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주 노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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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주 노얀은 몽골 제국의 장군으로, 몽골의 서방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룸 술탄국을 공격하여 쾨세 다그 전투에서 승리하고 몽골 제국의 종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교황 사절과의 만남에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훌레구의 바그다드 정복 이후 처형되었다는 기록과 시리아 원정 이후 기록이 끊긴다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터키 드라마 《디릴리스: 에르투룰》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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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주 노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원어 이름 (몽골어) | (Baiǰu) |
| 관직 정보 | |
| 관직 | 몽골 제국의 근동 총독 |
| 임명 | 오고데이 칸 |
| 임기 시작 | 1241년 |
| 임기 종료 | 1247년 |
| 선임자 | 코르마칸 |
| 후임자 | 엘지기데이 |
| 관직 | 몽골 제국의 페르시아, 소아시아 총독 |
| 임명 | 몽케 칸 |
| 임기 시작 | 1251년 |
| 임기 종료 | 1255년 |
| 선임자 | 엘지기데이 |
| 후임자 | 훌라구 |
| 군사 활동 | |
| 주요 전투 | 쾨세다으 전투 바그다드 공성전 (1258) |
2. 배경
바이주는 몽골 베수트 부족 출신으로 제베의 친척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칭기즈 칸 휘하의 밍간 지휘관이었으며, 그는 아버지의 사망으로 이 부대를 상속받았다.[1]
바이주는 코르마칸의 부관으로, 1228년 잘랄 앗딘 밍부르누를 상대로 이스파한 근처에서 벌어진 공격에 참여했다.[2] 1241년 코르마칸이 마비되자, 바이주는 그의 군대를 넘겨받아 오고타이 칸의 임명으로 투멘 사령관이 되었다.[2] 오고타이 사후, 바이주는 바투의 명령을 받았다.
3. 생애 및 군사 경력
1243년 6월 26일, 바이주는 룸 술탄국을 공격하여 쾨세 다그 전투에서 승리했다.[2] 이 전투로 룸 술탄국은 몽골 제국의 종속국이 되었고, 다비드 7세 울루가 석방되었다. 1244년, 바이주는 안티오키아 공국에 복종을 요구했고,[3] 1245년에는 아바스 칼리프국을 습격했다.[4] 1246년에는 시리아를 습격했다.[4]
1247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롬바르디아의 아셀린을 대사로 파견하여 바이주와 시시안에서 만났다. 하지만 대사단의 무례한 태도에 바이주는 분노하여 교황을 모욕하고 복종을 요구했다.[5]
1240년대와 1250년대에 바이주는 오늘날의 이란 지역에서 몽골의 권력을 유지하며, 여러 소국들의 왕위 계승에 간섭하고 조공을 징수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와 암살자는 1255년 훌레구가 올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훌레구는 바이주가 몽골의 세력을 확장하지 못한 것을 질책했고, 1255년에 최고 사령관을 교체했다.
1256년 훌레구가 이란에 진입했을 때, 바이주는 룸 지방에 있어 맞이에 참여하지 못했다. 이후 알라무트 등 니자리파 요새군이 함락된 후, 훌레구에게 접견하여 바그다드 정복이 늦어진 것을 질책받았다. 바이주는 여러 이유로 바그다드 정복이 불가능했다고 해명했고, 훌레구는 바그다드 정복과 유럽 원정에 종군할 것을 명했다.
바그다드 전투에서 바이주는 우익군을 이끌고 티그리스 강 서안에서 칼리프 군과 싸웠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바이주는 바그다드 함락 후 훌레구에게 처형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작전에 훌라구와 합류하는 것을 주저했고, 칼리프 알-무스타심과 은밀한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6]
3. 1. 초기 활동
바이주는 코르마칸의 부관이었으며 1228년 잘랄 앗딘 밍부르누를 상대로 이스파한 근처에서 벌어진 공격에 참여했다.[2] 1241년 코르마칸이 마비된 후, 바이주는 그의 군대를 넘겨받아 오고타이 칸의 임명으로 투멘 사령관이 되었다.[2] 오고타이의 죽음 이후, 바이주는 바투의 명령을 받기 시작했다.
바이주는 즉시 룸 술탄국을 공격하여 1243년 6월 26일 쾨세 다그 전투에서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2] 이 전투 이후, 룸 술탄국은 몽골 제국의 종속국이 되었고 다비드 7세 울루를 석방해야 했다. 1244년에 바이주는 안티오키아 공국에도 복종을 요구했다.[3] 그는 1245년에 아바스 칼리프국을 습격했다.[4] 또한 1246년에 몽골 투멘을 이끌고 시리아를 습격했다.
1247년에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로부터 대사를 받았다. 대사단은 롬바르디아의 아셀린이 이끌었고, 1247년 5월 24일 시시안에서 그를 만났다. 대사단의 무례함과 아셀린의 삼배 경례 거부는 바이주를 화나게 했고, 그는 교황을 모욕하고 그의 복종을 요구했다.[5] 아셀린은 1247년 7월 24일에 로마로 떠났다. 그동안 그는 새로운 칸 구유크에 의해 엘지게데이로 교체되었다.
1249~50년에 이라크의 아바스 칼리프국을 침공하려 한 그의 다음 두 번의 시도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1251년에 몽케 칸의 선출에 반대하여 바투에 의해 엘지게데이와 그의 온 가족이 숙청되면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1228년, 툴루이 섭정 시대에 황자 오고데이와의 협의를 통해 이란 방면으로 초르마간을 사령관으로 하는 수비군(타마군, lashkar-i Tamā)의 파견이 결정되었다.[7] 이는 호라즘 제국의 잘랄 웃딘이 인도에서 이란 고원으로 귀환했다는 정보를 받은 것으로, 1229년에 제2대 몽골 황제가 된 오고데이는 초르마간에게 4개의 만호대를 부여했고, 초르마간이 이끄는 타마군은 그 해에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이란으로 들어갔다. 바이주는 처음에는 초르마간 직속의 천호장이었으나, 나중에 4개였던 만호대 중 제1만호대의 만호장이 되었다.[8]
1243년, 오고데이의 붕어로 몽골 제국 중앙이 동요하던 시기에 초르마간 휘하의 이란 수비군은 이란 북서부의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여 카이호스로 2세가 이끄는 룸 술탄국 군과 교전하여 이를 패배시켰다. 이 '''쾨세다 전투'''로 룸 술탄국은 몽골군에게 항복했고, 이후 몽골 제국에 신종하게 되었다. 이 때, 쾨세다 전투에서의 전투에서 이란 수비군 전체를 직접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바이주였다. 초르마간으로부터 바이주에게 이란 수비군의 지휘권이 이양된 시기에 대해서는 『세계 정복자사』, 『집사』에는 명확한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간자케치의 키라코스(en)의 『아르메니아 역사』에 따르면, 쾨세다 전투 2년 전인 아르메니아력 691년(1241년) 초에, 이란 방면에 있던 몽골군 장군들에게 발한 카안의 칙서에 의해 벙어리가 된 초르마간을 대신하여 바이주 노얀이 그 후임이 되었다고 한다.[9] 룸 술탄국의 패배로 인해 주변의 그루지야 왕국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도 신종했으며, 그 처리는 이란 수비군과 이란 총독부에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
1247년 초여름, 바이주가 대아르메니아의 시시안에 주둔하고 있을 때, 로마 교황인노첸시오 4세의 서한을 가지고 온 도미니코회 수도사 안셀무스(또는 아스켈리누스) 등 교황 사절이 도착했다. 그러나 교황 사절들의 거만한 태도에 분노한 바이주는 사절과의 면회를 거부하고, 후술하는 것처럼 서한의 답신만을 전달하고 돌려보냈다.
1246년에 도레게네의 섭정을 거쳐 오고데이를 계승하여 그 장남인 구유크가 제3대 몽골 황제로 즉위했으나, 이란 수비군의 지휘권은 1247년에 몽골 고원에서 파견된 구유크의 측근 일치기타이에게 맡겨졌다. 이 때문에 바이주는 지휘권을 잠시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유크 사망 후의 오굴 카이미시 섭정 시대에도 계속해서 이란 방면의 지배는 일치기타이가 장악했다.
1251년에 툴루이 가문의 몽케가 제4대 몽골 황제로 즉위하자, 일치기타이는 몽케 암살 계획에 가담한 혐의로 처형되었고, 바이주는 다시 이란 수비군의 지휘권을 되찾았다. 이후, 쿠릴타이의 결정에 따라 몽케의 황제 동생 훌라구의 서정군이 파견되었고, 바이주 휘하의 이란 수비군은 이란 총독아르군 아카나 이란 주변의 몽골에 귀순한 여러 정권, 북인도의 카슈미르 수비군 등의 여러 군과 함께 훌라구의 지휘 하에 놓였다. 쿠릴타이의 결정에서는 초르마간 이래의 이란 수비군과 그것을 이끄는 바이주에게 룸(아나톨리아) 지방으로의 추가 파견이 결정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2. 룸 술탄국 정복
1241년 코르마칸이 마비된 후, 바이주는 그의 군대를 넘겨받아 오고타이 칸의 임명으로 투멘 사령관이 되었다.[2] 오고타이의 죽음 이후, 바이주는 바투의 명령을 받기 시작했다. 바이주는 즉시 룸 술탄국을 공격하여 1243년 6월 26일 쾨세 다그 전투에서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2] 이 전투 이후, 술탄국은 몽골 제국의 종속국이 되었고 다비드 7세 울루를 석방해야 했다.[2]
1243년, 오고데이의 붕어로 몽골 제국 중앙이 동요하던 시기에 초르마간 휘하의 이란 수비군은 이란 북서부의 아제르바이잔 지방에서 더욱 서쪽으로 진출하여 카이호스로 2세가 이끄는 룸 술탄국 군과 교전하여 이를 패배시켰다. 이 '''쾨세 다그 전투'''로 룸 술탄국은 몽골군에게 항복했고, 동 왕조는 이후 몽골 제국에 신종하게 되었다. 이 때, 쾨세다 전투에서 이란 수비군 전체를 직접 지휘하고 있던 인물이 바로 바이주였다. 초르마간으로부터 바이주에게 이란 수비군의 지휘권이 이양된 시기에 대해서는 『세계 정복자사』, 『집사』에는 명확한 연도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간자케치의 키라코스(en)의 『아르메니아 역사』에 따르면, 쾨세다 전투 2년 전인 아르메니아력 691년(1241년) 초에, 이란 방면에 있던 몽골군 장군들에게 발한 카안의 칙서에 의해 벙어리가 된 초르마간을 대신하여 바이주 노얀이 그 후임이 되었다고 한다.[9] 룸 술탄국의 패배로 인해 주변의 그루지야 왕국과 킬리키아 아르메니아 왕국도 신종했으며, 그 처리는 이란 수비군과 이란 총독부에 맡겨진 것으로 보인다.
3. 3. 아바스 칼리프국 및 시리아 원정
바이주는 코르마칸의 부관이었으며 1228년 이스파한 근처에서 잘랄 앗딘 밍부르누를 상대로 한 공격에 참여했다.[2] 1241년 코르마칸이 마비된 후, 바이주는 그의 군대를 넘겨받아 오고타이 칸의 임명으로 투멘 사령관이 되었다.[2] 오고타이의 죽음 이후, 바이주는 바투의 명령을 받기 시작했다. 바이주는 즉시 룸 술탄국을 공격하여 1243년 6월 26일 쾨세 다그 전투에서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 전투 이후, 술탄국은 몽골 제국의 종속국이 되었고 다비드 7세 울루를 석방해야 했다.[2] 바이주는 1244년에 안티오키아 공국에도 복종을 요구했다.[3] 그는 1245년에 아바스 칼리프국을 습격했고,[4] 1246년에는 몽골 투멘을 이끌고 시리아를 습격했다.[4]
1240년대와 1250년대의 바이주 아래에서 몽골은 대략 오늘날의 이란에서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고, 술탄국, 조지아, 그리고 이란의 소국들을 필요에 따라 왕조 계승에 간섭하고 군사적으로 조공을 징수하면서 고객으로서 그들의 독립을 용인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에서, 암살자는 엘부르즈 산맥에서 1255년 훌레구가 올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3. 4. 교황 사절과의 만남
1245년,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명에 따라 파리의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사 롬바르디아의 아스켈리누스(안셀무스)와 시몬 등 4명의 사절단이 1247년에 몽골 제국령이 된 아르메니아에 도착했다.[5] 이때 바이주는 대 아르메니아의 시시안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아스켈리누스 등은 교황 사절로서 유럽에 대한 약탈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황의 서신을 전달했다.
아스켈리누스 등은 교황 사절로서 바이주와의 회견을 요청했지만, 교황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몽골을 멸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이에 응대한 몽골 장교들은 강하게 반발하여 그들의 면회를 거부했다.[12] 몽골 측은 당시 몽골 궁정에서의 면접 방식에 따라 몽골 왕공에게 헌상품을 바치고 세 번 절할 것을 요구했지만, 아스켈리누스 등 사절단은 이를 거부하여 서신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9주 동안 현지에 머물며 협상하게 되었다. 이 사절단에 동행하여 기록을 남긴 상카탱의 시몬(:en)에 따르면, 바이주는 수도사들의 언동에 격분하여 세 번이나 사절단을 살해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사절단은 바이주를 만나지 못하고 교황의 서신에 대한 답신만을 받고 쫓겨났지만, 이 사절단이 가져온 바이주의 답신에 따르면, 바이주는 답신 서두에서 교황에게 사절단의 거만한 태도에 대해, 이처럼 말하도록 교황이 명령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독단인지 질문하고 있다. 사절단은 그를 "Bayothnoy(바요스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후 루이 9세를 방문한 엘지기데이가 파견한 사자는 "과거 바콘(=바이주)은 어째서 우리의 사절을 냉대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고, "바콘이 무슬림 고문단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이 사자가 정말 몽골 제국에서 파견된 사자인지 의문시되고 있으며, "사자의 냉대는 기독교도와 무슬림의 종교적 대립에 기인한다"는 답변도 당시 몽골의 관례로 볼 때 사실인지 의심스럽다.[13]
3. 5. 훌레구의 서방 원정과 바그다드 함락
바이주는 코르마칸의 부관이었으며, 1241년 코르마칸이 마비된 후 그의 군대를 넘겨받아 오고타이 칸의 임명으로 투멘 사령관이 되었다.[2] 오고타이의 죽음 이후, 바이주는 바투의 명령을 받기 시작했다. 바이주는 즉시 룸 술탄국을 공격하여 1243년 6월 26일 쾨세 다그 전투에서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3] 1245년에는 아바스 칼리프국을 습격했다.[4]
1240년대와 1250년대의 바이주 아래에서 몽골은 대략 오늘날의 이란에서 그들의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에서, 암살자는 엘부르즈 산맥에서 1255년 훌레구가 올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 바이주는 몽골의 세력을 더 확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훌레구에게 질책을 받았고, 1255년에 최고 사령관으로 교체되었지만, 1258년의 바그다드 공략에서 그의 밑에서 복무했다.[6]
1256년 1월 8일, 훌레구가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이란에 진입했을 때, 바이주는 룸 지방에 있어 맞이에 참여하지 못했다. 바이주가 훌레구에게 접견한 것은 알라무트 등 니자리파의 요새군이 함락된 후, 1257년 3월 말에 카즈빈 근교에 도착했을 때였다. 훌레구는 바이주에게,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권위를 증대시켰을 뿐이라고 질책했고, 바이주는 바그다드 정복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행 불가능했다고 해명했다. 훌레구는 이 말을 듣고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다가올 바그다드 정복 참여와 이후 예정된 유럽 원정에의 종군을 명했다.
이후 바이주는 바그다드 전투를 향한 자그로스 산맥과 이라크 방면의 여러 도시 정복에 종사했다. 바그다드 전투에서는 훌레구를 본영으로 하는 중군, 좌익군은 키트부카와 이르게이 노얀 등이 담당했고, 바이주 노얀이 이끄는 여러 군대는 우익군에 배치되었다.
바그다드 포위전에서 1258년 1월 23일, 선봉으로 바이주, 부카 테무르, 순자크가 먼저 티그리스 강을 건너 바그다드 서안 지역에 진을 쳤다. 훌레구가 바그다드 시가지 동쪽에 진을 치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바이주는 바그다드 주변 전투에서 주로 티그리스 서안에서 부카 테무르와 순자크와 함께 행동하며 칼리프 군과 싸웠다.
3. 6. 사망
바이주는 훌레구에게 몽골의 세력을 더 확장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을 받았고, 1255년에 최고 사령관에서 교체되었지만, 이후에도 여러 작전에서 훌레구 휘하에서 복무했다.[6] 여러 자료에 따르면, 바이주는 바그다드 함락 후 훌레구에게 처형되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작전에 훌라구와 합류하는 것을 주저했고, 칼리프 알-무스타심과 은밀한 서신을 주고받았기 때문이다.[6]
《집사》 훌레구 칸기에 따르면, 1256년 훌레구가 이란에 진입했을 때 바이주는 룸 지방에 있어 맞이에 참여하지 못했고, 1257년 알라무트 등 니자리파 요새군이 함락된 후 훌레구에게 접견했을 때, 촐마간 파견 이후 완만한 정복으로 바그다드의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권위를 증대시켰다고 질책받았다. 바이주는 바그다드 정복이 여러 가지 이유로 불가능했다고 해명했고, 훌레구는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바그다드 정복과 유럽 원정에 종군할 것을 명했다.
바그다드 전투에서 바이주는 우익군을 이끌고 티그리스 강 서안에서 칼리프 군과 싸웠다. 1259년 시리아 원정 이후 《집사》 훌레구 칸기에는 바이주에 대한 기록이 없어지고, 다른 자료에서도 대략 이 시기부터 바이주에 대한 기록이 끊긴다.
《집사》 베스트 부족지에 따르면, 바이주는 룸 지방에서의 전공을 자랑했기 때문에 훌레구에게 소환되어 처형당했고, 그의 재산 절반은 몰수되었으며, 휘하의 만호대는 초르마칸의 아들 시레문이, 천호대는 바이주의 아들 아다크가 지배하게 되었다.
《원사》에는 서방에서 활약한 무장이기 때문에 바이주에 대한 열전이 없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2015년부터 2016년까지 방영된 터키 역사 드라마 시리즈 《디릴리스: 에르투룰》에서 바르쉬 바으즈가 노얀 역을 연기했으며, 여기서 노얀은 전통적으로 몽골 군사 칭호로 사용되었다.[1]
참조
[1]
문헌
[2]
문헌
[3]
웹사이트
BĀYJŪ – Encyclopaedia Iranica
http://www.iranicaon[...]
Encyclopædia Iranica
2020-04-23
[4]
문헌
[5]
문헌
[6]
웹사이트
Erken Dönem Memlük Tarihçilerinin Bağdat'ın Moğollar Tarafından İstilasıyla Alakalı Rivayet ve Yorumları, İslam Medeniyetinde Bağdat Uluslararası Sempozyumu, 7/9 Kasım 2008, İstanbul, Fatih Yahya AYAZ
http://ktp.isam.org.[...]
2015-11-04
[7]
문서
『聖武親征録』「戊子(1228年)、太宗皇帝(オゴデイ)與太上皇(トルイ)共議 搠力蛮(チョルマグン)遣復征西域。」
[8]
서적
モンゴル帝国史研究序説
[9]
간행물
訳註ギラゴス『アルメニア史』-- E. Dulaurier のフランス語訳よりの重訳
三一書房
[10]
서적
モンゴル帝国史研究序説
[11]
서적
モンゴル帝国史研究序説
[12]
서적
モンゴル帝国と西洋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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