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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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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료(馬寮)는 일본 율령제에 따라 설치된 관청으로, 말의 사육과 관리를 담당했다. 나라 시대에는 좌마료와 우마료로 시작하여, 마료감, 주마료 등으로 변화했다. 헤이안 시대에는 좌마료와 우마료로 개칭되었으며, 무사들이 선호하는 관직 중 하나가 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이후 무로마치 시대에는 쇼군과 관련된 인물들이 주로 임명되었고,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쇼군이 우마료어감을 겸임했다. 주요 관직으로는 어감, 두, 조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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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료
개요
일본어 명칭馬寮 (めりょう, 메료우)
다른 일본어 명칭典厩 (てんきゅう, 텐큐우)
일본어 음독馬寮 (うまのつかさ, 우마노츠카사)
설명일본의 율령제 하에 있던 기관으로, 병부성에 속하여 말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음. 좌마료(左馬寮)와 우마료(右馬寮)로 나뉘어 있었음.

2. 연혁

다이호 율령에 따라 좌마료(左馬寮)와 우마료(右馬寮)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두(頭, 좌마두・우마두)가 장(長)이었지만, 711년 황족인 가쓰라기 왕(후의 다치바나노 모로에)이 령외관인 '''마료감'''(めりょうげん)에 임명되어 좌우 마료를 통괄했다. 마료감은 비상설이었으며 나중에 좌우 각각에 설치되었다.[1]

765년 근위부 설치와 동시에 궁중의 마굿간을 다루는 '''내구료'''(ないきゅうりょう)가 분리되었고, 남은 좌우의 마료도 781년에 '''주마료'''(しゅめりょう)로 통합되었다.[1]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무사들이 마료 직을 동경하여 지원자가 쇄도했고, 1148년에는 대윤·소윤의 정원이 늘어났지만,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그 수배의 인원이 임명되었다고 한다(『관직비초』).[1]

가마쿠라 시대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사마료(左馬寮) 어감에 서임되었다.[1] 싯켄과 렌쇼의 대부분은 두(頭), 곤노카미(権頭), 조(助)에 임명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우마료고칸(右馬寮御監)에 서임된 이후 여러 아시카가 쇼군들이 우마료고칸에 임명되었다. 사마노카미(左馬頭)는 쇼군가나 가마쿠라 구보, 고가 구보의 당주·자제가 취임하는 관직으로 여겨졌다. 센고쿠 시대에는 모리 모토나리모리 데루모토도 우마노카미에 서임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좌마료어감에,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우마료어감에 서임되었고, 이후 우마료어감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까지 도쿠가와 쇼군이 겸임하는 관직이 되었다. 아시카가 씨의 후예인 기레가와 씨는 좌마두를 가칭하는 것을 묵인받았다.

2. 1. 나라 시대

다이호 율령에 따라 좌마료(左馬寮)와 우마료(右馬寮)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두(頭, 좌마두・우마두)가 장(長)이었지만, 711년에 말의 군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종5위하이면서 황족인 가쓰라기 왕(후의 다치바나노 모로에)이 령외관인 '''마료감'''(めりょうげん)에 임명되어 좌우 마료를 통괄했다. 마료감은 비상설이었으며 나중에 좌우 각각에 설치되었다.[1]

765년 근위부 설치와 동시에 궁중의 마굿간을 다루는 '''내구료'''(ないきゅうりょう)가 분리되어 기본적으로 근위부의 관인이 이를 겸임했으며, 남은 좌우의 마료도 781년에 '''주마료'''(しゅめりょう)로 통합되어 장인 '''주마두'''(しゅめのかみ)에는 종4위하인 이세 노오이나리가 임명되었다.[1]

2. 2.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후기 이후에는 실질적인 최고직인 좌우마두에 가와치 겐지, 이세 헤이시 등 유명한 무사들이 잇달아 임명되었기 때문에 마료 직은 무사들이 동경하는 관직 중 하나가 되었다. 지하의 무사라도 대윤·소윤이면 성공으로 획득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지원자가 쇄도하여 큐안 4년(1148년)에 대윤·소윤의 정원은 총 20명으로 늘어났지만,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그 수배의 인원이 임명되었다고 한다(『관직비초』).[1]

2. 3. 가마쿠라 시대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는 사마료(左馬寮) 어감에 서임되었다.[1]

싯켄과 렌쇼의 대부분은 두(頭), 곤노카미(権頭), 조(助)에 임명되었다.

2. 4. 무로마치 시대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우마료고칸(右馬寮御監)에 서임되었다. 이후 아시카가 쇼군가에서는 아시카가 요시모치, 아시카가 요시노리, 아시카가 요시마사, 아시카가 요시히사 등이 우마료고칸에 임명되었다.

사마노카미(左馬頭)는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임관된 것을 시작으로, 쇼군가나 가마쿠라 구보, 고가 구보의 당주·자제가 취임하는 관직으로 여겨졌다. 무로마치 쇼군이나 가마쿠라 구보, 고가 구보 외에는 아시카가 요시쓰구, 아시카가 요시미[1], 아시카가 요시쓰나가 취임했다. 아시카가 요시테루가 살해된 에이로쿠의 변 이후에는, 후계자로 지목된 동생 아시카가 요시아키와 사촌 아시카가 요시히데를 조정에서 모두 사마노카미에 연이어 임명하여 사태를 주시하기도 했다.

사타케 씨, 이와마쓰 씨, 아와 사토미 씨 등 간토 지방에는 사마노카미를 자칭하는 일족이 있었다.

호소카와 덴큐가가 대대로 우마노카미·우마노스케에 서임된 것 외에, 센고쿠 시대에는 모리 모토나리모리 데루모토도 우마노카미에 서임되었다.

2. 5. 에도 시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좌마료어감에, 도쿠가와 이에미쓰는 우마료어감에 서임되었다. 이후 우마료어감은 도쿠가와 요시노부까지 도쿠가와 쇼군이 겸임하는 관직이 되었다.

도쿠가와 쓰나시게는 좌마두에,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우마두에 서임되었다.

아시카가 씨(가마쿠라 공방·고가 공방)의 후예인 기레가와 씨는 좌마두를 가칭하는 것을 묵인받았으며, 역대 여러 명이 칭했다.

3. 역직

제국에서 목(어목, 관목)을 통해 공납받아 조정이 보유한 의 사육과 조교를 담당하는 관직이다.[1] 제국에서 모인 말은 마료 직할의 마굿간이나 목(료목, 근도목)에서 사육하거나, 기내 및 주변 제국에 사육을 명했다. 또한, 후에는 칙지목의 경영도 감독했다. 그리고 군사나 의식에 필요할 때 말을 내어주어 필요한 부서에 공급했다.

마료의 관인은 무관으로 간주되어 대검 패용이 허가되었다. 후에는 검비위사를 보조하여 도읍의 치안 유지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후에 두(頭) 이하의 관직에 무사가 임관되는 것도 이러한 경찰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반부로서 실제로 말의 사육을 담당하는 마부(메부)가 있으며, 사육을 담당하는 사호(시코)를 산하에 두고 이를 통솔했다.

마료의 관직은 다음과 같다.

관직직위인원비고
어감종3위 상당, 령외관좌우 각 1명좌마료어감은 좌근위대장, 우마료어감은 우근위대장 겸임
종5위 상당좌우 각 1명
정6위 상당좌우 각 1명
대윤정7위 상당좌우 각 1명
소윤종7위 상당좌우 각 1명
대속종8위 상당좌우 각 1명
소속종8위 상당좌우 각 1명
마의종8위 상당좌우 각 2명
사생좌우 각 2명 (후에 4명)
마부좌우 각 60명
사부좌우 각 20명
직정좌우 각 2명
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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