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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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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는 무로마치 막부의 4대 쇼군으로,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아들이자 후지와라 게이코의 아들이다. 1394년, 9세의 나이로 쇼군직을 물려받았으나, 아버지 요시미쓰가 태정대신으로 실권을 장악하고 있어 초기에는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지 못했다. 요시미쓰 사후 가독을 상속받아 정치를 시작했으며, 명과의 교류를 단절하고,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와의 대립, 우에스기 젠슈의 난 등을 겪었다. 1423년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즈에게 쇼군직을 물려주고 출가한 후 도센이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142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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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요시모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시카가 요시모치
아시카가 요시모치 초상 (신고지 소장)
이름아시카가 요시모치 (足利 義持)
로마자 표기Ashikaga Yoshimochi
시대무로마치 시대 전기 - 중기
출생겐추 3년/시토쿠 3년 2월 12일 (西暦 1386년 3월 12일)
사망오에이 35년 1월 18일 (西暦 1428년 2월 3일)
계명쇼조인덴 겐잔 도시 다이젠몬 (勝定院殿顕山道詮大禅門)
묘소쇼코쿠지 쇼조인
관위정오위하
좌근위중장
세이이타이쇼군
종사위하
정사위하
참의
종삼위
권중납언
정삼위
종이위
권대납언
정이위
종일위
우근위대장
내대신
순화장학원
양원별당
태정대신
가문
씨족아시카가 씨 (아시카가 쇼군 가문)
부모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쓰
어머니: 후지와라 노 요시코 (아키 호간의 딸)
형제자매존만
호도 와카기미
아시카가 요시모치
요시쓰구
요시노리
다이가쿠지 요시아키 외
배우자히노 에이시 (히노 스케야스의 딸)
자녀요시카즈
정치 경력
막부무로마치 막부 제4대 세이이타이쇼군 (재임: 오에이 원년 (1394년) - 오에이 30년 (1423년))
쇼군 임기 시작1394년
쇼군 임기 종료1423년
이전 쇼군아시카가 요시미쓰
다음 쇼군아시카가 요시카즈
기타
아시카가 요시모치 서명

2. 생애

1394년(오에이 원년)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서 쇼군 직을 물려받았으나, 태정대신이었던 요시미쓰가 살아있을 때는 실권이 전혀 없었다. 1408년(오에이 15년) 요시미쓰 사후 쇼군으로 권력을 잡았다.[5]

요시미쓰 사후, 무로마치도노(교토시 가미교구)에 일시 거주했으나, 이듬해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살았던 산조보몬 저택(교토 시 나카교구)으로 이사했다. 요시미쓰가 조성한 기타야마도노는 히노 야스코(日野康子) 사후 로쿠온지(금각)를 제외하고 모두 철거했다. 정치는 간레이였던 시바 요시유키(斯波義将) 등의 보좌를 받으며 수구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요시미쓰가 비호했던 제아미(世阿弥)를 멀리하고, 조정이 요시미쓰에게 추증한 태상천황 칭호도 사양했으며, 1411년(오에이 18년) 조공 형식에 대한 반발이 컸던 명일무역도 중지했다. 한편, 고코마쓰 상황의 인 벳토(院別当)를 담당하고, 닌나지(仁和寺) 몬제키(門跡)에 동생 호손(法尊)을 들이는 등 요시미쓰와는 다른 형태로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1410년(오에이 17년) 고카메야마 천황요시노로 출분했다가 1416년(오에이 23년) 귀경했다. 1414년(오에이 21년) 기타바타케 미쓰마사(北畠満雅)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화해했다. 같은 해 시바 미쓰타네(斯波満種)가 요시모치의 노여움을 사 고야 산(高野山)으로 은퇴했다. 1416년(오에이 23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 일어나자, 이와 관련된 동생 요시쓰구를 쇼코쿠지(相国寺)에 유폐하고 1418년(오에이 25년)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요시모치 측근 도가시 미쓰나리(富樫満成)는 호소카와 미쓰모토(細川満元)와 시바 요시시게(斯波義重)가 요시쓰구에게 가담했다고 고발했으나, 결국 도가시가 추방되어 살해되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1년(1419년) 12월, 요시모치가 조선에 사신을 보내 불경을 구했고, 조선 조정은 《대장경》 한 부를 인쇄해 주고 쓰시마섬(對馬島) 정벌 이유를 설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1423년(오에이 30년)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즈에게 쇼군 직을 물려주고 출가했으나, 요시카즈는 1425년(오에이 32년) 요절했다. 1427년(오에이 34년) 아카마쓰 요시노리(赤松義則) 사후 아카마쓰 가문 상속에 개입하려다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의 반발을 샀고, 결국 미쓰스케에게 동정적인 슈고들의 압력으로 아카마쓰 모치사다(赤松持貞)가 할복했다.

1428년(오에이 35년) 1월, 욕실에서 입은 상처로 인한 감염증으로 중태에 빠졌고, 후계자를 정하라는 신하들의 간청에도 이를 거부하고 평의에 맡겼다. 결국 제비뽑기로 동생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후임 쇼군이 되었다.[12]

2. 1. 출생과 쇼군직 상속 (1386년 ~ 1408년)

아시카가 요시모치 상 (고화류취)


겐추 3년/지토쿠 3년(1386년) 2월 12일,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는 후지와라 게이코이다.

오에이 원년(1394년) 12월 17일, 요시미쓰에게서 쇼군직을 물려받아 9세의 나이로 4대 쇼군에 취임했다.[1] 같은 날, 성인식을 치르고 정오위하 좌근위중장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아시카가 가문의 가독은 여전히 요시미쓰 아래에 있었고, 정치 실권 또한 모두 요시미쓰가 장악하고 있었다.[2]

요시모치는 아버지 요시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요시미쓰 말년의 요시쓰구(義嗣)에 대한 후대도 요시미쓰와 요시모치의 악화된 부자 관계의 한 예로 여겨진다.

1408년(오에이 15년) 요시미쓰가 죽은 뒤에 요시모치는 쇼군으로서의 권력을 장악한다.[5]

2. 2. 요시미쓰 사후와 초기 통치 (1408년 ~ 1416년)

1394년(오에이 원년)에 9살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쓰에게서 쇼군 직을 물려받았으나, 태정대신이었던 요시미쓰가 살아있을 때는 요시모치에게 실권이 전혀 없었다. 막부의 평정(회의)도 요시미쓰가 거주하던 기타야마도노(北山殿)에서 개최되어 요시모치는 참가하지 못했다.[1] 1406년(오에이 13년)에는 측근인 야마시나 형제에 관한 일로 질책받은 기록이 있다.[2]

1408년(오에이 15년) 요시미쓰가 사망하기 직전, 고코마쓰 천황이 기타야마도노를 방문했을 때, 요시미쓰가 총애하던 이복동생 요시쓰구는 천황을 알현했으나, 요시모치는 교토 경비를 맡는 등 아버지에게 편애받지 못하고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2]

아버지이자 관백인 아시카가 요시미쓰


쇼군 취임 후, 요시모치의 관직은 빠르게 상승했다. 1395년(오에이 2년) 6월 3일에는 종4위하, 1396년(오에이 3년) 4월 20일에는 정4위하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9월 12일에는 참의, 1397년(오에이 4년) 1월 5일에는 종3위, 3월 29일에는 권중납언, 1398년(오에이 5년) 1월 5일에는 정3위, 1400년(오에이 7년) 1월 5일에는 종2위, 1401년(오에이 8년) 3월 24일에는 권대납언, 1402년(오에이 9년) 1월 6일에는 정2위, 11월 19일에는 종1위, 1406년(오에이 13년) 8월 17일에는 우대장을 겸임하는 등 빠르게 승진했다. 이러한 빠른 승진은 공무 양면에서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아버지의 강력한 의향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쇼군으로서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은 1400년(오에이 7년) 1월 11일 막부 평정(회의) 때부터였다. 같은 해 12월 19일에는 어판(御判) 의식도 행해졌다. 그러나 평정은 형식적인 것이었고, 실질적인 정무는 요시미쓰의 허락 하에 행해졌다. 1402년(오에이 9년)부터 쇼군으로서 유력 슈고 다이묘의 저택을 방문하고, 사찰에도 참배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다. 1407년(오에이 14년) 7월 24일에는 아들인 요시카즈가 태어났다.

1408년(오에이 15년) 5월, 요시미쓰가 중병에 걸려 5월 6일에 사망했다. 요시미쓰의 사후,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아시카가 쇼군가의 가독(家督) 상속 문제가 발생했다. 요시모치는 아버지 요시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복동생인 요시쓰구가 아버지에게 편애받았다고 여겨진다. 요시미쓰의 편애를 받은 요시쓰구는 이미 가독 상속의 유력 후보로 부상하고 있었고, 세간에서는 요시쓰구가 형인 쇼군 요시모치를 밀어내고 요시미쓰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요시미쓰는 요시쓰구 원복(元服) 이틀 후에 병에 쓰러져 수일 만에 위독해졌기 때문에, 후계자를 유언할 시간이 없었다. 이 때문에 시바 요시마사의 주장에 따라 가독 상속자는 요시모치로 결정되었다.

요시모치 옹립에 공헌한 시바 요시마사(斯波義将)


1408년(오에이 15년) 5월 9일, 조정은 요시미쓰의 생전 지위를 고려하여 그에게 태상법황(太上法皇)(태상천황)의 존호를 주려 했다. 그러나 쇼군 요시모치를 비롯하여 특히 요시미쓰 사후 정권을 잡은 시바 요시마사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거절되었다. 요시모치 정권 초기의 막정(幕政, 막부 정치)은 간레이(管領)직을 맡고 있던 숙로(宿老, 경험 많은 중신) 시바 요시마사의 영향력이 강했다. 요시마사의 아들 요시시게와 손자 요시아쓰도 간레이에 임명되는 등 간레이직도 시바 씨에게 계승되었다.

요시모치는 1408년(오에이 15년) 6월 26일에 기타야마데로 옮겼다. 요시모치가 아버지 요시미쓰를 상징하는 기타야마데에 들어가고, 요시쓰구가 생모인 가스가노쓰보네(春日局)의 사저로 옮긴 것은 요시모치가 요시미쓰의 후계자임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듬해에는 조부인 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라가 살았던 산조보몬데이(교토 시 나카교구)를 재건하고 거처를 옮겼다.

요시모치는 쇼군 교체를 계기로 1408년(오에이 15년) 8월 중순부터 적극적인 소령(所領, 영지) 정책을 추진하여, 사찰 등에 대한 소령 안도(安堵, 영지 소유권 인정)를 실시하고, 사찰령의 부흥에도 힘썼다. 요시모치 자신은 "인정(仁政)"을 의식했고, 사찰 측도 요시모치의 덕정(徳政)을 기대하여 막부에 소령 회복을 호소했다고 한다. 몰수된 소령인 결소(闕所)의 급여에 대해서도 1408년(오에이 15년) 11월에 "제국 결소사(諸國闕所事)"라는 법령을 내어 결소 급여 제도를 정비했다.

1411년(오에이 18년)에는 요시모치가 명(明)과의 외교 관계에서도 전환을 시도하여, 요시미쓰가 명과의 사이에 맺은 책봉 관계를 부정했다. 처음에 요시모치는 요시미쓰의 사망 소식을 명의 영락제에게 보고하고 책봉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승낙했다. 그러나 요시미쓰의 일본 국왕 책봉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무역에는 적극적이었던 시바 요시마사가 1410년(오에이 17년) 5월 7일에 사망했기 때문에, 요시모치는 정책을 바꾸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책봉 관계도 소멸시켰다.

시바 요시마사 사후, 그의 영향에서 벗어난 요시모치는 시바 씨를 막정의 중심에서 제외했다. 간레이였던 요시마사의 손자 시바 요시아쓰는 간레이직을 사임하고, 후임에는 하타케야마 미쓰이에가 취임했다. 또한, 측근으로 도가시 미쓰나리를 등용하고, 요시모치의 정실 우라마쓰(히노) 에이코의 형 시게미쓰와 그의 아들 요시스케를 중용하는 등 정권 내에 심복을 배치했다.

1410년(오에이 17년) 11월에는 남조 마지막 천황이었던 고카메야마 상황요시노로 도망쳤다. 1411년(오에이 18년) 7월에는 히다 국사 아네가코지 스케쓰나가 반란을 일으켜 같은 국의 슈고 사사키 다카미쓰에게 토벌되었다. 1415년(오에이 22년)에는 가와치에서 구스노키 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해 봄에는 기타바타케 미쓰마사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막부와 곧 화해했다. 이러한 봉기는 황위를 둘러싼 구 남조 세력의 반막부 활동으로 여겨진다. 한편, 아네가코지 스케쓰나와 기타바타케 미쓰마사의 반란은 각각 배경에 소령 문제가 있었고, 요시모치 정권과의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도 난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여겨진다. 고카메야마 천황은 막부의 설득도 있어 1416년(오에이 23년) 가을에 귀경했다.

1411년(오에이 18년) 11월 28일에 미치히토 친왕(후의 쇼코 천황)이 원복(元服)했을 때, 요시모치는 원복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친왕에게 가관(加冠, 관을 씌워주는 일)을 맡았다. 1412년(오에이 19년)에는 우곤에다이쇼(右近衛大将)를 사퇴했다. 같은 해 8월 29일에는 미치히토 친왕이 즉위(쇼코 천황)하고, 고코마쓰 상황이 원청(院庁)을 열자, 요시모치는 같은 날 원집사(院執事)에 취임했다. 이듬해 10월 22일에는 쇼가쿠인・준나인 별당이 되고, 다음 날 겐지 쵸자(源氏長者)의 선하(宣下)도 받았다.

1414년(오에이 21년) 6월 8일에는 시바 요시마사의 조카 시바 미쓰타네가 요시모치의 노여움을 사 가가 슈고직(加賀守護職)을 빼앗기고 고야산에 은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가 슈고직은 요시모치의 측근인 도가시 미쓰나리에게 주어졌다.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호소카와 궁내소부(細川宮内少輔)가 도다이지의 소령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요시모치의 명령으로 자살했다.

요시모치는 아버지 요시미쓰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요시미쓰는 요시모치가 9세 때 쇼군직을 양위하였고, 그 후 요시모치가 16세가 되기 전에 권대납언으로 승진시키는 등 요시미쓰의 후원은 상당했다. 한편, 요시모치의 생모인 후지와라 게이코가 사망했을 때, 요시모치는 어머니의 기중(忌中)으로 등지사(等持寺)에 칩거했지만, 요시미쓰는 술을 많이 마시며 슬퍼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고 술자리를 여는 등 정반대의 행동을 보인 것이 다감한 시기에 있던 요시모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요시미쓰 말년의 요시쓰구에 대한 후대도 요시미쓰와 요시모치의 악화된 부자 관계의 한 예로 여겨진다. 실제로 요시쓰구가 요시미쓰의 계승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당시부터 있었다. 그러나 요시미쓰가 요시모치를 제치고 요시쓰구를 후계자로 삼으려고 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문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 요시미쓰 사후 요시쓰구는 형 요시모치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고, 요시모치도 요시쓰구의 관직 승진과 생활에 신경을 썼다.

1408년, 요시모치는 쇼군으로서의 권력을 장악한다.[5] 다음 해에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간토 구보(関東公方)가 된다.[5] 1411년, 요시모치는 명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6] 고코마쓰 천황1413년에 퇴위하고, 쇼코 천황이 협정을 거부하고 즉위한다. 이로 인해 쇼군 정권과 남조 지지자들 사이의 적대감이 다시 고조되었다.[5]

2. 3. 우에스기 젠슈의 난과 요시쓰구 살해 (1416년 ~ 1418년)

이복동생 아시카가 요시쓰구(足利義嗣)


1416년(오에이 23년) 10월, 간토 지방에서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 일어났다.[5] 초기에는 막부가 정확한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지만, 10월 28일 모치우지가 스루가국(駿河国)으로 낙향하고 막부군에 구원을 요청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10월 29일, 요시모치는 제후들을 소집하여 평정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요시모치의 삼촌인 아시카가 미쓰아키(足利満詮)가 모치우지 구원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요시모치와 제후들도 이에 동의하여 요시모치는 스루가 슈고 이마가와 노리마사(今川範政)와 에치고국(越後国) 슈고 우에스기 후사카타(上杉房方)에게 모치우지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

모치우지 지원이 결정된 다음 날인 10월 30일, 요시쓰구가 교토에서 도주하여 야마시로국(山城国) 고쇼(高雄)로 도망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시모치는 11월 2일 요시쓰구에게 간레이 호소카와 미쓰모토(細川満元)와 신하 도가시 미쓰나리(富樫満成)를 사자로 파견하여 귀환을 촉구했다. 이후 요시모치는 요시쓰구를 닌나지(仁和寺) 고토쿠안(興徳庵)으로 옮겼고, 요시쓰구의 측근인 야마시나 노리타카(山科教高)와 야마시나 쓰네노리(山科嗣教)는 도가시 미쓰나리와 도가시 미쓰하루(富樫満春)에게 맡겨졌다. 나아가 요시쓰구는 11월 9일에 쇼코쿠지(相国寺) 다추 린코인(塔頭林光院)으로 옮겨졌고, 노리타카 등 측근 4명은 가가국(加賀国)으로 유배되었다. 요시쓰구의 이러한 행동은 간토의 젠슈와 손을 잡고 반역을 꾀한 것이라는 소문이 당시 기록에 남아있다. 유력 다이묘 중에서도 요시쓰구와 공모한 인물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기 때문에, 막부 내에서도 요시쓰구의 처우를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6]

우에스기 젠슈의 난은 1417년(오에이 24년)에 막부의 지원을 받은 모치우지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진압 후, 이듬해에는 이 여파로 도키 모치요리(土岐持頼)가 요시쓰구를 도왔다는 이유로 영지 몇 곳이 몰수되었고, 중신 하타케야마 미쓰요시(畠山満慶)에게도 그 혐의가 씌워졌으며, 야마나 씨(山名氏)도 출사 정지를 당하는 등의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주모자로 여겨진 요시쓰구는 1418년(오에이 25년) 1월 24일, 요시모치의 밀명을 받은 도가시 미쓰나리에게 살해당했다. 요시쓰구 살해는 요시모치와 측근 도가시 미쓰나리가 주도하여 행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때문에 도가시 미쓰나리의 권세가 높아지고 제후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미쓰나리는 1418년(오에이 25년) 11월 24일, 요시쓰구의 애첩인 하야시 우타쿠(林歌局)와 간통한 사실 등이 폭로되어 실각했다. 미쓰나리는 고야산(高野山)으로 도망쳤지만, 후에 살해당했다.[6]

2. 4. 가마쿠라부와의 대립 (1418년 ~ 1423년)

1416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에서는 협력했던 아시카가 요시모치와 모치우지였으나, 난이 종결된 후부터 대립으로 돌아섰다. 원인은 모치우지의 전후 처리에 있었다. 모치우지는 반란군에 가담했던 여러 다이묘들을 용서하지 않고 철저하게 토벌했다. 젠슈의 사위인 이와마쓰 만준과 다케다 노부미쓰 등은 모치우지의 토벌을 받아 처형되거나 자결로 몰렸다. 그 외에도 모치우지는 관동 각지에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했기 때문에, 관동 각국의 여러 다이묘는 물론, 요시모치와의 사이에도 큰 틈이 생겼다.

노부미쓰의 자결로 가이 슈고직이 공석이 되자, 모치우지는 새로운 슈고로 잇미 아리아나오를 임명했지만, 요시모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노부미쓰의 동생인 다케다 노부모토를 임명했다. 그러나 노부모토의 가이 입국은 잇미 씨의 저항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고, 노부모토가 사망하는 사태까지 발생하여 조카인 다케다 노부시게가 슈고로 임명되었지만 이 또한 입국하지 못하고 교토에 머무르는 상황이 되었다. 히타치에서도 사타케 요시노리(모치우지 측)와 사타케 요시(막부 측)의 슈고직 문제가 발생하여, 요시모치는 요시를 슈고로 임명했지만 모치우지는 이 명령을 무시했고, 더 나아가 우에스기 노리나오에게 명령하여 요시 일족을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모치우지의 전후 처리에 불만을 품은 북관동의 국인, 특히 오구리 만쥬는 반 가마쿠라후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 가마쿠라후 세력의 배후에는 요시모치의 지원이 있었다.

요시모치는 모치우지의 강경하고 가혹한 전후 처리에 격노하여, 오에이 30년 6월에는 막부군을 무사시에 파병할 계획도 있었다고 한다. 모치우지의 전후 처리로 요시모치의 반감을 산 것은 교토 부지슈, 즉 관동은 가마쿠라후의 관할 하에 있지만 막부에 친밀한 야마이리 씨나 다이죠 씨, 마카베 씨 등을 토벌하거나 토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요시모치는 모치우지에게 격노하고 불신을 품고, 여러 다이묘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대립은 오에이 30년 7월에 정점에 달했고, 이마가와 노리마사와 오가사와라 마사야스(시나노 슈고), 무사시의 국인, 그리고 시노가와 칸포의 아시카가 미츠나오와 오슈 탄다이의 오사키 씨에게 요시모치는 모치우지 토벌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요시모치의 강경한 대응에 몰린 모치우지는 오에이 31년 2월에 요시모치에게 기청문을 보내 화목을 청했다. 그러나 화목의 조건을 둘러싸고 양측은 다투었고, 특히 히타치와 가이 슈고직 문제는 불씨가 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양측은 화목했다.

2. 5. 출가와 만년 (1423년 ~ 1428년)

동모제이자 제6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노리


1423년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즈에게 쇼군 직을 물려주고 실권을 쥔 채로 다음 해 6월에 도지인으로 출가하여 사사 참배를 시작했다. 그러나 요시카즈가 1425년 요절하였다.

1427년 11월, 아카마쓰 요시노리 사후 아카마쓰 가문의 상속에 개입하여 근습 아카마쓰 모치사다에게 소령을 주려 했다. 이에 반발한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교토에서 출분하여 하리마국으로 내려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모치사다는 미쓰스케에게 동정적인 슈고들의 압력으로 할복했다. 도가시 미쓰나리와 아카마쓰 모치사다 사건은 쇼군 권위를 높이고자 자신의 친재권을 강화하려던 요시모치가 슈고 다이묘 서류인 측근 층을 강화하고 슈고 다이묘 가문의 약체화를 꾀했으나, 슈고 다이묘의 강한 반발로 측근 대표격인 도가시・아카마쓰가 배제당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1428년 1월, 욕실에서 입은 상처로 인한 감염증으로 중태에 빠졌다. 신하들이 후계자를 정하도록 간청했으나 요시모치는 이를 거부하고 중신들이 평의하여 정하도록 명했다. 평의 결과 요시모치의 네 동생 중 한 사람을 제비뽑기로 정하기로 했고 요시모치도 이를 승인하였다. 요시모치가 후계를 지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만사이는 《만사이준후일기》에서 '요시카즈 사망 후 이와시미즈 하치만 궁에서 제비를 뽑았는데 아들 탄생의 결과가 나왔고, 그 날 아들을 얻는 꿈도 꿨기에 다시 제비를 뽑는 것은 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 요시모치가 말했다고 기록했다. 한편, 마데노코지 도키후사는 《건내기》에서 요시모치가 '내가 말하더라도 중신들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없다'라고 말했다고 적었다. 요시모치는 자신의 사후 제비를 뽑으라고 했으나 막각은 사전에 제비를 뽑고 요시모치 사후에 개봉하기로 하였다.

1월 18일 요시모치는 사망했다. 향년 43세. 요시모치 사후, 제비뽑기로 동생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쇼군이 되었다.[12]

3. 평가

요시모치의 치세는 규슈 지역을 유력 다이묘들이 통치하고, 간토 지방의 가마쿠라 구보가 반독립 상태가 되는 등 불안정한 요소가 있었으나,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시대였다. 요시모치는 아버지 요시미쓰의 정책을 대체로 따랐지만, 유력 슈고들의 견제로 인해 요시미쓰와 같은 강력한 쇼군 권위를 확립하지는 못했다.

선종을 깊이 믿고 중국 선종 문화를 좋아했으며, 은둔적인 선승들을 선호했다. 아버지와 달리 검소함을 추구했지만, 술을 매우 좋아하고 향락적인 면모도 있었다. 의약에 관심이 많아 윤체환을 야마시나 교겐에게 주거나 의사 사카시부츠를 방문하기도 했고, 진외랑을 등용하여 외교를 맡기기도 했다.

요시모치는 온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동생 요시노리 못지않게 성급하고 화병을 잘 내는 면도 있었다. 신앙심이 깊어 많은 사찰을 참배했지만, 정치적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화압은 공가풍 화압만을 사용했다.

요시모치는 선종 문화에 심취한 지식인이었고, 주변에 다이묘와 선승들이 모여 문화 살롱을 형성하여 수묵화 발전에 기여했다. 료세쓰(如拙)의 표염도(瓢鮎圖)는 요시모치의 지도하에 그려진 대표적인 작품이다. 덴가쿠(田楽)를 좋아하여 마스아미(増阿弥)를 후원했고, 사루가쿠노(猿楽能)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세아미(世阿弥)를 냉대하지 않았다. 와카(和歌)와 렌가(連歌)에도 능통하여 조정의 렌가회나 와카회에 자주 참석했다.

『芭蕉夜우도(芭蕉夜雨圖)』. 요시모치와 대면한 조선 사신 양유(梁儒)와 유력 다이묘 산나 시히로, 요시모치와 친분이 있던 선승들의 찬이 적혀 있다.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4. 정책

아시카가 요시모치는 쇼군직 교체를 계기로 적극적인 소령 정책을 추진하여, 사찰 등에 대한 소령 안도(安堵)를 실시하고 사찰령 부흥에도 힘썼다.[2] 요시모치는 스스로 "인정(仁政)"을 의식했고, 사찰 측도 요시모치의 덕정(徳政)을 기대하며 막부에 소령 회복을 호소했다.[3] 몰수된 소령인 결소(闕所) 급여에 대해서도 "제국 결소사(諸國闕所事)"라는 법령을 내려 결소 급여 제도를 정비했다.[4]

1411년에는 명(明)과의 외교 관계에서 전환을 시도하여, 아버지 요시미쓰가 맺은 책봉 관계를 부정했다.[5] 처음에는 요시미쓰의 사망 소식을 명의 영락제(永楽帝)에게 보고하고 책봉 관계에 들어가는 것을 승낙했다.[6] 그러나 요시미쓰의 일본 국왕 책봉에는 비판적이었지만 무역에는 적극적이었던 스파 요시마사(斯波義将)가 1410년에 사망하자, 요시모치는 정책을 바꾸어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책봉 관계도 소멸시켰다.[7] 요시모치는 당시 일본 내에 퍼져있던 신국(神國)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요시미쓰 이래의 명과의 책봉 관계에 대한 일본 신들의 벌을 두려워했다고 한다.[8]

스파 요시마사 사후, 요시모치는 스파씨(斯波氏)를 막정의 중심에서 제외했다.[9] 관령이었던 요시마사의 손자 스파 요시아쓰(斯波義淳)는 관령직을 사임하고, 후임에는 하타케야마 미쓰이에(畠山満家)가 취임했다.[10] 또한, 측근으로 후가시 미쓰나리(富樫満成)를 등용하고, 요시모치의 정실 히노 에이코의 형 시게미쓰(重光)와 그의 아들 요시스케(義資)를 중용하는 등 정권 내에 심복을 배치했다.[11]

1410년에는 남조 마지막 천황이었던 고가메야마 상황(後亀山上皇)이 요시노(吉野)로 도망쳤다.[12] 1411년에는 히다 국사(国司) 아네가코지 스케쓰나(姉小路尹綱)가 반란을 일으켜 슈고 사사키 다카미쓰(佐々木高光)에게 토벌되었다.[13] 1415년에는 카와치에서 쿠스노키 씨(楠木氏)가 반란을 일으켰다.[14] 같은 해 봄에는 키타바타케 미쓰마사(北畠満雅)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막부와 곧 화해했다.[15] 이러한 봉기는 황위를 둘러싼 구 남조 세력의 반막부 활동으로 여겨진다.[16] 아네가코지 스케쓰나와 키타바타케 미쓰마사의 반란은 배경에 소령 문제가 있었고, 요시모치 정권에 악감정을 품고 있었던 것도 난의 주요 원인이었다.[17] 고가메야마 천황은 막부의 설득으로 1416년 가을에 귀경했다.[18]

1412년에는 미치히토 친왕(躬仁親王)(쇼코 천황)의 원복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인 가관(加冠)을 맡았다.[19] 같은 해 우곤에다이쇼(右近衛大将)를 사퇴했는데, 이는 요시모치와 같은 나이에 사퇴한 요시미쓰의 선례를 따른 것이다.[20] 같은 해 미치히토 친왕이 즉위하고, 고코마쓰 상황(後小松上皇)이 원청(院庁)을 열자, 요시모치는 원집사(院執事)에 취임했다.[21] 이듬해 쇼가쿠인(奨学院)・준와인(淳和院) 별당이 되고, 겐지 쵸자(源氏長者)의 선하도 받았다.[22]

1414년에는 스파 요시마사의 조카 스파 미쓰타네(斯波満種)가 요시모치의 불쾌를 사서 가가 슈고직(加賀守護職)을 빼앗기고 고야산(高野山)에 은퇴했다. 가가 슈고직은 요시모치의 측근인 후가시 미쓰나리에게 주어졌다.[23] 같은 해 호소카와 궁내소부(細川宮内少輔)가 도다이지(東大寺) 소령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요시모치의 명령으로 자살했다.

상杉 젠슈의 난 이후 모리우지와 대립하게 되었다. 모리우지는 반란군에 가담했던 다이묘들을 철저하게 토벌했고, 이로 인해 관동 각국의 다이묘들은 물론 요시모치와도 큰 틈이 생겼다. 요시모치는 모리우지의 강경한 전후 처리에 격노하여 1423년에는 막부군을 무사시에 파병할 계획도 있었다. 결국 1423년 모리우지 토벌 명령을 내렸고, 모리우지는 1424년 요시모치에게 기청문을 보내 화목을 청했다. 양측은 화목했지만, 히타치와 가이 슈고직 문제는 불씨로 남았다.

1423년, 요시모치는 아들 요시카즈에게 쇼군직을 넘겨주고 출가하여 도센(道詮)이라는 호를 받았다. 출가 이유는 아버지 요시미쓰처럼 조정이나 막부 체제를 초월한 권력을 행사하고 싶었고, 선(禪)의 오의를 탐구하기 위해서였다고 추측된다. 요시미쓰의 선례를 따른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막부의 실권은 여전히 요시모치에게 있었고, 이후에도 유력한 수호 다이묘, 관령, 측근, 공가 등의 저택에 여러 차례 행차하고, 어대소인 히노 에이코와 요시카즈를 동반하여 사찰 참배도 자주 했다.

1425년, 요시카즈가 세는 19세(만 17세)에 급사하면서 요시모치가 다시 막부를 통괄하게 되었다.

요시모치는 아버지 요시미쓰가 시작한 일명무역과 명과의 책봉 관계에 부정적이었다. 요시마사 사후 명의 사신을 쫓아내고 사실상 책봉 관계를 단절했다. 이 때 명의 영락제는 격노하여 일본 정벌을 계획할 정도였다고 한다. 요시모치는 외국 군주에게 '가신'을 칭하고 일본 국왕 칭호를 받는 것을 신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라 생각했다. 1419년 응에이의 외구를 영락제의 뜻을 받은 조선군의 침략으로 간주하여 명과의 단절을 결심했다고도 한다. 요시모치는 류큐와의 무역으로 일명무역을 대체하고 책봉 관계를 끊으려 했다는 지적도 있다.

조선과는 요시미쓰 사망 직후부터 교류하여 1409년에는 스파 요시마사(斯波義将) 명의의 서장을 보내 우호 관계를 확인했다. 1411년에는 요시모치가 태종에게 코끼리를 보냈다. 요시모치는 대명 통교의 대체 수단으로 조선과의 교역을 중시했고, 실제 교섭에는 오우치, 규슈 단다이 시부카와 미쓰요리(渋川満頼), 봉공중(奉公衆) 고바야카와 노리히라(小早川則平)가 깊이 관여했다. 1419년 왜구 문제로 응에이의 외구가 발생하여 긴장 관계가 생기기도 했다. 같은 해 요시모치는 대장경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쇼후쿠지 선승 무애량예(無涯亮倪)를 정사로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을 살폈다. 이 사절이 귀국할 때 조선의 회례사 송희경(宋希璟)이 일본에 왔다. 요시모치는 1422년에도 조선 국왕에게 서장을 보냈고, 1423년에는 조선 회례사의 귀국에 맞춰 다시 사신을 보내 대장경을 요구했다. 요시모치는 조선에 보내는 서장에 '일본 국왕' 호를 사용하지 않고 책봉 체제에서 이탈했음을 보였다.

류큐와는 자주 교류했고, 특히 1413년대에는 국가적 교섭이 본격화되었다. 요시모치는 류큐 국주로부터 국서와 진상품을 받았다.

요시모치는 조정과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요시모치는 후코마쓰 상황과 연계하여 긴밀한 정치 관계를 쌓았고, 개인적으로도 친밀했다. 1412년 원집사(院執事)에 취임하여 오랫동안 후코마쓰 상황을 보좌했다. 요시모치는 쇼코 천황의 후견인이기도 했으며, 젊은 천황의 권위 향상을 도모했다. 요시모치는 무가는 배후에 머물고 공가 정치 표면에 나서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요시미쓰 사후 태상천황 증호도 거절했다고 생각된다.

조정 의례에도 관심을 가지고 깊이 이해하려 했다. 요시모치의 의례 참가는 현임 섭관에 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1419년에는 중단되었던 조정 의례인 기넨곡봉폐를 재흥했다. 그 외, 궁중 진언원 복흥과 신천원 수리도 실시했다.

요시모치는 1422년에 "고성패조조(御成敗条々)"라는 법령을 반포하여 사찰본소령(寺社本所領)을 중심으로 한 소령 정책과 소송 제도를 정비했다. 그 때까지 막부 소송은 원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절차가 취해졌으나, 요시모치 정권 후기에는 원고와 피고 양측의 증거 문서를 심리하게 되었다. 또한 1423년대가 되면 논인봉행(論人奉行)이라는 직책이 설치되었다. 1413년대 중반까지는 상론(相論) 소장 접수나 무로마치도노 보고 등 소송 진행은 본봉행(本奉行) 한 명이 담당했다. 그러나 논인봉행이 설치되면서 원고는 본봉행, 피고는 논인봉행이 담당하게 되었다.

동국(관동・오슈) 지역에 대해서는 가마쿠라 쇼군 아시카가 모리우지와의 마찰, 우에스기 젠슈의 난 등으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했다. 반면 서국, 즉 규슈 지역에 대한 관심은 낮았다. 이는 당시 규슈에 막정을 흔들 정도의 큰 사건이 없었고, 다이나이 모리미(大内盛見)가 요시모치 정권 수뇌부 일원으로 교토에 머물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요시모치 정권 초기에는 요시미쓰 시대에 비해 불사(佛事)와 기도의 규모가 감소하고 임시 기도를 자주 개최했다. 특히 공무 관계가 밀접해지면서 아시카가 쇼군가뿐 아니라 천황가도 기도 대상에 포함되었고, 요시카즈쇼코 천황의 병약, 응에이의 외구, 아시카가 모리우지와의 대립 등 여러 문제가 터져 요시모치는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임시 기도를 개최했다. 무가 호지 승만으로는 부족해져 많은 고승(高僧)이 동원되었다. 불신사(佛神事)는 요시모치 출가 후 더욱 성행했고, 요시모치 자신도 사찰에 자주 참배했다. 출가 직전인 1423년에는 이시키미즈 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 권속별당직(権俗別当職)이라는 신관에 취임하기도 했다.

요시모치는 선종(禪宗)에 깊이 귀의하여 많은 선승(禪僧)과 교류했다. 당시 오산(五山)의 중심이 된 몽창파(夢窓派) 승려뿐 아니라, 이충통서(惟忠通恕)와 대우성지(大愚性智)와 같은 불원파(佛源派)·성일파(聖一派) 선승도 등용했다. 몽창파 거점이었던 상국사(相國寺) 내에 타파 선승을 초빙하는 등, 몽창파에 대한 견제도 했다.

무장하거나 난폭한 폭력을 되풀이하는 승려는 철저히 단속했다. 상국사에 직접 나서 병기를 몰수하고 무기 소지 승려 수십 명을 체포하여 사무소(侍所)에 맡기고, 행실이 불량한 승려를 체포하기도 했다. 남선사(南禪寺)에서도 무기 소지 혐의로 승려가 체포되는 등 승려의 무장을 엄금했다. 1424년에는 이시키미즈 하치만궁(石清水八幡宮) 신인(神人)과의 다툼으로 낙중(洛中)에서 신인과 막부군이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도 발생했다.

야마토 국의 실질적인 수호였던 흥복사(興福寺)(남도(南都))에 대해서는 1414년에 발생한 야마토 국내 항쟁으로 흥복사 측으로부터 사전 중지와 상론(相論) 재결을 막부에 요구하는 요청이 나와 남도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요시모치는 흥복사 중도(衆徒)와 야마토 국 국민에게 막부 재정에 복종할 것을 명하는 "편목(篇目)"을 내고 기청문(起請文)을 제출하게 했다.

요시모치에 의한 명과의 관계 단절로 막부는 명과의 무역 이익을 재원으로 삼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토장역(土倉役)주가역(酒屋役)과 수호가 출전한 수호역(守護役)이 막부의 주요 재원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 재정사 연구에서는 요시모치 정권기 막부 재정이 도시 교토에 의존하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5. 연표

応永일본어 원년(1394년) 9세의 나이로 요시미쓰에게서 쇼군 직을 물려받았으나, 태정대신이 된 요시미쓰의 생전에는 실권이 전혀 없었다.[1] 1408년(오에이 15년) 요시미쓰가 죽은 뒤에 쇼군직을 계승하고 실권을 장악했다.[2]

1411년(오에이 18년)에 조공 형식에 대하여 반발의 소리가 높았던 명일무역(감합무역)을 중지하였다.[6]

1416년(오에이 23년)에는 간토 지방에서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 일어났다.[6]

1419년 조선에서 이종무 등을 보내 왜구의 본거지로 지목된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하게 했던 세종 1년에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불경을 구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요시모치의 요청에 대해 《대장경》 한 부를 인쇄해 주고, 아울러 지난 해 쓰시마를 정벌한 연유를 설명하였다.

1423년(오에이 30년) 아들 아시카가 요시카즈에게 쇼군 직을 물려주었다.[5] 그러나 요시카즈가 1425년(오에이 32년) 요절하였다.[7] 1428년(오에이 35년) 1월, 욕실에서 입은 상처로 인한 감염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43세. 요시모치 사후, 제비뽑기로 동생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후임 쇼군이 되었다.

요시모치가 쇼군이었던 시기는 연호로는 영에이(1394년–1428년)이다.[9]

일본 연호서력날짜내용나이
겐츄(元中) 3년/시토쿠 3년1386년2월 12일탄생1세
오에이(応永) 원년1394년12월 17일제4대 쇼군이 됨.9세
오에이 15년1408년5월요시미쓰(義満) 사망. 아시카가 쇼군가의 가독을 계승하고 실권을 장악함. 요시미쓰의 존호 등을 거부함.23세
오에이 18년1411년명나라와의 교류가 단절됨.26세
오에이 23년1416년10월우에스기 젠슈(上杉禅秀)의 난이 일어남.31세
오에이 24년1417년1월막부의 지원으로 우에스기 젠슈의 난이 진압됨.32세
오에이 25년1418년1월아우인 아시카가 요시쓰구(足利義嗣)를 살해함.33세
오에이 30년1423년3월 18일요시모치, 적장자인 요시카즈(義量)에게 쇼군직을 양위함. 다음 달에 출가함.38세
오에이 32년1425년2월 27일아시카가 요시카즈 사망. 이후 쇼군 자리는 공석이 됨.40세
오에이 34년1427년11월 13일아카마쓰 모리사다(赤松持貞) 사건이 일어나, 모리사다가 할복함.42세
오에이 35년1428년1월 18일아시카가 요시모치 사망.43세


6. 가계


  • 아버지: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
  • 어머니: 후지와라 요시코(藤原義子)(1358–1399)
  • 정실: 히노 에이코(日野栄子)(1390–1431)
  • 측실:
  • * 도쿠다이지 도시코(徳大寺俊子)
  • * 고효에도노(光嚴殿)
  • 자녀:
  • * 아시카가 요시카즈(足利義詮)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요시미쓰(足利義満)3대 쇼군
형제요시쓰구(義嗣)요시미쓰가 편애함
형제요시아키라(義昭)2대 쇼군
양모히노 야스코(日野康子)요시미쓰 사후 기타야마도노(로쿠온지 제외) 철거
시바 요시유키(斯波義将)간레이, 요시모치 보좌
제아미(世阿弥)요시미쓰가 비호, 요시모치는 멀리함
고카메야마 천황남조 마지막 천황
기타바타케 미쓰마사(北畠満雅)요시모치에게 양통질립 요구하며 반란
시바 미쓰타네(斯波満種)시바 요시유키 조카, 요시모치 노여움으로 고야산 은퇴
우에스기 젠슈의 난(上杉禅秀の乱)간토 지방에서 발생
측근도가시 미쓰나리(富樫満成)호소카와 미쓰모토, 시바 요시시게 고발
호소카와 미쓰모토(細川満元)도가시 미쓰나리에게 고발당함
시바 요시시게(斯波義重)도가시 미쓰나리에게 고발당함
아들아시카가 요시카즈(足利義量)요시모치에게 쇼군직 물려받음, 요절
아카마쓰 요시노리(赤松義則)사망 후 요시모치, 가문 상속 개입
근습아카마쓰 모치사다(赤松持貞)아카마쓰 가문 소령 받으려다 할복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아카마쓰 모치사다에게 소령 주는 것에 반발
만사이(満済)요시모치 후계자 문제 언급
마데노코지 도키후사(万里小路時房)요시모치 후계자 문제 언급
동생아시카가 요시노리요시모치 사후 제비뽑기로 쇼군


7. 요시모치의 헨기를 받은 사람

헨기를 받은 사람
잇시키 요시쓰라
니조 모치모토
니조 모치미치
히노 모치미쓰
아카마쓰 모치사다
아시카가 모치우지
아리마 모치이에
잇시키 모치노부
잇시키 모치
우에스기 모치후사
오우치 모치모리
오우치 모치요
오다치 모치후사
오가사와라 모치나가
교고쿠 모치키요
교고쿠 모치타카
고노 모치미치
시바 모치타네
다테 모치무네
도가시 모치하루
도키 모치마스
도키 모치요리
하타케야마 모치쿠니
하타케야마 모치토미
호소카와 모치카타
호소카와 모치쓰네
호소카와 모치하루
호소카와 모치모토
호소카와 모치유키
야마나 모치토요
야마나 모치히로
롯카쿠 모치쓰나


참조

[1] 서적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Google Books 1834
[2] 서적 Google Books 1834
[3] 서적 Diplomacy and Ideology in Japanese-Korean Relations: from the Fifteenth to the Eighteenth Century Google Books 1997
[4] 서적 Google Books 1834
[5] 서적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1982
[6]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Google Books 1961
[7] 서적 Lessons from History: The Tokushi Yoron 1982
[8] 서적 Google Books 1834
[9] 서적 Google Books 1834
[10]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辞典 三省堂 2009
[11] 웹사이트 ヒ函/68/:足利義持御判御教書|文書詳細|東寺百合文書 https://hyakugo.pref[...] 2024-06-01
[12] 논문 足利将軍家子弟・室町殿猶子寺院入室とその意義-室町殿と寺院・公家社会との関係を探る- 吉川弘文館
[13] 서적 中世花押の謎を解く 足利将軍家とその花押 山川出版社
[14] 웹사이트 ColBase https://colbase.nich[...] 2024-06-04
[15] 서적 絵は語る5 瓢鮎図 ─ひょうたんなまずのイコノロジー 平凡社
[16] 문서 ユリウス暦
[17] 문서 宣明暦長暦
[18] 문서 数え年
[19] 웹사이트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https://kunishitei.b[...] 2024-06-04
[20] 웹사이트 国指定文化財等データベース https://kunishitei.b[...] 2024-06-04
[21] 논문 足利義持筆『布袋図』 西日本文化協会
[22] 서적 日本美術絵画全集 第2巻 集英社
[23] 웹사이트 [ID:141] 寒山図 : 作品情報 収蔵作品データベース 岡山県立美術館 https://jmapps.ne.jp[...] 2024-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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