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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루이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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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뤄루이칭은 1906년 쓰촨성에서 태어나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여하고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여러 직책을 역임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공안부 부장,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으며,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대장 계급을 받았다. 그는 1959년 총참모장이 되었으나 린뱌오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고,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반당 집단으로 몰려 투옥되었다. 이후 복권되어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장 직책을 다시 맡았으나, 1978년 서독에서 치료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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뤄루이칭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뤄루이칭
뤄루이칭 대장
인물 정보
이름뤄루이칭 (罗瑞卿)
로마자 표기Luo Ruiqing
출생일1906년 5월 31일
출생지청나라 쓰촨성 난충시
사망일1978년 8월 3일
사망지서독 하이델베르크
별칭뤄창쯔 (Luo the Tall)
국적중화인민공화국
배우자하오즈핑
자녀4명
군사 경력
복무 기간1928년 – 1966년
최종 계급대장
소속 군중국인민해방군
참전북벌
장정
백단대전
국공내전
한국 전쟁
중인전쟁
지휘 경력
주요 지휘제2집단군 사령원
화북지역 사령관
총참모장
수상
훈장팔일훈장 (1급)
독립자유훈장 (1급)
해방훈장 (1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영웅
정치 경력
정당중국공산당
주요 직책
역대 직책공안부장
국방부 부부장
총참모장
기타 활동
분야정치인
작가

2. 생애

뤄루이칭은 쓰촨성 난충 출신으로 1928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대장정에 참여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보안 관련 직책을 맡았다. 젊은 간부 훈련을 위해 산시성으로 전출되어 왕밍 지지자 숙청을 주도했고, 장궈타오에게 충성하는 파벌을 제거하는 역할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에는 공안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을 역임하며, 소련의 러시아 내무부와 유사한 준군사 조직 설립을 지지했다. 한국 전쟁에도 참전했으며, 1955년에는 대장 계급을 받았다.[1]

1956년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1959년에는 국무원 부총리 겸 중앙군사위원회 합동참모부 참모장이 되었으나,[1] 군의 정치 교육을 강조하려는 마오쩌둥의 생각에 따르지 않아 린뱌오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1965년 12월에 참모장 직위에서 해임되었지만, 부총리직은 유지했다.[2][3]

문화 대혁명 초기, "펑-뤄-루-양 반당 집단" (펑전, 루딩이, 양상쿤과 함께)의 일원으로 비판받았다. 비판 회의 후 징시 호텔 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으나 두 다리가 부러진 채 생존했다. 이후 몇 년간 입원했으며 1969년에는 왼쪽 다리를 절단했다.

1975년, 마오쩌둥이 린뱌오의 조작을 깨닫고 중앙군사위원회 회의에서 뤄루이칭을 복권시켰다. 1977년에는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장 직책을 되찾았다.

뤄루이칭은 1978년 8월 3일 의료 치료를 위해 서독에 체류하던 중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입당

뤄루이칭은 1906년 쓰촨성 난충에서 태어나 1928년 22세의 나이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6명의 자녀를 둔 부유한 지주 뤄춘팅(罗春庭)의 장남이었다. 그러나 뤄춘팅은 아편 중독으로 모든 재산을 잃었고, 온 가족은 뤄루이칭의 어머니(성씨는 셴(鲜)이며 이름은 알려지지 않음)에게 의존해야 했다. 가족의 재산이 줄었음에도 뤄의 가족은 그의 교육비를 댈 수 있었는데, 이는 홍위병이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뤄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의 부르주아 배경 때문에 뤄의 초기 생애는 1990년대까지 중국 공식 기록에서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뤄루이칭은 1906년 5월 31일 청나라 쓰촨 성 난충 현 우펑 향에서 태어났다.[2] 1923년 난충 중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6월 청두 실업전문학교에 입학했다.[2] 그해 10월 충칭으로 간 후 공청단에 가입했으며, 동시에 중앙군사정치학교(황푸 군관학교)에서 수학했다.[2] 1928년 10월 우위장(중국어 페이지)의 소개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2]

2. 2. 대장정과 군 경력

뤄루이칭은 대장정에 참여했으며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여러 보안 직책을 맡았다.[2] 그는 젊은 간부들의 훈련을 감독하기 위해 산시성으로 전출되어, 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왕밍의 지지자들을 숙청하는 여러 차례의 숙청을 주도했다.[2] 이후 그는 제4방면군에서 마오쩌둥의 라이벌이었던 장궈타오에게 충성하는 파벌을 제거하는 책임을 맡았는데, 이는 장궈타오가 정치적으로 패배한 직후였다.[2]

1933년 2등 홍성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1934년 가을 대장정에 참가했다.[8] 1936년 2월부터 그해 5월까지 중국 인민 항일 군정 대학 교육장을 역임했고, 1938년 부교장, 1940년 2월 팔로군 야전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9]

2. 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뤄루이칭은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부장과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새로운 체제를 내부의 적들로부터 강화하는 역할을 맡았다. 1950년 베이징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자신의 부서 산하에 소련의 러시아 내무부와 유사한 준군사 조직 설립을 지지했다.[1]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1955년에는 중국 인민해방군 최고 계급인 육군 대장으로 훈장을 받았다.[1]

1956년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중국 공산당 중앙서기처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장이 되었다. 195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로 선출되었다.[1]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당 중앙정법위원회 부주임, 국무원 정법판공실 주임, 공안부 부장, 정치법률위원회 부주임, 공안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베이징시 공안국장이 되었다.

1959년 4월 28일에 국무원 부총리 겸 공안부장[1], 국방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며, 국방부 부부장,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이 되었다[2]。 같은 해 9월 17일에 공안부장 겸임을 해임되었고,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임했으며[3], 국방공업판공실 주임,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을 겸임했다.

실무적으로는 마오쩌둥의 측근으로서 경비 책임을 맡았다. 마오쩌둥으로부터 "뤄창쯔"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4], 1965년까지는 항상 마오쩌둥의 충실한 부하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오쩌둥에게도 가장 신뢰받는 부하 중 한 명이었다[5][4]1955년의 반혁명 숙청 운동 당시에는 작가 후펑을 체포하여 정치 감옥(친청 감옥)에 투옥했다.

2. 4. 총참모장 및 린뱌오와의 갈등

1959년 황커청이 펑더화이와 함께 직위에서 해임된 후, 뤄루이칭은 그를 대신하여 중앙군사위원회 합동참모부 참모장이 되었다.[1] 그러나 그는 군대에서 정치 교육을 강조하려는 마오쩌둥의 생각을 따르기를 꺼려 린뱌오와 갈등을 빚었고, 1965년 12월에 해임되었지만, 부총리직은 유지했다.[2][3]

총참모장 시절 뤄루이칭은 마오쩌둥의 전령 역할을 하며, 때로는 린뱌오 국방부장을 건너뛰어 인민해방군에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린뱌오가 병약하여 항상 지휘를 할 수 없었던 사정도 있었다.[4] 뤄루이칭은 펑더화이 실각 후에도 군 현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보수파인 린뱌오와 대립했다.[7]

1965년 5월, 뤄루이칭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최신 무기를 장비하고 방공을 중심으로 한 육해공으로 요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고, 그 전제로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 개선 필요성을 제창했다.[9] 이에 대해 린뱌오는 철저한 "인민 전쟁"에 의한 지구전이야말로 취해야 할 전략이라고 비판하며, "배신자"인 소련과는 더욱 대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9] "린뱌오·뤄루이칭 논쟁"이라고 불린 이 논쟁은 린뱌오의 승리로 끝났다.[9]

3. 문화 대혁명

1959년 황커청이 펑더화이와 함께 직위에서 해임된 후, 뤄루이칭은 중앙군사위원회 합동참모부 참모장이 되었다. 그러나 군대에서 정치 교육을 강조하려는 마오쩌둥의 생각을 따르기를 꺼려 린뱌오와 갈등을 빚었고, 1965년 12월에 해임되었지만 부총리직은 유지했다.

3. 1. 몰락과 투옥

문화 대혁명 초기, 뤄루이칭은 펑전, 루딩이, 양상쿤과 함께 "펑-뤄-루-양 반당 집단"으로 지목되어 비판받았다. 비판 회의 후, 징시 호텔 3층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했으나 두 다리가 부러진 채 살아남았다. 이는 그의 유죄를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져 회복 후에도 공개적인 비판을 받았다.[10] 그는 여러 차례 입원해야 했으며 1969년에는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11]

1965년 마오쩌둥은 류샤오치 국가주석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류샤오치는 허룽과 뤄루이칭을 끌어들여 군마저 장악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5] 그 때문에 마오쩌둥은 린뱌오와 협력하여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권력 장악을 꾀했다.

린뱌오는 협력의 대가로 군의 실력자였던 뤄루이칭의 파면을 마오쩌둥에게 요구했다.[5] 뤄루이칭은 펑더화이 실각 후에도 군 현대화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보수파인 린뱌오와 대립하고 있었다.[7]

1965년 12월, 린뱌오의 아내 예췬은 뤄루이칭을 고발했고, 이는 받아들여져 뤄루이칭은 자택 연금되었다.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뤄루이칭은 "정치 돌출에 반대하고, 군을 장악하여 당에 반대했다"고 비판받았다.[11] 1966년 3월, 뤄루이칭은 자택에서 투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는 당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되어 더욱 심하게 고발당했다. 5월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펑전, 루딩이, 양상쿤과 함께 반당 집단으로 몰려 친청 감옥에 투옥되었다.[10]

3. 2. 복권과 사망

뤄루이칭은 1975년 중앙군사위원회 회의에서 마오쩌둥에 의해 복권되었는데, 마오쩌둥린뱌오가 뤄루이칭에 대한 사건을 조작했음을 깨달았다.[14] 1977년 중국 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고 중앙군사위원회 서기장 직책을 되찾았다.[14]

1978년 8월 3일 의료 치료를 위해 서독에 체류 중 사망했다.[15]

4. 평가 및 영향

뤄루이칭은 중국 공산당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문화 대혁명으로 인해 큰 시련을 겪었다. 그는 중국 인민해방군의 여러 요직을 거치며 공산당 정권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되어 숙청되었다. 다리가 부러지는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1975년에 복권되어 다시 당의 중책을 맡았다. 그의 생애는 중국 현대사의 복잡한 정치적 격동을 반영하며, 특히 당내 권력 투쟁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뤄루이칭의 경험은 현대 중국 정치에서 개인의 역할과 운명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참조

[1] 웹사이트 中华人民共和国主席令(二届第2号) http://www.npc.gov.c[...]
[2] 웹사이트 中华人民共和国主席令(二届第3号) http://www.npc.gov.c[...]
[3] 웹사이트 第二届全国人民代表大会常务委员会第九次会议简况 http://www.npc.gov.c[...]
[4] 서적 ユン・チアン
[5] 서적 高文謙
[6] 서적 安藤・太田・辻
[7] 서적 天児
[8] 서적 安藤・太田・辻
[9] 서적 安藤・太田・辻
[10] 서적 ユン・チアン
[11] 서적 安藤・太田・辻
[12] 서적 安藤・太田・辻
[13] 서적 ユン・チアン
[14] 서적 李輝
[15] 웹인용 1942년 2월 11일, 팔로군 본부 적들의 "소탕"과 "숙청" 파괴 지시 http://korean.cri.cn[...] 2023-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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