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오스 1세 (트라페준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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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시오스 1세는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기 직전 트레비존드를 점령하고 트라페준타 제국을 건국하여 초대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는 조지아의 지원을 받아 파플라고니아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나, 니케아 제국과 룸 술탄국의 공격을 받아 시노페를 잃고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후 룸 술탄국에 신종하고 석방되어 황제로 복위했지만, 제국의 위신은 크게 훼손되었다. 1222년 사망했으며, 사위 안드로니코스 1세가 그의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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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1세 (트라페준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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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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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트라페준타 황제, 비잔티움 제위 주장자 |
재위 기간 | 1204년 – 1222년 2월 1일 |
계승자 | 안드로니코스 1세 |
배우자 | 아마도 테오도라 악수키나 |
자녀 | 요한 1세 마누엘 1세 이름 미상 (안드로니코스 1세의 아내) |
가문 | 콤네노스 왕조 |
아버지 | 마누엘 콤네노스 |
어머니 | 루수단 |
출생일 | 기원후 1182년경 |
사망일 | 1222년 2월 1일 (향년 약 40세) |
종교 | 동방 정교회 |
호칭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군주 |
섭정 | 다비드 (1204년–1212년) |
이름 | |
로마자 표기 | Alekseos I Komnēnos |
2. 초기 생애
알렉시오스는 콤네노스 왕조의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이자 마누엘 코메노스의 장남이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1185년 친척인 이사키오스 2세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했으며, 그의 아들 마누엘은 눈이 멀게 되었고 이 훼손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4]
마누엘은 두 아들, "카이사르"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남겼다. 이들의 어머니는 조지아의 왕녀 루수단으로 추정되나[5], 확실하지 않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어머니와 함께 흑해 동안으로 도망쳐 조지아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은 타마르 1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트라페주스, 카스타모니를 포함한 파플라고니아와 폰토스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알렉시오스와 타마르 여왕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미하일 파나레토스는 타마르가 알렉시오스의 "부계 친척"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해석을 낳았다. 1854년 러시아 학자 쿠니크는 알렉시오스의 어머니가 타마르의 여동생 루수단이라고 제안했고, 알렉산더 바실리예프는 이 이론을 지지했다.[7] 시릴 투마노프는 안드로니코스가 조지아 망명 시절 조지 3세의 이름 없는 여동생과 결혼했다고 주장했다.[8]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몰락 이후 1204년 알렉시오스가 트레비존드에 도착하기까지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제가 타마르의 궁정에서 피난처를 찾았다는 데 동의하며, 조지아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며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10]
콤네노스 왕조의 안드로니코스 1세는 실정으로 신민들에게 인심을 잃고, 결국 친척인 이사키오스 2세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안드로니코스 1세와 그의 아들 마누엘은 살해당했다.[4] 마누엘의 부인이었던 조지아의 왕녀 루수단은 두 아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데리고 흑해 동안으로 이사키오스의 추격을 피해 도망쳤다. 그곳에서 조지아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두 청년은 잃었던 제국을 되찾을 야망을 키웠다. 루수단의 언니이자 조지아의 여왕 타마르 1세는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7]
알렉시오스는 마누엘 코메노스의 장남이자 비잔틴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였다. 마누엘은 두 아들, 즉 "카이사르"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남겼다. 그들의 어머니는 조지아 공주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있다.[5] 두 소년은 친척인 타마르 여왕의 궁정에 도착했다. 학자들은 그들이 언제,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시했는데, 팔머여는 소년들이 1185년 할아버지의 몰락의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데려와졌다고 보았고, 조지 핀레이는 소년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렀지만 안드로니코스의 후계자였던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로부터 안전했다고 주장했다.[6]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 때, 형제가 단순히 트레비존드의 총독이 되었고, 알렉시오스가 그곳에서 황제를 자처했다는 가설도 있었으나, 바실리예프는 팔머여의 가설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7] 미하일 파나레토스에 따르면 타마르 여왕은 알렉시오스의 "부계 친척" (προς πατρός θεìα)인데, 이 문구는 학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여러 학자들이 이 관계에 대해 다양한 이론을 제시했다.[7][8][9]
이러한 정보 부족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제가 타마르의 궁정에서 피난처를 찾았다는 데 동의한다. 바실리예프는 그들이 "언어와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상에서도 철저히 조지아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10] 쿠르샨스키스는 트라페준드 제국의 행정 및 문화에서 조지아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11]
조지아에서 행군한 후, 외가 친척인 타마르 여왕의 도움을 받아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1204년 4월에 트라페준트를 점령했다.[12] 같은 달 알렉시오스는 22세의 나이로 황제로 선포되었고, 이는 후대 작가들에 의해 트라페준타 제국이 세워진 순간으로 여겨졌다.[13] 세르게이 카르포프는 알렉시오스의 납으로 된 인장을 통해 트라페준타 점령 날짜를 추정했는데, 인장에는 성 조지가 승리한 왕자를 트라페준타로 초대하고 그의 왼손으로 도시의 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성 조지의 기념일이 4월 23일이고 1204년 부활절이 4월 25일이었기 때문에, 카르포프는 이 인장이 트라페준타 점령 날짜를 가리킨다고 추정했다.[15]
바실리예프는 타마르가 혈연 이상의 이유로 어린 친척들을 도왔다고 의심했다. 그는 타마르가 알렉시오스 3세에게 모욕을 당했고, 조카들이 비잔틴 영토를 침략하도록 지원하여 그 모욕에 복수하기로 결정했다고 보았다.[14] 쿠르샨스키스는 형제들이 비잔틴 영토로 돌아온 더 분명한 동기는 반란을 일으켜 황좌를 코메노스 왕조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고 제시했다.[17]
그 다음 달 동안 다비드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폰토스와 파플라고니아의 나머지를 장악했다. 앤서니 브라이어는 조지아 왕실 연대기의 침략 기록을 두 경로로 나누었다. 다비드는 해안을 따라 함대를 이끌고 케라수스, 치데, 아마스라 및 헤라클레아 폰티카를 점령했고, 알렉시오스는 림니아, 삼순 및 시노페를 점령했다.[18] 삼순은 셀주크 룸 술탄국의 흑해로 가는 관문이었고, 알렉시오스의 점령은 술탄국의 무역과 확장의 기회를 차단했다.[19] 파플라고니아는 코메노스 가문에게 중요한 지원 기지를 제공했는데, 카스타모네는 코메노이의 조상 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20]
다비드가 파플라고니아에 있는 동안, 알렉시오스는 트라페준타 인근에 남아 동부 영토를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야 했다. 이러한 공격은 1205~06년의 트라페준타 첫 번째 포위전으로 절정에 달했다.[22]
2. 1. 가계와 망명
알렉시오스는 콤네노스 황조의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이자 마누엘 코메노스의 장남이었다. 안드로니코스 1세는 1185년 친척인 이사키오스 2세에게 제위를 빼앗기고 살해당했으며, 그의 아들 마누엘은 눈이 멀게 되었고 이 훼손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4]마누엘은 두 아들, "카이사르"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남겼다. 이들의 어머니는 조지아의 왕녀 루수단으로 추정되나[5], 확실하지 않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어머니와 함께 흑해 동안으로 도망쳐 조지아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들은 타마르 1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트라페주스, 카스타모니를 포함한 파플라고니아와 폰토스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알렉시오스와 타마르 여왕의 관계는 명확하지 않다. 미하일 파나레토스는 타마르가 알렉시오스의 "부계 친척"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 여러 해석을 낳았다. 1854년 러시아 학자 쿠니크는 알렉시오스의 어머니가 타마르의 여동생 루수단이라고 제안했고, 알렉산더 바실리예프는 이 이론을 지지했다.[7] 시릴 투마노프는 안드로니코스가 조지아 망명 시절 조지 3세의 이름 없는 여동생과 결혼했다고 주장했다.[8]
1185년 안드로니코스 1세의 몰락 이후 1204년 알렉시오스가 트레비존드에 도착하기까지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학자들은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제가 타마르의 궁정에서 피난처를 찾았다는 데 동의하며, 조지아어를 모국어처럼 사용하며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한다.[10]
2. 2. 조지아의 지원과 트라페주스 점령
콤네노스 왕조의 안드로니코스 1세는 실정으로 신민들에게 인심을 잃고, 결국 친척인 이사키오스 2세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안드로니코스 1세와 그의 아들 마누엘은 살해당했다.[4] 마누엘의 부인이었던 조지아의 왕녀 루수단은 두 아들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데리고 흑해 동안으로 이사키오스의 추격을 피해 도망쳤다. 그곳에서 조지아 왕실의 도움을 받으며 두 청년은 잃었던 제국을 되찾을 야망을 키웠다. 루수단의 언니이자 조지아의 여왕 타마르 1세는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7]알렉시오스는 마누엘 코메노스의 장남이자 비잔틴 제국 황제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였다. 마누엘은 두 아들, 즉 "카이사르"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를 남겼다. 그들의 어머니는 조지아 공주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있다.[5] 두 소년은 친척인 타마르 여왕의 궁정에 도착했다. 학자들은 그들이 언제, 어떻게 그곳에 갔는지에 대해 여러 가설을 제시했는데, 팔머여는 소년들이 1185년 할아버지의 몰락의 혼란 속에서 콘스탄티노플에서 데려와졌다고 보았고, 조지 핀레이는 소년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머물렀지만 안드로니코스의 후계자였던 황제 이삭 2세 앙겔로스로부터 안전했다고 주장했다.[6]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을 때, 형제가 단순히 트레비존드의 총독이 되었고, 알렉시오스가 그곳에서 황제를 자처했다는 가설도 있었으나, 바실리예프는 팔머여의 가설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7] 미하일 파나레토스에 따르면 타마르 여왕은 알렉시오스의 "부계 친척" (προς πατρός θεìα)인데, 이 문구는 학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여러 학자들이 이 관계에 대해 다양한 이론을 제시했다.[7][8][9]
이러한 정보 부족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알렉시오스와 그의 형제가 타마르의 궁정에서 피난처를 찾았다는 데 동의한다. 바실리예프는 그들이 "언어와 교육뿐만 아니라 정치적 이상에서도 철저히 조지아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10] 쿠르샨스키스는 트라페준드 제국의 행정 및 문화에서 조지아의 영향이 거의 나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11]
조지아에서 행군한 후, 외가 친척인 타마르 여왕의 도움을 받아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1204년 4월에 트라페준트를 점령했다.[12] 같은 달 알렉시오스는 22세의 나이로 황제로 선포되었고, 이는 후대 작가들에 의해 트라페준타 제국이 세워진 순간으로 여겨졌다.[13] 세르게이 카르포프는 알렉시오스의 납으로 된 인장을 통해 트라페준타 점령 날짜를 추정했는데, 인장에는 성 조지가 승리한 왕자를 트라페준타로 초대하고 그의 왼손으로 도시의 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성 조지의 기념일이 4월 23일이고 1204년 부활절이 4월 25일이었기 때문에, 카르포프는 이 인장이 트라페준타 점령 날짜를 가리킨다고 추정했다.[15]
바실리예프는 타마르가 혈연 이상의 이유로 어린 친척들을 도왔다고 의심했다. 그는 타마르가 알렉시오스 3세에게 모욕을 당했고, 조카들이 비잔틴 영토를 침략하도록 지원하여 그 모욕에 복수하기로 결정했다고 보았다.[14] 쿠르샨스키스는 형제들이 비잔틴 영토로 돌아온 더 분명한 동기는 반란을 일으켜 황좌를 코메노스 왕조에게 돌려주는 것이었다고 제시했다.[17]
그 다음 달 동안 다비드는 서쪽으로 진군하여 폰토스와 파플라고니아의 나머지를 장악했다. 앤서니 브라이어는 조지아 왕실 연대기의 침략 기록을 두 경로로 나누었다. 다비드는 해안을 따라 함대를 이끌고 케라수스, 치데, 아마스라 및 헤라클레아 폰티카를 점령했고, 알렉시오스는 림니아, 삼순 및 시노페를 점령했다.[18] 삼순은 셀주크 룸 술탄국의 흑해로 가는 관문이었고, 알렉시오스의 점령은 술탄국의 무역과 확장의 기회를 차단했다.[19] 파플라고니아는 코메노스 가문에게 중요한 지원 기지를 제공했는데, 카스타모네는 코메노이의 조상 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20]
다비드가 파플라고니아에 있는 동안, 알렉시오스는 트라페준타 인근에 남아 동부 영토를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해야 했다. 이러한 공격은 1205~06년의 트라페준타 첫 번째 포위전으로 절정에 달했다.[22]
3. 트라페주스 제국의 통치자
1204년 4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 알렉시오스 1세는 트레비존드를 점령하고 콤네노스 왕조의 후계 왕조로서 트레비존드 제국을 건국하여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12][13]
즉위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숙모인 조지아의 여왕 타마르의 지원을 받아 서진을 계속하여 파플라고니아/파플라고니아영어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 후에도 흑해 남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순조롭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이를 위험하게 여긴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룸 술탄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룸 술탄국에 대항하기 위해 시노프로 진출했으나, 1214년에 룸 술탄국의 역습을 받아 대패하여 본인도 포로가 되었다.
룸 술탄국에 신종한다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진 후 석방되어 황제로 복위했지만, 트레비존드 제국의 위신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또한 이 패배로 제국은 시노프를 잃고 수도 트레비존드에서 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이리스 강까지 밀려났다.
1222년 2월 1일에 사망했고, 사위인 안드로니코스 1세가 알렉시오스 1세의 아들 요한네스 1세와 마누엘 1세를 제치고 황위에 올랐다.
3. 1. 제국의 확장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동로마 세계 뿐 아니라, 가톨릭 세계, 이슬람 세계에도 하나의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는 제4차 십자군이 세운 라틴 제국의 상황을 지켜보며, 다비드에게 군대를 주어 서쪽으로 진격하게 했다. 니케아 제국과 라틴 제국이 혼란에 빠져있는 틈을 타, 다비드는 군대를 이끌고 헤라클레아를 점령했다. 이렇게 되자, 십자군과 니케아의 잔존 세력의 힘이 자신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트라페주스에서 ''"로마인들의 황제"''를 칭하고 동생인 다비드 콤네노스는 ''"폰토스와 파플라고니아의 주인"''이라고 자칭하였다. 또한 자신들의 성을 ''콤네노스''에서 ''메가스 콤네노스'', 즉 ''대 콤네노스''라고 바꾸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트라페주스에서 동쪽으로 좀 더 뻗어나가 오랜 동맹자인 조지아 왕국과 국경을 맞대었다. 그리고 동로마 제국에 충성을 바쳐오다 제국이 니케아로 쫓겨난 후 혼란에 빠져있던 동로마령 크림반도(카파 제외, 카파는 베네치아령에 귀속)를 자국령으로 편입하여 흑해의 남북 양안에 영토를 갖게 되었다. 트라페주스인들은 이 영토를 ''"페라테이아"'', 즉 ''바다 저편의 땅''이라고 불렀다.1204년 4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 알렉시오스 1세는 트레비존드를 점령하고 콤네노스 왕조의 후계 왕조로서 트레비존드 제국을 건국하여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12][13]
즉위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숙모인 조지아의 여왕 타마르의 지원을 받아 서진을 계속하여 파플라고니아영어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 후에도 흑해 남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순조롭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이를 위험하게 여긴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룸 술탄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3. 2. 니케아 제국과의 갈등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기 직전, 알렉시오스 1세는 트레비존드를 점령하고 콤네노스 왕조의 후계 왕조로서 트레비존드 제국을 건국했다. 이후 조지아의 여왕 타마르의 지원을 받아 서진하여 파플라고니아영어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그러나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는 트라페준타 제국의 성장을 경계했다. 1205년, 테오도로스에게 충성하던 니코메데이아를 공격한 트라페준스 제국군은 니케아 제국군에게 대패하였고, 다비드 콤네노스는 헤라클레아 폰티카(Heraclea Pontica)를 제국의 서쪽 국경으로 인정해야 했다. 다비드는 라틴 제국과 동맹을 맺고 테오도로스를 공격하려 했으나, 라틴 제국은 불가리아의 공격을 받아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1208년 테오도로스는 다비드가 소유한 파플라고니아를 공격, 상가리우스 강(Sangarios River)을 건너 헤라클레아 폰티카를 포위했다. 다비드는 플랑드르의 앙리(Henry of Flanders)에게 사절단을 보내 도움을 요청했고, 앙리는 군대를 이끌고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를 건너 니코메디아(Nicomedia)를 점령, 테오도로스의 후방을 위협하여 그를 퇴각시켰다. 그러나 테오도로스는 퇴각 중 홍수로 인해 약 1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도 테오도로스는 파플라고니아 점령을 포기하지 않았다. 메안더 강 안티오키아 전투(Battle of Antioch on the Meander)에서 셀주크가 패배한 후, 그는 새로운 셀주크 술탄 카이카우스 1세(Kaykaus I)와 조약을 맺고 함께 트라페준타 영토를 침범했다. 니케타스 코니아테스(Niketas Choniates)에 따르면, 테오도로스는 저항없이 헤라클레아 폰티카와 아마스트리스(Amastris)를 점령했다.
한편, 다비드 콤네노스는 아토스 산(Mount Athos) 바토페디 수도원(Vatopedi monastery)에서 수도사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가 어떤 이유로 수도사가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일설에는 다비드가 라틴 제국의 봉신이 된 것이 알렉시오스에게 불명예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알렉시오스 1세는 룸 셀주크의 술탄 카이카우스 1세의 형제 카이쿠바드 1세(Kayqubad I)를 지원하기도 했는데, 이는 카이카우스에게 테오도로스와 동맹을 맺을 이유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카이카우스는 흑해의 중요 항구인 시노페 포위(Siege of Sinope)를 점령하고자 했고, 1214년 시노페를 공격하던 중 알렉시오스 1세를 사로잡았다. 알렉시오스는 도시 수비대 앞에서 고문을 당했고, 결국 주민들은 항복했다. 알렉시오스는 술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한 후 풀려났다.
3. 3. 룸 술탄국과의 전쟁과 패배
1204년 4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 알렉시오스 1세는 트레비존드를 점령하고 콤네노스 왕조의 후계 왕조로서 트레비존드 제국을 건국하여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즉위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숙모인 조지아의 여왕 타마르의 지원을 받아 서진을 계속하여 파플라고니아/파플라고니아영어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니코메데이아를 공격하여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에게 충성을 바치던 니케아 제국군에게 대패하였으며, 다비드 콤네노스는 헤라클레아가 제국의 서쪽 국경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흑해 남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등 순조롭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지만, 이를 위험하게 여긴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와 룸 술탄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1206년 3월 또는 4월에 테오도로스 1세는 황제로 즉위했고, 플랑드르의 앙리가 아나톨리아로 확장하려는 시도를 좌절시켰다.[26] 1208년 테오도로스는 알렉시오스의 형제 다비드가 소유한 파플라고니아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상가리우스 강을 건너 헤라클레아 폰티카를 포위했다. 다비드는 플랑드르의 앙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앙리는 군대를 이끌고 마르마라 해를 건너 니코메디아를 점령하여 라스카리스의 후방을 위협했고, 라스카리스는 포위를 풀고 자신의 영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의 철수는 대가가 컸는데, 홍수 상태였던 상가리우스 강을 건너면서 약 1000명의 병사를 잃었다.[27]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파플라고니아에 대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메안더 강 안티오키아 전투에서 셀주크가 패배한 후, 그는 새로운 셀주크 술탄 카이카우스 1세와 조약을 맺었고, 함께 트라페준타 영토를 침범했다.[28] 니케타스 코니아테스의 찬사에 따르면, 테오도르의 침략에 저항하는 사람은 없었고, 테오도르는 결국 헤라클레아 폰티카와 아마스트리스를 점령했다.[29]
알렉시오스 1세는 룸 술탄국에 대항하기 위해 시노프로 진출했으나, 1214년에 룸 술탄국의 역습을 받아 대패하여 본인도 포로가 되었다. 알렉시오스는 시노프를 포위하는 동안 작은 전투에서 붙잡혔다. 이븐 비비에 따르면 그는 500명의 기병 호위를 받으며 도시 밖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33]
룸 술탄국에 신종한다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진 후 석방되어 황제로 복위했지만, 트레비존드 제국의 위신은 이미 땅에 떨어졌다. 또한 이 패배로 제국은 시노프를 잃고 수도 트레비존드에서 서쪽으로 250km 떨어진 이리스 강까지 밀려났다.
3. 4. 말년과 죽음
룸 술탄국의 술탄 케이카워스 1세는 알렉시오스 1세에게 석방과 시노페 동쪽의 트라페준타 제국령을 공격하지 않는 조건으로 공물, 병력 차출, 신종의 예를 요구했고, 알렉시오스 1세는 이를 수용했다. 케이카워스 1세는 흑해 방면 항구 영유를 자축하며 자신의 업적을 아랍어와 그리스어 문자로 새겼다. 그는 아탈레이아를 점령하여 지중해 방면 항구도 확보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이후 트라페준타에 머물며 내정에 전념한 것으로 보이며, 크림반도와 트라페준타 본토만이 그가 죽을 때 트라페준타 제국의 영토로 남았다.1222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한 알렉시오스 1세는 아들들 대신 사위인 안드로니코스 기도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12] 시노페를 잃으면서 트라페준타 제국의 서쪽 경계는 이리스 강과 테르모돈 강으로 밀려났고, 니케아 제국 및 다른 그리스 지역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끊어졌다.[37] 나머지 비잔틴 세계와 단절된 트라페준타 통치자들은 이후 아시아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38]
알렉시오스 1세의 남은 생애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진 바가 없다. 바실리예프는 알렉시오스가 조지아의 조지 4세 라샤에게 조공을 바친 인물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39] 쿠르샨스키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으며 알렉시오스가 트라페준타에서 멀리 여행했을 리 없다고 주장한다.[40]
4. 유산
4.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5. 가족 관계
알렉시오스는 생애 어느 시점에서 결혼했지만, 동시대 작가들은 그의 아내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기록하지 않았다. 테오도라 악수키나(Theodora Axuchina)가 그녀의 이름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데틀레프 슈베니케(Detlev Schwennicke)의 《유럽 가계도: 유럽 국가의 역사에 대한 가계도(Europäische Stammtafeln: Stammtafeln zur Geschichte der Europäischen Staaten)》(1978)에 등장한다. 이후 여러 현대 가계도에도 포함되었다.
미셸 쿠르상키스(Michel Kuršankis)는 요안니스 1세 악수코스(John I Axouchos)의 성과 알렉시오스 1세의 알려진 정치적 연관성을 근거로, 알렉시오스가 아마도 1201년경에 뚱보 요한 콤네노스(1200년 사망)의 딸과 결혼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요한 콤네노스는 전(前) 프로토스트라토르 알렉시오스 악수흐(Alexios Axouch)의 아들이었다.[41] 알렉시오스는 두 아들, 즉 훗날 황제가 된 요한 1세와 마누엘 1세를 두었다. 또한 안드로니코스 기두스(Andronikos Gidos)와 결혼한 딸이 있었다. 러시아 비잔틴 연구학자 루스탐 슈쿠로프(Rustam Shukurov)는 알렉시오스에게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아들이 있었으며, 마누엘이 황제가 되었을 때 삭발당하고 수도원에 감금된 이오안니키오스가 그 중 한 명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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