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임시정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는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일어난 6월 봉기를 통해 수립되었으며, 리투아니아의 독립 회복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 정부는 유대인 배척 성명을 발표하고 유대인 학살에 연루되면서 논란을 낳았다. 임시 정부는 1941년 8월 독일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그 활동은 전후 리투아니아의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쳤지만,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 문제로 인해 현재까지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시작된 6월 봉기 과정에서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LAF)은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3][2] LAF 지도자 카지스 스키르파가 총리로 지명되었으나, 당시 베를린에 있던 그는 나치 독일의 방해로 귀국하지 못하고 가택 연금되었다.[17][9] 이에 따라 문학사가인 주오자스 암브라제비치우스가 총리 대행을 맡아 1941년 8월 5일까지 정부를 이끌었다.[4]
임시정부는 1941년 6월 22일 6월 봉기가 시작되면서 확정되었다. 그러나 총리로 예정되었던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LAF)의 지도자 카지스 스키르파는 당시 베를린에 있었고, 나치 독일 당국은 리투아니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그의 이동을 허가하지 않아 리투아니아로 돌아오지 못하고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다.[17] 당시 베를린에 있던 또 다른 장관 후보였던 라폴라스 스키피티스(외무부 장관 내정자) 역시 베를린을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17]
리투아니아 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특히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의 역할과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책임 문제가 주요 쟁점이다.[17]
[1]
저널
1941 m. Lietuvos laikinosios vyriausybės atsiradimo aplinkybės
http://www.is.lt/vor[...]
2004-06-11
2. 역사
나치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장차 대게르만 제국의 일부로 편입할 계획이었기에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임시 정부의 활동을 일시적으로만 용인했다.[17] 임시 정부는 소련 점령 이전의 법률 및 제도를 복원하려 했으나,[18]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렸고 일부 각료 후보들은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거나 처형되기도 했다.[10]
특히 임시 정부는 나치 독일과 LAF 내 반유대주의 세력이 조장한 폭력을 효과적으로 제지하지 못했으며, 정부가 창설한 군사 조직(Tautinio darbo apsaugos batalionas|민족 방위 노동 대대lit)은 이후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나치에 협력하여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18][7] 또한 임시 정부는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결국 임시 정부는 나치 독일로부터 독립은 물론 자치권조차 인정받지 못했으며, 1941년 8월 5일 독일 당국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고 해산되었다.
2. 1. 6월 봉기와 임시 정부 수립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바르바로사 작전)하자 리투아니아 전역에서는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LAF)의 주도로 소련의 점령 통치에 반대하는 6월 봉기가 일어났다.[3] 봉기가 시작되면서 임시 정부 수립 계획이 확정되었다. 6월 23일, LAF 소속의 Leonas Prapuolenis|레오나스 프라푸오레니스lt는 카우나스 라디오 방송을 통해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의 수립과 독립 회복을 선언했다.[2]
임시 정부의 총리로는 LAF의 지도자이자 전 주독 공사였던 카지스 스키르파가 지명되었다.[9] 그러나 그는 당시 베를린에 머물고 있었는데, 나치 독일 당국은 리투아니아를 장차 대게르만 제국의 일부로 편입할 계획이었기에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할 의사가 없었다.[17] 독일은 스키르파가 독립 승인을 요청하자 그를 베를린 자택에 연금시키고 리투아니아로의 귀국을 막았다.[17][9] 역시 베를린에 있던 또 다른 장관 후보였던 Rapolas Skipitis|라폴라스 스키피티스lt 역시 출국이 금지되었다.[17][9]
스키르파가 돌아올 수 없게 되자, 문학사가이자 임시 정부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유오자스 암브라제비치우스가 총리 대행을 맡게 되었다.[4] 그는 1941년 6월 23일부터 임시 정부가 해산되는 8월 5일까지 총리 대행직을 수행했다.
임시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심각한 인력난에 부딪혔다.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던 Vytautas Bulvičius|비타우타스 불비치우스lt는 봉기 이전인 6월 2일에 이미 소련군에 체포된 상태였고, Stasys Raštikis|스타시스 라슈티키스lt 장군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10] 또한, 독일의 침공 바로 전날인 6월 21일에는 Vladas Nasevičius|블라다스 나세비치우스lt, 비타우타스 스타트쿠스, Jonas Masiliūnas|요나스 마실리우나스lt, 요나스 바이나우스카스 등 다른 각료 후보들이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모스크바 또는 니즈니노브고로드(당시 고리키)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1941년 11월 말 재판에 회부되었고, 불비치우스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나머지 인사들은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암브라제비치우스를 비롯한 임시 정부의 각료 대부분은 기독교 민주파 인사들로 채워졌으며, 정부 내에서는 당파 간의 갈등도 존재했다. 임시 정부는 소련 점령 이전의 리투아니아 공화국 법률과 사법 제도를 복원하고, 재산의 사유화를 다시 인정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리투아니아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들은 재산 반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나치 독일은 리투아니아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임시 정부를 일시적으로만 용인했다. 임시 정부는 나치와 LAF 내 반유대주의 세력이 부추긴 반유대주의 폭력을 막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18] 오히려 6월 23일 독립 선언과 함께 발표된 성명에서는 "오랜 유대 멍에"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며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을 배제할 것을 공공연히 선언했다. 임시 정부는 군사 조직으로 Tautinio darbo apsaugos batalionas|민족 방위 노동 대대lt(TDA)를 창설했는데, 이 조직은 나중에 보조 경찰 대대(PPT)로 개편되어 홀로코스트 과정에서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7] 또한 임시 정부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 설치를 승인하고, 8월 1일에는 유대인의 권리를 박탈하고 게토 수용을 규정한 "유대인 지위 규칙"을 제정하는 등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임시 정부의 이러한 반유대주의적 행보와 홀로코스트 연루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책임 논란을 낳고 있다.
결국 임시 정부는 나치 독일의 지원 하에 독립은커녕 자치권조차 확보하지 못하게 되자, 1941년 8월 5일 해산되었다.
2. 2. 임시 정부의 활동과 한계
임시 정부는 소련 점령 이전에 시행되던 리투아니아의 법률을 복원하기로 결정했으며, 사법 제도 역시 점령 이전 상태로 되돌렸다.[18] 재산의 사유가 다시 인정되어 토지, 가옥, 자산, 기업 등이 원래 소유주에게 반환되었으나, 유대인이나 "리투아니아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은 반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18]
군사 조직의 필요성을 느낀 임시 정부는 1941년 6월 28일 리투아니아 내 여러 군사 조직을 무장 해제시킨 뒤, 다음 날인 29일 Tautinio darbo apsaugos batalionas|민족 방위 노동 대대lit(TDA)를 창설했다. 카우나스 군 사령관으로는 Jurgis Bobelis|유르기스 보벨리스lit 대령이 임명되었다. TDA는 이후 보조 경찰 대대(PPT)로 개편되었으며, 이 조직들은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보벨리스 대령은 임시 정부에 유대인 강제 수용소 설치를 제안했고, 임시 정부는 1941년 6월 30일 각료 회의에서 이를 승인했다.
1941년 8월 1일, 임시 정부는 각료 회의에서 유대인을 게토에 격리 수용하기 위한 "유대인 지위 규칙"을 제정했다. 이 규칙의 전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내각은, 유대인이, 수세기에 걸쳐 리투아니아 민족을 경제적으로 착취하고, 도덕적으로 파멸시키며, 또한 최근에는 볼셰비즘의 외투를 입고 리투아니아의 독립과 리투아니아 민족에 대한 싸움을 널리 전개한 것을 고려하고, 그리고 유대인의 이러한 파괴적 활동의 앞길을 막고, 그들의 유해한 영향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민족을 보호하는 것을 목표로, 다음의 여러 규칙을 제정할 것을 결정했다. […]
—"유대인 지위 규칙" 전문
이처럼 임시 정부는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추진했다.[18] 1941년 6월 23일 독립 회복 선언 당시에도 유대인 배척을 촉구하는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LAF)의 성명서가 함께 낭독되었다:유대인의 마지막 심판이 될 운명적인 순간이 왔다. 리투아니아는, 아시아적 볼셰비키의 멍에뿐만 아니라, 오랜 유대 멍에에서도 해방되어야 한다. […] 리투아니아의 유대인은, 예외 없이 전원 즉시 리투아니아의 땅을 떠나도록 단호히 경고한다. […] 새로운 리투아니아 국가는, 리투아니아 민족에 속하는 자의 힘, 노동, 마음, 정신에 의해 재건될 것이다. 유대인은 완전하고 영원히 거기에서 배제된다. […] 새롭게 재건되는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은 그 누구도 시민권도 거주의 가능성도 갖지 못할 것이다. […]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 "형제 자매 리투아니아인들이여"
실제로 6월 봉기 직후부터 독일 아인자츠그루펜이 도착하기 전에도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독일 점령 이전에 약 500건의 개별적인 포그롬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유럽 홀로코스트의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임시 정부는 이러한 반유대주의 폭력을 막으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18] LAF의 선동과 정부의 방관이 유대인 박해를 조장했다는 비판과 함께 그 책임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임시 정부는 나치 독일의 보호 하에 있던 슬로바키아와 같이 독일과의 동맹을 통한 독립 국가 승인을 얻으려 했으나, 나치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식민지 정도로 간주하고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임시 정부는 1941년 8월 5일 독일 당국에 의해 활동이 금지되며 해체되었다.
2. 3. 나치 독일과의 관계와 임시 정부 해산
나치 독일 정권은 리투아니아를 대게르만 제국의 미래 영토 일부로 간주하여 리투아니아의 독립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다만 임시 정부가 추축국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동안에는 활동을 잠정적으로 허용했다.[17] 임시 정부 총리로 내정되었던 리투아니아 운동전선(LAF) 지도자 카지스 스키르파는 당시 베를린에 있었으나, 나치 독일은 그의 리투아니아 귀국을 막고 가택 연금에 처했다. 베를린에 있던 또 다른 장관 후보 라폴라스 스키피티스 역시 출국이 금지되었다.[17][9] 이에 문학 역사가인 주오자스 암브라제비치우스가 스키르파를 대신하여 총리 대행을 맡았다.[4]
임시 정부는 나치 독일 측에 슬로바키아의 사례처럼 "독일과의 견고한 동맹 하에서의 독립 국가"로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치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포함한 발트 지역을 사실상의 식민지로 취급할 계획이었기에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17][9]
한편, 임시 정부는 나치와 LAF의 반유대주의 지도자들이 선동한 반유대주의 폭력을 막기 위한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으며, 임시 정부에 의해 조직된 리투아니아 경찰 대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집행에 협력하기도 했다.[18][7]
결국 임시 정부는 독일의 지원 하에 독립은커녕 자치권조차 확보하지 못했고, 1941년 8월 5일 독일 당국에 의해 모든 활동이 금지되며 해산되었다.[17][9]
3. 내각
또한, 일부 내각 구성 예정자들은 소련 당국에 의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던 비타우타스 불비치우스 소령은 6월 2일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1년 11월 28일 처형되었고, 그의 자리는 스타시스 라슈티키스 장군이 대신 맡게 되었다. 1941년 6월 21일에는 내무부 장관 블라다스 나세비치우스, 상무부 장관 비타우타스 스타트쿠스, 통신부 장관 요나스 마실리우나스, 국가 감사원장 요나스 바이나우스카스가 소련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들은 니즈니노브고로드(당시 고리키)에 수감되었고, 이후 불비치우스를 제외한 마실리우나스, 나세비치우스, 스타트쿠스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었다.
총리 스키르파의 부재로 인해, 문학사가이자 교육부 장관이었던 유오자스 암브라제비치우스-브라자이티스가 총리 대행을 맡았다. 임시 정부의 내각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11][13]직책 성명 비고 총리 카지스 스키르파 대령 베를린에서 가택 연금되어 취임하지 못함. 총리 대행 겸 교육부 장관 유오자스 암브라제비치우스-브라자이티스 총리 부재로 대행 겸임. 국방부 장관 비타우타스 불비치우스 소령 1941년 6월 2일 소련에 체포, 11월 처형됨. 스타시스 라슈티키스 장군 불비치우스 체포 후 임명됨. 법무부 장관 Mečislovas Mackevičius|메치슬로바스 마츠케비치우스lt 임시 정부 해산 후 법무국 고문 역임.[14] 외무부 장관 라폴라스 스키피티스 베를린에서 이동이 허가되지 않아 취임하지 못함. 내무부 장관 블라다스 나세비치우스 1941년 6월 21일 소련에 체포,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취임하지 못함. Jonas Šlepetys|요나스 슐레페티스lt 나세비치우스 체포 후 임명됨. 재무부 장관 Jonas Matulionis|요나스 마툴리오니스lt (1898년 출생) 임시 정부 해산 후 재무국 고문 역임.[14] 상무부 장관 비타우타스 스타트쿠스 1941년 6월 21일 소련에 체포,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취임하지 못함. Pranas Vainauskas|프라나스 바이나우스카스lt 감사원장 겸임. 스타트쿠스 체포 후 상무장관직 수행. 감사원장 공업부 장관 (공무부 장관) Adolfas Damušis|아돌파스 다무시스lt (공학 박사) 농업부 장관 Balys Vitkus|발리스 비트쿠스lt (교수) 임시 정부 해산 후 농업국 고문을 단기간 역임.[14] 사회보장부 장관 (노동 사회 보장부 장관) Juozas Pajaujis-Javis|유오자스 파야우이스-야비스lt (박사) 기반 시설부 장관 (공동 경제부 장관) 비타우타스 란즈베르기스-젬칼니스 (공학자) 통신부 장관 (운수 통신부 장관) Jonas Masiliūnas|요나스 마실리우나스lt 1941년 6월 21일 소련에 체포,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취임하지 못함. Antanas Novickis|안타나스 노비츠키스lt 마실리우나스 체포 후 임명됨. 보건부 장관 Ksaveras Vencius|크사베라스 벤시우스lt LAF 전권 대표 Leonas Prapuolenis|레오나스 프라푸오레니스lt 식량국장 Vladas Grudzinskas|블라다스 그루진스카스lt[15] 정보국장 Juozas Senkus|유오자스 셴쿠스lt (1911년 출생)
4. 평가
임시정부는 나치 독일과 리투아니아 운동전선(LAF)의 반유대주의 지도자들이 조장한 반유대주의 폭력을 막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임시정부가 조직한 민족 방위 노동 대대(TDA, 이후 보조 경찰 대대(PPT)로 개칭)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수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18][7][17] 1941년 6월 23일, 임시정부 수립과 독립 회복을 라디오로 선언할 당시, LAF는 "유대인의 마지막 심판이 될 운명적인 순간이 왔다"며 리투아니아에서 유대인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는 성명을 함께 발표했다. 이는 임시정부 초기부터 강력한 반유대주의 성향을 드러낸 것이다.
임시정부는 소련 점령 이전의 법률을 부활시키면서도, 재산 반환 대상에서 유대인과 "리투아니아 민족의 이익에 반하는 행위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자들을 제외했다.[18][18] 또한, TDA 사령관 Jurgis Bobelis|유르기스 보벨리스lt 대령의 요구에 따라 6월 30일 각료 회의에서 유대인 강제 수용소 설치를 승인했으며[17], 8월 1일에는 유대인을 게토에 수용하기 위한 "유대인 지위 규칙"을 제정했다.[17] 이 규칙의 전문에는 유대인이 리투아니아 민족을 착취하고 파멸시켰으며 볼셰비즘과 손잡고 독립에 맞서 싸웠다는 비난과 함께, 유대인의 "파괴적 활동"과 "유해한 영향"으로부터 민족을 보호하기 위해 규칙을 제정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실제로 리투아니아 6월 봉기 직후 독일 아인자츠그루펜이 도착하기 전부터 리투아니아 전역에서는 리투아니아인들에 의한 유대인 학살(포그롬)이 발생했으며, 이는 유럽 홀로코스트의 시작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LAF가 퍼뜨린 반유대주의 선전과 임시정부의 유대인 살해 방조 및 가담은 이러한 폭력을 부추긴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되며, 임시정부의 책임론이 제기된다.
일각에서는 임시정부가 직접적인 잔혹 행위를 장려하지 않았으며, 6월 봉기가 이후 반나치 및 반소련 저항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5][6] 예를 들어, 역사가 Vygantas Vareikis|비간타스 바레이키스lt는 임시정부가 유대인이나 LAF 지도자에 대한 잔혹 행위를 직접 지시하지 않았고, 언론은 고위 공산당원과 NKVD 간부 처형만을 제안했다고 주장했다.[5]
그러나 홀로코스트 역사 연구가 Stanislovas Stasiulis|스타니슬로바스 스타시울리스lt는 리투아니아 홀로코스트 역사 서술이 나치 점령기, 소련 재점령기, 그리고 1990년 이후의 시기로 나뉜다고 지적한다.[8] 특히 소련 시기에는 홀로코스트의 인종주의적 본질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홀로코스트와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탄압을 동일시하는 이른바 '이중 학살 이론'이라는 방어적 역사 인식을 낳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관점은 홀로코스트를 경시하고 때로는 나치의 포그롬을 정당한 보복 행위로 묘사하려는 시도로 이어지기도 해 비판받는다.[8]
결론적으로 리투아니아 임시정부는 민족 자결과 독립 회복을 추구했다는 측면이 있으나, 그 과정에서 나타난 극단적인 반유대주의 정책과 홀로코스트 가담은 심각한 역사적 과오로 평가되며, 이에 대한 책임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로 남아있다.
5. 유산
리투아니아 6월 봉기는 이후 반(反)나치 저항과 반소련 저항으로 이어지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6] 요자스 암브라제비추스-브라자이티스가 총리 대행을 맡았던[4] 임시 정부 시기의 활동은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의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당시 베르마흐트가 도착하기 전에 리투아니아 반군들은 이미 리투아니아를 해방시키고, 체카에 의해 살해될 위기에 처했던 300명 이상의 정치범을 구출하기도 했다.[6]
그러나 임시 정부는 나치가 조장한 반유대주의 폭력과 리투아니아 행동 전선(LAF) 내의 반유대주의적 경향을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임시 정부가 구성한 리투아니아 경찰 대대는 나치의 홀로코스트 수행에 협력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7] 역사가 비간타스 바레이키스는 임시 정부나 LAF 지도부가 유대인에 대한 "잔혹한 행동을 장려하지 않았으며", 현지 언론은 고위 공산주의 관리와 NKVD 장교의 처형만을 제안했다고 주장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 과정에서의 방관 또는 일부 세력의 협력이라는 어두운 역사는 임시 정부의 유산에서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이러한 복잡한 과거는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홀로코스트 역사 서술에도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타니슬로바스 스타시울리스는 리투아니아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세 시기로 나누어 분석했다. 첫째는 나치 점령기 리투아니아인과 유대인의 관계, 둘째는 소련의 재점령 이후 시기, 셋째는 1990년 독립 이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8] 특히 소련 당국이 홀로코스트의 인종주의적 본질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태도는, 일부에서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소련의 스탈린주의적 탄압을 동일시하려는 소위 '이중 학살 이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관점은 홀로코스트의 고유한 성격과 심각성을 경시한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8]
임시 정부는 나치 독일의 후원 아래 자치적이기는커녕 독립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결정한 후 1941년 8월에 해산되었다.
참조
[2]
웹사이트
Lietuvių savivalda ir vokiečių okupacinė valdžia: tarp kolaboravimo ir rezistencijos
http://www.genocid.l[...]
2021-06-07
[3]
뉴스
A glimmer of hope or prelude to Holocaust? Lithuania's June 1941 uprising remains controversial eight decades on
Lithuanian National Radio and Television
2021-06-22
[4]
웹사이트
Lithuanian Collaboration during the Second World War
https://yivo.org/cim[...]
YIVO Institute for Jewish Research
[5]
서적
Nazi Europe and the Final Solution
https://books.google[...]
Berghahn Books
2009
[6]
웹사이트
Istorikai apie Birželio sukilimo reikšmę
http://www.šaltiniai[...]
Vilnius University, Institute of Lithuanian Literature and Folklore
2021-06-07
[7]
저널
The Burden of 1941
http://www.lituanus.[...]
2001
[8]
저널
The Holocaust in Lithuania: The Key Characteristics of Its History, and the Key Issues in Historiography and Cultural Memory
2020-02
[9]
웹사이트
Kuo reikšmingas 1941 m. birželio 22-28 d. sukilimas?
http://www.llks.lt/V[...]
2014-06-20
[10]
뉴스
Baltics Rebellious
https://www.newspape[...]
2023-10-05
[11]
저널
Pasaulyje — kaip savo namuose
http://ic.lms.lt/ml/[...]
1998-02-11
[12]
저널
1941 m. Lietuvos laikinosios vyriausybės atsiradimo aplinkybės
http://www.is.lt/vor[...]
2004-06-11
[13]
웹사이트
Lietuvos laikinoji vyriausybė
https://www.vle.lt/S[...]
2019-07-15
[14]
웹사이트
generaliniai tarėjai
https://www.vle.lt/S[...]
2019-07-15
[15]
웹사이트
Vladas Grudzinskas
https://www.mle.lt/s[...]
2020-12-18
[16]
저널
1941 m. Lietuvos laikinosios vyriausybės atsiradimo aplinkybės
http://www.is.lt/vor[...]
2004-06-11
[17]
웹인용
Kuo reikšmingas 1941 m. birželio 22-28 d. sukilimas?
http://www.llks.lt/V[...]
2014-06-20
[18]
웹사이트
The Burden of 1941
http://www.lituanus.[...]
2001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