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루터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루터 전투는 1626년 8월 27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가 이끄는 덴마크-독일 연합군과 틸리 백작이 지휘하는 신성 로마 제국군의 전투이다. 덴마크는 30년 전쟁에 개입하여 루터교 신자들을 지원하려 했으나, 루터 전투에서 패배하여 북유럽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뤼벡 조약으로 전쟁에서 물러났다. 이 전투는 30년 전쟁의 주요 국면 중 하나로, 덴마크의 몰락과 유럽 정세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626년 분쟁 - 제1차 영원성 전투
    1626년 제1차 영원성 전투에서 명나라는 원숭환의 지휘 아래 홍이포를 사용하여 후금의 누르하치가 이끄는 침략군을 격퇴하며 명청 교체기의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루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루터 전투
전체30년 전쟁
루터 암 바렌베르게 전투
루터 암 바렌베르게 전투 (작자 미상)
날짜1626년 8월 27일
장소독일 니더작센주 루터 암 바렌베르게
결과제국군 승리
교전 세력 1덴마크-노르웨이
교전 세력 2신성 로마 제국
가톨릭 제후연맹
지휘관 1크리스티안 4세
필리프 폰 헤센-카셀(전사)
Fuchs von Bimbach(전사)
지휘관 2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안홀트 백작 요한 야코프
병력 1보병 16,000명, 기병 5,000명, 대포 20문
병력 2보병 17,000명, 기병 7,000명, 대포 22문
사상자 1사망 또는 부상 3,000명, 포로 2,500명
사상자 2사망 또는 부상 700명

2. 배경

크리스티안 4세는 루터교 신자로서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와 동맹을 맺고 중부 독일 튀링겐으로 진입하여 남부 지방을 영유하려 하였다. 또한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완패한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을 구원하고자 했다.[1]

30년 전쟁은 크리스티안 4세의 참전 이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내전이었으나, 그의 개입으로 다른 유럽 강대국들까지 참전하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계 혈통 (올덴부르크 출신)이었기에 완전한 외국인이 아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슈타인 공작 직위도 겸임하고 있어 참전 명분도 있었다.

2. 1. 30년 전쟁 초기 상황

크리스티안 4세루터교 신자로서 용병대장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와 동맹을 맺고 중부 독일의 투링기아로 진입하여 그 남부 지방을 영유하기 위한 전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또한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완패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1]

크리스티안 4세의 참전 이전까지 30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에서의 내전에 불과했으나, 그의 개입으로 이 전쟁을 다른 유럽의 강대국들에게까지 확대시켰다. 크리스티안 4세는 혈연적으로 독일계 (올덴부르크 출신)였기에 외국인이 아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슈타인 공작의 직위까지 겸임하고 있었기에 참전의 명분도 가지고 있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인 홀슈타인 공국의 통치자로서, 하작센 주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하작센 주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였지만, 상작센 주회와 마찬가지로 1618년 보헤미아 반란으로 시작된 30년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유지했다. 1625년까지 그들은 페르디난트 2세 황제가 북서 독일(North-West Germany)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이전 가톨릭 공후의 영지들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1625년 초, 틸리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의 군대가 할버슈타트를 점령하고,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신성 로마 황제의 황제군이 마그데부르크를 공격하면서 이러한 두려움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1625년 5월, 크리스티안 4세는 상하 작센 주회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군대는 훈련이 부족한 7,000명이 채 안 되는 민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수비 임무에만 적합했으며, 정규군을 모집하려면 잉글랜드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야 했다. 이 보조금은 1625년 12월 헤이그 조약에서 합의되었지만, 크리스티안 4세가 작전을 개시할 준비를 갖춘 것은 1626년 6월이 되어서였다. 그의 작전 계획은 그가 주력군을 베저 강을 따라 남하하는 동안,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이끄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발렌슈타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스펠트는 4월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패배했고,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의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그는 6월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그 후 오스트리아 상부 농민 전쟁을 처리하느라 방향을 바꾸었고, 크리스티안 4세는 자신이 틸리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2. 2. 크리스티안 4세의 참전

루터교 신자였던 크리스티안 4세는 용병대장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와 동맹을 맺고 중부 독일의 튀링겐으로 진입하여 남부 지방을 영유하기 위한 전역을 계획하고 있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패배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다.[1]

30년 전쟁은 크리스티안 4세의 참전 이전까지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내전이었으나, 그의 개입으로 다른 유럽 강대국들까지 참전하게 되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독일계 혈통(오르덴부르크 출신)이었기에 완전한 외국인은 아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슈타인 공작 직위도 겸임하고 있어 참전 명분도 있었다.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인 홀슈타인 공국의 통치자이자, 하작센 주회의 일원이었다. 하작센 주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였지만, 상작센 주회와 마찬가지로 1618년 보헤미아 반란으로 시작된 30년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유지했다. 1625년까지, 그들은 페르디난트 2세 황제가 북서 독일에 있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소유한 이전 가톨릭 공후의 영지들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꼈다. 1625년 초, 틸리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의 군대가 할버슈타트를 점령하고,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신성 로마 황제의 황제군이 마그데부르크를 공격하면서 이러한 두려움은 사실로 확인되는 듯 했다.

1625년 5월, 크리스티안 4세는 상하 작센 주회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군대는 훈련이 부족한 7,000명이 채 안 되는 민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수비 임무에만 적합했으며, 정규군을 모집하려면 잉글랜드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야 했다. 이 보조금은 1625년 12월 헤이그 조약에서 합의되었지만, 크리스티안 4세가 작전을 개시할 준비를 갖춘 것은 1626년 6월이 되어서였다.

그의 작전 계획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그가 주력군을 베저 강을 따라 남하하는 동안,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젊은 크리스티안이 이끄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발렌슈타인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만스펠트는 4월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패배했고,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의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그는 6월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그 후 오스트리아 상부 농민 전쟁을 처리하느라 방향을 바꾸었고, 크리스티안 4세는 자신이 틸리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2. 3. 덴마크의 초기 군사 작전

Christian 4.da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인 홀슈타인 공국의 통치자이자, 하작센 주회의 일원이었다. 하작센 주회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개신교였지만, 상작센 주회와 마찬가지로 1618년 보헤미아 반란으로 시작된 30년 전쟁 초기에는 중립을 유지했다. 1625년까지 그들은 페르디난트 2세 황제가 북서 독일에 있는 개신교도들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이전 가톨릭 공후의 영지들을 되찾으려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점점 더 크게 느꼈다. 1625년 초, 틸리가 이끄는 가톨릭 동맹의 군대가 할버슈타트를 점령하고,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이끄는 신성 로마 황제군이 마그데부르크를 공격하면서 이러한 두려움은 사실로 확인되는 것처럼 보였다.[1]

1625년 5월, 크리스티안 4세는 상하 작센 주회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이 군대는 훈련이 부족한 7,000명이 채 안 되는 민병대로 구성되어 있었고, 대부분은 수비 임무에만 적합했으며, 정규군을 모집하려면 잉글랜드 왕국네덜란드 공화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아야 했다. 이 보조금은 1625년 12월 헤이그 조약에서 합의되었지만, 크리스티안 4세가 작전을 개시할 준비를 갖춘 것은 1626년 6월이 되어서였다. 그의 작전 계획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그가 주력군을 베저 강을 따라 남하하는 동안,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이 이끄는 군대의 지원을 받아 발렌슈타인을 공격할 것이었다. 그러나 만스펠트는 4월 데사우 다리 전투에서 패배했고, 브라운슈바이크의 크리스티안의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으며, 그는 6월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그 후 오스트리아 상부 농민 전쟁을 처리하느라 방향을 바꾸었고, 크리스티안 4세는 자신이 틸리보다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3. 전투

틸리 백작은 크리스티안 군을 루터로 유인하여 전투를 시작했다. 제국 보병 부대는 세 차례에 걸쳐 덴마크 전열을 돌파했지만, 매번 기병의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덴마크군은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대포를 빼앗긴 채 혼란에 빠져 슈타데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 전투로 덴마크군은 약 6,000명의 병사를 잃고 2,500명의 포로를 냈다.[1]

3. 1. 전력 비교와 초기 상황

틸리 백작은 크리스티안의 군대를 바렌베르게의 루터로 끌어들여 전투를 강요하였다. 덴마크-독일 연합군은 1626년 7월 말 볼펜뷔텔을 떠나 틸리와의 전투를 준비했지만, 틸리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으로부터 4,000명 이상의 증원군을 받아 예상보다 훨씬 강력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폭우로 도로는 진흙탕이 되었고 보급 부족이 발생했으며, 틸리는 뮌덴, 노르트하임, 괴팅겐의 프로테스탄트 점령 요새들을 점령했다.[1] 이 요새들을 구원하는 것이 크리스티안의 주요 목표였기에, 그는 손실을 줄이고 철수하기로 결정했지만,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수송대와 대포의 이동이 방해받아 후퇴가 느려졌다. 3일 연속으로 후위 부대는 틸리의 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냈고, 8월 27일 크리스티안은 볼펜뷔텔에서 약 32.19km 떨어진 루터에서 방어를 결정했다.

루터 전투(1626) 삽화


군은 세 개의 별도 전열로 편성되었는데, 크리스티안이 중앙을, 20세의 필리프 폰 헤세-카셀이 우익을, 베테랑 푸크스 폰 빔바흐가 좌익을 이끌었다. 그의 위치는 매우 유리해 보였다. 바로 앞의 나일레 강과 훔메케 강은 대부분 말라 있었고, 양쪽의 숲은 양측면을 보호했으며, 포병은 유일한 다리를 사정권에 두었다. 그러나 군대는 피곤하고 굶주렸으며, 4일 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울리히와 그의 2,000명의 분견대가 철수한 이후로 약간 수적으로 불리했다. 게다가 크리스티안은 지휘 체계를 명확히 하지 못했고, 그가 뒤쪽 숲에 갇힌 수송대를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떠났을 때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3. 2. 전투 전개

틸리 백작은 크리스티안의 군대를 루터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전투를 강요하였다. 제국군 보병대는 덴마크군의 전열을 세 번이나 돌파하였으나 번번이 기병대의 반격에 격퇴당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덴마크군의 포병대를 제국군이 장악하자, 덴마크군은 전열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고 패닉상태에 빠져 슈타데 마을을 향해 궤주했다.[1] 이 전투로 덴마크군은 거의 6,000명이 전사하였고 2,5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1]

덴마크-독일 연합군은 1626년 7월 말 볼펜뷔텔을 떠나 틸리와의 전투를 준비했지만, 틸리가 발렌슈타인으로부터 4,000명 이상의 증원군을 받아 예상보다 훨씬 강력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폭우로 도로는 진흙탕이 되었고 보급 부족이 발생했으며, 틸리는 뮌덴, 노르트하임, 괴팅겐의 프로테스탄트가 점령한 요새들을 점령했다. 이 요새들의 구출이 크리스티안의 주요 목표였기에, 그는 손실을 줄이고 철수하기로 결정했지만,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인해 수송대와 대포의 이동이 방해받아 후퇴가 느려졌다. 3일 연속으로 후위 부대는 틸리의 기병대의 공격을 막아냈고, 8월 27일 크리스티안은 볼펜뷔텔에서 20마일 떨어진 바렌베르게의 루터에서 방어를 결정했다.

군대는 세 개의 별도의 전열로 편성되었는데, 크리스티안이 중앙을, 20세의 필리프 폰 헤세-카셀이 우익을, 그리고 베테랑 푸크스 폰 빔바흐가 좌익을 이끌었다. 그의 위치는 매우 유리해 보였다. 바로 앞의 나일레 강과 훔메케 강은 대부분 말라 있었고, 양쪽의 숲은 양측면을 보호했으며, 포병은 유일한 다리를 사정권에 두었다. 그러나 군대는 피곤하고 굶주렸으며, 4일 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울리히와 그의 2,000명의 분견대가 철수한 이후로 약간 수적으로 불리했다. 게다가 크리스티안은 지휘 체계를 명확히 하지 못했고, 그가 뒤쪽 숲에 갇힌 수송대를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떠났을 때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정오 무렵, 틸리의 포병이 상대방의 주의를 끌기 위해 포격을 시작하는 동안 안홀트 백작이 강을 건너 다리를 확보했다. 오후 2시경, 그들은 반대편 강둑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덴마크군 좌익을 공격했다. 푸크스는 안홀트를 다리까지 밀어붙이는 반격을 명령했지만 저지당했다. 이것이 총공격의 신호라고 생각한 헤세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틸리의 중앙을 공격했다. 이제 전선으로 돌아온 크리스티안과 상의한 후, 푸크스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틸리의 좌익을 공격했고, 국왕은 다리 앞의 지면을 점령하고 있는 부대를 공격했다.

푸크스의 보병은 강을 건너면서 대형을 잃었고, 틸리는 그들이 100미터 거리에 있을 때까지 포병의 사격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파괴적인 집중포화의 영향으로 공격이 무너지고 덴마크군은 완전한 혼란 속에 원래 위치로 후퇴했다. 오후 3시 30분경, 틸리는 주도권을 되찾았다. 푸크스는 기병대의 또 다른 공격을 이끌면서 위치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사망했고, 헤세도 사망했다. 오후 5시 직후, 틸리는 중앙 부대가 강을 건너도록 명령했고, 동시에 그의 좌익 부대는 숲을 돌아 후방을 공격했다. 두 방향에서 압력을 받고 많은 장교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면서, 선봉대는 붕괴되었고, 일련의 필사적인 기병 돌격만이 2, 3열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기병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볼펜뷔텔로 도망쳤고, 3,000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또 다른 2,500명은 근처의 ''루터 성''에 피난하여 다음 날 항복했다. 틸리의 손실은 약 700명의 사상자였다. 그는 또한 덴마크군의 모든 포병대와 많은 수송품, 금으로 가득 찬 두 대의 마차를 압수했다.

3. 3. 덴마크군의 패배

틸리 백작은 크리스티안의 군대를 루터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전투를 강요하였다. 제국군 보병대는 덴마크군의 전열을 세 번이나 돌파하였으나 번번이 기병대의 반격에 격퇴당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덴마크군의 포병대를 제국군이 장악하자, 덴마크군은 전열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고 패닉상태에 빠져 슈타데 마을을 향해 궤주했다.[1] 이 전투로 덴마크군은 거의 6,000명이 전사하였고 2,5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1]

정오 무렵, 틸리의 포병이 상대방의 주의를 끌기 위해 포격을 시작하는 동안 안홀트 백작이 강을 건너 다리를 확보했다. 오후 2시경, 그들은 반대편 강둑에 교두보를 확보하고 덴마크군 좌익을 공격했다. 푸크스는 안홀트를 다리까지 밀어붙이는 반격을 명령했지만 저지당했다. 이것이 총공격의 신호라고 생각한 헤세는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기병대를 이끌고 강을 건너 틸리의 중앙을 공격했다. 이제 전선으로 돌아온 크리스티안과 상의한 후, 푸크스는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틸리의 좌익을 공격했고, 국왕은 다리 앞의 지면을 점령하고 있는 부대를 공격했다.

푸크스의 보병은 강을 건너면서 대형을 잃었고, 틸리는 그들이 100미터 거리에 있을 때까지 포병의 사격을 유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파괴적인 집중포화의 영향으로 공격이 무너지고 덴마크군은 완전한 혼란 속에 원래 위치로 후퇴했다. 오후 3시 30분경, 틸리는 주도권을 되찾았다. 푸크스는 기병대의 또 다른 공격을 이끌면서 위치를 회복하려고 했지만 사망했고, 헤세도 사망했다. 오후 5시 직후, 틸리는 중앙 부대가 강을 건너도록 명령했고, 동시에 그의 좌익 부대는 숲을 돌아 후방을 공격했다. 두 방향에서 압력을 받고 많은 장교들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하면서, 선봉대는 붕괴되었고, 일련의 필사적인 기병 돌격만이 2, 3열의 탈출을 가능하게 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기병대의 잔여 병력과 함께 볼펜뷔텔로 도망쳤고, 3,000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또 다른 2,500명은 근처의 ''루터 성''에 피난하여 다음 날 항복했다. 틸리의 손실은 약 700명의 사상자였다. 그는 또한 덴마크군의 모든 포병대와 많은 수송품, 금으로 가득 찬 두 대의 마차를 압수했다.

4. 영향

루터 전투에서 패배한 후, 크리스티안 4세는 볼펜뷔텔을 지키지 못하고 더 북쪽의 슈타데에 동계 숙영지를 설치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일 동맹군은 덴마크의 지배를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로 대체하는 데 별 관심이 없어 그를 버렸다. 틸리는 브레멘-페르덴 대부분을 점령하고 브레멘 자체를 포위했지만, 후퇴하는 덴마크군이 시골의 보급품을 모두 약탈하여 그의 군대는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없었다. 많은 병사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강도질에 의존했고, 덴마크군만큼이나 빨리 인기를 잃었다.

만스펠트는 타트라 산맥에 고립되었고, 그의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으며, 봉급을 받지 못하고 굶주렸다. 그의 동맹 가브리엘 베틀렌은 페르디난트 2세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만스펠트는 1626년 11월에 사망했고, 크리스티안은 전투를 계속하기 위해 영국과 네덜란드로부터 충분한 보조금을 받았지만, 1627년 10월까지 덴마크군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축출되었다.[1]

전투 현장의 폭스 기념비

4. 1. 덴마크의 패전과 뤼벡 조약

루터 전투 이후 메클렌부르크까지 이르는 지방에 할거하던 북부 독일의 영주들은 크리스티안 4세에 대한 지원을 그만두었다. 페르디난트 2세와 그의 동맹자들의 승리는 덴마크의 작센 저지대에 대한 공략이 절망스러운 것이었음을 입증시켰고, 결국 1629년 덴마크 독일 원정은 뤼벡 조약으로 종결된다. 따라서 이 전투는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덴마크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

메클렌부르크 근처 북독일의 제후들은 크리스티안 4세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동맹을 맺었다. 하노버 지방에서 덴마크에 대한 비참한 약탈과 파괴가 시작되었다. 어쩔 수 없이 크리스티안 4세는 불화가 있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1628년에 동맹을 맺었다. 양군의 공동 전투로 간신히 황제군의 진격을 저지했지만, 덴마크의 후퇴는 1629년 5월 뤼벡 조약으로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북유럽 강국으로서 덴마크 몰락의 계기가 되었다.[1]

4. 2. 유럽 정세 변화와 덴마크의 몰락

루터 전투 이후 메클렌부르크까지 이르는 지방에 할거하던 북부 독일의 영주들은 크리스티안 4세에 대한 지원을 그만두었다. 페르디난트 2세와 그의 동맹자들의 승리는 덴마크의 작센 저지대에 대한 공략이 절망적임을 입증했고, 결국 1629년 덴마크 독일 원정은 뤼벡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따라서 이 전투는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덴마크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