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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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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르디난트 2세는 1578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으며, 1596년 슈타이어마르크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가톨릭 신앙을 강화하고 개신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1617년 보헤미아 왕, 1618년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종교 정책은 보헤미아에서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을 일으켰고, 30년 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30년 전쟁 기간 동안, 그는 백산 전투에서 승리하고 회복령을 발표하는 등 가톨릭 세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스웨덴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기도 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예수회를 지원하고 개신교를 탄압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두 번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종교 정책은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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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디난트 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페르디난트 2세의 초상화, 1614년경
페르디난트 2세의 초상화, 1614년경
이름페르디난트 2세
로마자 표기Ferdinand II
출생일1578년 7월 9일
출생지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그라츠
사망일1637년 2월 15일
사망지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매장지그라츠 영묘 (신체)
빈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심장)
종교가톨릭 교회
통치
직위신성 로마 황제
즉위일1619년 8월 28일
대관일1619년 9월 9일, 프랑크푸르트 대성당
선대 황제마티아스
후대 황제페르디난트 3세
기타 작위헝가리 국왕
보헤미아 국왕
오스트리아 대공
크라인 공작
가족
배우자마리아 안나 폰 바이에른 (1600년 결혼, 1616년 사별)
엘레오노라 곤차가 (1622년 결혼)
자녀페르디난트 3세
마리아 안나, 바이에른 선제후비
체칠리아 레나타, 폴란드 왕비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가문
왕가합스부르크 가문
아버지카를 2세
어머니마리아 안나 폰 바이에른
서명
페르디난트 2세의 서명
페르디난트 2세의 서명

2. 초기 생애 및 교육

페르디난트 2세는 1578년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그라츠에서 카를 2세와 바이에른의 마리아 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할아버지는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였다. 아버지 카를 2세는 오스트리아 내국 (슈타이어마르크, 케른텐과 크라인)을 다스렸고, 어머니 마리아 아나는 카를 2세의 조카딸이자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5세의 딸이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주로 어머니에게 교육받았으며, 그라츠에 있는 예수회 학교에서 수학하였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입학하였고, 3년 후에는 그를 위한 별도의 장소가 마련되었다. 1590년, 루터교 슈타이어마르크 귀족들과의 연결을 원치 않았던 부모에 의해 바이에른의 잉골슈타트 대학교로 보내져 수학하였다. 그의 외삼촌 빌헬름 5세가 그의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1590년부터 1594년까지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가톨릭 통치자로 성장했다.[9]

3. 통치 초기

페르디난트 2세는 사촌 형제들인 루돌프 2세마티아스 사이의 갈등에는 거리를 두었다.[1] 그러나 자녀가 없던 마티아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그 대가로 1617년 비밀 조약을 통해 알자스이탈리아 영토 일부를 스페인에 양도하기로 약속했다.[1] 같은 해,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되었다.

1618년, 페르디난트 2세는 헝가리 왕으로도 선출되었다. 하지만 그해 5월 23일 (일부 자료에서는 5월 22일), 페르디난트 2세의 즉위에 반대한 체코인 반군 지도자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이 군대를 이끌고 프라하성으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가톨릭 측 인사 2명과 비서 1명을 체포하여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 사건이 바로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으로, 새로운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곧이어 개신교도들은 임시 정부를 구성했다.

이듬해 보헤미아 개신교 의회는 페르디난트 2세를 폐위하고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는 30년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4. 30년 전쟁

1618년 5월 23일(일부 근원에 의하면 22일) 페르디난트 2세의 계승을 거부한 체코인 반군 중 하나인 인드르지흐 마티야시 투른이 자신의 군대를 프라하성으로 이끌었다. 그는 2명의 총재와 비서를 포로로 잡아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는데, 이 사건이 제2차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개신교도들은 임시 정부를 구성했고, 이는 30년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9]

1619년 8월 28일, 페르디난트 2세는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으나, 보헤미아 개신교 의회는 그를 폐위하고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스페인, 폴란드, 그리고 일부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받았다.[10]

1620년 11월 8일, 막시밀리안 1세 폰 바이에른 선제후의 도움과 틸리 백작이 이끄는 군대는 프라하 근처 백산에서 프리드리히 5세의 반군을 격파했다. 이 전쟁은 처음에는 독일에 국한되었으나, 이후 프랑스가 개입하면서 유럽 전체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오스트리아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해야 했다.[10]

1625년, 페르디난트 2세는 스페인과 교황의 재정 지원에도 불구하고 재정난을 겪었다. 그는 보헤미아 귀족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군대 강화를 요청했고, 발렌슈타인은 전쟁 지휘권과 약탈한 재산에 대한 권한을 조건으로 이를 수락했다. 그는 3만 명(이후 10만 명으로 증가)의 군대를 모아 슐레지엔, 안할트, 덴마크에서 개신교 군대를 격파했다.[11]

1629년, 페르디난트 2세는 복구령을 발표하여 1552년 파사우 화약 이후 가톨릭 교회 재산을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이로 인해 개신교 군대는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1630년,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하여 그를 해임하고 틸리 백작에게 전쟁 지휘권을 넘겼으나, 틸리는 스웨덴군을 막지 못했다.[11]

1632년 틸리 백작 사후 발렌슈타인이 재기용되었고, 보헤미아에서 스웨덴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뤼첸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는 패배했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전사했다. 1634년, 발렌슈타인은 모호한 행동으로 인해 암살되었다.[12]

가톨릭 군대는 레겐스부르크를 탈환하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승리했다. 스웨덴 군대는 약화되었고, 프랑스루이 13세리슐리외 추기경의 주도로 개신교 편에 서서 전쟁에 개입했다. 1635년, 페르디난트 2세는 프라하 조약을 체결했지만, 전쟁은 계속되었다.[13]

4. 1. 주요 전투

5. 종교 정책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가톨릭 교회의 권위를 회복하고 제국 내에서 가톨릭 신앙을 강화하고자 했다.[9] 그는 예수회 교육을 받았으며, 예수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590년부터 1594년까지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가톨릭 통치자로 훈련받았다.[1] 1598년 이탈리아 로레토성가정 성당을 방문하여 가톨릭을 회복할 것을 엄숙히 서약했다.[1]

1596년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기 시작한 그는 개신교를 억압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로레토로마 순례 여행 후, 개신교도를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강요했다.[1] 1602년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에서 개신교 설교자들을 추방하고 교회들을 파괴했다.[1]

1624년 3월 25일, 페르디난트 2세는 자신의 영토에서 가톨릭교를 회복하겠다는 맹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보헤미아 본토와 모라비아에서 프로테스탄트 의식을 금지했고, 귀족들이 프로테스탄트 목사를 고용하는 것 또한 금지했다. 오스트리아 상부에서는 모든 프로테스탄트 목사와 교사를 추방했으며, 1년 후에는 모든 주민들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명령했다. 이러한 강경책은 1626년 오스트리아 상부 농민들의 반란을 야기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페르디난트 2세의 종교 정책은 30년 전쟁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보헤미아에서 비가톨릭 신민들에게 혼란을 야기했고, 결국 1618년 프라하 창밖 투척 사건으로 이어져 30년 전쟁의 첫 단계가 시작되었다.

6. 가족 관계

1600년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5세의 딸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1574년 - 1616년)와 결혼하여 7명의 자녀를 두었다.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이름출생사망비고
크리스티네1601년1601년요절
카를1603년1603년요절
요한 카를1605년1619년
페르디난트 3세1608년1657년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마리아 안나1610년1665년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1세의 부인
체칠리아 레나타1611년1644년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의 부인
레오폴트 빌헬름1614년1662년에스파냐령 네덜란드 총독



1622년 만토바빈첸초 1세의 딸인 엘레오노라 곤차가와 재혼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인 만토바 공녀 엘레오노라 곤차가(1598-1655).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지만, 그들의 결혼은 "행복한" 결혼으로 여겨졌다.

7. 유산 및 평가

페르디난트 2세의 통치는 종교적 갈등과 정치적 격변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강경한 가톨릭 정책은 30년 전쟁을 장기화시키는 데 기여했다.[9] 그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력을 확장하려 했지만, 그의 정책은 신성 로마 제국의 분열을 심화시켰다.[12]

페르디난트 2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특히 보헤미아에서 비가톨릭 신민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다.[10] 그는 이전 황제인 루돌프 2세가 서명한 칙령으로 보장된 종교의 자유를 유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또한 절대 군주였던 페르디난트 2세는 귀족들의 여러 역사적 특권을 침해했다.[10]

1618년 프라하 창밖 투척사건30년 전쟁의 첫 단계로 여겨진다.[10] 이후 페르디난트 2세는 반종교개혁 노력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자 독일 가톨릭 동맹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확고한 지지를 보였다. 1620년 흰산 전투에서 승리한 후,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에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강요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이 거의 사라지고 의회의 권력이 약화되었다.[10]

1629년 페르디난트 2세는 반환칙령을 발표하여 1552년 파사우 조약 이후 가톨릭으로부터 빼앗긴 모든 토지를 반환하도록 했다.[11] 그러나 그의 군사적 성공은 스웨덴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다.[12]

1635년 페르디난트 2세는 프라하 조약 (1635년)을 체결했지만, 전쟁은 계속되었다.[13] 결국 페르디난트 2세는 1637년 사망했고,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3세가 뒤를 이었다.[13]

현대 한국의 관점에서 볼 때, 페르디난트 2세의 종교적, 정치적 행보는 종교의 자유와 정치적 다양성을 중시하는 현대 한국 사회의 가치와는 상반되는 측면이 있다.

참조

[1] 서적 Kriege und Krisen. Deutschland 1600–1715
[2] 백과사전 Habsburg, Karl II. von Steiermark
[3] 백과사전 Habsburg, Maria von Bayern
[4] 백과사전 Ferdinand I, Holy Roman Emperor
[5] 백과사전 Charles V, Holy Roman Emperor
[6] 백과사전 Anna Jagjello
[7] 백과사전 Albrecht V.
[8] 백과사전 Habsburg, Anna von Oesterreich (1528–1587)
[9] 서적 p. 486 (성세 등 저서)
[10] 서적 p. 487 (성세 등 저서)
[11] 서적 p. 490 (성세 등 저서)
[12] 서적 p. 491-492 (성세 등 저서)
[13] 서적 p. 492 (성세 등 저서)
[14] 서적 p. 493-494 (성세 등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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