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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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귀는 회회국 왕족 출신으로, 명나라 만력 연간에 닝샤에서 일어난 압배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 구원병 제독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울산성 전투에 참여했으나 왜군을 격퇴하지 못했다. 이후 요동 총병관을 역임했으며, 그의 후손 중 마순상은 조선에 귀화하여 한국 상곡 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마귀는 뛰어난 무인 가문 출신으로, 이성량과 함께 '동이서마'로 불렸다.
마귀는 회회국(回回國) 왕 마립(麻立)의 후손으로, 아버지 마록(麻祿)은 1512년 회회왕국이 멸망할 때 안남국(安南國)으로 망명했다가 1522년 명나라로 건너가 벼슬을 한 인물이다. 마귀는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 출신으로, 1592년 닝샤에서 일어난 압배의 난을 진압하며 이름을 알렸다.
마귀의 아버지는 포정사(布政使) 마록(麻祿)이다. 마귀는 슬하에 아들 대국총병(大國總兵) 마승은(麻承恩)을 두었으며, 마승은은 총병(總兵) 마암(麻巖)을 낳았다.[1]
2. 생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마귀는 명나라 구원군의 제독(提督)으로 참전하여 울산성 전투에서 권율과 함께 구로다 나가마사에 맞섰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 1598년 다시 만세덕(萬世德)의 14만 원군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울산왜성을 공격했으나, 이전의 실패를 고려하여 신중하게 작전을 펼친 결과 큰 교전은 없었다. 그러나 《난중잡록》에는 명나라 군대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1599년 봄, 마귀는 명나라로 돌아갔다.
이후 마귀는 1610년부터 1612년까지 요동 총병관을 역임했다.[5] 그의 아들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고, 손자 마암(麻巖)은 심하 전투에서 전사했다. 증손 마순상(麻舜裳)은 1627년 풍랑을 만나 조선에 표류, 귀화하여 상곡 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명나라에서의 활약
1512년 회회왕국이 망했을 때, 6세였던 태자 마록(麻祿)은 신하의 등에 업혀 안남국(安南國)으로 망명하여 왕에게 의탁해 성장한 후 왕의 사위가 되었다. 1522년 마록은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여 총병관 및 포정사 등을 지냈다. 마귀(麻貴)는 회회국(回回國) 왕(王) 마립(麻立)의 원손이자 포정사(布政使) 마록(麻祿)의 아들이다. 마록의 자는 윤집(允執),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마귀는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 출신이다.
만력 20년(1592년) 닝샤에서 일어난 압배의 난 진압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했다. 임진왜란(조선 원정)에서도 총병에 임명되어 조선 구원에 나섰다. 만력 25년(1597년) 말 양호와 함께 공세를 취하여 울산성 전투에 참가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4] 같은 해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병의 제독(提督)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왔다. 그 해 12월 도원수 권율(權慄)과 합세하여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에 맞서 제1차 울산성 전투를 치렀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왜군의 철수로 귀국하였다.
만력 26년(1598년) 만세덕(萬世德)이 거느린 14만 원군을 따라 들어와 동로군을 이끌고 충주,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왜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이전 공격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중하게 행동한 결과 9월 하순에 소규모 접전이 있었던 정도에 그쳤다.[4] 그러나 《난중잡록》에는 “적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천병(明軍)이 피해를 입었다. 그 수를 알 수 없다.”라고 적혀 있어 명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599년 봄 본국인 명나라로 돌아갔다.
만력 38년(1610년) 3월부터 만력 40년(1612년) 4월까지 요동 총병관을 역임했다.[5]
마귀 장군의 아들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으며, 손자 마암(麻巖)은 조부와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한 후 1619년 후금(後金)과의 싸움인 심하 전투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하였다. 증손 마순상(麻舜裳)은 남경통판겸 조병독량사로 산동성 등주의 군량을 실은 배를 타고 순찰 감독하다가 1627년(조선 인조 5년) 9월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 만에 황해도 풍천에 이르렀는데, 함께 탔던 29명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조선에 귀화하여 한국 상곡 마씨의 조상이 되었다.
2.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참전
1597년(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마귀(麻貴) 장군은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병의 제독(提督)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들어왔다. 그 해 12월 도원수 권율과 합세하여 적장 구로다 나가마사에 맞서 제1차 울산성 전투를 치렀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했고 왜군의 철수로 귀국하였다.[4] 1598년(조선 선조 31년) 만세덕이 거느린 14만 원군을 따라 들어와 또 동래로 내려가 도산성을 공격하였다. 1599년(조선 선조 32년) 봄에 본국인 명나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에서 총병에 임명되어 조선 구원에 나섰던 마귀는 1597년 말부터 양호와 함께 공세를 취하여 울산성 전투에 참가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1598년 공세에서도 동로군을 이끌고 충주,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왜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이전 공격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중하게 행동한 결과 9월 하순에 소규모 접전이 있었던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난중잡록》에는 “적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천병(明軍)이 피해를 입었다. 그 수를 알 수 없다.”라고 적혀 있어 명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3. 울산성 전투에서의 역할
1597년 정유재란 때 마귀(麻貴) 장군은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병의 제독(提督)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 해 12월 도원수 권율과 합세하여 구로다 나가마사에 맞서 제1차 울산성 전투를 치렀으나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4] 1598년에는 만세덕이 거느린 14만 원군을 따라 들어와 동래 도산성을 공격하였다. 임진왜란에서 총병에 임명되어 조선 구원에 나섰으며, 1597년 말부터 양호와 함께 공세를 취하여 울산성 전투에 참가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1598년 공세에서도 동로군을 이끌고 충주,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왜성을 재차 공격했으나, 이전 공격의 실패를 거울삼아 신중하게 행동한 결과 9월 하순에 소규모 접전이 있었던 정도에 그쳤다.[4] 그러나, 《난중잡록》에는 “적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천병(明軍)이 피해를 입었다. 그 수를 알 수 없다.”라고 적혀 있어 명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 4. 명나라 귀환과 이후 활동
1598년(조선 선조 31년) 만세덕(萬世德)이 이끄는 14만 명의 원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와 동래로 내려가 도산성을 공격하였다. 1599년 (조선 선조 32년) 봄에 명나라로 돌아갔다.[4] 임진왜란에서 총병에 임명되어 조선 구원에 나섰으며, 만력 25년(1597년) 말부터 양호와 함께 공세를 취하여 울산성 전투에 참가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지키는 울산왜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만력 26년(1598년)의 공세에서도 동로군을 이끌고 충주, 안동, 경주를 거쳐 울산왜성을 다시 공격했으나, 이전 공격의 실패를 교훈 삼아 신중하게 행동한 결과 9월 하순에 소규모 접전이 있었던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난중잡록》에는 “적탄이 비처럼 쏟아졌다. 천병(明軍)이 피해를 입었다. 그 수를 알 수 없다.”라고 적혀 있어 명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만력 38년(1610년) 3월부터 만력 40년(1612년) 4월까지 요동 총병관을 역임했다.[5]
3. 가족 관계 및 후손
마씨 가문은 이성량(李成梁) 가문과 함께 “동이서마(東李西麻)”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장수들을 배출했다.[1] 마귀의 형제로는 산서총병관(山西總兵官)을 지낸 마금(麻錦)이 있었다. 마금의 아들로는 마승훈(麻承勳,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등 역임), 마승은(麻承恩, 도독동지(都督同知) 등 역임), 마승조(麻承詔, 영하참장(寧夏參將)), 마승훈(麻承訓, 계진부총병(薊鎮副總兵)), 마승선(麻承宣, 도민부총병(洮岷副總兵)), 마승종(麻承宗,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이 있었다.
3. 1. 상곡 마씨의 기원
1597년(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가 파견한 구원병의 제독(提督)으로 조선에 들어온 마귀(麻貴)는 회회국(回回國) 왕 마립(麻立)의 후손이자 포정사(布政使) 마록(麻祿)의 아들이다.[1] 1512년 회회왕국이 망했을 때 6세였던 태자 마록은 신하의 등에 업혀 안남국(安南國)으로 망명하여 왕에게 의탁해 성장한 뒤 왕의 사위가 되었다.[1] 이후 1522년 중원(中原)으로 들어가 벼슬을 하여 총병관 및 포정사 등을 지냈다.[1]
마귀의 아들 마승은(麻承恩)은 대동초병관을 지냈으며, 손자 마암(麻巖)은 조부와 함께 정유재란에 참전한 후 1619년 후금(後金)과의 전투인 심하 전투에서 총병관으로 활약하다가 전사하였다.[1] 증손 마순상(麻舜裳)은 남경통판겸 조병독량사로 산동성 등주의 군량을 실은 배를 타고 순찰 감독 중 1627년(조선 인조 5년) 9월 묘도(廟島)에서 풍랑을 만나 3일 만에 황해도 풍천에 도착했는데, 함께 탔던 29명은 모두 죽고 혼자 살아남아 조선에 귀화하여 한국 상곡 마씨의 시조가 되었다.[1]
마씨(麻氏) 가문에는 뛰어난 장수가 많았고, 가신들로 구성된 군벌의 강력함으로 인해 이성량(李成梁) 가문과 함께 “동이서마(東李西麻)”라고 불렸다.[1]
4. "동이서마(東李西麻)"
마씨(麻氏) 일족에는 뛰어난 장수가 많았고, 가신들로 구성된 군벌의 강력함으로 인해 이성량 일족과 함께 "동이서마(東李西麻)"라고 불렸다.[1]
이름 | 직위 |
---|---|
마록 | 마귀의 아버지. 대동참장(大同參將), 선부부총병(宣府副總兵) |
마금 | 마귀의 형. 산서총병관(山西總兵官) |
마승훈 | 마금의 아들.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도독첨사(都督僉事), 남경후부첨서(南京後府僉書) |
마승은 | 마금의 아들. 도독동지(都督同知), 선부·연수·대동총병관(宣府·延綏·大同總兵官). 요동에 파병되었으나 후퇴하여 사형을 선고받았다. 말 800필을 바쳐 죄를 면했으나 마가의 몰락 원인이 되었다. |
마승조 | 마금의 아들. 영하참장(寧夏參將). 압배의 난에 공을 세웠다. |
마승훈 | 마금의 아들. 계진부총병(薊鎮副總兵) |
마승선 | 마금의 아들. 도민부총병(洮岷副總兵) |
마승종 | 마금의 아들.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 천계 연간 초에 사령(沙嶺)에서 전사했다. |
마귀 | 비왜총병관(備倭總兵官) |
참조
[1]
웹사이트
明史/卷238#戚繼光
http://zh.wikisource[...]
[2]
웹사이트
明史/卷238#戚繼光
http://zh.wikisource[...]
[3]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상곡마씨 上谷麻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4]
서적
文禄・慶長の役
吉川弘文館
2008
[5]
서적
李成梁一族の軍事的台頭
八幡大学社会文化研究所
198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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