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누일 1세 메가스 콤니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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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누일 1세 메가스 콤니노스는 1238년부터 1263년까지 트라페준타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몽골 제국과의 관계에서 쾨세다으 전투 이후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몽골 황제를 직접 방문하여 복종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1254년 시노페를 탈환하여 흑해의 해상 강국 지위를 회복했다. 마누일 1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혼인 동맹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으며, 200종이 넘는 아스퍼 은화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경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또한 트라페준트의 아야 소피아 성당을 재건했으며, 비잔틴 제국과의 관계에서 황제의 칭호를 고수했다. 그는 세 번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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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일 1세 메가스 콤니노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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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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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누엘 1세 메가스 콤네노스 |
로마자 표기 | Manueil 1se Megaseu Komnenoseu |
그리스어 | Μανουήλ Κομνηνός |
통치 정보 | |
작위 | 트라페준타 황제 비잔츠 황제의 제위 주장자 |
재위 | 1238년 - 1263년 3월 |
선임자 | 요안니스 1세 |
후임자 | 안드로니코스 2세 |
가문 | |
가문 | 콤네노스 왕조 |
가문 유형 | 군주국 |
아버지 | 알렉시우스 1세 |
어머니 | 테오도라 악수치나 |
배우자 | |
배우자 | |
자녀 | 안드로니코스 2세 콤네노스 |
기타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 군주 |
2. 몽골과의 관계
1243년, 트라페준타 제국군은 닥쳐오는 몽골 제국군에 대항하기 위해, 룸 술탄국군에 원군을 파견하고, 니케아 제국으로부터의 원군 부대와 함께 몽골군과 싸웠다[3]。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룸 술탄국의 군세는 괴멸되었고, 룸 술탄국과 트라페준타 제국을 비롯한 원군 파견국은 몽골에 대한 복속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1246년경에는, 마누엘 1세가 직접 몽골 황제 구유크 칸의 궁정을 방문했다. 현재의 러시아인 비잔틴 학자 로스탐 슈크로프에 따르면, 이 마누엘 1세의 직접 방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몽골 제국의 속국의 군주들이 스스로 몽골 궁정을 방문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필수적인 의식·예절이었다고 한다. 속국 군주는 몽골 궁정을 직접 방문함으로써, '''「대 칸 가문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34]。또한 슈크로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 아나톨리아는 룸 술탄국의 강력한 지배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아나톨리아 지방에서의 사회 체제나 정치적 기제를 바꾸기 위해서는, 몽골인의 내습이나 자르리크에 근거한 룸 술탄에 대한 제재 처분 등이 필수불가결했다[35]。」''
1254년 6월 24일, 마누엘은 시노페를 탈환하고, Ghadras를 이 흑해 연안의 항구 도시의 통치자로 임명했다[36]。역사학자 미셸 쿠르산스키스에 따르면, 이 사건이 트라페준타 제국의 관습에 맞지 않는 사건임을 인정하는 한편, 동시에 그는 시노페 공격 전에 마누엘이 몽골 제국으로부터의 어떤 허가나 사령을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37]。마누엘이 이 시노페라는 항구 도시를 룸 술탄국으로부터 탈환한 것으로, 룸 술탄국은 내륙으로 밀려나고, 트라페준타 제국은 다시 흑해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띈 제국으로 부활했다.
슈크로프는 쿠르샨스키스의 의견에 반론하며, 시노페 탈환을 위해 마누엘 1세는 일 칸국으로부터 자르리크를 얻었고, 이것은 룸 술탄국의 종주국인 킵차크 칸국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주장한다. 마누엘 1세는 시노페를 함락시켰을 때, 이 항구 도시는 룸 술탄국 해군 장관 슈자 알-딘 압드 알-라흐만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지만, 그는 1253년에 당시 킵차크 칸국의 칸 바투에게 사절로 갔을 때, 나이프 취임을 허가하는 자르리크를 바투로부터 수여받았었다[38]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1256년 10월, 룸 술탄국의 술탄 카이카우스 2세/Kaykaus IItr는 몽골군과 대결하여, 바이주의 군세에게 패배했다. 카이카우스 2세는 패전 후, 니케아 제국으로 망명하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지배자는 킵차크 칸국에서 일 칸국으로 바뀌었다[39]。
2. 1. 쾨세다으 전투와 몽골 종주권 인정
1243년, 트라페주스 제국 군대는 니케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쾨세다으 전투에서 룸 술탄국을 지원하여 페르시아의 몽골 제국에 맞섰으나, 룸 술탄국 군대는 대패하였다.[3][33] 이 전투의 결과로 트라페주스 제국은 몽골 제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1246년, 마누엘 1세는 직접 몽골 제국의 대칸 구유크 칸의 궁정을 방문하여 복종 의사를 표명했다.[4] 이는 몽골 제국의 지배 체제에서 필수적인 의례로, 속국의 통치자는 대칸을 직접 방문함으로써 '대칸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았다.[34]1254년 6월 24일, 마누엘은 시노페를 탈환하고 가드라스를 흑해 항구의 통치자로 임명했다.[6][36] 마누엘이 이 항구를 장악한 몇 년 동안, 룸 술탄국은 내륙에 갇히게 되었고, 트라페준테는 다시 한 번 흑해의 주요 해상 강국이 되었다.
2. 2. 시노페 탈환과 흑해 패권 회복
1243년, 트라페준테 제국 군대는 니케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코세 다그 전투에서 룸 술탄국을 지원하여 몽골 제국에 맞섰으나 패배했다.[3] 1246년, 마누엘은 대칸 구유크의 궁정을 직접 방문하여 복종을 맹세했다.[4]1254년, 마누엘은 시노페를 탈환하고 가드라스를 흑해 항구의 ''아르콘''으로 임명했다.[6] 이로써 룸 술탄국은 내륙에 갇히게 되었고, 트라페준테는 다시 흑해의 주요 해상 강국으로 부상했다.
일부 학자들은 마누엘이 시노페 탈환을 위해 일 칸국으로부터 '얄리크'(허가령)를 받았다고 주장한다.[7] 이는 룸 술탄국의 종주국이었던 킵차크 칸국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다고 해석된다.[8] 당시 시노페의 총독은 룸 술탄국의 해군 사령관인 ''라이스 알-바르'' 슈자 알-딘 '압드 알-라흐만이었는데, 그는 1253년 바투 칸으로부터 ''나이프'' 직위를 부여하는 ''얄리크''를 받은 인물이었다.[8] 1256년, 카이카우스 2세가 바이주에게 패배하면서 아나톨리아는 킵차크 칸국에서 일 칸국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9]
2. 3. 몽골 제국 내 세력 변화
1243년, 니케아 제국의 군대와 함께 트라페준테 제국 군대가 코세 다그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몽골 제국에 맞서 룸 술탄국을 지원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룸 술탄국군은 패배했고, 룸 술탄국과 그 동맹국들은 몽골에 복종해야 했다. 마누엘은 1246년 초에 대칸 구유크의 궁정을 직접 방문했는데, 이는 칸의 진영에 종속 통치자가 직접 방문하는 것은 필수적인 의례로 여겨졌기 때문이다.[4]1254년 6월 24일, 마누엘은 시노페를 탈환하고 가드라스를 흑해 항구의 ''아르콘''으로 임명했다.[6] 마누엘이 이 항구를 장악한 몇 년 동안, 룸 술탄국은 내륙에 갇히게 되었고, 트라페준테는 다시 한 번 흑해의 주요 해상 강국이 되었다.
1256년 10월, 룸 술탄국을 상속한 세 형제 중 한 명인 카이카우스 2세는 바이주에게 패배하여 니케아 제국으로 피신했으며, 이로 인해 아나톨리아는 킵차크 칸국이 확고하게 통제하던 영역에서 일 칸국으로 이동했다.[9]
3. 서유럽과의 외교 관계
1253년, 마누일 1세는 십자군 원정 중 시돈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사절을 보내 혼인 동맹을 제안했다.[10][40] 마누일 1세는 십자군 원정의 지도자인 루이 9세와 관계를 강화하여, 당시 몽골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나아가 니케아 제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3]
장 드 주앙빌은 마누일 1세가 루이 9세에게 보낸 선물 중에는 산수유 나무로 만든 활과 정교하게 제작된 화살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하며 그의 부를 증언했다.[11][41]
윌리엄 밀러는 루이 9세가 마누일 1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라틴 제국과의 혼인 동맹을 맺도록 권유했다고 기록했다.[10] 이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바타체스에 대항하는 데 라틴 제국의 지원이 더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0]
마누일 1세가 루이 9세에게 사절단을 파견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쿠르샨스키스는 사절 파견 시기가 마누일의 첫 번째 부인인 안나 크실라로에가 사망한 직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새로운 혼인 동맹을 모색하려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2][42] 루이 9세의 거절 이후 마누일 1세는 이레네 시리카이나와 결혼했다.[12]
3. 1. 프랑스 루이 9세와의 교섭
1253년, 마누일 1세는 십자군 원정 중 시돈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사절을 보내 혼인 동맹을 제안했다.[10][40] 마누일 1세는 십자군 원정의 지도자인 루이 9세와 관계를 강화하여, 당시 몽골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처하고, 나아가 니케아 제국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3]장 드 주앙빌은 마누일 1세가 루이 9세에게 보낸 선물 중에는 산수유 나무로 만든 활과 정교하게 제작된 화살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기록하며 그의 부를 증언했다.[11][41]
윌리엄 밀러는 루이 9세가 마누일 1세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신 라틴 제국과의 혼인 동맹을 맺도록 권유했다고 기록했다.[10] 이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바타체스에 대항하는 데 라틴 제국의 지원이 더 유용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0]
마누일 1세가 루이 9세에게 사절단을 파견한 정확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쿠르샨스키스는 사절 파견 시기가 마누일의 첫 번째 부인인 안나 크실라로에가 사망한 직후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며, 새로운 혼인 동맹을 모색하려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12][42] 루이 9세의 거절 이후 마누일 1세는 이레네 시리카이나와 결혼했다.[12]
4. 내치
마누일 1세는 트라페주스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화폐를 주조한 황제였다.[14] 특히 200종이 넘는 다양한 종류의 은화 아스퍼를 대량으로 발행했는데,[15] 이는 트라페준타의 다른 어떤 통치자보다 많은 양이었다. 요한 2세가 그의 치세 동안 약 138종의 아스퍼를 발행하여 그나마 2위에 위치하고 있다.[15] 이러한 트라페주스 제국의 화폐는 제국 외부, 특히 조지아에서 널리 유통되었다.[16] 조지아에서는 마누엘 1세의 이름에서 유래한 "키르마네울"이 화폐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사용될 정도였다.[17]
마누일 1세 시대에 대량의 화폐가 주조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모든 주화가 마누엘 1세의 은세공인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으며, 조지아에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위조된 동전도 확인되었다.[18] 미셸 쿠르산스키스는 몽골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은화를 주조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일부가 마누엘의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와 게오르기우스의 통치 기간에 발행되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7]
일부 학자들은 훌라구 칸의 바그다드 파괴(1258년) 이후 실크로드 무역로가 아르메니아와 상부 유프라테스 계곡에서 에르주룸을 거쳐 지고나 고개를 지나 트라페준타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부활하면서,[19] 마누엘 1세 치세 동안 실크로드의 경로가 변경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앤서니 브라이어는 이 경로를 통해 운송된 무역량이 미미했으며, 트라페준타를 통과하는 상품에서 추출한 세금과 관세는 분주한 해에 제국 총 수입의 최대 30%였고, 더 자주 6%였다고 지적했다.[20] 다른 학자는 구무스하네 지역의 은광이 13세기 트라페준타 제국 내에 있었고, 이 동전의 원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21] 그러나 더 자세한 조사 결과, 이 은광은 18세기 이전에 크게 개발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22] 쿠르산스키스는 이러한 동전이 페르시아의 지배적인 몽골족이 징수한 조공을 나타낸다고 제안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동전 주조에 기울인 주의를 설명하기 어렵다.[23]
4. 1. 화폐 주조와 경제 발전
마누일 1세는 트라페주스 제국 역사상 가장 많은 화폐를 주조한 황제였다.[14] 특히 200종이 넘는 다양한 종류의 은화 아스퍼를 대량으로 발행했는데,[15] 이는 트라페준타의 다른 어떤 통치자보다 많은 양이었다. 요한 2세가 그의 치세 동안 약 138종의 아스퍼를 발행하여 그나마 2위에 위치하고 있다.[15] 이러한 트라페주스 제국의 화폐는 제국 외부, 특히 조지아에서 널리 유통되었다.[16] 조지아에서는 마누엘 1세의 이름에서 유래한 "키르마네울"이 화폐를 지칭하는 일반적인 단어로 사용될 정도였다.[17]마누일 1세 시대에 대량의 화폐가 주조된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모든 주화가 마누엘 1세의 은세공인으로부터 나온 것은 아니었으며, 조지아에서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위조된 동전도 확인되었다.[18] 미셸 쿠르산스키스는 몽골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이름으로 은화를 주조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유형의 일부가 마누엘의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와 게오르기우스의 통치 기간에 발행되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7]
일부 학자들은 훌라구 칸의 바그다드 파괴(1258년) 이후 실크로드 무역로가 아르메니아와 상부 유프라테스 계곡에서 에르주룸을 거쳐 지고나 고개를 지나 트라페준타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부활하면서,[19] 마누엘 1세 치세 동안 실크로드의 경로가 변경된 것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앤서니 브라이어는 이 경로를 통해 운송된 무역량이 미미했으며, 트라페준타를 통과하는 상품에서 추출한 세금과 관세는 분주한 해에 제국 총 수입의 최대 30%였고, 더 자주 6%였다고 지적했다.[20] 다른 학자는 구무스하네 지역의 은광이 13세기 트라페준타 제국 내에 있었고, 이 동전의 원료를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21] 그러나 더 자세한 조사 결과, 이 은광은 18세기 이전에 크게 개발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22] 쿠르산스키스는 이러한 동전이 페르시아의 지배적인 몽골족이 징수한 조공을 나타낸다고 제안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동전 주조에 기울인 주의를 설명하기 어렵다.[23]
4. 2. 아야 소피아 성당 건립
마누일 1세는 1250년에서 1260년 사이에 트라페준테에 아야 소피아 성당 수도원을 재건했다.[24] 이 성당은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가장 훌륭한 건축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24]
1261년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했을 때, 그는 마누일에게 비잔틴 황제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로마 황제이자 전제군주"라는 칭호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지만 실패했다.[25][54]
5.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
5. 1. "로마 황제" 칭호 문제
1261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미카일 8세 팔레올로고스는 마누일 1세에게 비잔틴 황제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로마 황제이자 전제군주"라는 칭호를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25][54] "로마인의 황제 겸 독재관" 칭호는 비잔틴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칭호였기 때문이다.[54] 그러나 마누일 1세는 이를 거부했다.6. 가족 관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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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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