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독일의 수도이자, 독일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슬라브어에서 유래된 지명과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12세기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일부로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독일 제국의 수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를 거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단되었으나, 1990년 독일 통일과 함께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되었다. 12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당, 좌파당, 기민당, 녹색당 등이 주요 정당이다. 경제적으로는 서비스업이 발달했으며, 생명 과학, IT, 미디어 등 다양한 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베를린은 또한 4개의 공립 대학과 다양한 연구 기관을 갖춘 교육 및 연구의 중심지이며, 스포츠, 문화, 관광 분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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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 데어 앙그리프 요제프 괴벨스가 창간한 나치당의 신문 데어 앙그리프는 당의 지원을 받아 반의회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을 선동하고 나치즘을 확산하는 데 기여했으나, 나치 정권의 선전 도구로 활용되다 1945년 폐간되었다.
베를린 -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방송 베를린-브란덴부르크 방송(RBB)은 2002년 베를린주와 브란덴부르크주 간 협약으로 설립된 독일 공영 방송으로, 자유 베를린 방송(SFB)과 브란덴부르크-동부 독일 방송(ORB)의 통합체이며, RBB Fernsehen과 Radio Berlin 88.8 등 다양한 채널을 운영하고 ARD 회원으로서 지역 특화 방송 서비스를 제공한다.
독일의 주 - 신연방주 독일 통일 후 구 동독 지역에 편입된 신연방주는 경제 재건, 인구 변화, 사회 통합 등의 과제를 안고 있으며, 서독 지역과의 문화적, 정신적 차이와 경제적 격차가 존재하고 좌파당과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보이는 특징을 가진다.
독일의 주 - 구연방주 구 연방주는 독일 통일 이전 서독 지역을 지칭하며, 동독과 비교하여 인구, 경제, 정치 등 여러 측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베를린의 구 - 슈판다우구 슈판다우구는 독일 베를린의 행정 구역으로, 하펠강 서안에 위치하며 6세기에 슬라브족이 정착한 이래 1197년에 처음 언급되었고, 요새 건설과 산업 발달을 거쳐 2021년 기준 약 22만 명이 거주하는 9개의 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베를린의 구 - 라이니켄도르프구 라이니켄도르프구는 베를린 북서쪽에 위치하며 숲과 수면이 넓고 다양한 주거 형태가 혼재된 구로, 프랑스령 지구였으며 현재는 11개의 동으로 구성되어 구청과 구의회를 통해 운영된다.
베를린은 13세기에 최초로 문서에 언급되었으며, 이후 프로이센 왕국(1701-1918), 독일 제국(1871-1918),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 나치 독일(1933-1945)의 수도였다.[302] 1920년 "대베를린" 성립으로 시역이 크게 확장되어 현재와 거의 같은 영역이 되었다.
베를린이라는 명칭은 1244년 역사적 문서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324] 144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Brandenburgischer Markgraf)는 브란덴부르크 안 데어 하벨(Brandenburg an der Havel)에서 베를린으로 궁전을 옮겼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의 삼십년 전쟁(Dreißigjähriger Krieg)으로 베를린 인구의 절반이 감소했다.[325]1709년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326]
187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황제가 되어 독일 제국(Deutsches Reich)이 성립되었고, 베를린은 그 수도가 되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외교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쇠퇴로 베를린은 유럽 국제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여, 삼십년 전쟁 발발 당시 약 1만 명에서 19세기 초 17만 명, 1860년 50만 명, 1877년 100만 명에 달했다.[326]1873년 일본 이와쿠라 사절단이 베를린을 방문했고, 당시 모습이 『미국 유럽 회람 실기』에 기록되었다.[327]1882년이토 히로부미 등이 일본 헌법 기초 조사를 위해 베를린을 방문했다. 1884년모리 오가이가 유학, 소설 『무희』를 저술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일 제국이 붕괴된 후,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의 수도가 되었다. 베를린은 유럽 예술·학문의 중심이었으나, "붉은 베를린"이라는 별명처럼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성채였다. 1928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33%, 독일 공산당 25%, 나치당 2% 득표율을 기록했다.[328] 1932년 11월 선거에서 공산당이 베를린 투표 총수 31%를 획득, 단독 제1당이 되었다.[329]1933년 나치 집권 후, 베를린 문화는 쇠퇴했다.
1939년 인구 434만 명의 대도시였지만,[326]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소전쟁 최후의 전장이 되어 파괴되었고(베를린 시가전), 약 12만 5천 명의 시민이 희생되었다.[331] 히틀러 정권 하 베를린에는 일본 외교관, 군인, 상사원, 유학생 등 400명 이상 일본인이 체류, 유럽에서 일본인이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였다.[332][333]
제2차 세계 대전 후, 베를린은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분단되었다.[304]1990년 독일 재통일로 베를린은 다시 수도 지위를 얻었다.
베를린은 독일 북동부에 위치한다. 독일 북동부의 도시와 마을 대부분은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슬라브어 기원의 지명 접미사의 전형적인 독일식 표기는 -ow, -itz, -vitz, -witz, -itzsch, -in이며, 접두사로는 ''Windisch''와 ''Wendisch''가 있다.[27]
베를린의 12개 자치구 중 5개는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판코우, 슈테글리츠-첼렌도르프, 마르찬-헬러스도르프, 트레프토우-쾨페니크, 슈판다우. 베를린의 96개 지역 중 슬라브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곳은 다음과 같다: 알트글리니케, 알트-트레프토우, 브리츠, 부흐, 부코우, 가토우, 카로우, 클라도우, 쾨페니크, 랑크비츠, 뤼바르스, 말코우, 마르찬, 판코우,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루도우, 슈뫼크비츠, 슈판다우, 슈타트란트지들룽 말코우, 슈테글리츠, 테겔, 첼렌도르프.
베를린(Berlin)의 지명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오늘날 베를린 일대에 서슬라브인들이 정착하면서, 고대 폴라브어로 습지를 의미하는 'berl-' / 'birl-'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다.[296] 독일어로 곰을 의미하는 'Bär'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297] 이는 오늘날 베를린의 문장에도 표현되어 있다.[297] 한자로는 '''伯林'''이라는 표기가 사용된다.[298]
2. 2. 초기 역사
약 1,500년 전, 현재의 베를린 지역에는 다양한 슬라브 민족들이 살고 있었다. 1100년대에 독일인 정착자들이 이 지역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당시 베를린은 작은 마을이었고, 슈프레 강 북동쪽 둑에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에 슈프레 강 섬에서는 쾰른(Coelln)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 두 마을은 상업 중심지였다. 1307년 베를린과 쾰른은 공동 방어를 위한 연합을 설립하고, 공동 시청사를 지었다. 15세기 베를린은 브란덴부르크주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15세기 후반 호엔촐레른 왕가가 베를린을 관저로 삼았다. 30년 전쟁 동안 큰 피해를 보았고, 인구는 6,000명으로 감소했다.
베를린 지역 최초의 인류 정착지는 기원전 6만 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9000년경의 사슴 가면은 마글레모세 문화(Maglemosian culture)의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000년경 슈프레 강(Spree)과 하벨 강(Havel)을 따라 밀집된 인류 정착지가 형성되어 루사티아 문화(Lusatian culture)가 탄생했다.[28] 기원전 500년경부터 게르만 부족(Germanic tribes)들이 오늘날 베를린의 고지대에 여러 마을을 세우고 정착했다. 200년경 세므노네스족(Semnones)이 떠난 후 부르군디아인(Burgundians)들이 뒤를 이었다. 7세기에는 이후 헤벨리족(Hevelli)과 슈프레바네족(Sprevane)으로 알려진 슬라브족 부족들이 이 지역에 도착했다.
2. 3.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
1640년부터 1688년까지 브란덴부르크주를 통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아래 베를린은 다시 번영하였다. 그의 통치 아래, 슈프레강과 오데르강 사이에 운하가 건설되었고 산업이 촉진되고 건설에 후원하였다.[36]1701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41]
1710년에는 베를린, 쾰른과 3개의 이웃 집단들이 통합하여 하나의 베를린을 이루었다. 1700년대에 베를린은 작은 읍에서 번영하는 통상과 제조업의 중심지로 증대하였다. 예술과 과학이 번창하였고, 산업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1806년부터 1808년까지 나폴레옹 1세에 의해 점령당하였고, 그가 떠나자 독일의 강국이 된 프로이센의 수도로 번영하였다.
1688년 베를린 지도
베를린 대성당(왼쪽)과 베를린 궁전(오른쪽), 1900년
19세기 동안 산업혁명은 베를린을 변화시켰다. 도시의 경제와 인구가 급격히 확장되었고, 베를린은 독일의 주요 철도 중심지이자 경제 중심지가 되었다.
2. 4. 불안한 시대
1918년제1차 세계 대전 말, 독일 제국이 무너지면서 베를린은 새 바이마르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파업, 폭동, 인플레이션으로 도시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20년 베를린 대확장으로 7개의 도시, 59개의 마을, 27개의 소유지가 베를린에 합쳐지며 계속 성장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은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정권이 세워지는 원인이 되었다.[302]
20세기 초 베를린은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다.[49] 건축, 회화, 영화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예술 양식이 나타났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필립 샤이데만이 국회의사당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선포했다. 1920년 대베를린법으로 베를린 주변의 여러 지역이 편입되어 면적은 66km2에서 883km2로, 인구는 약 400만 명으로 증가했다. 바이마르 시대 동안 베를린은 정치적 불안을 겪었지만, 흥망의 20년대의 중심지로 과학, 기술, 예술, 영화, 고등 교육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에서 대중적 명성을 얻었고,[50] 1921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51]
1933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했다. 히틀러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갖춘 수도를 원했고, 나치 건축을 통해 권력을 과시하는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히틀러와 알베르트 슈페어는 베를린을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로 만들고자 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52]
나치 통치로 베를린의 유대인 공동체는 1933년부터 1939년 사이 16만 명에서 약 8만 명으로 감소했다. 1938년 수정의 밤 이후, 수천 명의 베를린 유대인들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고, 1943년 초부터는 격리 구역과 강제 수용소, 절멸 수용소(아우슈비츠 등)로 강제 이송되었다.[5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를린은 연합국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독일이 분단되면서 베를린 역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뉘었다. 서베를린은 서독과는 다른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었으나, 행정권은 서베를린에서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독의 수도가 될 수 없었고, 분단 시기 서독의 실질적인 수도는 본이었다. 동베를린 또한 소련군의 점령지로 간주되었으나, 사실상 동독의 수도 기능을 수행했다.
냉전 시기, 서베를린은 동독 영토 안에 고립된 자유 진영의 섬과 같았다. 동베를린 시민들이 서베를린으로 탈출하는 사례가 늘자, 1961년 동독 정부는 베를린 장벽을 세워 이를 막으려 했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 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이 시기 서베를린 시장을 역임했다.
이러한 냉전의 영향으로 서독의 항공 허브는 프랑크푸르트와 뮌헨 등이 발전하게 되었고, 베를린은 현재까지도 항공 교통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편이다.
2. 6. 통일 이후 독일의 수도
1989년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고, 1990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베를린은 연방 주 지위를 얻었다. 베를린은 함부르크, 브레멘과 함께 도시이자 연방 주인 곳이다. 분단 이전부터 수도였기에 별다른 이견 없이 1991년 수도로 확정되었다.[63]독일 연방의회(Bundestag, 독일 의회)는 독일 수도 결정에 따라 수도를 본에서 베를린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 재임 중인 1999년에 완료되었다.[67]
발터 묄퍼(서베를린 시장)는 임시로 통일된 도시의 첫 시장이 되었다.[64] 1990년 12월 시 전역 선거 결과, 1991년 1월에 첫 "베를린 전체" 시장이 취임하면서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별도 시장직은 소멸되었고, 에버하르트 디프겐(전 서베를린 시장)이 통일 베를린의 첫 선출 시장이 되었다.[65] 1994년 6월 18일, 미국, 프랑스, 영국 군인들이 연합군 주둔군 철수를 기념하는 행진을 하였으며, 이는 독일 통일#통일된 베를린을 가능하게 했다.[66]
3. 자연
베를린의 위성사진
베를린 외곽은 삼림과 수많은 호수로 덮여 있다.
베를린은 독일 북동부의 저지대 습지 삼림 지역에 위치하며, 주로 평평한 지형이다. 이곳은 북부 프랑스에서 러시아 서부까지 뻗어 있는 광대한 북유럽 평원의 일부이다. 마지막 빙하기 말에 빙상에서 흘러나온 빙하 융수에 의해 형성된 베를리너 우르슈트롬탈(빙하 계곡)은 북쪽의 바르님 고원과 남쪽의 텔토 고원 사이에 있다. 현재 슈프레 강이 이 계곡을 따라 흐른다. 베를린 서부의 슈판다우에서 슈프레 강은 하펠 강으로 합류하며, 하펠 강은 베를린 서부를 북에서 남으로 흐른다. 하펠 강의 흐름은 호수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중 가장 큰 호수는 테겔 호와 그로서 반제이다. 일련의 호수들은 또한 상류 슈프레 강으로 유입되며, 베를린 동부의 그로서 뭊겔제를 통과한다.[82]
베를린 현재 지역의 상당 부분은 슈프레 계곡 양쪽의 저지대 고원으로 확장된다. 라이니켄도르프와 판코우 구의 대부분은 바르님 고원에 위치하며, 샬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 구, 슈테글리츠-체렌도르프 구, 템펠호프-셰네베르크 구, 노이쾰른 구의 대부분은 텔토 고원에 위치한다.
슈판다우 구는 베를린 빙하 계곡과 베를린 서쪽으로 뻗어 있는 나우엔 평원에 부분적으로 위치한다. 2015년 이후로 판코의 아르켄베르게 언덕은 122m의 고도로 베를린에서 가장 높은 지점이 되었다. 건설 잔해의 매립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잔해로 이루어진 토이펠스베르크(120.1m)를 능가하게 되었다.[83] 114.7m의 고도를 가진 뭊겔베르게가 가장 높은 자연 지점이며, 가장 낮은 지점은 슈판다우의 스펙테제로 28.1m의 고도를 가지고 있다.[84]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본 베를린 중심부
3. 1. 기후
베를린은 쾨펜의 기후 구분에 따르면 서안 해양성 기후(Cfb)에 속하며, 습윤 대륙성 기후 (Dfb)와 인접해 있다.[85] 이러한 기후는 온화하거나 매우 따뜻한 여름 기온과 춥지만 매우 혹독하지 않은 겨울을 특징으로 한다. 연 강수량은 적당하다.[86][87]
여름은 따뜻하고 때때로 습하며, 평균 최고 기온은 22°C~25°C, 최저 기온은 12°C~14°C이다. 겨울은 춥고 평균 최고 기온은 3°C, 최저 기온은 -2°C~0°C이다. 봄과 가을은 일반적으로 서늘하거나 온화하다. 베를린의 건설된 지역은 도시 건물과 포장 도로에 저장된 열로 인해 열섬 현상을 일으키는 미기후를 만들어 도시의 기온은 주변 지역보다 4°C 더 높을 수 있다.[88]
연 강수량은 570mm이며, 일년 내내 적당한 강우량을 보인다. 강설은 주로 12월부터 3월까지 발생한다.[89] 베를린에서 가장 더웠던 달은 1834년 7월로 평균 기온이 23°C였고, 가장 추웠던 달은 1709년 1월로 평균 기온이 -13.2°C였다.[90] 기록상 가장 강우량이 많았던 달은 1907년 7월로 230mm였고, 가장 강우량이 적었던 달은 1866년 10월, 1902년 11월, 1908년 10월, 1928년 9월로 모두 1mm였다.[91]
월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평균 최고 기온 (℃)
3.2°C
4.9°C
9°C
15.1°C
19.6°C
22.9°C
25°C
24.8°C
19.8°C
13.9°C
7.7°C
4.1°C
평균 최저 기온 (℃)
-2.2°C
-1.8°C
0.4°C
4°C
8.2°C
11.7°C
14°C
13.5°C
9.8°C
5.6°C
1.9°C
-0.9°C
월 강수량 (mm)
41.5mm
30mm
35.9mm
27.7mm
52.8mm
60.2mm
70mm
52.4mm
43.6mm
40.3mm
38.8mm
39.1mm
평균 강수일수 (≥ 0.1mm)
15.8
13.9
14
10.9
12.8
12.4
13.4
12.7
11.6
13.6
14.5
16.4
평균 강설일수 (≥ 1cm)
8.4
6.8
2.6
0.2
0
0
0
0
0
0
1.4
4.9
평균 상대 습도 (%)
85.9
81.2
75.8
67.2
66.9
66.3
67
68.5
76
82.7
87.8
87.5
월 평균 일조시간
52.6
77.9
126.7
196.4
231.1
232.9
233.7
222.2
168.9
113.8
57.4
45.0
자료 출처 1: 독일 기상청 (평년값: 1991년~2020년, 극값: 1957년~현재)[463]
베를린 주는 12개의 행정구(''Bezirk'')로 구성되어 있다. 2001년까지는 23개의 구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행정 개혁에 따라 각 구의 권한이 강화되고 행정구가 재편되었다. 각 행정구에는 여러 개의 지역(''Ortsteil'')이 포함된다. 그 역사는 1920년 10월에 설정된 대베를린 이전의 구 자치체에 유래한다. 대베를린에 합병되어 도시화되었지만, 많은 시민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이나 행정구에 강한 일체감을 가지고 있다. 현재 베를린에는 96개의 지역이 있으며, 이들은 일반적으로 몇몇 블록을 형성하고 베를린 방언으로 Kiez(키츠)라고 불리는 소규모 주택지를 가리킨다.
각 행정구에는 선거로 지역에서 선출된 의원으로 구성된 구의회(''Bezirksamt'')가 있으며[343], 구청장(''Bezirksbürgermeister'')과 5명의 참사위원(''Bezirksstadträte'')으로 구성된 집행 기관이 있다[343]. 각 행정구는 자치체로서는 독립적이지 않지만, 기본적인 행정 서비스 제공을 담당하며[343], 베를린 주 정부(베를린 참사회)의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12명의 구청장은 “구청장 회의”를 설치하고(의장은 시장이 맡음), 주 정부에 자문을 한다[343].
''Ortsteile''에는 행정적인 권한이나 의무가 없으며, 이전 지역의 대표였던 ''Ortsvorsteher''는 구청장에게 이어졌다.
베를린 주는 다음의 12개 구(Bezirk)로 구분된다.
미테 구(Mitte)
프리드리히스하인-크로이츠베르크 구(Friedrichshain-Kreuzberg)
판코 구(Pankow)
샬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 구(Charlottenburg-Wilmersdorf)
슈판다우 구(Spandau)
슈테글리츠-체렌도르프 구(Steglitz-Zehlendorf)
템펠호프-셰네베르크 구(Tempelhof-Schöneberg)
노이쾰른 구(Neukölln)
트레프토우-쾨페니크 구(Treptow-Köpenick)
마르찬-헬러스도르프 구(Marzahn-Hellersdorf)
리히텐베르크 구(Lichtenberg)
라이니켄도르프 구(Reinickendorf)
5. 정치
베를린은 대도시인만큼 좌파정당 득표율이 높으며, 주로 사회민주당, 좌파당, 기민당, 녹색당이 많이 득표한다.
베를린은 독일 연방공화국의 수도이다. 주로 의례적인 역할을 하는 독일 대통령의 공식 관저는 벨뷰궁전]이다.[141] 베를린은 독일 총리의 소재지이며, 총리 관저는 총리청 건물에 위치해 있다. 총리청 건너편에는 독일 연방의회가 있으며, 1998년 정부가 베를린으로 이전한 이후로 개조된 국회의사당 건물에 자리하고 있다. 독일 연방참의원 (상원의 기능 수행)은 독일 16개 연방주의 대표 기구이며, 이전의 프로이센 귀족원 건물에 자리 잡고 있다. 독일 정부가 관리하는 연방 전체 예산은 2013년 3100억유로 (3750억달러)를 초과했다.[142]
연방 정부와 연방의회의 베를린 이전은 1999년에 대부분 완료되었다. 그러나 일부 부처와 일부 하위 부서는 서독의 전 수도였던 연방 도시 본(Bonn)에 남아 있었다. 나머지 부처와 부서의 베를린 이전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다.[143]
독일 외교부, 독일 국방부, 독일 연방 법무 소비자 보호부, 독일 연방 재무부, 독일 연방 내무부, 독일 연방 경제 에너지부, 독일 연방 노동 사회부, 독일 연방 가족 노년 여성 청소년부, 독일 연방 환경 자연보전 원자력 안전부, 독일 연방 식량 농업부, 독일 연방 경제협력 개발부, 독일 연방 보건부, 독일 연방 교통 디지털 인프라부, 독일 연방 교육 연구부 등의 부처들이 베를린에 있다.
베를린에는 총 158개의 외국 대사관[144]이 있으며, 많은 싱크탱크, 노동조합, 비영리단체, 로비 단체 및 전문 협회의 본부도 있다.
베를린 주의 의회는 '''베를린 주의회'''(Abgeordnetenhausde)이며, 2023년 1월 현재 147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원의 임기는 5년이다.[343] 베를린은 도시주이기 때문에, 의회는 시의회와 주의회의 권한을 모두 갖는다.[343]
'''베를린 시장'''(Regierender Bürgermeisterde, 직역하면 "통치하는 시장")은 의회 의원 선거 때마다 의회에서 선출되며, 독일 연방의회가 임명한다.[343]
베를린 시장은 주정부(베를린 시 참사회, Senat von Berlinde)를 이끈다.[343] 주정부는 시장 외에 8명의 각료(Senatde, 직역하면 "원로")로 구성된다.[343] 각료는 각각 주정부의 "부처"를 이끈다.[343] 각료 중 2명은 부시장(Bürgermeisterde, 직역하면 "시장")을 맡는다.[343] 시장과 주정부의 집무는 베를린 붉은 시청사에서 이루어진다.
6. 인구 통계
젊은 베를린 시민
인구(연령)
2022년 베를린 인구 피라미드
1880년~2012년 베를린 인구 변화
2020년 12월 31일 기준, 이주 배경이 없는 베를린 주민(구별)
베를린은 독일 국내뿐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국제적인 도시이다. 2018년 말 기준, 베를린 시 면적은 891.1km2, 등록 주민은 375만 명이었으며,[105] 인구 밀도는 4,206명/km2였다. 베를린은 유럽 연합(EU)에서 시 경계 내 인구를 기준으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2019년 베를린 도시 지역의 인구는 약 450만 명,[5] 기능적 도시 지역 인구는 약 520만 명이었다.[102]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수도권 전체 인구는 30546km2 면적에 600만 명이 넘는다.[103][3]
1960년대와 1970년대 서베를린의 적극적인 이민 및 난민 정책은 이민의 물결을 일으켰다. 특히 튀르키예계 이민자가 많아, 베를린은 이스탄불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터키인들의 도시로 알려졌다. 베를린에는 최소 18만 명의 터키인과 독일계 터키인 거주자가 있으며,[105] 터키를 제외한 지역 중 가장 큰 터키계 사회를 이루고 있다.[106] 1990년대에는 ''Aussiedlergesetze''(추방자 법)에 따라 구 소련 거주민들의 독일 이주가 가능해져, 오늘날 구 소련 국가 출신의 민족 독일인들이 러시아어 사용자 사회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107]
2014년 베를린 시는 37,368명의 출생아 수(+6.6%)를 기록했는데, 이는 1991년 이후 최고 기록이다. 같은 해 사망자 수는 32,314명이었다. 도시에는 거의 200만 가구가 있었고, 그 중 54%는 1인 가구였다. 18세 미만 자녀가 있는 가구는 33만 7천 가구가 넘었으며, 약 4만 명의 순이주를 기록했다.[104]
2023년 12월 31일 기준 국적별 거주민 수[105]
국가
인구
2,931,731
107,022
62,495
54,099
48,301
37,815
33,732
33,257
33,256
28,843
25,851
22,172
21,743
21,305
19,484
2019년 12월 기준, 외국 국적의 등록 거주민은 77만 7,345명이었고, "이주 배경"(Migrationshintergrund, MH)을 가진 독일 시민은 54만 2,975명이었다.[105] 이는 그들 또는 그들의 부모 중 한 명이 1955년 이후 독일에 이주했다는 의미이다. 베를린의 외국 거주민들은 약 190개국 출신이다.[111]
베를린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가장 많은 난민을 받은 독일 도시 중 하나이다. 2022년 11월 기준, 베를린에는 약 8만 5천 명의 우크라이나 난민이 등록되어 있으며,[116] 독일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이 가장 많이 찾는 도시이다.[117]
6. 1. 종교
베를린 전체 인구의 70%는 현재 종교가 없으며, 이 부류의 인구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다른 독일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천주교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꾸준히 감소세를 보였다. 2023년 12월 31일 기준, 도시 인구의 7.1%가 천주교 신자였고, 12.2%가 개신교, 0.5%가 유대교 신자였다. 그 외에도 소수의 성공회 교도와 외국인들을 주축으로 한 이슬람교도가 존재한다.[121]
2011년 인구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인구의 약 37%가 법적으로 인정된 교회 또는 종교 단체의 구성원이라고 보고했다. 나머지는 그러한 단체에 속하지 않았거나, 그들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122]
2010년에 기록된 가장 큰 종교 단체는 프로테스탄트 지역 교회 단체인 베를린-브란덴부르크-실레지아 상부 루사티아 복음교회(EKBO)로, 연합 교회였다. EKBO는 독일복음교회(EKD)와 EKD 내 프로테스탄트 교회 연합(UEK)의 회원이다. EKBO에 따르면, 그들의 회원은 지역 인구의 18.7%를 차지했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는 주민의 9.1%가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었다.[123] 인구의 약 2.7%는 다른 기독교 교파(대부분 동방 정교회이지만 다양한 프로테스탄트도 포함)와 자신을 동일시한다.[124] 베를린 주민 등록부에 따르면, 2018년 복음교회 회원은 14.9%, 가톨릭 교회 회원은 8.5%였다.[105] 정부는 교회를 대신하여 교회세를 징수하기 때문에 세금 목적으로 이러한 교회 회원을 등록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체 교회세를 징수할 수 있는 다른 종교 단체 회원에 대한 기록은 보관하지 않는다.
2009년, 베를린-브란덴부르크 통계청은 베를린에 있는 모스크와 이슬람 종교 단체의 회원으로 약 249,000명의 무슬림을 보고했다.[125] 반면 2016년, ''타게스슈피겔'' 신문은 베를린에서 약 350,000명의 무슬림이 라마단을 지켰다고 추산했다.[126] 2019년, 약 437,000명의 등록 주민(총 인구의 11.6%)이 이슬람 협력기구 회원국 중 한 곳에서 이주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105][126] 1992년부터 2011년 사이에 무슬림 인구는 거의 두 배로 증가했다.[127]
베를린 주민의 약 0.9%는 다른 종교에 속한다. 추산 30,000~45,000명의 유대인 주민[128] 중 약 12,000명이 종교 단체에 등록된 회원이다.[124]
베를린은 베를린 로마 가톨릭 대주교의 본부이며, EKBO의 선출 의장은 EKBO 주교로 불린다. 또한 베를린은 서유럽과 중앙 유럽의 두 본부 중 하나인 불가리아 정교회 서유럽 및 중앙 유럽 교구의 성 보리스 세례자 대성당과 베를린 교구(모스크바 총대주교청)의 그리스도 부활 대성당과 같은 많은 정교회 대성당의 본부이다.
다양한 종교와 교파의 신자들은 베를린에 많은 예배 장소를 유지하고 있다. 독립 복음 루터 교회는 베를린에 크기가 다른 여덟 개의 교구를 가지고 있다.[129] 베를린에는 36개의 침례교 교회(독일 복음 자유교회 연합 내), 29개의 신사도 교회, 15개의 연합 감리교회, 8개의 자유 복음 교회, 4개의 기독교 과학 교회(1, 2, 3, 11), 6개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 교회, 구교회 교회, 그리고 성공회 교회가 있다. 베를린에는 80개가 넘는 모스크,[130] 10개의 시나고그,[131] 그리고 2개의 불교 사원과 4개의 힌두교 사원이 있다.
6. 2. 건강
샤리테는 베를린의 의과대학이자 대학 병원으로 1710년에 설립되었고, 1810년부터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의 대학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2003년에는 베를린 자유 대학교의 의과대학까지 통합하여 유럽 최대의 대학 병원인 "Charité Universitätsmedizin Berlin"이 되었다.[465]
샤리테
베를린은 의학 분야의 발견과 의료 기술 혁신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200] 현대 의학은 베를린 출신 과학자들의 큰 영향을 받았다. 루돌프 피르호는 세포 병리학의 창시자였으며, 로베르트 코흐는 탄저병, 콜레라, 결핵 백신을 개발했다.[201] 코흐는 평생의 업적으로 현대 의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02]
샤리테는 유럽에서 가장 큰 대학병원으로, 그 기원은 17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밀 아돌프 폰 베링, 로베르트 코흐, 파울 에를리히 등 독일의 생리학 또는 의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 중 절반 이상이 샤리테에서 근무했다. 샤리테는 4개의 캠퍼스에 걸쳐 약 3,000개의 병상, 15,500명의 직원, 8,000명의 학생, 60개 이상의 수술실을 보유하고 있으며, 연간 20억유로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203]
7. 경제
베를린은 금융, 보건, 부동산, 소매, 교통 등 서비스업이 발달했다. 제조업은 독일 통일 이후 쇠퇴했지만, 기계, 전기 제품, 화학 공업과 식품 공업은 여전히 중요한 산업이다.
2018년 베를린의 GDP는 1470억유로로 전년 대비 3.1% 증가했다.[3] 서비스업이 경제의 약 84%를 차지하며 주도하고 있다. 2015년 총 노동력은 185만 명이었고, 실업률은 2015년 11월 24년 만에 최저치인 10.0%를 기록했다.[146]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베를린은 독일 주 중에서 가장 높은 연간 고용 증가율을 보였으며, 약 13만 개의 일자리가 추가되었다.[147]
생명 과학, 운송, 정보통신 기술, 미디어 및 음악, 광고 및 디자인, 생명 공학, 환경 서비스, 건설, 전자상거래, 소매, 호텔 사업, 의료 공학 등이 베를린의 중요한 경제 부문이다.[148]
연구 개발은 도시 경제에 중요하며,[149] 폭스바겐(Volkswagen), 화이자(Pfizer), SAP과 같은 여러 대기업들이 베를린에 혁신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150] 아들러스호프의 과학 및 비즈니스 파크는 매출 기준 독일에서 가장 큰 기술 단지이다.[151] 유로존 내에서 베를린은 기업 이전과 국제 투자의 중심지가 되었다.[152]
연도[153]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2021
2022
실업률 (%)
13.6
13.3
12.3
11.7
11.1
10.7
9.8
9.0
8.1
7.8
6.4
8.6
9.1
많은 독일 및 국제 기업들이 베를린에 사업장이나 서비스 센터를 두고 있으며, 베를린은 주요 창업자 중심지로 인정받고 있다.[155] 2015년 베를린은 유럽에서 젊은 스타트업 기업에 대한 벤처 캐피탈을 가장 많이 유치했다.[156]
베를린 10대 고용주에는 베를린 시, 독일철도(DB),[154] 병원 제공업체인 샤리테와 비반테스, 독일 연방 정부, BVG, 지멘스, 도이치텔레콤이 포함된다.[157]
글로벌 500 기업이자 DAX 상장 기업인 지멘스는 베를린에 일부 본사를 두고 있다. 베를린에 본사를 둔 다른 DAX 상장 기업으로는 부동산 회사인 도이치 보넨과 온라인 음식 배달 서비스인 딜리버리 히어로가 있다. 유럽 최대의 디지털 출판사인 독일철도(DB),[158][159] 악셀 슈프링어뿐만 아니라 MDAX 상장 기업인 잘란도와 헬로프레시도 베를린에 본사를 두고 있다. 베를린에 독일 또는 유럽 본사를 둔 대규모 국제 기업으로는 봄바디어 트랜스포테이션, 시큐어링 에너지 포 유럽, 코카콜라, 화이자, 소니, 토탈에너지가 있다.
2023년 기준으로, 독일과 유럽 전체에서 가장 큰 금융 서비스 그룹을 형성하는 저축은행 금융그룹(Sparkassen-Finanzgruppe) 네트워크는 베를린에 본사를 두고 있다. 약 1.2조유로를 관리하는 (Bundesverband der Deutschen Volksbanken und Raiffeisenbanken)는 베를린에 본사를 두고 있다.[160] 수도의 3대 은행은 독일 신용은행, 베를린 주은행, 베를린 하이프이다.[161]
메르세데스-벤츠 그룹은 자동차를 생산하고, BMW는 베를린에서 오토바이를 생산한다. 2022년 미국 전기 자동차 제조업체인 테슬라(Tesla, Inc.)는 브란덴부르크주 그뤼네하이데에 베를린 외곽에 첫 번째 유럽 기가팩토리를 열었다. 바이엘[162]의 제약 부문과 베를린 케미는 베를린의 주요 제약 회사이다.
베를린은 과거 제조업과 금융의 중심지였으나, 냉전 시대의 동서 베를린 분단으로 동서 베를린은 각각 동독과 서독의 경제에 편입되었다. 동베를린은 동독의 상업, 공업, 금융, 수송의 중심이 되었고, 슈프레 강의 중요한 내항 기능을 갖추고 운하를 통해 발트해와도 연결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파괴된 서베를린의 경제는 소련이 1948년부터 1949년에 걸쳐 실시한 베를린 봉쇄로 다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마셜 플랜 경제 원조 덕분에 베를린은 재건을 시작했다. 고속도로, 철도, 운하, 항공로로 서독과 연결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동서 베를린은 다시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경제 통합은 공식적으로 1990년 7월에 시작되었고, 특히 동베를린 경제는 과거 국영 기업의 민영화 등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국제 가전 박람회
베를린 경제에서 제3차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83%이다. 실업률은 2018년 현재 7.9%로 독일 평균 5.0%보다 높지만, 지난 25년 동안 최저치이다.[349] 환경 개선 사업, 수송 공학, 의료 공학 등이 있다. 사이언스 비즈니스 파크는 아들러스호프 지역에 있으며, 세계에서 15번째로 큰 기술 단지이다. 연구 개발 부문은 베를린 도시 경제에서 중요하며, 유럽 연합 내에서는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지역이 상위 3위의 혁신적인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350]
8. 자매 도시
베를린은 세계 여러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으며, 각 구는 시와 별도로 자매결연을 맺기도 한다. 1967년 서베를린과 로스앤젤레스 간의 자매결연을 시작으로, 현재 17개 도시와 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40] 독일 통일 당시 동베를린의 자매 도시 관계는 해소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베를린은 3개의 오페라 하우스와 1,500개가 넘는 극장과 무대를 갖춘 오페라의 중심지이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제 관객 영화제 중 하나이다.[246][247]
야곱 시몬 미술관
베를린 궁전 / 훔볼트 포럼
1990년대 이후, 특히 서유럽과 중유럽의 젊은이들이 베를린의 클럽 문화를 즐기기 위해 모여들면서 베를린은 나이트라이프의 중심지로 떠올랐다.[240][241]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베를린 중심부의 많은 역사적 건물들이 젊은이들에 의해 재건축되어 지하 문화와 반문화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242]
베를린은 또한 LGBT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243][244] 1880년대부터 동성애자 바와 무도장이 운영되었고, 1896년에는 최초의 게이 잡지가 창간되었다. 현재 베를린에는 다양한 퀴어 클럽과 축제가 열리고 있다.
매년 오순절 주말에는 다민족 거리 퍼레이드인 카니발 데르 쿨투렌(문화의 카니발)이 열린다.[248] 또한, 재즈페스트 베를린, 영 유로 클래식 등 다양한 문화 축제가 개최된다.[249][250]
베를린에는 44개의 극장과 무대가 있으며,[149] 독일 극장, 폴크스뷔네, 베를리너 앙상블, 샤우뷔네 등이 대표적이다. 베를린에는 독일 오페라, 베를린 국립 오페라, 코미셰 오페라 등 3개의 주요 오페라 극장이 있다.
베를린 요리는 북독일 요리 전통의 영향을 받았으며, 돼지고기, 거위, 생선, 콩, 오이, 감자 등을 사용한 소박한 요리가 주를 이룬다.[260][261] 커리부어스트, 베를리너 등이 대표적인 베를린 음식이다. 또한, 터키, 아랍, 아시아 등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도 맛볼 수 있다.
9. 1. 과학
베를린 아들러스호프의 비스타 과학기술단지
베를린에는 프라운호퍼 연구소(Fraunhofer Society), 독일항공우주센터 행성연구소(DLR Institute for Planetary Research), 라이프니츠협회(Leibniz Association), 헬름홀츠 연구소, 막스플랑크협회(Max Planck Society) 등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연구 기관들이 밀집해 있다.[218] 이들 연구소는 베를린의 대학들과 독립적이거나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2012년 기준으로 약 6만 5천 명의 전문 과학자들이 베를린에서 연구개발 분야에 종사하고 있었다.[149]
베를린은 유럽혁신기술연구소(EIT)의 지식 및 혁신 공동체(KIC) 중 하나이다.[219] KIC는 베를린 공과대학교 창업센터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IT 산업 발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지멘스(Siemens), 도이치텔레콤(Deutsche Telekom), SAP 등 주요 다국적 기업들과 협력하고 있다.[220]
유럽에서 성공적인 연구, 사업 및 기술 클러스터 중 하나인 비스타(WISTA) (아들러스호프)에는 1,000개 이상의 관련 기업, 대학 부서 및 과학 기관이 있다.[221]
대학 부속 도서관 외에도 베를린 주립도서관(Staatsbibliothek zu Berlin)이 주요 연구 도서관이다. 주요 두 곳은 포츠다머슈트라세와 운터덴린덴에 있다. 또한 베를린에는 86개의 공공 도서관이 있다.[149] 과학자들을 위한 글로벌 소셜 네트워킹 사이트인 리서치게이트(ResearchGate)의 본사는 베를린에 있다.
유로리그 파이널 포 농구 경기는 2009년과 2016년에 개최했으며,[275] FIBA 유로바스켓 2015의 개최 도시 중 하나였다. 2015년에는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렸다. 베를린은 2000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나섰지만 시드니에 밀려 실패했다.[276]
2023 스페셜 올림픽 세계 하계 대회는 독일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스페셜 올림픽 세계 대회였다.[277]
매년 열리는 베를린 마라톤과 ISTAF는 베를린에서 잘 자리 잡은 육상 경기이다.[278]
"근대 체조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은 1811년경 베를린에서 평행봉, 철봉, 링, 도마를 발명했다.[281][282][283]
2013년에는 약 60만 명의 베를린 시민이 2,300개가 넘는 스포츠 및 피트니스 클럽에 등록했다.[285] 베를린시는 60개 이상의 공공 실내 및 야외 수영장을 운영한다.[286] 베를린은 독일 최대 규모의 올림픽 훈련 센터로, 약 500명의 정상급 선수(전체 독일 정상급 선수의 15%)가 훈련하고 있다. 2012년 하계 올림픽에는 47명의 베를린 출신 엘리트 선수들이 참가하여 금메달 7개, 은메달 12개, 동메달 3개를 획득했다.[287]
베를린에는 독일의 주요 관중 스포츠를 대표하는 여러 프로 클럽들이 있다. 가장 오래되고 인기 있는 1부 리그 축구 클럽은 헤르타 BSC로, 1963년 분데스리가 창립 멤버이다.[288] 베를린의 주요 프로 스포츠 클럽은 다음과 같다.
베를린의 도시교통은 비교적 빠르고 지상 구간이 많은 에스반(S-Bahn), 지하철인 우반(U-Bahn), 버스, 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10. 2. 항공 교통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항(BER)은 독일 수도 베를린 남쪽 경계 부근 브란덴부르크주 쇠네펠트에 있는 국제 공항이다. 베를린 중심가에서 남동쪽으로 약 18km 떨어져 있다.[194]대한민국 직항편은 없어서 같은 독일 내 도시 프랑크푸르트 및 뮌헨에서 내려 열차 혹은 항공을 이용해야 한다.
과거에는 서베를린에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2008년 폐항)과 베를린 테겔 공항(2020년 폐항)이, 동베를린에 베를린 셰네펠트 공항(2020년 폐항)이 있었으나, 2020년 10월 31일에 이들을 통합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국제공항(BER)이 개항하였다.[195] 2006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당초 완공 예정이었던 2011년보다 9년 늦은 2020년 10월 31일에 개항하였다.
공항에는 베를린 S반(S9, S45), 인터시티(IC17), 레기오날 익스프레스(RE7, FEX), 레기오날반(RB14, RB22)이 운행하고 있으며, 베를린 중앙역이나 베를린 동물원역 등 베를린 각지와 드레스덴 등 독일 각지까지 직통으로 갈 수 있다.
10. 3. 자전거길
베를린은 잘 발달된 자전거 도로 시스템으로 유명하다.[183] 베를린에는 주민 1,000명당 약 710대의 자전거가 있으며, 2010년 기준으로 하루 약 50만 명의 자전거 이용자들이 전체 교통량의 13%를 차지했다.[184]
베를린 프렌츠라우어 베르크의 자전거 이용자
베를린의 자전거 이용자들은 약 620km의 자전거 도로를 이용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다음이 포함된다.[185]
약 150km의 자전거 전용 도로
190km의 비포장 자전거 도로
60km의 도로 자전거 차선
자전거 이용도 허용되는 70km의 버스 전용 차선
100km의 보행자/자전거 겸용 도로
50km의 도로변 인도 또는 보도에 표시된 자전거 차선
자전거 티켓을 구입하면 자전거를 Regionalbahn(RE), S-Bahn, U-Bahn 열차, 트램, 심야 버스에 가지고 탈 수 있다.[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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