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후계자로 입양된 인물이다. 본래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베루스로도 불렸다. 그는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아비디아와 결혼하여 루키우스 베루스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원래 매형을 후계자로 고려했으나, 건강 문제로 인해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입양하여 후계자로 삼았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이듬해 사망했고, 하드리아누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루키우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로 로마를 통치했다. 그의 삶에 대한 사료는 불분명하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를 포함한 전기 자료의 신뢰성에 대한 논란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케이오니우스 씨족 - 루키우스 베루스
    루키우스 베루스는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로 태어나 로마 황제가 되었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여 파르티아 전쟁을 이끌었지만 향락적인 생활로 비판받았고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있다.
  • 101년 출생 - 헤로데스 아티쿠스
    헤로데스 아티쿠스는 2세기 로마 제국 시대 아테네 출신의 귀족이자 웅변가, 자선가로, 명문 가문 출신이며 정치적으로 활약했고, 대규모 건축 사업을 후원하여 많은 유산을 남겼으며, 만년에는 시민들과 갈등을 겪었으나 사후 아테네에 매장되었다.
  • 138년 사망 -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아누스는 76년에 태어나 117년부터 138년까지 로마 황제로 재위하며 제국 방어와 통합을 위해 노력했고, 하드리아누스 방벽 건설, 판테온 재건 등의 업적을 남겼지만, 유대인 반란과 독단적인 면모로 비판받기도 했다.
  • 138년 사망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부)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는 올리브유 생산으로 부를 축적한 히스파니아 바이티카 속주 출신의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세 차례 집정관을 지낸 인물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로마 수도 지사를 역임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루브르 박물관, 파리
개요
칭호카이사르
이름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본명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하드리아누스에게 입양되기 전까지)
즉위 시 이름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황제의 후계자로서)
출생일101년 1월 13일
사망일138년 1월 1일 (36세)
아버지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하드리아누스 (양아버지)
어머니플라우티아
배우자아비디아
자녀루키우스 베루스, 케이오니아 파비아, 케이오니아 플라우티아
왕조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우레우스

2. 생애와 가정



아일리우스는 본래 '''Lucius Ceionius Commodus|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la'''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이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후계자로 입양되면서 '''Lucius Aelius Caesar|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la'''가 되었다. 그는 때때로 '''Lucius Aelius Verus|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베루스la'''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 이름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외의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아마도 원본 자료의 기록 과정에서 생긴 오류일 것으로 추정된다.[1] 젊은 시절의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케이오니우스 씨족 출신이었다.

2. 1. 가족 관계

아일리우스의 아버지 역시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코모두스였으며, 106년에 집정관을 지냈다. 그의 할아버지 또한 같은 이름으로 7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의 부계 조상들은 에트루리아 출신의 집정관 가문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플라우티아라는 이름의 로마 여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

130년 이전에, 아일리우스(당시 루키우스 코모두스)는 아비디아와 혼인했다. 아비디아는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딸로, 유력한 로마 귀족 여성이었다. 아비디아는 아일리우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한 명과 딸 두 명을 낳았다.

3. 하드리아누스의 후계자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하드리아누스 흉상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오랫동안 매형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를 후계자로 고려했으나, 그의 고령으로 인해 통치 말기에 다른 인물을 물색했다. 처음에는 세르비아누스의 손자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가 유력했으나, 136년경 하드리아누스는 갑작스럽게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선택하여 아들로 입양했다.[11] 이 결정은 많은 반대 속에 이루어졌으며,[12][2] 기존 후계자 후보였던 살리나토르와 세르비아누스는 이후 사형당했다.[14]

입양을 통해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그는 군 경험은 없었지만 원로원 의원으로서 정치적 기반은 있었으나 건강이 좋지 못했다. 하드리아누스가 갑자기 그를 후계자로 삼은 이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13][3]

3. 1. 갑작스러운 후계자 교체



오랫동안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자신의 처남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를 비공식적인 후계자로 여겼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의 통치 말기에 이르러, 그는 90대에 접어든 세르비아누스가 황제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판단했다. 하드리아누스는 대신 세르비아누스의 손자이자 자신의 종손인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에게 관심을 돌려, 그를 승진시키고 궁정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며 후계자로 준비시켰다.

하지만 136년 말(또는 여름), 하드리아누스는 심각한 출혈로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티볼리에 있는 하드리아누스 별장에서 요양하던 중, 그는 돌연 마음을 바꿔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선택하고 그를 아들로 입양하였다.[11] 이 결정은 '모든 이들의 바람에 반하여'(Invitis omnibus|인비티스 옴니부스la) 이루어졌으며,[12][2] 특히 세르비아누스와 젊은 살리나토르는 하드리아누스에게 크게 분노하여 입양 결정에 대해 따져 물으려 했다. 하드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후계자를 바꾼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13][3]

일각에서는 살리나토르가 세르비아누스와 연루되어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결국 하드리아누스는 후계 구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분쟁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살리나토르와 세르비아누스에게 사형을 명령했다.[14]

새로운 후계자가 된 루키우스는 군 경험은 없었지만, 원로원 의원이었고 강력한 정치적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의 건강은 좋지 못했다. 입양된 후,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3. 2. 아일리우스의 배경

아일리우스는 본래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코모두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후계자로 입양되면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다. 그는 때때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베루스'''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 이름은 《아우구스타 열전》 외에는 확인되지 않아 필사본 오류의 결과일 가능성이 있다.

젊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코모두스는 케이오니아 씨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역시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코모두스였으며, 106년에 집정관을 지냈다. 그의 할아버지 또한 같은 이름으로 78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의 부계 조상들은 에트루리아 출신의 집정관 계급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플라우티아라는 로마 여인으로 추정된다.[1] 《아우구스타 열전》에 따르면 그의 외조부와 외가 조상들도 집정관 계급이었다고 한다.

130년 이전에, 젊은 루키우스 코모두스는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아비디우스 니그리누스의 딸이자 유력 귀족 여성이었던 아비디아와 결혼했다. 아비디아는 루키우스와의 사이에서 최소한 아들 한 명과 딸 두 명을 낳았다.

  •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코모두스: 훗날 루키우스 베루스가 되어 161년부터 169년 사망할 때까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로 통치했다. 베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소(小) 파우스티나의 둘째 딸 루킬라와 결혼했다.
  • 케이오니아 파비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입양될 당시 입양 조건의 일부로 그와 약혼했다. 하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황제가 된 직후, 피우스는 아우렐리우스에게 파비아와의 약혼을 파기하고 자신의 딸인 소(小) 파우스티나와 결혼하도록 요청했다. 파우스티나는 원래 하드리아누스가 루키우스 베루스와 결혼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 케이오니아 플라우티아


오랜 기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매형인 루키우스 율리우스 우르수스 세르비아누스를 비공식적인 후계자로 여겼다. 그러나 통치 말년에 이르러 하드리아누스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세르비아누스가 황제로서 통치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90대에 이른 세르비아누스는 황제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다고 판단했다. 하드리아누스의 관심은 세르비아누스의 손자인 루키우스 페다니우스 푸스쿠스 살리나토르에게 향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생질손인 젊은 살리나토르를 발탁하여 궁정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후계자로 준비시켰다.

하지만 136년 말, 하드리아누스는 출혈로 거의 죽을 뻔했다. 티볼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회복 중이던 그는 다시 마음을 바꾸어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코모두스를 새로운 후계자로 선택하고, 그를 아들로 입양했다.[11] 이 결정은 '모든 이들의 바람에 반하여'(lat) 이루어졌다.[12][2] 특히 세르비아누스와 젊은 살리나토르는 하드리아누스에게 크게 분노하여 입양 결정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려 했다. 오늘날까지도 하드리아누스가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꾼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13][3] 살리나토르가 세르비아누스와 연루되어 하드리아누스에 대한 쿠데타를 시도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하드리아누스는 후계 구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갈등을 막기 위해 살리나토르와 세르비아누스에게 사형을 명령했다.[14]

루키우스는 군 경험은 없었지만, 원로원 의원이었고 강력한 정치적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이 좋지 못했다. 입양되면서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4. 죽음

다뉴브 전선에서 1년간 머무른 뒤, 아일리우스는 138년 새해 첫날 원로원에서 연설하기 위해 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연설하기 전날 밤 병을 얻었고, 다음 날인 1월 1일 늦게 출혈로 사망하였다.[15] 아일리우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하드리아누스는 새로운 후계자를 찾아야 했고, 138년 1월 24일에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선택했다.[17]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저서 ''로마 제국 쇠망사''에서 아일리우스의 짧았던 후계자 시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하드리아누스는] 존경하고 미워하는 여러 뛰어난 인물들을 머릿속으로 숙고한 후, 안티노스의 연인에게 특별한 아름다움으로 추천받은 유쾌하고 방탕한 귀족인 아일리우스 베루스를 입양했다. 그러나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칭찬과 거대한 기증으로 동의를 얻은 병사들의 환호에 기뻐하는 동안, 새로운 카이사르는 때 이른 죽음으로 그의 품에서 빼앗겼다.[19]

4. 1.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입양

138년 1월 1일 루키우스 아일리우스가 사망하자[15],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1월 24일에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86년 9월 19일 – 161년 3월 7일)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17]

며칠간의 숙고 끝에 안토니누스는 이를 수락했고, 138년 2월 25일에 정식으로 하드리아누스의 양자가 되었다. 입양 조건으로 안토니누스는 사망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소(小)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와 하드리아누스의 조카손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를 다시 입양해야 했다. 이 입양을 통해 마르쿠스는 '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가 되었고, 루키우스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가 되었다. 다만 루키우스는 훗날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사망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할 때까지 '베루스'라는 코그노멘을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하드리아누스의 요청에 따라 안토니누스의 딸인 파우스티나는 루키우스와 약혼했다.[18]

이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로마 황제로서 공동 통치를 이어갔으며, 169년 루키우스 베루스가 사망한 뒤에는 180년 본인이 사망할 때까지 단독으로 제국을 다스렸다.

4.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의 공동 통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는 138년 1월 1일, 다뉴브 전선에서 1년간 머무른 뒤 원로원 연설을 위해 로마로 돌아왔으나, 연설 전날 밤 병을 얻어 다음 날 늦게 출혈로 사망하였다.[15][4] 138년 1월 24일,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Titus Aurelius Antoninus|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la, 86년 9월 19일 – 161년 3월 7일)를 새로운 후계자로 선택했다.[17]

며칠간의 고려 끝에 안토니누스는 이를 수락하고 138년 2월 25일에 하드리아누스의 양자가 되었다. 하드리아누스가 제시한 조건에 따라, 안토니누스는 사망한 루키우스 아일리우스의 아들인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Lucius Ceionius Commodusla)와 하드리아누스의 외조카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nnius Verus|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la, 121년 4월 26일 – 180년 3월 17일)를 입양해야 했다. 이 입양으로 마르쿠스는 Marcus Aelius Aurelius Verus|마르쿠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la가 되었고, 루키우스는 Lucius Aelius Aurelius Commodus|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la가 되었다. 또한 하드리아누스의 요청에 따라 안토니누스의 딸 파우스티나는 루키우스와 약혼했다.[18][6]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나중에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로마 황제로서 공동 통치를 했다. 이 공동 통치는 169년 루키우스 베루스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으며, 그 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180년 자신이 사망할 때까지 단독으로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5. 사료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생애를 다루는 주요 사료들은 내용이 분명하지 않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장 중요한 문헌 자료로 꼽히는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그의 전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저작 시기와 저자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20]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아일리우스와 같은 부제(副帝)나 제위 주장자들의 전기에 대해서는 신뢰성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20][21] 문헌 자료 외에도 비문이나 주화 등의 고고학적 자료들이 연구에 활용된다.[23]

5. 1. 전기 자료의 신빙성

아일리우스의 삶에 대한 주요 사료들은 불분명하고 종종 신뢰하기 어렵다. 가장 중요한 문헌 자료 모음집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포함된 전기 내용들은 4세기 초 여러 작가가 썼다고 주장되지만, 실제로는 4세기 말(약 395년경)에 한 명의 작가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20]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내에서도 후기의 전기집, 부제들이나 제위 주장자들의 전기집은 거짓과 가공으로 가득 차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현재는 소실된 이전 사료들(마리우스 막시무스 또는 '이그노투스'라 불리는 미상의 역사가)을 기반으로 한 초기 전기집들은 훨씬 정확한 편이다.[20] 아일리우스의 경우,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루키우스 베루스의 전기집은 상당히 믿을 만하지만, 아비디우스 카시우스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본인의 전기집은 가공된 내용이 많다.[21]

이 외에도 상세한 내용을 전하는 문헌 자료들이 있다. 의사 갈레누스의 저술은 안토니누스 시대 엘리트들의 생활 습관을 엿볼 수 있게 해주고,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의 연설문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또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의 법률 문서인 '디게스타'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에 보존된 법률 내용들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22] 비문 자료나 주화 발견물 등도 문헌 자료를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23]

5. 2. 기타 사료

일부 문헌 자료는 아일리우스 시대의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사 갈레누스의 저술은 당시 엘리트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하며, 아일리우스 아리스티데스의 연설문은 시대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또한 마르쿠스의 법률 저서 내용이 보존된 '다이제스트'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등도 중요한 자료이다.[22]

이러한 문헌 자료 외에도 비문이나 주화 발견물 등은 문헌 기록을 보완하는 중요한 고고학적 자료로 활용된다.[23]

6. 등장 작품


  • '''영화'''
  • * 테르마이 로마이 (2012년), 테르마이 로마이 II (2014년)에서는 키타무라 카즈키가 연기했다.

참조

[1] 논문 Antonine Relatives: Ceionii and Vettulani 1957
[2] 서적 HA Hadrian
[3] 논문 Hadrian and Lucius Verus https://www.jstor.or[...]
[4] 서적 HA Hadrian
[5] 서적 Cassius Dio
[6] 서적 Cassius Dio
[7] 서적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https://www.gutenber[...]
[8] 논문
[9] 서적
[10] 논문 Antonine Relatives: Ceionii and Vettulani 1957
[11] 서적 Marcus Aurelius
[12] 서적 HA Hadrian
[13] 논문 Marcus Aurelius
[14] 서적 Hadrian the Restless Emperor
[15] 서적 HA Hadrian
[16] 서적 Dio
[17] 서적 Marcus Aurelius
[18] 서적 Dio
[19] 서적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https://www.gutenber[...]
[20] 서적 Marcus Aurelius
[21] 서적 Marcus Aurelius
[22] 서적 Marcus Aurelius
[23] 서적 Marcus Aureliu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