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은 1953년 영국이 남·북 로디지아와 니아살란드(현재 말라위)를 통합하여 설립한 반독립 국가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백인 이민 증가와 흑인 노동력 유입으로 통합 움직임이 커졌지만, 흑인들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 반발과 독립 운동, 그리고 남로디지아 중심의 정책 추진으로 인한 갈등으로 1963년 해체되었다. 이후 니아살란드는 말라위로, 북로디지아는 잠비아로 독립했으며, 남로디지아는 로디지아 공화국을 거쳐 짐바브웨로 독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0세기 말라위 - 니아살랜드
니아살랜드는 영국령 중앙 아프리카 보호령에서 개칭된 영국의 보호령으로, 독립을 위한 노력과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탈퇴 후 말라위로 독립한 역사를 가진다. - 말라위의 역사 - 장미색 지도
장미색 지도는 19세기 말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에서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연결하는 식민 제국 건설을 시도한 정책으로, 영국과의 갈등으로 포기하게 되면서 포르투갈 정치에 영향을 주어 왕정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 말라위의 역사 - 니아살랜드
니아살랜드는 영국령 중앙 아프리카 보호령에서 개칭된 영국의 보호령으로, 독립을 위한 노력과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탈퇴 후 말라위로 독립한 역사를 가진다. - 잠비아의 역사 -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는 세실 로즈가 아프리카 분할을 위해 설립한 회사로, 로디지아 지역을 지배하며 광산 채굴, 토지 소유, 철도 건설 등을 수행했으나, 원주민과의 갈등과 논란 끝에 해체되었다. - 잠비아의 역사 - 북로디지아
북로디지아는 현재의 잠비아 지역으로,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의 통치와 영국 정부의 직접 통제를 거쳐 구리 광산 개발로 경제 성장했으나 아프리카인들의 저항 끝에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에서 해체 후 1964년 잠비아로 독립한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지도 | |
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
영어 명칭 | Federation of Rhodesia and Nyasaland |
다른 명칭 | 중앙아프리카 연방 |
지위 | 영국 식민지 및 자치령 |
표어 | Magni Esse Mereamur |
표어 (라틴어) | 위대함을 이루어 나가자 |
국 가 | 하느님, 여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 |
수도 | 솔즈베리 |
가장 큰 도시 | 솔즈베리 |
공용어 | 영어 |
사용 언어 | 영어 쇼나어 툼부카어 북은데벨레어 벰바어 체와어 |
정부 형태 | 연방 군주제 |
통화 |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파운드 |
시간대 | CAT |
UTC 오프셋 | +2 |
![]() | |
![]() | |
![]() | |
정치 |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독 | 존 제스틴 루웰린 남작 (1953–1957) 사이먼 램지 달하우지 백작 (1957–1963) 험프리 깁스 경 (1963) |
총리 | 고드프리 허긴스 말번 자작 (1953–1956) 로이 웰렌스키 경 (1956–1963) |
역사 | |
건국 | 연방 |
건국일 | 1953년 8월 1일 |
해체 | 해체 |
해체일 | 1963년 12월 31일 |
면적 및 인구 | |
면적 | 1,261,674 km² |
면적 (mi²) | 487,135 mi² |
인구 | 약 8,320,000 명 (1960년)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1 | 북로디지아 |
![]() | |
이전 국가 2 | 남로디지아 |
![]() | |
이전 국가 3 | 니아살랜드 |
![]() | |
이후 국가 | |
이후 국가 1 | 북로디지아 |
![]() | |
이후 국가 2 | 남로디지아 |
![]() | |
이후 국가 3 | 니아살랜드 |
![]() |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말라위 잠비아 짐바브웨 |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로디지아, 북로디지아, 니아살랜드 간의 경제적 유대가 강화되면서 백인 사회를 중심으로 세 지역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영국은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 확산을 막고 지역 통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를 지지하여, 각 지역의 자치권을 일부 보장하는 형태로 1953년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연방은 이름뿐인 다인종 국가였고, 실제로는 백인 소수가 정치·경제적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였다. 유권자 자격 제한 등을 통해 사실상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차별 정책이 시행되었으며, 이는 다수 흑인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니아살랜드에서의 봉기와 북로디지아에서의 노동 운동 등 저항이 계속되었고, 1960년대 아프리카 대륙의 탈식민지화 흐름 속에서 연방 탈퇴 및 독립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연방 체제는 내부의 모순과 외부의 압력으로 인해 지속 불가능해졌고, 남로디지아 백인 사회마저 연방 유지보다 분리를 선호하게 되면서 1963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1964년 니아살랜드는 말라위로, 북로디지아는 잠비아로 독립했으며, 남로디지아는 백인 정권의 로디지아 공화국 시기를 거쳐 1980년 짐바브웨로 독립하게 된다.
2. 1. 중앙 아프리카 위원회 (1945-1953)
1929년, 힐튼 영 위원회는 냐살란드와 북부 로디지아의 주요 이익이 동아프리카보다는 서로 간, 그리고 자치 식민지인 남부 로디지아와의 연관성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1938년 블레디슬로 위원회는 이 지역들이 모든 활동에서 상호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연방을 직접 권고하지는 않았다. 대신 정부 서비스 조정과 지역 개발 필요성 조사를 위한 지역 간 위원회 설립을 제안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이 기관의 설립은 1945년까지 미뤄졌고, 마침내 지역 간 정책 및 행동 조정을 촉진하기 위한 중앙 아프리카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남부 로디지아 총독이 위원회를 주재했으며, 다른 두 지역의 지도자들이 참여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구속력이 없는 자문 권한만을 가졌다.[7]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부 로디지아에는 백인 이민이 증가하면서 농업과 제조업이 발전했다. 또한 구리 광산으로 번영하던 북부 로디지아와 흑인 노동력 공급원이었던 냐살란드(현재의 말라위)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백인들을 중심으로 세 지역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초기에 반대했던 영국 정부도 아프리카인들의 식민지 독립 운동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연방제 도입을 지지하게 되었다. 각 지역의 독자적인 정책을 유지하고, 연방 성립 후에도 북부 로디지아와 냐살란드는 계속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는다는 조건 하에 1953년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는 사실상 반독립 국가 형태로, 영국, 연방 기관, 각 보호령이 여러 수준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구조였다.
2. 2. 연방 협상 (1950-1953)
1950년 11월, 당시 영국의 식민지 담당 국무장관이었던 짐 그리피스(Jim Griffiths)는 하원에 중앙 아프리카의 세 영토(남부 로디지아, 북부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간의 긴밀한 연합 가능성을 추가로 검토할 것이며, 1951년 3월에 각 정부와 중앙 아프리카 평의회 간의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1951년 3월에 열린 회의에서는 세 영토가 경제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더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각 영토가 개별적으로는 취약하지만, 더 넓은 경제 기반을 가진 단일 단위로 통합되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특정 공공 서비스를 통합하면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점도 언급되었다. 회의 결과, 중앙 정부가 특정 권한을 갖고 나머지 권한은 각 영토 정부가 유지하는 연방제를 권고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1951년 9월에는 빅토리아 폭포(Victoria Falls)에서 그리피스와 패트릭 고든 워커(Patrick Gordon Walker)가 참석한 추가 회의가 열렸고, 1952년과 1953년에는 런던(London)에서 두 차례의 회의가 더 열려 연방의 구체적인 구조가 마련되었다.[7]
그러나 협상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여러 쟁점이 논의되었지만, 특히 '원주민 문제', 즉 흑인 아프리카인의 지위와 사회적 역할에 대해 남부 로디지아와 북부 보호령(북부 로디지아, 니아살란드) 간의 입장 차이가 커서 합의에 이르기 어려웠다.[8]
이러한 교착 상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당시 아프리카 문제 담당 식민청 차관보였던 앤드류 코헨 경(이후 우간다 총독 역임)이었다. 그는 연방 창설의 핵심 설계자이자 추진 동력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협상 결렬 위기를 여러 차례 극복하는 데 기여했다. 유대인(Jew)으로서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가진 코헨은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아프리카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당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민당 정부가 시행하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같은 더 경직되고 급진적인 백인 우월주의 체제가 남부 로디지아에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남부 로디지아 백인 정권의 가부장적인 시스템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했다. 역사가 블레이크 경은 "그런 의미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연방의 아버지로 간주될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9]
1953년 3월 24일, 영국 하원은 연방 구성 제안을 승인했으며, 4월에는 북부 로디지아와 니아살란드 입법부도 연방 참여를 결의했다. 남부 로디지아에서는 4월 9일에 국민투표(referendum)가 실시되었다.[7] 당시 남부 로디지아 총리였던 고드프리 허긴스 경의 설득과 안심시키는 약속에 힘입어, 25,000명이 넘는 백인 유권자가 연방에 찬성표를 던졌고, 반대는 약 15,000표였다.[10] 하지만 세 영토의 아프리카너(Afrikaner) 대다수와 흑인 아프리카인들은 연방 구성에 강력하게 반대했다.[11][12]
결국 영국 의회는 1953년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법(Rhodesia and Nyasaland Federation Act 1953)을 제정하여 연방 창설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 법은 영국 여왕에게 칙령(Order in Council)을 통해 세 영토의 연방을 설립할 권한을 부여했다. 1953년 8월 1일, 연방 설립 칙령이 발표되어 헌법의 일부 조항이 발효되었다. 초대 연방 총독으로는 르웰린 경이 임명되어 9월 4일에 취임했으며, 1953년 10월 23일에는 르웰린 총독이 헌법의 나머지 조항을 발효시키는 선포를 함으로써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이 공식적으로 출범했다.[7]
2. 3. 연방의 성립과 해체 (1953-196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부 로디지아에서는 백인 이민이 증가하며 농업과 제조업이 번창하였다. 또한 구리 광산으로 번영하던 북부 로디지아와 흑인 노동력 공급원이었던 니아살랜드(현재의 말라위)와의 유대가 강화되면서, 백인들을 중심으로 남북 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를 통합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초기에 반대했던 영국도 흑인들의 식민지 독립 운동 활성화를 억제하기 위해 연방제를 도입하는 데 동의하였다. 각 지역의 독자적인 정책을 유지하고, 연방 성립 후에도 북부 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는 계속 영국의 보호령으로 남는 조건으로 1953년에 로디지아·니아살랜드 연방이 성립되었다. 이는 사실상 반독립 국가 형태였으며, 영국, 연방 기관, 각 보호령이 각자의 수준에서 통치를 행하는 구조였다.
형식적으로는 모든 인종에게 참정권이 인정되었지만, 유권자 등록 과정에서 백인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어 실질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정책들이 남부 로디지아 중심으로 시행되면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흑인들의 반발은 격렬해졌다. 연방 내 아프리카인들의 반발이 커지는 동시에, 영국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연방의 구조와 목적에 대한 반대 의견이 제기되었고, 완전한 영연방 회원 자격을 갖춘 독립된 도미니언으로의 전환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1956년 6월, 북부 로디지아의 총독이었던 아서 벤슨 경은 연방 체제와 특히 연방 총리 로이 웰렌스키를 강하게 비판하는 극비 서한을 작성했다. 약 2년 후, 고드프리 휴긴스, 1대 말번 자작(이전 고드프리 휴긴스 경)이 이 서한 사본을 입수하여 웰렌스키에게 내용을 공개하면서 화이트홀(영국 정부)과 연방 내각의 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악화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 보수당 총리 해럴드 맥밀런의 관심을 연방의 위기로 처음 이끌었으나, 그는 상황의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이를 오래된 군-식민지 간의 경쟁이나 웰렌스키 개인의 불쾌감 문제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갈등은 몇 가지 헌법 개정을 통해 일단 봉합되었으나, 웰렌스키가 연방의 일방적 독립 선언(UDI)을 심각하게 고려했던 사실이 후에 알려졌다.
1950년대 말, 북부 지역에서는 아프리카인들이 연방의 백인 소수 지배에 대한 항의를 본격화했다. 1958년 7월, 해스팅스 반다는 영국에서 니아살랜드로 돌아와 니아살란드 아프리카 의회(NAC, 후일 말라위 의회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케네스 카운다는 북부 로디지아 ANC에서 분리된 잠비아 아프리카 민족 의회(ZANC)의 지도자가 되었다. 점증하는 불안 속에서 연방 당국은 1959년 3월 ZANC를 금지했고, 6월에는 카운다를 9개월간 투옥했다. 카운다가 수감된 동안 그의 동료 메인자 초나 등은 ZANC의 후계 조직인 연합국립독립당(UNIP)을 창설했다.
1959년 초, 니아살란드에서는 소요가 발생했다. 역사가 블레이크 경에 따르면 니아살랜드는 "경제적으로 가장 빈곤하고, 정치적으로 가장 발전했으며, 수적으로 가장 유럽화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연방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반다를 비롯한 NAC 지도부를 체포했으며 당을 불법화했다.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남부 로디지아 군대가 투입되었다. 한편, 논란이 많던 영국 노동당 의원 존 스톤하우스가 비상사태 선포 직전 남부 로디지아에서 추방되면서 영국 노동당의 큰 분노를 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연방의 존립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맥밀런 총리조차 연방의 정치적 생존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연방의 미래에 대해 자문할 왕립 위원회가 계획되었고, 전 지급총장이었던 월터 몽크턴, 1대 브렌치리 몽크턴 자작 QC가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영연방 장관인 알렉 더글러스-홈 경이 위원회 구성에 불만을 표하는 웰렌스키 총리를 설득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웰렌스키는 더글러스-홈 경이 연방 유지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최소한의 공감대를 찾았으나, 영국의 정책 방향은 변화하고 있었다. 더글러스-홈 경의 경쟁자이자 동료 스코틀랜드인이었던 식민지 장관 아이언 맥클로드는 아프리카인의 권리를 옹호하며 연방 해체를 선호했다. 맥밀런은 초기에 더글러스-홈 경을 지지했지만, 영국 내 선거 결과와 노동당의 부상 등을 고려하며 "보수당을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언급하는 등 변화를 예고했다. 북부 로디지아에서는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 빈번했고, 1960년대 아프리카 여러 국가들이 잇달아 독립하면서 북부 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의 연방 탈퇴 움직임은 더욱 거세졌다.
결국 남부 로디지아 백인층 내에서도 연방제를 포기하고 백인의 이권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지면서, 1963년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이듬해인 1964년 7월, 니아살랜드는 말라위로 독립했고, 같은 해 10월 북부 로디지아는 잠비아로 독립을 달성했다. 연방 해체 후 남은 남부 로디지아는 백인 정권 하의 로디지아 공화국 시기를 거쳐 1980년에야 짐바브웨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
2. 4. 연방 해체 이후
1962년까지 영국과 중앙아프리카 연방(CAF) 내각은 냐살란드의 분리를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다만, 남부 로디지아 총리인 에드가 화이트헤드는 이 사실을 해당 지역의 1962년 선거 이후까지 비밀로 유지할 것을 영국에 약속했다. 1년 후, 북부 로디지아에도 같은 지위가 부여되어 로디지아 및 냐살란드 연방의 해체는 불가피해졌다. 1963년에는 연방 해체를 위한 장으로서 빅토리아 폭포 회의가 개최되었다.연방은 형식적으로 모든 인종에게 참정권이 인정되었지만, 실제로는 유권자 등록 과정에서 백인이 절대적으로 유리하여 실질적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다름없었다. 정책들이 남부 로디지아 중심으로 시행되면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흑인들의 반발은 격렬했고, 북부 로디지아와 냐살란드에서는 연방 탈퇴 움직임이 강화되었다. 결국 남부 로디지아 백인층에서도 연방제를 포기하고 백인의 이권 확보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졌다.
1963년 12월 31일, 로디지아 및 냐살란드 연방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그 자산은 각 지역 정부에 분배되었다. 남부 로디지아는 연방군 자산을 포함한 대부분의 자산을 확보했는데, 이는 남부 로디지아가 연방군에 대한 기여도가 높았기 때문이라는 명분이었다.
연방 해체 이후 각 지역은 다음과 같은 길을 걸었다.
- 1964년 7월: 냐살란드 보호령은 해스팅스 반다의 지도 아래 말라위로 독립했다.
- 1964년 10월: 북부 로디지아는 케네스 카운다의 지도 아래 잠비아 공화국으로 독립했다.
- 남부 로디지아: 백인 정권은 연방 해체 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려 했다. 1965년 11월 11일, 이언 스미스 총리가 이끄는 정부는 영국으로부터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UDI)을 발표하여 국제 사회의 비난과 영국의 분노를 샀다. 남부 로디지아는 이후 로디지아 공화국 시기를 거쳐 1980년에야 흑인 다수 통치가 실현된 짐바브웨로 독립하였다.
3. 정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로디지아에서는 백인 이민이 늘어나면서 농업과 제조업이 발전했다. 또한 구리 광산으로 경제적 중요성이 커진 북로디지아와 노동력을 제공하던 니아살랜드(현재의 말라위)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백인 사회를 중심으로 이 세 지역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영국 정부는 처음에는 통합에 반대했지만, 아프리카 흑인들의 식민지 독립 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방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각 지역의 독자적인 정책을 유지하고,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는 영국의 보호령 지위를 유지하는 조건으로 1953년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이 출범했다. 이는 사실상 반독립 국가 형태로, 영국 정부, 연방 정부, 각 지역 정부가 여러 층위에서 통치하는 복잡한 구조를 가졌다.
연방의 정치 체제는 형식적으로는 모든 인종에게 선거권을 인정했지만, 실제로는 유권자 등록 과정에서 교육 및 재산 요건 등을 통해 백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되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유사한 인종 차별적 성격을 띠었다. 또한 연방의 정책 결정 과정은 남로디지아의 백인 이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차별과 불만은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져, 1959년 니아살랜드에서는 흑인들의 봉기가 일어났으나 곧 진압되었다. 북로디지아에서는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 자주 발생했다. 1960년대에 들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독립을 이루자, 북로디지아와 니아살랜드의 흑인 민족주의 운동은 더욱 거세지며 연방 탈퇴를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남로디지아의 백인들 사이에서도 연방 유지가 더 이상 백인의 이익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1963년 연방은 해체되었다. 이듬해인 1964년 7월 니아살랜드는 말라위로, 10월에는 북로디지아가 잠비아로 각각 독립했다. 남은 남로디지아는 소수 백인 정권이 통치하는 로디지아 공화국 시기를 거쳐, 오랜 투쟁 끝에 1980년 다수 흑인 통치의 짐바브웨로 독립을 이루었다.
3. 1. 헌법
연방은 준독립적인 연합으로 설립되었으며, 정부는 연방 정부 1개, 준주 정부 3개, 영국 정부 1개의 총 5개 부처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는 여러 정부 수준 간의 혼란과 관할권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블레이크 경은 이를 "세계에서 가장 정교하게 통치되는 국가 중 하나"였다고 평가했다.[13]헌법은 연방 정부에 열거된 권한을 부여했다. 여기에는 행정부, 단원제 연방 의회(아프리카 문제위원회라는 상임위원회 포함), 대법원 등이 포함되었다. 연방 정부와 준주 정부 간의 권한과 의무 분담이 명시되었다. 헌법 제97조는 연방 의회에 헌법 개정 권한을 부여했으며, 이는 제2의 입법부 설립 권한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14] 총독은 연방 내 여왕의 대표자 역할을 수행했다. 연방의 권한은 연방 정부에 할당된 권한과 그에 부수되는 사항에 한정되었다. 열거된 연방 권한은 연방 입법부가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연방 입법 목록"과 연방 및 준주 입법부 모두 법률 제정이 가능한 "동시 입법 목록"으로 나뉘었다.[7] 연방 입법부가 입법 권한을 가진 모든 경우(동시 목록 포함)에는 연방법이 준주법보다 우선했다.
행정부는 여왕을 대표하는 총독, 총리와 총리의 추천으로 총독이 임명한 9명의 다른 장관으로 구성된 행정평의회, 그리고 총리가 임명한 각료들로 이루어진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사법부는 대법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1955년 연방 대법원법에 따라 구체화되었다. 대법원은 대법원장, 연방 대법관 2명, 그리고 연방을 구성하는 3개 준주의 대법원장으로 이루어졌다. 대법원은 1955년 7월 1일 총독이 대법원장과 다른 판사들의 취임 선서를 주관하면서 공식적으로 개원했다. 이 행사에는 영국 대법원장과 남아프리카 연방 대법원장도 참석했다.[7] 역대 대법원장으로는 남부 로디지아 대법원장 출신인 로버트 트레드골드 경(1953년~1961년 재임)과 존 클레이든 경(1961년~1963년 재임)이 있었다. 대법원의 관할권은 주로 구성 준주 고등법원의 항소심을 심리하는 데 한정되었으나,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서는 원심 관할권을 가졌다.[7]
- 연방 정부와 준주 정부 간 또는 준주 정부 간의 분쟁 (법적 권리의 존재 또는 범위에 관한 법률 또는 사실 문제가 관련된 경우)
- 연방 의회의 공석 및 선거 소송 관련 사항
- 연방 정부 공무원이나 당국에 대한 권리 보호 소송, 금지 명령 또는 금지 명령 청구 소송
3. 2. 인종 문제
연방의 성립과 해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사이의 현격한 인구 수 차이였다. 특히 남부 로디지아는 북부 로디지아나 니아살랜드에 비해 유럽인 인구가 월등히 많았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등에서의 이민 증가로 그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15] 1939년 약 6만 명이던 남부 로디지아의 유럽인 인구는 연방 해체 무렵 22만 3천 명까지 증가한 반면, 니아살란드는 유럽인 인구가 가장 적고 아프리카인 인구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16]연도 | 남부 로디지아 | 북부 로디지아 | 니아살랜드 | 합계 | ||||
---|---|---|---|---|---|---|---|---|
백인 | 흑인 | 백인 | 흑인 | 백인 | 흑인 | 백인 | 흑인 | |
1927 | 38,200 (3.98%) | 922,000 (96.02%) | 4,000 (0.4%) | 1,000,000 (99.6%) | 1,700 (0.13%) | 1,350,000 (99.87%) | 43,900 (1.32%) | 3,272,000 (98.68%) |
1946 | 80,500 (4.79%) | 1,600,000 (95.21%) | 21,919 (1.32%) | 1,634,980 (97.68%) | 2,300 (0.10%) | 2,340,000 (99.90%) | 104,719 (1.84%) | 5,574,980 (98.16%) |
1955 | 125,000 (4.95%) | 2,400,000 (95.05%) | 65,000 (3.02%) | 2,085,000 (96.98%) | 6,300 (0.25%) | 2,550,000 (99.75%) | 196,300 (2.71%) | 7,035,000 (97.28%) |
1960 | 223,000 (7.30%) | 2,830,000 (92.70%) | 76,000 (3.14%) | 2,340,000 (96.85%) | 9,300 (0.33%) | 2,810,000 (99.66%) | 308,300 (3.72%) | 7,980,000 (96.28%) |
이러한 인구 구성은 남부 로디지아 백인 정착민들의 연방 내 지배력으로 이어졌다. 연방 정부의 초대 총리 고드프리 휴긴스 경(이후 말번 자작)은 연방 총리직 이전 23년간 남부 로디지아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는 백인 중심의 정치 구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5] 영국 정부는 당초 남부 로디지아 백인들의 지배를 우려하여 통합 대신 연방제를 선택했으나,[17] 결과적으로 연방은 백인, 특히 남부 로디지아 백인들의 이익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운영되었다. 영국 정부 내에서도 식민지청(CO)은 아프리카인의 권리에 비교적 동정적이었던 반면, 연방관계청(CRO)은 백인 정착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등 상반된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18]
형식적으로는 모든 인종에게 선거권이 보장되었지만, 재산 및 소득 자격 요건을 통해 유권자 등록 과정에서 백인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구조를 만들어 실질적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와 유사한 차별 정책으로 기능했다.[15] 당시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반대와 아프리카 민족주의적 열망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다.[15] 연방 정부는 '파트너십' 정책을 표방하며 1958년 인종 문제 사무소를 설립하고 1959년 관련 장관직을 신설하기도 했으나,[19] 이는 근본적인 불평등 구조를 해결하지 못했다.
이러한 차별적 구조와 남부 로디지아 중심 정책에 대한 아프리카인들의 불만은 아프리카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을 촉진했다. 초기에는 아프리카인들의 정치적 요구가 무시되었으나,[15] 점차 저항은 격화되어 1959년 니아살랜드에서는 봉기가 발생했고(비록 진압되었지만), 북부 로디지아에서는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1960년대 아프리카 국가들의 독립이 이어지면서 북부 로디지아와 니아살란드 내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은 연방 탈퇴를 강력히 요구했다. 결국 남부 로디지아 백인들 사이에서도 연방 유지가 백인들의 이익 확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1963년 연방은 해체되었다.
4. 군사
국방장관은 군인과 민간인으로 구성된 국방회의의 의장으로서 모든 국방 정책 관련 사항을 심의했다.
1960년 당시 육군의 훈련 부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부대 명칭 | 위치 | 담당 훈련 |
---|---|---|
보병학교 | 구엘루 | 부대 외부 훈련을 담당했으며, 전술 및 연대 부대로 편성되어 지휘 및 무기 훈련 등 다양한 과정을 제공했다.[7] |
정규군 훈련소 | 솔즈베리 | 흑인 신병에 대한 모든 기본 훈련을 담당했다. |
로디지아 왕립 연대 훈련소 | (명시되지 않음) | 영토군 부대의 신병을 훈련시켰다. |
병과 훈련은 로디지아-나이아살란드 공병대, 통신대, 육군 보급대에서 각각 담당했다.
1958년 5월에는 세 곳의 군사 시설이 "중앙 아프리카 군사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세 명의 군인"의 이름을 따서 다음과 같이 명명되었다.
이전 명칭 (위치) | 변경된 명칭 | 유래 인물 |
---|---|---|
RAR 캠프 (렐웰린) | 메슈 캠프 | 대령 J.A. 메슈 |
좀바 주둔지 | 코브 막사 | 중령 알렉산더 코브(Alexander Cobbe) |
루사카 군사 지역 | 스티븐슨 막사 | 중령 A. 스티븐슨 |
이 외에도 불라와요(Bulawayo)의 렐웰린 막사는 연방의 초대 총독을 기념하여 명명되었고, 놀돌라(Ndola)의 투그 아르간 막사는 투그 아르간 전투(Battle of Tug Argan)를 기념하여 이름 붙여졌다.
육군은 네 개의 아프리카 대대, 즉 제1 및 제2 대대, 킹스 아프리카 라이플즈(King's African Rifles), 노던 로디지아 연대(Northern Rhodesia Regiment), 로디지아 아프리카 라이플즈(Rhodesian African Rifles)로 구성되었다.[7] 1961년에는 백인으로만 구성된 로디지아 경보병(Rhodesian Light Infantry) 연대 제1대대가 추가되었다.
로디지아-나이아살란드 여성 군사 항공대(약칭 "WAMS")는 연방의 여성 보조 부대였으나, 1957년 정책 변경으로 인해 점차 축소되었고 결국 민간 직원이 그 업무를 인계받았다.[7]
5. 유산
로디지아 및 냐살란드 연방은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만 존재했지만, 중앙 아프리카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연방의 핵심 특징은 소수의 백인 지배층(주로 남부 로디지아 거주)이 수백만 명의 흑인 아프리카인을 통치하는 구조였다. 이러한 지배 체제는 종종 '온정주의적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었으나, 이는 점차 커져가는 아프리카인들의 자긍심 및 아프리카 민족주의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영향을 받은 연방의 제도와 인종 관계는 당시 또 다른 지역 강국이었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연방의 해체는 결국 아프리카인이 주도하는 독립 국가(잠비아, 말라위)와 백인 소수 정부가 내부 타협(1978년) 이전까지 통치를 이어간 남부 로디지아 사이의 극명한 대립 구도를 만들었다.
이후 남부 로디지아는 백인 정부와 아프리카 민족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게릴라 세력 간의 내전으로 치달았다. 반면, 독립한 말라위와 잠비아는 권위주의적인 일당 국가 독재 체제로 나아갔고, 이러한 정치 상황은 냉전이 종식된 이후인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28]
특히 남부 로디지아가 일방적으로 독립을 선언(UDI)한 이후, 과거 연방에 속했던 잠비아와 남부 로디지아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잠비아는 아프리카 민족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게릴라를 지원했고, 남부 로디지아는 1974년까지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으며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격렬한 외교적 비난을 주고받았으며, 때로는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도 발생했다.
참조
[1]
법률
Rhodesia and Nyasaland Federation Act, 1953
United Kingdom
1953
[2]
법률
Federation of Rhodesia and Nyasaland (Constitution) Order in Council, 1953
United Kingdom
1953
[3]
서적
Commonwealth and Colonial Law
Stevens
1966
[4]
학술지
The Central African Federation
http://www.jstor.org[...]
1963
[5]
법률
Rhodesia and Nyasaland Act
1964
[6]
법률
Federation of Rhodesia and Nyasaland (Dissolution) Order in Council
1963
[7]
서적
Handbook to the Federation of Rhodesia and Nyasaland
Cassell and Company, Ltd.
1960
[8]
웹사이트
Central Africa - Hansard
https://hansard.parl[...]
2020-05-29
[9]
웹사이트
Identity and Decolonisation: the policy of partnership in Southern Rhodesia 1945–62
https://ora.ox.ac.uk[...]
2020-05-29
[10]
서적
[11]
서적
White Farmers in Rhodesia, 1890–1965: A History of the Marandellas District
https://archive.org/[...]
Macmillan Press
1983
[12]
서적
Women and Power in Zimbabwe: Promises of Feminism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2015
[13]
서적
[14]
서적
Advisory Commission on the Review of the Constitution of the Federation of Rhodesia and Nyasaland
H.M. Stationery Office
1960
[15]
웹사이트
Struggles for Freedom: Southern Africa
https://www.jstor.or[...]
2020-05-29
[16]
서적
An Introduction to Malawi: Basic Facts
https://books.google[...]
Intercontinental Books
2017
[17]
학술지
'White Woman's Country': Ethel Tawse Jollie and the Making of White Rhodesia
1997
[18]
학술지
The Geopolitical Origins of the Central African Federation: Britain, Rhodesia and South Africa, 1948–1953
1987
[19]
서적
British Documents on the End of Empire: Central Africa
The Stationery Office
2005
[20]
서적
Britain and Decolonisation: The Retreat from Empire in the Post-War World
Macmillan International Higher Education
1988
[21]
서적
Party Politics and Decolonization: The Conservative Party and British Colonial Policy in Tropical Africa 1951–1964
Clarendon Press
1995
[22]
서적
A History of Rhodesia
https://books.google[...]
Knopf
1978
[23]
서적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Central Africa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2-09-10
[24]
서적
[25]
서적
The Past Is Another Country: Rhodesia 1890–1979
A. Deutsch
1979
[26]
학술지
The Politics of Regionalism and Federation in East Africa, 1958-1946
https://www.cambridg[...]
2019
[27]
서적
Pan-Africanism and East African Integration
http://dx.doi.org/10[...]
Harvard University Press
1965
[28]
학술지
Democracy and Nationalism in Historical Perspective: The Case of Malawi
https://academic.oup[...]
1998-04-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