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왕국 (19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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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왕국 (1918년)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지원을 받아 리투아니아 평의회가 수립하려 했던 입헌 군주국이다.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분할된 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던 리투아니아는 1918년 2월 16일 독립을 선언했으나, 독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독일은 괴뢰 국가 수립을 시도하며 프로이센의 왕자나 작센의 왕자 등 여러 후보를 고려했고, 결국 우라흐 공작 빌헬름을 리투아니아 국왕 민도우스 2세로 추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연합국의 반대와 독일의 패배로 인해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군주제 수립 계획을 철회하고 공화국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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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왕국 (1918년)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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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리투아니아 왕국 |
현지 명칭 | Lietuvos Karalystė (리투아니아어) Königreich Litauen (독일어) |
존속 기간 | 1918년 |
지위 | 독일 제국의 종속국 |
수도 | 빌뉴스 |
공용어 | 리투아니아어 폴란드어 벨라루스어 러시아어 |
통화 | (정보 없음)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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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및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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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국가 입헌 군주국, 임시 정부 하 |
국왕 (선출) | 민다우가스 2세 |
부관 | 안타나스 스메토나 |
입법부 | 리투아니아 평의회 |
역사 | |
시대 | 제1차 세계 대전 |
빌뉴스 회의 시작 | 1917년 9월 18일 |
독립 선언 | 1918년 2월 16일 |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1918년 3월 3일 |
독일의 승인 | 1918년 3월 23일 |
군주제 선포 | 1918년 6월 4일 |
국왕 선출 | 1918년 7월 11일 |
군주제 중단 | 1918년 11월 2일 |
독일 항복 | 1918년 11월 11일 |
이전 국가 | |
이전 국가 1 | 오버 오스트 |
이전 국가 2 | 러시아 공화국 |
이후 국가 | |
이후 국가 1 | 리투아니아 공화국 |
이후 국가 2 |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이후 국가 3 | 제2차 폴란드 공화국 |
2. 배경
179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분할 후,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점령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 독일은 '미텔유럽' 전략의 일환으로 괴뢰 국가를 세우려 했다.[1] 독일은 빌뉴스 회의 조직을 허용했는데, 이는 리투아니아 민족이 러시아로부터 분리되어 독일과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을 선언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2] 1917년 9월, 회의는 리투아니아 평의회 위원 20명을 선출하고 독일과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협상할 권한을 부여했다. 독일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협상을 준비하면서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독일과의 "굳건하고 영구적인 동맹"을 원한다는 선언을 요구했다.[3] 1917년 12월 11일 리투아니아 평의회에서 이러한 선언이 채택되었으나, 평의회를 분열시켰고 독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점령한 후,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를 리투아니아의 군주로 삼아 프로이센과 개인 연합을 맺으려 했다.[1] 그러나 리투아니아는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가톨릭에 우호적인 독일인을 군주로 맞이해야 한다며 이러한 계획에 반대했다.[1]
이에 따라 평의회는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은 독일과의 동맹에 대한 언급을 생략하고 "이전 국가를 다른 국가에 묶어 두었던 모든 국가적 유대 관계의 종결"을 선언했다.[4] 1918년 3월 3일, 독일과 볼셰비키 러시아는 발트 국가가 독일의 이익 지대에 속하며 러시아가 발트 국가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한다는 내용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1918년 3월 23일, 독일은 12월 11일 선언을 근거로 독립 리투아니아를 공식 인정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독일군에 점령되었고, 평의회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으며 독일인들에게 자문 위원회로 취급받았다.
3. 국왕 선출
이러한 상황에서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1918년 7월 4일, 독일 귀족 빌헬름 2세에게 왕위를 제안하기로 결정했지만, 독일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1]
3. 1. 후보자
리투아니아 왕관은 처음에 오베르 오스트의 군사령부에 의해 독일 제국 빌헬름 2세와 프로이센 왕에게 제안되었다. 이 제안은 리투아니아와 프로이센 간의 개인 연합을 창출했을 것이다. 또 다른 제안은 빌헬름의 막내 아들인 요아힘 왕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1] 이미 지배적인 프로테스탄트 프로이센의 확장에 대한 이러한 계획은 작센의 베틴 가문과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과 같은 가톨릭 통치 가문에 의해 반대되었다.[1] 작센은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 왕자를 지지했는데, 그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3세의 둘째 아들이었다. 이 제안은 작센과 리투아니아 간의 역사적 유대감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베틴 가문은 1697년부터 1763년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통치자 두 명을 배출했으며, 1791년 폴란드-리투아니아 헌법은 베틴 가문의 수장을 세습 군주로 선출했다.[1]
독일인들은 또한 폴란드 정치인인 라드지빌 가문의 야누시 프란치셰크 라드지윌에게 리투아니아 왕관을 제안했는데, 그는 호엔촐레른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고 고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였다.[1] 다른 여러 후보자들도 고려되었다. 이러한 계획은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독립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입헌 군주국을 창설하고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싸울 후보자를 초청하자는 아이디어가 제시되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단은 1918년 6월 4일, 세습 군주국을 수립하고 우라흐 공작 빌헬름을 초청하기로 비밀 투표했다. 빌헬름 공작은 스위스에서 리투아니아인들과 함께 일했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에 의해 제안되었다.[1] 그의 입후보는 적어도 1918년 3월부터 논의되었다. 빌헬름 공작은 가톨릭 신자였고, 할아버지의 정실 결혼으로 인해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계승 서열에 없었으며, 호엔촐레른 가문과 밀접한 관련이 없었고, 폴란드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완벽한 후보자로 보였다.[3] 독일 군대의 방해로 인해 빌헬름 공작을 만나기 위한 리투아니아 대표단은 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로 7월 1일까지 연기되었다.[1] 빌헬름 공작과 그의 장남(추정 상속인)은 무조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918년 7월 11일,[2]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찬성 13표, 반대 5표, 기권 2표로 공식적으로 군주국을 수립하기로 투표했다. 1918년 8월 12일, 평의회는 빌헬름 공작에게 리투아니아 국왕 민도우스 2세가 되어달라는 공식 초청장을 보냈다.[4]
3. 2. 조건
빌헬름 공작에게는 중세 시대의 파크타 콘벤타와 유사한 12개 조항이 제시되었다.[1] 이 조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조건들은 본질적으로 리투아니아인들이 "선택적 민족성"을 부과한 것으로 평가된다.[4]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조건을 헌법이라고 칭하기도 하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다. 리투아니아 법학자 미하우 피우스 뢰머는 이를 "헌법의 배아"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조건은 군주제가 폐지되지 않았다면 헌법으로 발전했을 매우 기본적인 임시 틀이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독일 문서 보관소에서 완전한 헌법 초안이 발견되었지만, 리투아니아 평의회에서 논의된 적은 없었고 초안으로만 남았다.
4. 선거 이후
군주제 제안은 리투아니아 평의회 내 우익과 좌익 구성원 사이에 분열을 야기했다. 이 제안은 안타나스 스메토나, 유르기스 샤울리스, 그리고 가톨릭 사제들이 가장 강력하게 지지했다.[1] 군주제가 승인되자, 스테포나스 카이리스, 요나스 빌레이시스, 미콜라스 비르지슈카, 스타니스와프 나루토비치 (스타니슬로바스 나루타비추스) 등 평의회 구성원 4명이 항의의 표시로 사임했다. 페트라스 클리마스 또한 반대표를 던졌지만, 사임하지는 않았다.[2] 동시에 평의회는 마르티나스 이카스,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 유오자스 푸리키스, 엘리제이우스 드라우겔리스, 유르기스 알레크나, 스타시스 실링가스 등 6명의 새로운 구성원을 충원했다.[2] 입헌 군주제 대 민주 공화국에 대한 논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앞서 1917년 12월 평의회는 군주제가 리투아니아에 더 적합하다는 데 15 대 5로 투표했다.[3] 지지자들은 리투아니아인들이 공화국에 대한 정치적 성숙도가 부족하며, 독일인들이 군주제를 더 쉽게 지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대자들은 이러한 기본적 사항들은 빌뉴스 회의에서 미래의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에 위임되었기에 평의회는 결정할 법적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다.[4]
독일은 새 국왕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독립 리투아니아에 대한 자신들의 승인은 독일과의 동맹을 규정한 12월 11일 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따라서 리투아니아는 새로운 군주를 일방적으로 선출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리투아니아 평의회가 민다우가스 2세 승인 직전에 이름을 리투아니아 국가 평의회로 변경한 것에 항의했다. 평의회는 독일과의 통신에서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새로운 국왕을 지지했다. 리투아니아 언론은 검열을 받아 새 국왕에 대한 어떠한 뉴스도 보도할 수 없었고, 독일 언론은 만장일치로 이 결정을 비판했다. 평의회의 신문인 ''리투보스 아이다스''가 새 국왕을 비난하는 기사를 게재하는 것을 거부하자, 그 신문은 한 달 동안 폐쇄되었다. 독일-리투아니아 관계는 1918년 10월까지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이 선거는 또한 이미 연합국과 리투아니아 디아스포라 사이에서 독일의 꼭두각시로 묘사되던 평의회의 평판을 더욱 손상시켰다. 서방의 리투아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가 독립에 대한 희망을 독일이 아닌 연합국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분열은 리투아니아의 입장을 더욱 분열시키고 약화시켰다.
5. 공화국 수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리투아니아는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1918년 10월 20일, 독일 제국 재상 바덴 공자 막시밀리안은 독립 리투아니아를 다시 인정하고, 독일 군정을 민간 정부로 전환하며, 리투아니아인들이 충분한 역량을 갖추면 정부를 인수하도록 허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접한 리투아니아 평의회는 10월 28일에 임시 헌법과 정부 구성을 논의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변화된 정치 상황으로 인해 평의회는 민다우가스 2세 선출 결정을 철회해야 했다. 연합국의 적을 왕으로 둘 수 없었기에 리투아니아는 연합국의 인정을 희망했다. 빌헬름 공작은 왕위를 포기할 의사를 밝혔다. 11월 2일, 평의회는 빌헬름 공작에 대한 초청을 보류하고 최종 결정을 미래의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에 맡겼다. 같은 날 평의회는 최초의 임시 헌법을 채택했는데, 이 헌법은 제헌 의회가 최종 결정을 내릴 때까지 정부를 임시적으로 구성하는 역할만 했다. 이후의 헌법들은 군주제를 다시 고려하지 않았다.
6. 한국과의 관계
참조
[1]
논문
Z działalności politycznej Janusza Radziwiłła do 1939 r. : szkic do portretu konserwatysty
2005
[2]
문서
[3]
문서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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