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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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7차 십자군은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예루살렘 회복을 목표로 시작한 십자군 원정이다. 1244년 예루살렘 함락과 맘루크 왕조의 부상으로 인해 루이 9세와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십자군을 결성했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점령했지만, 만수라 전투에서 패배하고 루이 9세가 포로로 잡히는 등 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해 서유럽의 위신이 실추되었고, 십자군 국가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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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7차 십자군 - 파리스크르 전투
1250년 4월 6일, 제7차 십자군 당시 이집트 파리스크르에서 벌어진 전투는 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이 맘루크 군대에 격파당하며 십자군의 주요 패배 원인이 되었고, 루이 9세 또한 포로로 잡혔다.
제7차 십자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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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십자군 | |
기본 정보 | |
시기 | 1248년–1254년 |
장소 | 이집트 |
결과 | 무슬림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 1 | 프랑스 왕국 예루살렘 왕국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나바라 왕국 |
교전 2 | 아이유브 왕조 바흐리 |
지휘관 | |
교전 1 지휘관 | 루이 9세 알퐁스 드 푸아티에 샤를 1세 드 앙주 기욤 드 빌레아르두앵 로베르 1세 드 아르투아 기욤 드 소나크 르노 드 비시에 테오발도 2세 장 2세 드 수아송 장 드 이벨린 위그 11세 드 뤼지냥 위그 4세 드 부르고뉴 라울 2세 드 쿠시 장 드 로네 윌리엄 롱스페 패트릭 2세 드 던바 |
교전 2 지휘관 | 아스살리흐 아이유브 알무아잠 투란샤 샤자르 알두르 파리스 앗딘 악타이 쿠투즈 파크르 앗딘 이븐 앗샤이크 아이바크 바이바르스 |
병력 규모 | |
교전 1 병력 | 보병 15,000명 기사 2,400–2,800명 석궁병 5,000명 |
교전 2 병력 | 불명 |
피해 규모 | |
교전 1 피해 | 막심한 피해 기독교군 대부분 파괴 또는 포로 루이 9세 포로 |
교전 2 피해 | 막심한 피해 전투 중 무슬림 군대 파괴 |
기타 | |
캠페인 상자 |
2. 배경
바론 원정 이후 예루살렘 왕국과 아이유브 왕조는 내분으로 혼란을 겪었다. 1244년 예루살렘 함락과 가자 전투 패배는 성지 내 기독교 세력의 붕괴와 맘루크 술탄국 부상을 초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루이 9세와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제7차 십자군을 결의했다.[1]
2. 1. 예루살렘 함락과 서구의 반응
1229년 제6차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기독교 세력의 손으로 돌아왔고, 10년의 휴전이 체결되었지만, 1244년 호라즘 병사(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에 고용된)에 의해 다시 함락되었다(1244년 예루살렘 포위전).[1]이에 대한 서구의 반응은 1187년 함락 때와 비교하여 훨씬 미미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예루살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 교황과 대립하고 있었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는 시몽 드 몽포르 등의 제2차 바론의 난 대응으로 바빠 십자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구는 제1차 십자군 때와 비교하여 훨씬 부유해졌고, 성지를 되찾기 위해 목숨과 재산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려는 종교적 열정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십자군 국가 또한 어느 정도 공존이 성립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가 십자군에 의해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군대 파병을 원하지 않았다.[2]
그러나 당시 서구 최강의 실력을 자랑했던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9세는 예루살렘 탈환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이후 성인으로 시성될 정도로 독실했던 루이 9세는 어머니 블랑슈와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2. 2. 프랑스 루이 9세의 결단
루이 9세는 1214년 4월 25일 프랑스 왕 루이 8세와 카스티야의 블랑슈 사이에서 태어났다. 1226년 11월, 루이가 12세였을 때 그의 아버지가 즉위 3년 만에 사망했다. 그는 그달에 왕으로 즉위했고, 그의 어머니는 섭정으로서 미성년 시절 동안 프랑스를 통치하며 그를 위대한 지도자이자 좋은 기독교인으로 키웠다.[5]1244년 예루살렘 공성전 이후 성지는 기독교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1187년 하틴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로 제6차 십자군과 귀족 십자군을 통해 예루살렘 왕국을 최대 규모로 회복시켰으나, 1244년에 다시 이슬람 세력(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에 고용된 호라즘 병사)에 의해 함락되었다(1244년 예루살렘 공성전).[7] 예루살렘 함락과 그에 따른 학살은 루이 9세가 그의 첫 번째 십자군을 조직하도록 자극했다.
이에 대한 서구의 반응은 1187년 함락 때와 비교하여 훨씬 미미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예루살렘 왕이기도 했던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 교황과 대립하고 있었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도 시몽 드 몽포르 등의 제2차 바론의 난 대응으로 바빠 십자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구는 제1차 십자군 때와 비교하여 훨씬 부유해졌고, 목숨과 재산을 잃을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성지를 되찾으려는 종교적 열정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또한 십자군 국가도 어느 정도 공존이 성립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가 십자군에 의해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군대 파병을 바라지 않았다.[7]
그러나 당시 서구 최강의 실력을 자랑했던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9세는 예루살렘 탈환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1244년 말, 루이는 심각한 말라리아에 걸렸으나, 회복하면 십자군에 나서겠다고 서원했고, 건강이 허락하는 대로 십자군 참여를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후에 성인으로 시성될 정도로 독실했던 루이 9세는 어머니 블랑슈와 중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2. 3. 당시 십자군 국가들의 상황
1241년, 테오발드 1세의 협상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1187년 이후 최대 영토를 회복하며 바론 원정이 종결되었다.[1] 그러나 아크레를 중심으로 한 왕국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반감과 중앙 권력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다.귀족들은 알리스 드 샹파뉴의 주장을 유보했고, 템플 기사단은 이집트와의 조약에 불만을 품고 1241년 아크르와 헤브론에서 요한 기사단을 포위했다.[2] 템플 기사단은 1242년 10월 30일 나블루스를 약탈하여 모스크를 불태우고 토착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1243년 6월 5일, 고등법원은 알리스와 그녀의 남편 랄프 드 네슬이 콘라트 2세가 왕국에 올 때까지 섭정으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티레는 귀족들의 손에 넘어갔고, 예루살렘은 사실상 가장 강력한 귀족들이 통치하는 봉건 공화국이 되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대부분을 회복한 후에도 왕국은 아유브 왕조와 몽골의 침입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충분히 재편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추종자들과 이벨랭 가문, 템플 기사단과 요한 기사단, 아크르와 티레 사이의 다툼은 왕국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제국주의자들의 패배는 템플 기사단을 강력한 위치에 올려놓았고, 1243년 험스, 케락, 다마스쿠스 통치자들의 연합과 이집트에 대한 조약을 협상하여 긴장을 완화하고 템플 산을 기사단에 반환했다.
1244년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에 대한 서구의 반응은 1187년 함락 때와 비교하여 훨씬 미미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예루살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로마 교황과 대립하고 있었고,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도 제2차 바론의 난 대응으로 바빠 십자군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서구는 제1차 십자군 때와 비교하여 훨씬 부유해졌고, 성지를 되찾으려는 종교적 열정은 사라지고 있었다. 또한 십자군 국가도 이슬람 세력과의 관계가 십자군에 의해 악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군대 파병을 바라지 않았다.
2. 4. 십자군 이전의 국제 정세
1241년, 테오발드 1세의 협상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1187년 이후 최대 영토를 회복하며 바론 십자군이 끝났다.[1] 리처드 콘월이 무슬림과의 협상을 마치자 베이루트의 옛 영주 장 드 이벨랭 가문의 지지를 확보했다. 1229년 3월, 프리드리히 2세가 왕으로 즉위했고, 이벨랭 가문은 몽포르의 시몽이 콘라트 2세가 성년이 되어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집정관으로 임명되는 조건으로 그를 섭정으로 받아들였다. 1241년 5월 3일 리처드가 귀국했을 때, 아크르를 중심으로 한 왕국은 회복된 것처럼 보였지만 프리드리히에 대한 반감과 중앙 권력의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다.리처드의 제안에 대한 프리드리히의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귀족들은 알리스 드 샹파뉴의 주장을 유보했다. 리카르도 필랑지에리는 티레에 남았고, 여러 귀족들은 시리아와 키프로스의 영지로 돌아갔으며, 필리프 드 몽포르는 아크르에 남았다. 이집트와의 조약에 불만을 품은 템플 기사단은 1241년 아크르와 헤브론에서 대수장 피에르 드 비외브리우드 지휘하에 조약을 지지했던 요한 기사단을 포위했다.[2] 요한 기사단의 동맹인 안나시르 다우드는 기독교 순례자와 상인들을 공격했다. 복수로 템플 기사단은 1242년 10월 30일 나블루스를 약탈하여 모스크를 불태우고 토착 기독교인들을 학살했다. 프랑크족과의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무슬림들의 믿음은 불합리하지 않았다.
일부 요한 기사단원들은 필랑지에리와 함께 아크르를 제국주의자들에게 넘기려는 음모에 가담했다. 템플 기사단, 필리프 드 몽포르, 제노바인, 베네치아인들은 쿠데타 시도를 종식시켰다. 알레포에 맞서 알마르카브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던 요한 기사단 본대가 돌아왔고, 비외브리우드는 음모를 부인했다. 도시는 이벨랭 가문의 통제하에 남았고, 필랑지에리는 이탈리아로 소환되었다. 1243년 6월 5일, 예루살렘 고등법원은 알리스와 그녀의 남편 랄프 드 네슬이 콘라트 2세가 왕국에 올 때까지 섭정으로서 예루살렘을 통치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레바논의 티레는 리처드의 형제 로타르 필랑지에리가 점령했다. 폭풍으로 항구로 밀려온 리처드는 귀족들의 손에 넘어갔고, 로타르는 형제를 구하기 위해 1243년 7월 10일 티레의 성채를 항복했다. 이벨랭의 발리안이 티레의 왕실 수호자로 임명되었고, 영주권은 결국 필리프 드 몽포르에게 할당되었다. 예루살렘은 사실상 가장 강력한 귀족들이 통치하는 봉건 공화국이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 대부분을 회복한 후에도 왕국은 아유브 왕조와 몽골의 침입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충분히 재편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추종자들과 이벨랭 가문, 템플 기사단과 요한 기사단, 아크르와 티레 사이의 다툼은 왕국을 거의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제국주의자들의 패배는 템플 기사단을 강력한 위치에 올려놓았고, 1243년 홈스, 케락, 다마스쿠스 통치자들의 연합과 이집트에 대한 조약을 협상하여 긴장을 완화하고 템플산을 기사단에 반환했다. 대수장 아르망 드 페리고르는 교황에게 기사단이 원래의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승전보를 전했다. 이 조약은 시리아에서 프랑크족의 안보를 강화할 것을 약속했지만, 임박한 공격 앞에서는 무력할 것임이 증명되었다.
1238년 술탄 알 카밀의 사망 이후 이집트와 레반트의 정치 상황은 그의 아들들 사이의 경쟁으로 혼란스러웠다. 1240년 초, 이집트 침공을 준비하던 장남 아스 살리흐 아이유브는 그의 이복형제이자 당시 술탄이었던 알 아딜 2세가 자신의 군인들에게 붙잡혀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즉시 와서 술탄 자리를 계승하라는 초청을 받았다. 1240년 6월, 그는 카이로에 개선 입성하여 왕조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카이로에 자리 잡은 후에도 아스 살리흐는 안전하지 않았다. 왕조와 관련된 쿠르드족 부족들은 충성심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집트 내부에서는 강력한 에미르 세력이 그를 폐위하고 그의 삼촌이자 아스 살리흐 이스마일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아스 살리흐는 카이로 요새로 피신하여, 한때 그를 권좌에 올린 충성스러운 에미르들조차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다. 킵차크 용병들은 중앙 아시아의 몽골 침략 이후 이용 가능해졌고, 곧 맘루크로 알려진 그의 군대의 핵심을 형성했다. 제7차 십자군이 끝나기 전에, 맘루크들은 결국 아이유브 왕조를 전복하고 스스로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1240년부터 중앙 아시아의 호라즘인으로 알려진 부족이 알레포의 영토를 공격하여 4년 안에 레반트를 황폐화시켰다. 잘랄 알 딘 망부르니의 사망 이후 강력한 지도력이 부족했던 그들은 본질적으로 용병 집단으로 활동하는 약탈자들이었다. 그들은 살라딘의 아들 알 무아잠 투란샤의 알레포 군대를 1240년 11월 11일 브자아 근처에서 패퇴시킨 후 만비즈를 점령했다. 아버지 알 무자히드의 사망 후 새로 임명된 훔스의 에미르 알 만수르 이브라힘은 군대를 동원하여 1241년 1월 6일 에데사 근처에서 호라즘인들을 결국 패퇴시켰고, 다마스쿠스의 에미르 바드르 알 딘 루루와 전리품을 나누었다. 그 후 알레포의 군대는 카이쿠바드 2세가 이끄는 셀주크 군대와 합류하여 아스 살리흐의 아들이자 부관인 알 무아잠 투란샤가 이끄는 아이유브 군대를 아미다에서 패퇴시켰다. 그러자 호라즘인들은 알 무자파르 가지와 동맹을 맺고 반격을 가했지만, 1242년 8월 알 마즈달에서 패배했다. 그 후 카이쿠바드 2세는 1243년 6월 쾨세다그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참패하여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위협하게 되었다.[2]

아스 살리흐의 초청으로 호라즘 군대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진격하여, 1244년 7월 15일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성지를 파괴했다. 도시의 요새인 다윗의 탑은 1244년 8월 23일에 함락되었고, 도시의 기독교인들은 추방되거나 학살당했다. 그해 말 아스 살리흐는 다시 호라즘인들과 동맹을 맺고, 이제 십자군과 동맹을 맺은 아스 살리흐 이스마일과 가자에서 라 포르비 전투를 벌여 성지에서 기독교 세력의 붕괴를 가져왔다. 1245년 아스 살리흐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했고, 바그다드의 칼리프 알 무스타심으로부터 술탄의 칭호를 받았다. 1246년 그는 호라즘 동맹군이 위험할 정도로 통제 불능이라고 판단하여 그들을 공격하여 훔스 근처에서 그들의 지도자들을 죽이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에 잔당들을 흩어놓았다. 3년 후 십자군이 시작되었을 때, 아스 살리흐는 시리아에서 그의 삼촌과 싸우고 있었고, 이집트로 돌아와 1249년 11월 22일에 사망했다.[3]
인노첸시오 4세는 1243년 6월 25일 교황이 되었는데, 당시 종교적, 정치적 십자군 운동에 직면해 있었다. 그 당시 교황청은 파문당한 프리드리히 2세 황제와 대립하고 있었다. 프리드리히는 처음에는 그의 선출을 기뻐했지만, 인노첸시오가 그의 전임자들의 전통을 계승할 의지를 가지고 있음이 곧 분명해졌다. 납치 계획을 우려한 인노첸시오 4세는 1244년 3월 로마를 떠나 황제의 기병대의 추격을 받으며 리옹으로 향했다. 그는 루이 9세에게 망명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지만, 신중하게 거절당했다. 망명 중인 교황은 1245년 리옹 제1 공의회를 주재했다. 공의회는 이미 십자군 십자를 받았던 루이 9세의 지휘 아래 새로운 십자군을 파병하여 성지를 탈환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로마가 프리드리히에 의해 포위된 그 해에 교황은 또한 그의 ''Ad Apostolicae Dignitatis Apicem''을 발표하여 황제에 대한 파문 선고를 공식적으로 갱신하고 황제와 나폴리 왕위에서 폐위시켰다.[8]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인노첸시오 4세는 정교회 러시아를 겨냥한 프로이센 십자군을 물려받았다. 인노첸시오는 또한 1241년 유럽으로의 몽골의 침입이라는 도전에 진지하게 맞선 최초의 교황이었다. 리옹 이후 인노첸시오는 몽골에 사절을 보냈는데(아래 참조), 그들은 로마와의 교회 연합에 대해 러시아 공작들과도 협상했다. 갈리치아-볼리니아의 다닐로 로마노비치와 블라디미르 대공 야로슬라프 2세가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교황은 몽골과의 동맹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몽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러시아와의 대규모 동맹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248년 1월 인노첸시오는 테우토니아 기사단의 테우토니아 기사단장 하인리히 폰 호엔로에와 함께 다닐로와 야로슬라프의 아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에게 기독교에 대한 몽골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침략자에 대한 방어를 위해 교황의 보호 아래 연합할 것을 경고했다. 두 러시아 공작 모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결국 몽골의 지배를 받지 않은 모든 동유럽 통치자들이 인노첸시오의 동맹에 가입했지만, 그것은 단명했다. 1243년 9월 그는 교황령 ''Qui iustis causis''을 발표하여 추가적인 북방 십자군을 승인했다.[9]
인노첸시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파괴하려는 목표에 단호했다. 루이 9세가 평화를 가져오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었다. 1249년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십자군을 설교하도록 명령했고, 1250년 12월 황제가 사망한 후에도 그는 콘라트 4세와 그의 이복형제 시칠리아 왕 만프레드에 맞서 끊임없이 싸웠다. 시칠리아 왕관은 프리드리히 2세의 폐위 후 교황청에 귀속되었고, 인노첸시오는 먼저 헨리 3세의 형제이자 아들인 콘월의 리처드와 에드먼드 크라우치백에게 그것을 제공했다. 1254년 5월 콘라트 4세가 사망한 후 교황은 마침내 콘라트의 두 살짜리 아들 콘라딘의 상속권을 인정했다. 만프레드도 복종했지만 곧 반란을 일으켜 1254년 12월 2일 포자 전투에서 교황군을 패배시켰다. 인노첸시오 4세는 며칠 후 사망했다.[10]
3. 십자군 원정 준비
루이 9세는 1244년 예루살렘 함락 소식을 듣고 십자군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1245년, 인노켄티우스 4세 교황은 리옹 제1 공의회를 통해 루이 9세의 십자군을 공식 승인하고 적극 지원했다.[8]
루이 9세는 십자군 원정 비용으로 150만 리브르 투르누아(l.t.)가 넘는 막대한 자금을 모았다. 이는 그의 연간 수입의 6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17]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유대인을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도시 과세, 서원 이행금, 성직자 과세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17][18]
또한, 십자군 원정을 위해 외교적 노력도 병행했다. 잉글랜드와는 휴전 협정을 맺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는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랑코-몽골 동맹을 시도하며 몽골에 사절단을 파견했지만, 구유크 칸은 오히려 교황에게 복종을 요구했다.[12] 롬바르디아의 아셀린은 바이주와 아유브 왕조에 대한 동맹을 논의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12]
결국 루이 9세는 동생인 툴루즈 백작 알퐁스, 시칠리아 왕 샤를 1세(앙주 백작 샤를),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 등과 함께 2만 명에 달하는 군세를 이끌고 해로를 통해 키프로스에 도착했다.
3. 1. 병력 모집
루이 9세는 1244년 예루살렘 함락과 그에 따른 학살 소식을 듣고 십자군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전 십자군들과는 달리 유럽 내 여러 갈등 때문에 지도자들이 원정을 떠나기 어려워 대중의 십자군 참여 열기는 크지 않았다.[7]1244년 말, 루이 9세는 심각한 말라리아에 걸렸으나, 기적적으로 회복하면서 십자군에 나서겠다는 서약을 했다. 건강을 되찾은 그는 즉시 십자군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장 드 브리엔이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겪은 곤경에 깊이 괴로워했던 루이 9세는 앙드레 드 롱주모를 파견하여 성물을 확보하게 했고, 파리의 생트샤펠에 이 성물들을 보관하였다.

1245년,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랑코-몽골 동맹을 맺기 위해 몽골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조반니 다 피아노 델 카르피네는 구유크 칸을 만났으나, 구유크 칸은 오히려 교황에게 복종을 요구했다.[12] 롬바르디아의 아셀린은 바이주와 아유브 왕조에 대한 동맹을 논의했으나, 1248년 11월, 별다른 성과 없이 귀환했다.
1244년, 아스칼론이 함락되면서 예루살렘 왕국은 생존의 위기에 처했다. 루이 9세는 거의 죽음에 이를 뻔한 병을 앓은 후 십자군 참여를 서약했다. 어머니와 측근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이 9세는 자신의 결정을 굽히지 않고 형제들과 궁정 사람들을 설득하여 십자군에 함께하도록 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타유부르 전투에서 루이 9세에게 패배한 후였기 때문에 프랑스와의 전쟁에 다시 개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윌리엄 롱에스페가 이끄는 소규모 영국군만 십자군에 참여시켰다.[16]
1245년 10월, 루이 9세는 귀족들을 소집하여 십자군 원정에 대한 동의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듬해 그는 파리에서 다시 귀족 회의를 열어, 자신이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자녀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때 소환된 사람들 중 한 명은 샹파뉴 지방의 센에샬인 장 드 주앵빌이었다. 그는 십자군 가문 출신으로, 그의 기록은 십자군 원정에 대한 가장 상세한 개인적 묘사를 제공한다.[19] 주앵빌은 20명의 기사들과 함께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으나, 키프로스에 도착했을 무렵 자금이 거의 바닥났다. 그는 왕에게 봉사하는 조건으로 즉각적인 지원을 받아 위기를 넘겼다.[20] 이러한 재정적 어려움과 왕의 지원 패턴은 루이 9세의 동생 알퐁스, 플랑드르 백작 기, 포레의 기 5세(Guy V of Forez)와 같은 다른 주요 영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3. 2. 자금 조달
Louis IX프랑스어|루이 9세)의 십자군 원정 비용은 150만 리브르 투르누아(l.t.)가 넘었는데, 이는 그의 연간 수입의 6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군대 유지 비용만 하루에 1000l.t.에 달했다.[17] 루이는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방법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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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추방 및 재산 몰수 | 1248년부터 유대인 금융업자들을 왕국에서 추방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는 루이 9세의 반유대 정책과 편견을 보여주는 조치였다.[17] |
도시 과세 | 프랑스 전역의 약 80개 도시에서 7만 l.t. 이상을 모금했고, 노르망디에서도 비슷한 액수가 기부되었다. 이는 전례가 없는 일은 아니었지만, 루이 9세는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도시들에 과세했다.[17] |
서원 이행금 및 성직자 과세 | 서원 이행금을 체계적으로 징수하고, 성직자들에게 20분의 1 세금을 부과했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5년 동안 10분의 1을 제공했다. 그러나 국제적인 기여는 줄어들었는데, 이는 십자군을 프랑스 십자군으로 보는 시각 때문이었다.[18] |
개별 지휘관들의 자금 조달 | 왕의 형제들을 포함한 개별 지휘관들은 보조금을 받았고, 자신의 땅에서도 자금을 조달했다.[18] |
이러한 중앙 집중식 자금 조달 시스템은 루이 9세에게 주요 추종자들에 대한 전례 없는 통제력을 부여했다.[18]
3. 3. 외교적 노력
루이 9세는 십자군 원정을 위해 다방면으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1242년 타유부르 전투에서 승리한 후 잉글랜드와 휴전 협정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제거했다.[6] 비록 잉글랜드 왕 헨리 3세는 십자군 참여 요청을 거부했지만, 프랑스 영토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고, 윌리엄 롱에스페가 이끄는 소규모 영국군이 십자군에 합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6]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관계는 복잡했다. 루이 9세는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분쟁에서 중립을 지켰지만, 프리드리히 2세가 교황을 공격하려 하자 개입을 시사하며 견제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왕 콘라트 2세(독일의 콘라트 4세)의 아버지였기에, 루이 9세는 그의 허락 없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없었다. 더구나 프랑스 사절이 십자군의 진행 상황을 프리드리히에게 알리자, 프리드리히가 이 정보를 이집트 술탄에게 전달하는 배신 행위까지 벌어졌다.[16]
인노첸시오 4세 교황은 1243년 즉위하여 십자군을 적극 지원했다. 그는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고 리옹 제1 공의회(1245)를 통해 루이 9세의 십자군을 공식 승인했다.[8] 또한 몽골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동유럽 국가들과의 동맹을 추진하고, 북방 십자군을 승인하는 등 다방면으로 십자군을 지원했다.[9]
루이 9세는 서방의 지원이 부족하자 암살단과 몽골과의 동맹을 모색했다. 암살단과는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고, 몽골에는 사절단을 파견하여 기독교로 개종한 사르탁 왕자에게 협력을 요청했다. 1245년, 인노첸시오 4세는 몽골과의 동맹을 위해 조반니 다 피아노 델 카르피네(요한 드 플라노 카르피니)[11]와 롬바르디아의 아셀린을 사절로 파견했다. 비록 몽골과의 동맹은 실패했지만, 이는 십자군 원정을 위한 루이 9세의 적극적인 외교 노력을 보여준다.[12]
4. 십자군 원정
루이 9세는 1226년에 아버지 루이 8세가 사망한 후, 어머니 블랑슈의 섭정 아래 12세의 어린 나이로 프랑스 왕위에 올랐다.[5] 블랑슈는 아들 루이 9세를 훌륭한 지도자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키웠으며, 반란을 일으킨 봉건 영주들을 진압하고 20년간 지속된 알비 십자군에서 카페 왕조의 승리를 이끌었다.[5]
1244년 예루살렘 공성전 이후 성지는 기독교인과 무슬림 모두에게 황폐화되었다. 예루살렘 함락과 학살 소식은 루이 9세가 십자군을 조직하는 계기가 되었다.[7]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기독교와 무슬림 세력 사이를 오갔기 때문에, 유럽 기독교인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또한 유럽 내 갈등으로 인해 지도자들이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 어려웠다.[7]
1244년 말, 루이 9세는 심각한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중 회복되면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서약했다. 기적적으로 회복한 그는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7] 그는 1235년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 장 드 브리엔의 어려움을 전해 듣고, 앙드레 드 롱주모를 파견하여 가시관, 참십자가 조각, 성창, 성해면 등 성물을 확보했다. 파리의 생트샤펠은 루이 9세가 성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예배당이다.[7]
1245년 10월, 루이 9세는 귀족들을 소집하여 십자군 원정에 대한 동의와 지원을 요청했다. 이듬해 파리에서 다시 귀족 회의를 열어, 자신이 돌아오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자녀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때 소집된 장 드 주앵빌은 십자군 원정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19] 주앵빌은 십자군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족들은 제3차 십자군, 제4차 십자군, 알비 십자군, 제5차 십자군 등 여러 십자군 원정에 참여했다.[20]
제7차 십자군 원정의 핵심은 루이 9세가 고용한 함선이었다. 제노바에서 16척, 마르세유에서 20척의 배가 건조되었다. 1246년 계약에 따라 이 배들은 아그모르트로 인도되었는데, 이 도시는 최근 왕실 영지에 편입되어 대대적인 개선이 필요했다.[21] 1248년 8월 말, 루이 9세와 함께 항해한 1만 명의 군대는 리처드 1세의 군대와 비슷한 규모였다. 장 드 주앵빌과 툴루즈 백작 레몽 7세는 마르세유의 선주들과 계약을 맺었다. 블루아 백작 위그 1세는 인버네스에서 출발하기 전 사망했고, 레몽의 군대를 위한 수송선 중 하나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마르세유로 와야 했기 때문에 1248년-1249년 겨울 동안 항구에 머물러야 했다. 푸아티에의 알퐁스는 자금이 부족하여 1249년에 동쪽으로 항해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에 도착했을 때, 2년 동안 막대한 양의 식량을 비축해 두었다.[21]
제7차 십자군은 1248년 8월 12일 루이 9세가 파리를 떠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21] 왕비 프로방스의 마르그리트와 그녀의 여동생 프로방스의 베아트리스, 루이 9세의 형제들인 앙주 백작 샤를 1세(베아트리스의 남편)와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가 동행했다. 막내 동생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는 아내 툴루즈 여백작 잔과 함께 다음 해에 출발했다.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와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도 합류했다. 윌리엄 롱에스페가 이끄는 잉글랜드 분견대가 뒤따랐다.[21]
십자군 원정 준비가 마무리되자 루이 9세는 아그모르트로 향했다. 그는 생드니 수도원에서 순례자의 상징인 ''오리플람''을 받았다. 루이 9세는 왕이자 참회자로서 십자군 원정을 수행했다. 생드니에서 루이 9세는 참회자의 복장을 하고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걸어가 미사에 참석한 후 맨발로 생트앙투안 수도원까지 걸어갔다. 리옹에서 인노첸시오 4세를 만난 후 지중해를 향해 여행하면서 정의를 집행했는데, 1226년 아버지 이후로 이 지역을 방문한 최초의 프랑스 국왕이었다. 1248년 8월 25일, 루이 9세는 키프로스의 리마솔로 항해했다.[21]
1249년 10월 말,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지자 알퐁스가 프랑스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피에르 모클레르크와 시리아 귀족들은 알렉산드리아를 기습 공격하여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로베르 1세는 왕과 함께 이 작전에 반대했다. 결국 1249년 11월 20일,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출발하여 만수라로 향했다.[25]
1249년 11월 23일,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아스살리흐 아이유브가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 샤자르 알두르는 남편의 죽음을 숨기고 알무아잠 투란샤를 상속자로, 파크르 앗딘을 총독으로 임명하는 문서를 위조했다. 맘루크 사령관 파리스 앗딘 악타이가 투란샤를 데려오기 위해 파견되었다.[25]
이후 십자군은 만수라 전투와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패배하고, 루이 9세는 포로로 잡혔다. 1250년 4월 6일에 벌어진 파리스쿠르 전투는 루이 9세 군대의 결정적인 패배였다. 루이 9세는 다미에타와 예루살렘 교환을 제안하며 협상을 시도했지만, 이집트인들은 불리한 위치를 깨닫고 거절했다.[25]
석방 협상 중 이집트에서 샤자르 알두르가 주도하고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이 폐위되고 맘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48] 맘루크 왕조와의 협상을 통해 루이 9세는 다미에타 등 점령지 포기와 라는 막대한 몸값으로 석방되어 1250년 5월에 아크레로 향했다.[49] 이후 루이 9세는 1254년까지 아크레에 체류하며 십자군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49]
4. 1. 키프로스 집결
루이 9세는 프랑스 왕국의 왕족이자 앙주 백작인 동생 시칠리아 왕 샤를 1세,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 툴루즈 백작 알퐁스 등과 함께 2만 명에 달하는 군세를 이끌고 해로를 통해 키프로스에 도착했다.[21]키프로스에 도착한 루이 9세는 현지 제후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십자군의 목표 지점을 논의했다. 라틴 제국에서는 니케아 제국의 공격을 요청했고, 안티오키아 공작과 템플 기사단은 시리아 공격을 제안했지만, 루이 9세는 예루살렘을 확보하고 유지하려면 이집트를 공격하여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249년 6월, 십자군은 이집트에 상륙하여 해항 도시 다미에타를 공격했다.
4. 2. 다미에타 점령 (1249년)
루이 9세는 1248년 9월 17일 키프로스에 도착하여 군대가 집결하기를 기다렸다. 많은 병사들이 질병으로 사망했고, 자금이 부족한 이들은 왕의 지원을 받아야 했다. 키프로스에서 헨리 1세와 아크레 출신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으며, 작전 계획 논의에서 이집트가 목표로 합의되었다. 이집트는 아유브 왕조의 가장 부유하고 취약한 지역이었으며, 과거 5차 십자군 당시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을 교환할 의향이 있었던 점이 고려되었다.
루이는 즉시 작전을 시작하려 했으나, 시리아 귀족들은 겨울 폭풍과 나일 삼각주의 위험을 이유로 만류했다. 1249년 5월 13일, 120척의 대형 수송선이 집결하여 군대는 탑승을 시작했다. 며칠 후 폭풍으로 배들이 흩어졌고, 왕은 5월 30일에 출항하여 1249년 6월 4일 다미에타에 도착했다. 그의 군대의 4분의 1만이 그와 함께 항해했고, 나머지는 독자적으로 이집트 해안으로 이동했다.
6월 5일 새벽, 상륙과 함께 다미에타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기사들과 이벨린의 장이 이끄는 울트라마르 기사들의 공격으로 무슬림들은 다미에타로 후퇴했다. 주민들이 공황 상태에 빠지고 수비대가 동요하자, 이집트 사령관은 도시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배로 만든 다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고, 십자군은 도시에 들어갔다. 기욤 드 소낙은 전투 다음 날 아침 다미에타가 단 한 명의 십자군 사상자만 내고 함락되었다고 기록했다.[22]
다미에타의 함락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나일강 홍수는 십자군을 묶어둘 것이었다. 루이는 제5차 십자군의 경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강물이 줄어들 때까지 진격하지 않았다. 그동안 다미에타는 다시 프랑크인 도시로 변모했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모스크는 대성당이 되었고, 제노바와 피사, 베네치아도 공로를 인정받았다.
다미에타 상실에 대한 책임으로 키나나 에미르들은 처형되었고, 파크르 아드-딘과 그의 맘루크 사령관들은 망신을 당했다. 군대는 만수라로 급파되었고, 죽어가는 아스-살리흐 아이유브는 들것에 실려 군대를 조직하기 위해 그곳으로 옮겨졌다.
4. 3. 만수라 전투 (1250년)
1249년 6월 루이 9세의 십자군은 이집트에 상륙하여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그러나 나일강의 범람으로 6개월 동안 발이 묶였다.[46] 다미에타 점령 후, 대부분의 제후들은 식량 수송에 적합한 항구가 있는 알렉산드리아를 다음 목표로 생각했지만,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가 카이로 공격을 주장하여 루이 9세는 동생의 의견을 채택, 카이로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47]당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리흐는 병상에 누워 루이에게 휴전을 제안했지만, 루이 9세는 이를 거절하고 11월에 카이로로 진군을 시작했다. 11월 23일 살리흐는 병사하고, 파흐르 앗딘이 군대 지휘를 맡았다.
1250년 2월, 십자군은 만수라에 침입했지만, 맘루크 군은 십자군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만수라 전투). 이 전투에서 십자군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특히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는 무모한 돌격으로 이집트군에 의해 전사했고, 템플 기사단장 기욤 드 소낙 역시 한쪽 눈을 잃었으며, 290명의 기사 중 단 5명만이 살아남는 등 템플 기사단도 큰 타격을 입었다.[25]
이집트 진영을 공격하던 로베르 1세는 왕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도망치는 이집트군을 추격하여 만수라 시내로 진입했다. 그러나 룩누 앗딘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 군은 좁은 골목길에서 십자군 기병대를 효과적으로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십자군은 전력에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
4. 4. 파리스쿠르 전투와 루이 9세의 포로
1249년 10월 말,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지자 알퐁스가 프랑스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피에르 모클레르크와 시리아 귀족들은 알렉산드리아를 기습 공격하여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을 장악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로베르 1세는 왕과 함께 이 작전에 반대했다. 결국 1249년 11월 20일,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출발하여 만수라로 향했다.[25]이 시기,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살리흐는 1249년 11월 23일 심각한 농양으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던 중 사망했다.[3] 그의 미망인인 샤자르 알두르는 최고 내시 자말 앗딘 모센과 사령관 파크르 앗딘에게만 알리고 남편의 죽음을 숨겼다. 그녀는 그의 서명으로 투란샤를 상속자로, 파크르 앗딘을 총독으로 임명하는 문서를 위조했다. 마물룩 사령관 파리스 앗딘 악타이가 투란샤를 데려오기 위해 파견되었다.[25]
십자군이 다미에타에서 만수라로 향하는 길에는 수많은 운하와 나일강의 지류가 있었다. 파크르 앗딘은 주력 부대를 알바흐르 아스사기르 뒤에 배치하고, 기병대를 보내 십자군이 운하를 건널 때 방해했다.[25] 1249년 12월 7일 파리스쿠르 근처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집트 기병대가 저지되었고, 템플 기사단은 모든 명령을 무시하고 후퇴하는 적을 추격했다.[25]
만수라 전투 이후, 십자군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1250년 2월 11일, 이집트군은 남쪽에서 온 증원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프랑크군과 전투를 벌였다. 샤를 1세와 좌익의 시리아 및 키프로스 귀족들은 방어선을 유지했지만, 우익의 템플 기사단과 프랑크 귀족들은 흔들렸고 왕에 의해 구출되었다. 템플 기사단장 기욤 드 소나크는 만수라에서 한쪽 눈을 잃은 데 이어, 다른 쪽 눈까지 잃고 사망했다. 병원 기사단장 장 드 로네이도 전사했다.[25]
8주 동안 루이 9세는 십자군 야영지에서 기다리며 카이로의 지도부 문제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1250년 2월 28일, 투란샤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술탄으로 선포된 다마스쿠스에서 도착했다. 그의 도착은 새로운 이집트 공세의 원인이 되었다. 경량선 함대가 만들어져 낙타를 이용해 나일강 하류로 수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미에타에서 식량을 가져오는 배들을 가로채기 시작하여 80척 이상의 프랑크 선박을 나포했다. 프랑크족은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다.[25]
1250년 4월 6일에 벌어진 파리스쿠르 전투는 루이 9세 군대의 결정적인 패배였다. 루이 9세는 군대를 다미에타로 이동시켜야 한다는 것을 알고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하며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은 그의 불리한 위치를 깨닫고 그 제안을 거절했다. 루이 9세는 병사들을 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병자들은 나일강을 따라 배로 보내고 건강한 병사들은 왔던 길을 따라 행군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4월 5일 아침에 출발했고, 왕은 후위에 있고 이집트인들은 추격하는 가운데 고통스러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프랑크족은 알-바흐르 아스-사깃을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뒤에 있는 폰툰을 파괴하는 것을 소홀히 했다. 이집트인들은 건너와 사방에서 프랑크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다음 날, 무슬림들은 다미에타에서 남서쪽으로 10마일 떨어진 파리스쿠르 마을에서 군대를 포위하고 전력으로 공격했다. 병들고 지친 병사들에게는 끝이 왔다는 것이 분명했다. 4월 6일, 루이 9세의 항복은 몽포르 백작 필리프에 의해 술탄과 직접 협상되었다. 왕과 그의 수행원들은 쇠사슬에 묶여 만수라로 끌려갔고, 그의 군대 전체가 체포되어 포로로 끌려갔다.[25]
4. 5. 루이 9세의 석방 협상과 아크레 체류
루이 9세는 이집트에서 철수하면서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했지만, 이집트 측은 이를 거절했다.[48] 1250년 4월 6일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루이 9세의 군대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루이 9세는 포로로 잡혔다. 포로의 총수는 1만 명이 넘었다고도 한다.석방 협상 중 이집트에서 샤자르 알-두르가 주도하고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이 폐위되고 맘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48] 아이벡은 투란샤 암살 후 지휘관이 되었고, 이후 샤자르 알-두르와 결혼했다.
맘루크 왕조와의 협상을 통해 루이 9세는 다미에타 등 점령지 포기와 라는 막대한 몸값으로 석방되어 1250년 5월에 아크레로 향했다.[49] 이 몸값으로 석방된 것은 포로 전체의 일부였고, 다른 포로들은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이후 루이 9세는 1254년까지 아크레에 체류하며 십자군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고 시리아에 세력 확장을 시도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49]
5. 십자군 원정의 결과와 영향
제7차 십자군은 4년 후에 끝났지만, 더 이상의 전투는 없었다. 루이 9세는 아크레에서 포로로 잡힌 자신의 군대를 석방시키고 혼란에 빠진 예루살렘 왕국에 질서를 회복하려 노력했다. 루이 9세는 동지중해 연안에 도착한 마지막 십자군 지도자였고, 그의 실패는 성지와 이슬람 세계뿐 아니라 서방에서도 뼈저리게 느껴졌다. 재앙의 규모가 유럽에 알려지자 베네치아와 다른 이탈리아 도시들에서 불안이 보고되었고, 프랑스는 국가적 애도에 빠졌다. 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은 즉각적이고 개인적인 것이었는데, 전투나 포로 생활에서 희생된 사람들 때문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대중의 환멸이 깊어져 더욱 공격적인 반응이 나타났다.[28]
투란샤의 죽음으로 살라딘이 시작한 아이유브 왕조는 사실상 끝났다. 샤자르 알-두르는 알-무스타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자신의 사령관 아이벡과 결혼하여 왕위를 넘겼다. 아이벡의 공식적인 통치는 5일 만에 끝났고, 바흐리 맘루크는 6살 된 알-아슈라프 무사를 술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실질적인 권력은 아타벡 지위로 돌아간 아이벡이 행사했다. 이집트는 1517년까지 맘루크 술탄국으로 남았다.[28]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1250년 봄 많은 신하들과 함께 십자군에 참여할 것을 서약했지만, 교황에게 원정을 연기하도록 설득했다. 루이 9세의 형제들은 여론이 분개했지만 환멸에 빠진 프랑스에서 원군을 보내기를 거부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기독교 황제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는 것을 선호하면서 이교도와 싸우는 사람들에게 원군을 보내는 대신, 교황에 대해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1250년 12월 13일, 이슬람권에서 존경받던 프리드리히 2세가 이탈리아에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예루살렘의 콘라트 2세는 황제의 권위는 없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교황의 십자군을 상속받았다. 카스티야의 블랑슈는 1251년 콘라트에 대한 십자군을 호소한 인노첸시오 4세의 요청에 응한 왕실 봉신의 재산을 몰수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도 그녀의 고문들도 동방으로 증원군을 보내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았다.[28]
제7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에 끔찍한 군사적 재앙을 불러왔다. 루이 9세가 아크레에서 4년간 머물며 피해 복구에 힘썼지만, 인적 손실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루이 9세는 왕국의 섭정으로 세르지네의 제프리를 남겼고, 이벨린의 장이 야파와 아스칼론 백작이자 왕국의 바이유(bailli)를 계승했다. 1254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하고 그의 두 살 난 아들 콘라딘이 명목상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28]
루이 9세는 1254년 2월 다마스쿠스와 수년간의 휴전을 맺었는데, 이는 안-나시르 유수프가 몽골의 위협을 우려하여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아이바크 역시 전쟁을 피하려 1255년 프랑크족과 10년간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양측의 국경은 끊임없는 습격과 반격의 대상이었다. 1256년 1월 프랑크족이 대상을 나포했고, 3월 예루살렘의 마멜루크 총독이 보복 원정을 이끌었으나 패배하고 사망했다. 아이벡은 칼리프의 중재로 다마스쿠스와 새로운 조약을 맺어 팔레스타인을 양도받고, 두 무슬림 세력은 야파를 포함하여 10년간의 휴전을 갱신했다.[28]
아이유브 왕조는 1260년 알레포 공성전으로 사실상 멸망했고, 그해 9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마멜루크가 몽골을 격퇴했다. 바이바르스 휘하의 맘루크 왕조가 세력을 키우면서, 루이 9세는 교황 클레멘스 4세에게 제8차 십자군을 청원했다.[28]
루이 9세의 대패는 기독교 세계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고, 십자군 국가를 방어할 전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이를 틈타 맘루크 왕조가 팽창하여 십자군 국가를 공격했고, 결국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는 멸망하게 되었다.
5. 1. 십자군 실패의 원인
루이 9세의 대패로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십자군 국가를 방어할 전력도 크게 감소했다. 이를 계기로 맘루크 왕조는 십자군 국가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으며, 이는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이어져 십자군 국가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4]5. 2. 서유럽에 미친 영향
1251년 목자들의 십자군(Crucesignatio pastorellorum)은 저지대 국가들과 프랑스 북부의 가난한 목자들과 농민들이 일으킨 민중 십자군 운동이다. 이들은 포로로 잡힌 루이 9세를 돕고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구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26] 루이 9세는 이집트인들에게서 석방된 후, 그의 형제들을 프랑스로 보내 구호를 요청했다. 섭정으로 활동하던 그의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슈는 귀족이나 성직자 모두에게 도움을 받지 못해 지원군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이때 시민들이 일어나 왕을 구하러 가겠다고 선언했다. 1251년 부활절 무렵, "헝가리의 스승"(Le Maître de Hongrie)으로 알려진 수수께끼의 인물이 프랑스 북부의 목자들에게 십자군을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항상 성모 마리아가 그에게 주었다고 주장하는 지도를 가지고 다녔다. 그는 많은 군중을 끌어모았고, 교황의 허가 없이도 그들이 십자가를 택하도록 허용했다.[26]이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어 곧 약 6만 명의 파스투로(Pastoureaux) 군대가 형성되었고, 그들은 헝가리의 스승에게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이 군대는 곧 성직자들, 특히 그들이 왕이 성지로 가도록 유도했다고 비난한 도미니크 수도회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다. 곧 많은 좋지 않은 남녀들이 그들의 대열에 합류했고, 점점 더 대담해져서 성직자들을 공격하고 주교들과 심지어 교황에 대해서도 설교했다. 블랑슈는 파스투로들을 아들의 구원에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스승을 만나 선물을 제공했다. 기세가 오른 파스투로들은 파리에 들어가 예상대로 혼란을 야기했다. 파리 이후, 그들은 여러 부대로 나뉘어 프랑스 전역에 공포를 퍼뜨렸다. 마침내 블랑슈는 자신이 잘못 판단했음을 깨닫고 왕실 관리들에게 그들을 체포하고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시민군이 그들을 추격하여 Villeneuve-sur-Cher 근처에서 그들을 저지했다. 헝가리의 스승은 그의 많은 추종자들과 함께 살해되었고, 가장 특이한 민중 운동 중 하나가 끝을 맺었다.[27]
루이 9세의 대패로 기독교 세계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십자군 국가를 지켜야 할 전력이 크게 감소했다. 이를 계기로 맘루크 왕조가 팽창하면서 십자군 국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이어지는 십자군 국가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
5. 3. 십자군 국가에 미친 영향
제7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에 끔찍한 군사적 재앙을 가져왔다. 루이 9세가 아크레에서 4년간 머물며 피해 복구에 힘썼지만, 인적 손실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그의 동방 원정은 불가피했지만, 그의 부재는 곧바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루이 9세는 왕국의 섭정으로 세르지네의 제프리를 남겼고, 이벨린의 장이 야파와 아스칼론 백작이자 왕국의 바이유(bailli)를 계승했다. 1254년 콘라트 2세가 사망하고 그의 두 살 난 아들 콘라딘이 명목상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28]루이 9세는 1254년 2월 다마스쿠스와 수년간의 휴전을 맺었는데, 이는 안-나시르 유수프가 몽골의 위협을 우려하여 프랑크족과의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아이바크 역시 전쟁을 피하려 1255년 프랑크족과 10년간의 휴전을 맺었다. 그러나 양측의 국경은 끊임없는 습격과 반격의 대상이었다. 1256년 1월 프랑크족이 대상을 나포했고, 3월 예루살렘의 마멜루크 총독이 보복 원정을 이끌었으나 패배하고 사망했다. 아이벡은 칼리프의 중재로 다마스쿠스와 새로운 조약을 맺어 팔레스타인을 양도받고, 두 무슬림 세력은 야파를 포함하여 10년간의 휴전을 갱신했다.
아이유브 왕조는 1260년 알레포 공성전으로 사실상 멸망했고, 그해 9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마멜루크가 몽골을 격퇴했다. 바이바르스 휘하의 맘루크 왕조가 세력을 키우면서, 루이 9세는 교황 클레멘스 4세에게 제8차 십자군을 청원했다.
루이 9세의 대패는 기독교 세계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고, 십자군 국가를 방어할 전력을 크게 감소시켰다. 이를 틈타 맘루크 왕조가 팽창하여 십자군 국가를 공격했고, 결국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는 멸망하게 되었다.
5. 4. 맘루크 왕조의 부상
예루살렘 공방전에서 성지가 파괴되고, 라 포르비 전투에서 십자군이 대패하면서 성지에서 기독교 세력은 붕괴되었다.[2]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유브 왕조는 내분과 호라즘 용병대의 통제 불능으로 혼란을 겪었다. 1249년 아스-살리흐 아이유브가 사망하고, 제7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3]루이 9세가 이끄는 십자군은 파리스쿠르 전투에서 대패하고, 루이 9세는 포로로 잡혔다.[28] 이집트의 승리로 십자군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후 투란샤가 사망하면서 아이유브 왕조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후 샤자르 알-두르가 아이벡과 결혼하여 왕위를 넘겼으나, 바흐리 맘루크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맘루크 술탄국이 성립되었다.[28] 맘루크 왕조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세력을 확장했으며,[28] 바이바르스의 지휘 아래 제8차 십자군을 촉발하는 등 십자군 국가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결국 서유럽의 강대국인 루이 9세의 패배는 기독교 세계의 위신을 실추시켰고, 십자군 국가를 방어할 전력을 약화시켰다. 이는 맘루크 왕조의 팽창으로 이어져,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십자군 국가는 멸망하게 되었다.
5. 5. 십자군 운동의 쇠퇴
서유럽의 루이 9세가 이끈 제7차 십자군의 대패로 기독교 세계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고, 십자군 국가를 지켜야 할 전력이 크게 감소했다.[1] 이를 계기로 맘루크 왕조가 팽창하면서 십자군 국가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291년 아크레 함락으로 이어지는 십자군 국가 멸망의 도화선이 되었다.[1]6. 평가 및 역사적 의의
제7차 십자군은 성지, 이슬람 세계, 서방 세계 모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십자군 실패 소식에 프랑스는 국가적 애도 분위기에 휩싸였고, 많은 이들이 전투와 포로 생활 희생자들로 인해 슬퍼했다.[29] 대중의 환멸은 공격적인 반응으로 이어지기도 했다.[29]
투란샤의 죽음은 아이유브 왕조의 종말을 알렸다. 샤자르 알-두르는 아이벡과 결혼해 왕위를 넘겼으나, 아이벡의 통치는 곧 끝났다. 바흐리 맘루크는 알-아슈라프 무사를 술탄으로 임명했지만, 실권은 아이벡이 가졌다. 이집트는 1517년까지 맘루크 술탄국으로 존속했다.[29]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십자군 참여를 서약했지만, 교황 설득으로 원정을 연기했다. 프랑스 귀족들은 교황을 비난하며 이교도 대신 기독교 황제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는 것을 선호했다.[29]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 사후, 예루살렘의 콘라트 2세가 교황의 십자군을 상속받았다. 카스티야의 블랑슈는 콘라트에 대한 십자군 요청에 응해 왕실 봉신 재산을 몰수했지만, 동방 증원군은 보내지 않았다.[29]
제7차 십자군은 outremer(예루살렘 왕국)에 군사적 재앙을 초래했다. 루이 9세는 피해 복구에 힘썼지만, 인적 손실은 컸다. 그는 제프리 드 세르지네를 섭정으로 남겼다. 콘라트 2세 사후, 콘라딘이 예루살렘 왕이 되었다.[28] 루이 9세는 다마스쿠스와, 아이벡은 프랑크족과 각각 휴전을 맺었다.[28]
아이유브 왕조는 1260년 알레포 공성전으로 멸망했고, 몽골은 레반트 침략을 완료했다.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는 몽골을 격퇴, 일 한국 진격을 저지했다.[29] 바이바르스 아래 맘루크 왕조 세력이 커지자, 루이 9세는 클레멘트 4세에게 제8차 십자군을 청원했다.[29]
19세기 프랑스 『십자군 역사가들의 자료집』(RHC)에는 7차 십자군 관련 자료들이 있다.[32] 번역된 십자군 텍스트와 포드햄 대학교 『인터넷 중세 자료집』에도 관련 자료가 존재한다.[33]
주요 서구 자료는 장 드 주앙빌의 『성 루이 전기』[19], 『십자군 회고록』[19], 『로텔랭 계속』[41], 매슈 파리스의 『대연대기』[36] 등이다. 아랍어 자료는 아부 엘피다의 『인류 간략사』[41], 알 마크리지 기록[42] 등이다.
6. 1. 십자군 운동 전체에 대한 평가
제7차 십자군의 실패는 오크어를 사용하는 오크 트루바두르들의 여러 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십자군 원정 직후 작품을 지은 오스토르크 다를라크(Austorc d'Aorlhac)는 루이 9세가 패배하는 것을 하느님이 허락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 때문에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에는 놀라지 않았다고 표현했다.[29]베르나르 드 로베낙(Bernart de Rovenac)은 그의 시 ''D'un sirventes m'es gran voluntatz preza''에서 "수리아를 정복한 왕"(rei que conquer Suria)이 소유했던 영지를 방어하지 않은 아라곤의 하메스 1세(James I of Aragon)와 잉글랜드의 헨리 3세(Henry III of England)를 모두 비난했다. 여기서 "수리아를 정복한 왕"은 루이 9세를 조롱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30]
십자군 원정대와 함께 여행한 트루베르인 라울 드 수아송(Raoul de Soissons)은 앙주 백작 샤를 1세(Charles I of Anjou)에게 헌정된 여러 샹송을 지었다. 그러나 베르트랑 달라마농(Bertran d'Alamanon)은 십자군 원정을 위해 프로방스를 소홀히 한 샤를을 비판했다. 그는 제7차와 제8차 십자군 사이인 약 1260년에서 1265년 사이에 기독교의 해외 쇠퇴를 애도하는 그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를 지었다.[31]
6. 2. 중세 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관계
키프로스의 앙리 1세는 1253년 1월 18일에 사망하여 그의 아들 키프로스의 위그 2세가 왕위를 계승받았다. 앙리 1세의 미망인이자 안티오크의 보에몽 5세의 딸인 안티오크의 플라이상스는 키프로스와 예루살렘의 섭정을 주장했다. 오트르메르의 귀족들은 섭정을 인정하기 전에 그녀가 직접 나타날 것을 요구했고, 아르수프의 장은 그동안 집정관으로 남았으며, 플라이상스는 결국 그의 아들 아르수프의 발리앙과 결혼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루이 9세가 계속 정부를 관리했다.[1]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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