴스
[데일리안 여론조사] 국민 51.5% "개천절 집회 경찰력 동원 과잉조치 아냐"
https://news.naver.c[...]
데일리안
2020-10-07
[198]
뉴스
"적대행위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동교동계 입당에 반발 확산하는 민주당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20-10-11
[199]
뉴스
동교동계 복당설에 與 공개반대…친문 '나갈 땐 언제고' 싸늘(종합2보)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20-10-11
[200]
웹사이트
자본주의(資本主義)
https://encykorea.ak[...]
[201]
뉴스
[정두언 칼럼] 보수주의가 지켜내야 할 가치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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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도시화(都市化)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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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유교 문화
https://terms.naver.[...]
세계문화사전
[204]
웹사이트
한국기독교회사(韓國基督敎會史)
http://encykorea.aks[...]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5]
뉴스
[전문기자 칼럼] '자유'와 '公益'이 보수 우파 양 날개 돼야
https://news.naver.c[...]
조선일보
2018-12-26
[206]
간행물
북한의 민족주의와 對南전략
http://monthly.chosu[...]
월간조선
2020-03-02
[207]
뉴스
“흡수통일 논할 일 아니다…6자회담 통해 북핵 폐기”
https://news.naver.c[...]
한겨레
2010-12-29
[208]
뉴스
진정한 光復은 統一이다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15-08-15
[209]
뉴스
김종인 "문 대통령서 통일 못들어봐"
https://news.naver.c[...]
이데일리
2020-07-08
[210]
뉴스
김종인, 당명에 `국민` 넣어…중도층 포용해 차기대선 정조준
https://news.naver.c[...]
매일경제
2020-08-31
[211]
웹인용
문 닫은 '미래통합당', 보수역사상 가장 짧았다
https://news.naver.c[...]
이데일리
2020-09-03
[212]
웹인용
[김태일의 정치시평]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그리고 새누리당
https://news.naver.c[...]
경향신문
201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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