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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페준타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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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페준타 제국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알렉시오스 1세에 의해 건국되었다. 흑해 남부 연안을 중심으로 번영했으며, 콤네노스 왕조가 통치했다.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지정학적 위치와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며 비잔틴 제국의 마지막 세력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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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페준타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1204년의 트라페준타 제국 지도
1204년의 라틴 제국 수립 직후의 트라페준타 제국 지도. 다비드 콤네노스의 서부 아나톨리아의 단명한 정복지(이후 니케아 제국에 의해 재정복됨)와 시노프 (이후 룸 술탄국에 의해 정복됨)가 표시됨.
기본 정보
공식 명칭트라페준타 제국
일반 명칭트라페준타
존속 기간후기 중세
지위비잔티움 제국의 계승국
조지아 왕국의 속국 (1204년–1227년)
몽골 제국의 봉신국 (1243년–1336년)
건국설립
건국 시기1204년
멸망 시기1461년
주요 사건제4차 십자군에 의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204년 4월 12일)
몽골 제국에 대한 복종 (1243년)
시노페의 영구적인 상실 (1265년)
요한 2세의 황제 칭호 포기 (1282년)
트라페준타 내전 (1340년–1349년)
트라페준타 함락 (8월 15일)
현재 국가조지아
러시아
튀르키예
우크라이나
트라페준타 제국의 깃발
서양의 해도첩에 묘사된 쌍두 독수리 깃발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트라페준타
주요 언어폰토스 그리스어 (공식어)
라즈어
서아르메니아어, 고대 아나톨리아 튀르크어, 리구리아어, 라틴어
종교그리스 정교회
역대 통치자
주요 황제알렉시오스 1세 (1204년–1222년)
마누엘 1세 (1238년–1263년)
(1280년–1297년)
(1349년–1390년)
다비드 (1459년–1461년)
황제 칭호1282년 이후 트라페준타 황제의 완전한 칭호는 "모든 동방, 이베리아인 및 페라테이아의 충실한 바실레우스이자 아우토크라토르"였음.

2. 역사

마누엘 1세 콤네노스.


1204년 4월 초,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동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콤네노스 황조의 후예인 알렉시오스 콤니노스가 친척인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트라페주스(현재의 트라브존)와 주변 칼디아 지역을 장악하면서 트라페준타 제국이 세워졌다. 이 사건 이후 트라페준타와 조지아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그 관계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62] 알렉시오스는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 황제의 손자로, 1185년 할아버지가 폐위되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 어머니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출하여 망명 생활을 했다.

트라페준타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메가스 콤네소스'(grc, "대 콤네노스")라고 칭하며 가문의 정통성을 강조했다. 초기에는 다른 동로마 제국 후계 국가들처럼 전통적인 동로마 황제 칭호인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를 사용하며 제국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1261년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재건하자, 칭호 문제가 불거졌다. 결국 1282년, 요안니스 2세는 동로마 제국과 합의하여 공식 칭호를 "페라테이아 및 이베리아와 동방 전체의 황제 및 전제자"로 변경했고, 이 칭호는 1461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트라페준타 제국은 종종 '콤네노스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건국 초기 트라페준타 제국은 흑해 남부 연안의 소테리우폴리스에서 시노페에 이르는 넓은 지역과 크림반도의 페라테이아 지역 일부를 지배했다. 알렉시오스의 동생 다비드 콤네노스는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여 파플라고니아와 헤라클레이아 폰티케까지 진출하기도 했으나, 이러한 확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1206년에는 니케아 제국에게, 1214년에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주요 영토를 빼앗기며 세력이 위축되었다.

이후 제국은 몽골 제국이나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기도 했지만, 비교적 고립된 지리적 위치와 주변 강대국들 사이의 경쟁 구도 덕분에 직접적인 지배는 피하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국의 경제는 , , 명반석, 의류, 포도주 등의 생산품 수출과 동방 교역로의 통과세 수입에 크게 의존했다. 특히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의 등장으로 실크로드 교역로가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트라페준타는 중요한 무역 거점으로 부상하여 번영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제국은 내부 분열과 오스만 제국의 점증하는 위협에 시달렸다. 여러 차례 외교적 노력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결국 1461년 메흐메드 2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에 의해 수도 트라페준타가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2. 1. 건국 배경

1204년 4월 초,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동로마 제국 중앙 정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알렉시오스 콤네노스는 트라페주스와 주변 칼디아 지역을 장악하고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웠다. 알렉시오스는 콤네노스 황조 출신의 마지막 동로마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의 손자로, 안드로니코스 1세가 1185년 폐위되고 살해된 후 아버지 마누일 콤니노스마저 실명 후 사망하자, 어머니 루수단과 함께 새로운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박해를 피해 수도를 탈출해야 했다.

알렉시오스는 제국 건국 과정에서 그의 고모인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이 제공한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트라페준타와 조지아는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으나, 그 관계의 정확한 성격과 정도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62]

2. 1. 1. 트라페주스 제국 건국 이전의 상황

중세 후기 소규모 제국의 중심지가 되기 이전부터, 트라페준타는 오랜 자치 통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천혜의 항만과 방어에 유리한 지형, 그리고 구리 광산에 대한 접근성 덕분에 트라페준타는 건설 직후부터 흑해 동부 연안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 식민지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로마 제국의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역 통치자들은 중앙 정부의 간섭 없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제국이 건국되기 수 세기 전부터 이 도시는 지역의 가브라스(Gabras) 가문의 지배 아래 있었는데,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였으나,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할 정도로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53][10]

트라페준타는 비잔티움 제국의 행정 구역인 칼디아 테마의 수도였으며, 10세기 아랍 지리학자 아불피다는 이곳을 주로 라지카의 항구로 간주했다. 칼디아 테마는 이미 10세기와 11세기에 지역 지도자였던 테오도로스 가브라스의 통치 아래 분리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안나 콤네나에 따르면, 테오도로스 가브라스는 트라페준타와 그 주변 지역을 "자신의 운명에 속한 것"으로 여기며 독립적인 군주처럼 행동했다. 이에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그를 칼디아 총독으로 임명하면서도, 그의 아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인질로 잡아두어 견제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브라스는 조지아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하며 지역의 강력한 수호자임을 증명했다.[15]

테오도로스 가브라스의 후계자 중 한 명인 그레고리 타로니테스는 카파도키아 술탄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다시 총독직에 복귀하기도 했다.[16] 테오도로스의 또 다른 후계자인 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는 역사가 니케타스에 의해 트라페준타를 폭압적으로 통치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의 독자적인 행보는 1139년 황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트라페준타로 원정을 오게 만들었다. 비록 이 원정은 큰 성과 없이 끝났지만, 콘스탄티노스 가브라스는 1204년 트라페준타 제국이 건국되기 전 기록된 마지막 반란 총독으로 남게 되었다.[17]

트라페준타 요새의 계획도


이처럼 트라페준타는 콤네노스 왕조가 들어서기 전부터 강력한 지방 세력이 자치적으로 통치해 온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1204년 알렉시오스 콤네노스가 새로운 제국을 세울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 1. 2. 트라페주스 제국의 성립



2013년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개조된 트라페주스의 아야 소피아 교회


중세 후기 소규모 제국으로서 중심이 되기 이전부터, 트라페주스는 오랜 자치 통치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천혜의 항구와 방어에 유리한 지형, 그리고 구리 광산 접근성 덕분에 트라페주스는 건설 직후 흑해 동부 연안의 가장 중요한 그리스 식민지가 되었다. 로마 제국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지역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기회를 얻었다. 제국 건설 이전 수 세기 동안 이 도시는 지역 가브라스 가문의 지배를 받았는데, 이 가문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동로마 제국의 일부였지만 자체적으로 주화를 주조했다.[10][53]

콤네노스 황조 출신의 마지막 동로마 황제였던 안드로니코스 1세 콤네노스가 1185년 폐위되어 살해되자, 그의 아들 마누일 콤네노스 역시 눈이 멀게 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마누엘의 아내이자 조지아의 기오르기 3세의 딸인 루수단은 어린 아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 콤네노스를 데리고 새로운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박해를 피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탈출했다. 루수단과 아들들이 친정인 조지아로 갔는지, 아니면 콤네노스 가문의 본거지인 흑해 남부 연안으로 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결국 고모인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의 궁정에서 지내게 되었다.

1204년 4월 초,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여 동로마 중앙 정부가 다른 지역에 신경 쓸 여력이 없게 된 혼란한 상황을 틈타, 알렉시오스 콤네노스는 고모인 타마르 여왕이 제공한 군대를 이끌고 트라페주스 시와 주변 칼디아 지역을 점령하며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웠다.[18][22] 이때 알렉시오스의 나이는 22세였으며, 황제로 선포되었다.[23] 타마르 여왕이 조카들을 지원한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바실리예프는 동로마 황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조지아 순례자들에게 타마르가 보낸 선물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주장했으며,[1] 미셸 쿠르스칸스키스는 타마르가 조카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위를 되찾도록 도우려 했다고 보았다.[21]

트라페준타 제국 건국 이후 조지아 왕국과의 관계는 긴밀하게 유지되었으나, 그 정확한 성격과 범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62][19] 일부 학자들은 제국 초기, 특히 13세기 초에는 조지아에 종속적인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1][20]

트라페준타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을 "메가스 콤네노스"(Megas Komnenos, 대 콤네노스)라고 칭하며 가문의 혈통을 강조했다. 초기에는 다른 동로마 계승국인 니케아 제국이나 에페이로스 공국처럼 전통적인 동로마 황제의 칭호인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를 사용하며 최고 권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1261년 니케아 제국의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고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여 동로마 제국을 복원하자, 트라페준타 황제의 칭호 사용은 문제가 되었다. 결국 1282년,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미카엘 8세의 딸과 결혼하면서 "로마인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데스포트라는 법적 칭호를 받아들였다.[11] 하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제국이 멸망하는 1461년까지 "페라테이아 및 이베리아와 동방 전체의 황제 및 전제자"라는 변형된 칭호를 계속 사용했다.[12] 트라페준타 제국은 황가의 이름을 따 '콤네노스 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초기 트라페준타 제국은 흑해 남부 연안의 소테리우폴리스에서 시노페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했다. 이는 현대 터키의 행정 구역상 시놉, 오르두, 기레순, 트라브존, 바이부르트, 귀뮈샤네, 리제, 아르트빈 주에 해당한다. 13세기에 제국은 크림반도케르소네소스케르치 등 페라테이아 지역까지 지배력을 확장했다. 알렉시오스의 동생 다비드 콤네노스는 서쪽으로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여 시노페를 점령하고 파플라고니아와 헤라클레이아 폰티케(오늘날 삼순 주, 카스타모누 주, 바르틴 주, 종굴다크 주의 해안 지역)까지 진출하여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가 세운 니케아 제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노페 서쪽 영토는 1206년 니케아 제국에 빼앗겼고, 시노페 자체는 1214년 룸 술탄국에게 함락되었다.

2. 2. 초기 발전과 쇠퇴



1204년 4월 초, 제4차 십자군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하여 동로마 제국 중앙 정부가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친척인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의 군대 지원을 받아 트라페주스와 주변 칼디아 지역을 장악하며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웠다. 이때부터 트라페준타와 조지아의 관계는 돈독해졌지만, 그 구체적인 성격과 정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62]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는 콤네노스 황조 출신의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1세 콤니노스의 손자였다. 그의 아버지 마누일 콤니노스는 안드로니코스 1세가 폐위된 후 눈이 멀었고 얼마 뒤 사망했다. 알렉시오스의 어머니이자 조지아 왕 조지아의 기오르기 3세의 딸인 루수단은 아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데리고 새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박해를 피해 수도를 탈출했다.

알렉시오스가 트라페존트에 입성한 정확한 날짜에 대해, 세르게이 카르포프는 알렉시오스의 납 인장을 근거로 1204년 4월 23일(성 게오르기우스 축일) 또는 4월 25일(부활절)경으로 추정한다.[24] 건국 동기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바실리예프는 형제들이 셀주크 투르크로부터 조지아를 보호하기 위한 완충국을 만들려 했다고 주장한다.[25] 반면 쿠르샨스키스는 알렉시오스 앙겔로스 황제에 대한 복수심과 콤네노스 가문의 제위 복원을 목표로 했다고 본다.[26] 콘스탄티노플 함락 소식을 들은 후, 이들은 니케아 제국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에페이로스 공국의 미카엘 1세 콤네노스 두카스와 함께 옛 제국의 수도 회복을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26]

초기 트라페준타 제국은 소테리우폴리스에서 시노페에 이르는 흑해 남부 연안 지역을 지배했다. 이는 현재 터키의 시놉, 오르두, 기레순, 트라브존, 바이부르트, 귀뮈샤네, 리제, 아르트빈 주에 해당한다. 13세기에 제국은 크림반도케르소네소스케르치 등 페라테이아 지역도 지배했다. 알렉시오스의 동생 다비드는 서쪽으로 빠르게 영토를 확장하여 시노페를 점령하고 파플라고니아와 헤라클레이아 폰티케까지 진출하여 니케아 제국과 국경을 맞대었다. 그러나 이 확장은 오래가지 못했고, 시노페 서쪽 영토는 1206년 니케아 제국에 빼앗겼으며, 시노페 자체는 1214년 셀주크 투르크에게 함락되었다.

트라페준타의 지배자들은 다른 동로마 후계국들처럼 자신들을 '메가스 콤네소스'("대 콤네노스")라고 칭했으며, 초기에는 전통적인 동로마 황제 칭호인 "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를 주장했다. 하지만 1282년, 복원된 동로마 제국과의 합의를 통해 공식 칭호를 "페라테이아 및 이베리아와 동방 전체의 황제 및 전제자"로 변경하여 1461년 멸망할 때까지 사용했다. 이 때문에 트라페준타 제국은 종종 황가의 이름을 따 '콤네노스 제국'으로 불리기도 한다.

13세기 대부분 동안 트라페준타는 셀주크 룸 술탄국,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동로마 제국제노바 공화국과 끊임없이 갈등을 겪었다. 제국은 지리적으로 고립된 위치와 주변 경쟁 세력 간의 분쟁 덕분에 상대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제노바와 베네치아 공화국 상인들과의 무역(은, 철, 명반석, 의류, 흑포도주 수출 및 이란 서부로 가는 교역품에 대한 통과세 수입)에서 얻은 부와,[27] 통치 가문의 딸들을 내륙 아나톨리아의 튀르크계 지배자들과 혼인 동맹을 맺는 외교 정책을 통해 생존을 유지했다.

황금칙서에서 발췌한 알렉시오스 3세. 아토스 산 디오니시우 수도원에 하사한 문서


알렉시오스 1세의 둘째 아들인 마누엘 1세(1238-1263)는 내부 안정을 다지고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254년 시노페를 잠시 탈환하기도 했으며,[28] '아스퍼'로 알려진 은화를 처음으로 발행했다. 1258년 몽골 제국의 훌라구 칸이 바그다드를 파괴하면서 실크로드의 서쪽 종착지가 북쪽 흑해 연안으로 이동했고, 몽골의 지역 수도인 타브리즈와의 연계 덕분에 트라페준타는 몽골의 종주권 아래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29] 서양 여행자들은 아시아로 가는 출발점으로 트라페준타를 이용했으며, 마르코 폴로 역시 1295년 이곳을 통해 유럽으로 돌아갔다.

마누엘 1세의 막내아들인 요한 2세(1280-1297)의 통치기에는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과 화해하고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황제 계승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의 아들 알렉시오스 2세(1297-1330)의 긴 통치 기간 동안 트라페준타는 부와 영향력의 절정기를 누렸다.[30] 이 시기에는 에르주룸 지역이 1310년대경 트라페준타 제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31]

아기아 테오토코스 수도원에 있는 코므네노스 가문의 프레스코화 사본(파괴됨). 알렉시오스 3세, 그의 어머니 에이레네, 그의 아내 테오도라 묘사, 트라페준타의 파나기아 테오스케파스토스 수도원

2. 3. 몽골 제국의 영향과 번영



13세기 중반, 몽골 제국의 등장은 트라페준타 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58년 훌라구 칸이 바그다드를 파괴하면서(바그다드 전투 (1258)) 기존 실크로드의 남쪽 경로가 막히자, 동서 교역로는 북쪽의 흑해 연안으로 이동하게 되었다.[29] 이러한 변화는 일 칸국의 수도였던 타브리즈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트라페준타에게 경제적 번영의 기회를 제공했다. 트라페준타는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직접적인 지배는 피하면서, 변경된 교역로의 중심지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29]

이 시기 트라페준타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상인들에게 중요한 경유지가 되었다. 제국 정부는 교역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화폐와 도량형을 타브리즈의 기준에 맞추었으며, 13세기 후반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 상인들이 트라페준타에 거류지를 설치하고 활발한 상업 활동을 전개했다. 트라페준타는 통과하는 상품에 3%의 관세를 부과하고 폰투스 산맥의 풍부한 은광을 개발하여 막대한 수입을 확보했다.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제국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 자원을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27] 당시 트라페준타를 거쳐 간 대표적인 인물로는 1295년 마르코 폴로가 있으며, 그는 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트라페준타를 통해 유럽으로 귀환했다.[29]

트라페존트의 마누엘 1세(1238-1263)는 '아스퍼'로 알려진 은화를 발행하여 제국의 경제적 기반을 다진 통치자였다.[28] 그의 뒤를 이은 트라페존트의 요한 2세(1280-1297) 시대에는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제위 주장을 철회하는 등 외교적 안정을 꾀했다. 트라페준타의 부와 영향력은 요한 2세의 아들인 트라페존트의 알렉시오스 2세(1297-1330)의 오랜 통치 기간 동안 절정에 달했다.[30] 이 시기에는 제국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1310년대에는 에르주룸 지역까지 지배하기도 했다.[31]

그러나 이러한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 트라페준타는 외교적으로 신중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특히 내륙의 튀르크계 지배자들과의 관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황녀들을 많은 지참금과 함께 혼인 동맹의 형태로 보내는 경우가 잦았다. 이는 제국의 안보를 유지하고 상업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외교적 수단이었다.

2. 4. 내분과 쇠퇴

알렉시오스 2세가 사망한 후, 트라페준타 제국은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했다. 그의 막내아들인 바실리오스가 통치하던 짧은 기간(1332년 ~ 1340년)을 제외하고는 황제가 계속해서 폐위되거나 암살당하는 불안정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이 시기 제국 내에서는 두 개의 주요 세력이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다. 한 세력은 비잔티움에 우호적인 입장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스콜라로이'(grc)였고, 다른 한 세력은 토착 귀족(아르콘테스)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는 '아미츠안타란테스'(grc)였다. 이러한 내부 분열과 혼란은 1347년부터 1348년 사이에 극에 달했다. 제국의 약세를 틈타 튀르크 세력은 오이나이온(Oinaion, 현재 위니에)을 정복하고 수도 트라페존트를 포위했으며, 제노바인들은 케라수스(Kerasous, 현재 기레순)를 점령했다. 설상가상으로 카파(Caffa, 현재 페오도시야)에서 시작된 흑사병이 트라페존트를 비롯한 폰토스 해안 도시들로 퍼져나가 큰 피해를 입혔다.

이러한 재난 상황 속에서 황제 미카엘은 1349년 조카인 알렉시오스 3세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점차적으로 양대 파벌 세력을 통제하며 제국의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알렉시오스 3세의 통치 아래 트라페존트는 중요한 무역 중심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예술적으로도 발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이 시기에는 트라페준타 황실의 공주들을 주변 튀르크계 왕조의 군주들과 결혼시키는 외교 정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역사학자 앤서니 브라이어스(Anthony Bryer)는 당시 트라페준타 제국이 알려진 것처럼 부유한 국가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무역을 통해 얻는 세금 수입이 비잔티움 기준으로 볼 때 상당하기는 했지만, 황제 수입의 대부분(최대 4분의 3)은 황실 소유 영지에서 직접 얻거나 다른 토지에서 세금 및 십일조 형태로 거둬들인 것이었다고 분석했다.[32]

2. 5. 오스만 제국에 의한 멸망

1400년경 주변 국가와 함께 축소된 트라페존트


14세기 말, 서아나톨리아에서 발흥한 오스만 제국의 팽창은 트라페준타 제국에게 점증하는 위협이 되었다. 비록 1402년 앙카라 전투에서 티무르가 오스만 세력을 일시적으로 꺾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1430년대에 재기하여 그리스의 넓은 지역을 장악했고, 마침내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트라페존트의 마누엘 3세 (1390–1417)는 티무르와 동맹을 맺었으나,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를 떠나고 그의 제국이 사후에 붕괴하면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트라페존트의 알렉시오스 4세 (1417–1429)는 정략결혼을 통해 제국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는 딸들을 이웃한 이슬람 국가의 군주들, 즉 까라 코윤루의 칸 지한 샤와 아크 코윤루의 칸 알리 베이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그의 장녀 마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8세 요한 팔라이올로고스의 세 번째 황후가 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의 뒤를 이은 트라페존트의 요한 4세 (1429–1459)는 오스만 제국의 위협이 임박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오스만 술탄 무라드 2세는 1442년 해상을 통해 트라페준타를 공격하려 했으나 높은 파도로 인해 실패했다.[33] 이후 메흐메드 2세 시대인 1456년, 벨그라드 공성전 중에 아마시아의 오스만 총독이 트라페준타를 공격하여 비록 패배했지만 많은 포로를 잡고 공물을 받아갔다.[34] 한편, 제노바 측 기록에 따르면 1437년 요한 4세는 제노바 상선 한 척을 나포하기도 했다.[35]

요한 4세는 오스만 제국의 침공에 대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1439년 피렌체 공의회에 인문주의자 조르지 아미로우체스를 사절로 보내 동서 교회의 통합을 논의했으나 실질적인 도움은 얻지 못했다. 그는 딸 테오도라 (데스피나 카툰으로도 알려짐)를 그의 매형인 우준 하산의 아들, 아크 코윤루 칸에게 트라페존트를 방어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시집보냈다. 그는 또한 시노프와 카라만의 튀르크 에미르들과 조지아의 왕과 왕자들로부터 도움을 받겠다는 약속을 받았다.[36] 테오도라와 트라페존트의 알렉시오스 4세의 딸 (테오도라라고도 함)을 통해 아크 코윤루를 계승한 이란사파비 왕조는 처음부터 직계 일부가 폰토스 그리스인 민족이었으며, 이스마일 1세는 테오도라의 손자였다.

요한이 1459년에 사망한 후, 그의 동생인 다비드가 권력을 잡았다. 다비드는 오스만인에 대항하여 여러 유럽 강국들과 도움을 얻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예루살렘 정복을 포함한 야심 찬 계획들을 이야기했다. 메흐메드 2세는 결국 이 음모들을 듣게 되었고, 다비드가 메흐메드에게 그의 형제에게 부과된 조공을 면제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더욱 자극을 받았다.[36]

메흐메드의 반응은 1461년 여름에 나왔다. 그는 부르사에 상당한 군대를 모았고, 기습적으로 시노프로 진군했으며, 시노프의 에미르는 곧 항복했다. 그러자 술탄은 동아나톨리아를 가로질러 남쪽으로 이동하여 우준 하산을 무력화시켰다. 트라페존트를 고립시킨 메흐메드는 주민들이 그의 접근을 알기 전에 덮쳐 포위 공격을 가했다. 도시는 한 달 동안 버텼지만, 다비드는 1461년 8월 15일에 항복했다. 트라페존트의 함락으로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독립적인 잔존물이자 비잔티움 제국이 발흥한 로마 제국에서도 마지막 잔존물은 트라페존트 제국의 분파인 테오도로 공국이었다. 1475년 12월 30일, 그곳도 오스만 통치하에 넘어갔다.[37]

3. 지리

1204년 제4차 십자군과 옛 비잔티움 제국의 정치적 상황


트라페준타 제국은 지리적으로 흑해 남부 해안을 따라 좁게 뻗은 지역과 폰투스 산맥의 서쪽 절반을 차지했다. 초기에는 크림 반도 남부의 가자리아 페라테이아도 포함했으나, 이 지역은 곧 제노바가자리아테오도리트 가자리아에게 넘어갔다.

제국의 중심지는 예실르르막 강 하구부터 동쪽으로, 당시 라지아로 알려진 지역까지 이어지는 흑해 남부 해안이었다. 이 지역은 트라페준트인들에게 림니아로 알려졌으며, 아마도 아캄프시스 강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가 앤서니 브라이어는 트라페준트 통치자들이 제국 멸망 시까지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옛 칼디아 테마의 7개 ''반돈'' 중 6개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남쪽 국경은 폰투스 산맥이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었다. 이 산맥은 초기 셀주크 왕조와 이후 투르크멘 침입자들에 대한 방벽 역할을 하여, 그들의 약탈을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여주었다.[13] 또한 남쪽에서 침입하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제국을 보호하는 천연 요새로 기능했다.

제국의 영토는 오늘날 터키의 다음 주들의 해안 지역 전체 또는 일부에 해당한다.

주 이름
시노프
삼순
오르두
기레순
트라브존
바이부르트
귀뮈시하네
리제
아르트빈



13세기 일부 전문가들은 제국이 크림 반도의 가자리아 페라테이아, 특히 케르손과 케르치를 지배했다고 본다. 크림 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보다 트라페준타와 경제적으로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알렉시오스 1세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1세 시대 말기부터 크림 반도에 대한 통치권은 점차 타타르족과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넘어갔다.

초대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동생인 다비드 콤네누스는 서쪽으로 빠르게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먼저 시노페를 점령하고, 이어서 파플라고니아의 해안 지역(현재 카스타모누 주, 바르틴 주, 존굴닥 주의 해안 지역)과 헤라클레이아 폰티카(현재 카라데니즈 에레글리)까지 장악하여 니케아 제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확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1214년, 시노페 서쪽의 영토는 니케아 제국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에게 빼앗겼다. 같은 해 시노페 자체도 셀주크 투르크에게 함락되었다. 트라페준트 황제들은 13세기 내내 시노페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계속 싸웠다.[14]

4. 경제

몽골 제국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이 격렬해지면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카라반은 일한국의 수도 타브리즈와 트라페준타 제국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항로를 이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국 정부는 화폐와 도량형을 타브리즈의 기준에 맞추었으며, 13세기 후반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제노바 공화국 상인들이 트라페준타에 거류지를 마련했다. 트라페준타는 3%의 관세를 거두어들이고 폰투스 산맥의 은광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하지만 이러한 상업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 안보 차원에서 황녀와 많은 혼수를 이슬람 국가에 보내야 하는 등의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5. 문화

19세기 요하네스 리트슈타프는 중세 자료를 바탕으로 트라페준타와 콤네누스 가문의 문장을 '은색 바탕에 세 개의 검은색 가로줄'로 널리 알렸으나, 당대 기록에는 이 문장을 뒷받침할 자료가 없으며, 중세 문장학에서는 외딴 지역에 대해 상상의 문장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었다


스티븐 런시먼(Steven Runciman)에 따르면, 트라페준타 제국은 서유럽에서 "수도를 통과하는 페르시아와 동방의 무역과 뒤편 산악 지대의 은광으로 부유해졌으며, 공주들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했다"[40]는 평판을 얻었다.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역시 "대부분의 황제들은 결혼할 수 있는 딸들을 많이 두었고, 트라페준타의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그들의 풍부한 지참금만큼이나 전설적이었다."[41]고 언급했다. 이러한 부와 이국적인 위치는 트라페준타 제국에 지속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세르반테스(Cervantes)는 그의 소설 ''돈 키호테''(Don Quixote)의 주인공이 "자신의 무용으로 적어도 트라페준타 황제로 즉위했다고 상상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프랑수아 라블레(Rabelais)는 피에몬트의 통치자 피크로콜(Picrochole)이라는 인물에게 "나 또한 트라페준타 황제가 되고 싶다"고 말하게 했다. 트라페준타를 배경으로 한 다른 언급과 작품들은 20세기까지 이어졌다.[42]

이탈리아어에는 perdere la Trebisonda|페르데레 라 트레비손다ita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당황하다"라는 의미이다. 트라페준타는 흑해를 가로지르는 모든 항로로 접근할 수 있는 항구였고, 따라서 폭풍우 속에서 안전한 피난처였기 때문에 이러한 표현이 생겨났다.[43]

5. 1. 종교

트라페준타 제국 사회는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바젤론 수도원의 기록에 따르면, 제국 내 마추카 지역 농민 다수가 기독교 성인과 관련된 이름을 사용했으며, 성씨 역시 기독교 성인, 직업, 지명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았다.[38][56] 이 마추카 지역은 트라페준트와 타브리즈를 잇는 무역로에 위치하여, 수도 트라페준트보다 오히려 제국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이 지역의 스멜라 수도원은 대영주로서 지역 질서를 유지하고 주민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트라페준타 제국의 비교적 좁은 영토에는 세 개의 교구가 있었다. 오래된 트레비존드 교구 외에, 라지카 지역 주교구가 승격되어 케라소스리자이온 교구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 세 교구는 1461년 오스만 제국의 정복 이후에도 유지되었으나, 17세기경 케라소스와 리자이온 교구는 폐지되었다. 특히 리자이온 교구와 오프 주교구는 해당 지역 라즈족의 이슬람화 때문에 사라졌으며, 케라소스 교구도 비슷한 이유로 폐지된 것으로 추정된다.[39]

팔레올로고스 왕조 치하의 동로마 제국 황제들이 서유럽의 압력 때문에 로마 교회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과 달리, 트라페준타 제국은 국내외 교회와 수도원을 꾸준히 지원하며 자신들이 정교회 신앙에 충실함을 강조했다.

트라페준타의 문화는 중세 그리스어를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적 색채가 강했지만, 황제와 백성들은 스스로를 '그리스인'이 아닌 '로마인'으로 여겼다.

6. 역대 군주

1285년 – 1297년마누엘 1세의 아들, 게오르기오스의 동생테오도라1284년 – 1285년마누엘 1세의 딸알렉시오스 2세1297년 – 1330년요안니스 2세의 아들안드로니코스 3세1330년 – 1332년알렉시오스 2세의 장남마누엘 2세1332년안드로니코스 3세의 사생아바실레이오스1332년 – 1340년알렉시오스 2세의 아들아이레네 팔라이올로기나1340년 – 1341년바실레이오스의 황후안나1341년
1341년 – 1342년알렉시오스 2세의 딸미카엘1341년
1344년 – 1349년요안니스 2세의 아들요안니스 3세1342년 – 1344년미카엘의 아들알렉시오스 3세1349년 – 1390년바실레이오스의 아들마누엘 3세1390년 – 1417년알렉시오스 3세의 아들알렉시오스 4세1417년 – 1429년마누엘 3세의 아들요안니스 4세1429년 – 1458년알렉시오스 4세의 아들다비드1458년 – 1461년알렉시오스 4세의 아들, 마지막 황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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