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카가 다다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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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가마쿠라 시대의 사무라이 가문 출신으로, 겐코 전쟁 이후 고다이고 천황과 동맹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 겐무 신정에서 가마쿠라 부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활약했지만, 나카센다이의 난과 형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으로 교토를 떠나 규슈로 도주했다. 이후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곤 천황을 옹립하고 무로마치 막부를 건국하는 데 힘썼으며, 다카우지와 함께 막부를 이끌었다. 그는 사법 및 행정을 담당하며 이원정치를 펼쳤으나, 고 모로나오와의 대립과 간노의 소란으로 인해 정계에서 물러났고, 결국 가마쿠라에서 유폐된 채 사망했다. 다다요시는 정치, 문화, 종교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선종 불교를 옹호하고 와카에도 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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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카가 다다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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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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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가마쿠라 시대 말기 - 무로마치 시대(난보쿠초 시대) 전기 |
출생 | 1306년 |
사망 | 1352년 3월 12일 |
개명 | (아명 불명) → 다카쿠니 → 다다요시 → 다다요시 → 에겐 (법호) |
별명 | 시타노고쇼, 니시키노코지도노, 산조도노, 다카쿠라도노, 부장군 |
신호 | 오쿠라노미야 |
계명 | 다이휴지 고잔 에겐 |
묘소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조묘지 |
관위 | 종5위하 병부소보, 사마노카미, 정5위하, 사가미노카미, 종4위하, 종4위상 사효에노카미, 종3위, 증 종2위, 증 정1위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 무로마치 막부 |
씨족 | 아시카가 씨 |
가문 | |
가몬 | 인양문 |
가몬 설명 | 인양문(引両紋)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아시카가 사다우지 |
어머니 | 우에스기 기요코 |
형제 | 다카요시, 아시카가 다카우지, 다다요시, 겐린 (다마 고보) |
배우자 및 자녀 | |
정실 | 혼코인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아내) (시부카와 사다요리의 딸) |
자녀 | 아시카가 뇨이마루 (뇨이오), 양자: 아시카가 다다후유 |
2. 생애
아시카가는 가마쿠라 출신의 사무라이 가문으로,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문과 혈연 관계가 있었다. 형인 다카우지와는 달리, 다다요시는 겐코 전쟁 (1331–1333) 전까지 가마쿠라 막부의 정치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겐코 전쟁의 종결 (가마쿠라 공방전 (1333))은 가마쿠라 시대의 종말과 일본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대인 무로마치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2]
형과 마찬가지로 다다요시는 가마쿠라 막부 (사실상 호조 씨가 통치)를 단호하게 버리고, 1333년 겐무 신정 동안 과거에 추방되었던 고다이고 천황과 동맹을 맺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1318년에 즉위하면서 즉시 가마쿠라의 군부 간섭 없이 통치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6] 그러나 사무라이 계급 전체는 권력을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와 아시카가의 동맹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가마쿠라와 나라 동쪽에 그의 통치를 재건하기를 원했지만, 막부가 무너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그곳에 "쇼군"을 파견하는 것은 여전히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6] 절충안으로 그는 여섯 살 된 아들 노리나가 친왕을 무쓰국에 파견하여 무쓰국과 데와국의 지사로 임명했다.[6] 이에 대한 명백한 대응으로, 다다요시는 천황의 명령 없이 또 다른 아들 열한 살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호위하여 그를 고즈케국 지사로 임명하고 자신은 부지사 겸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았다.[6][7] 이러한 중요한 자리에 무사를 임명한 것은 사무라이 계급이 순수한 문관 통치에 준비되지 않았음을 천황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6] 그는 교토의 간섭 없이 통치했고, 그 지역 자체가 사실상 소규모 막부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아시카가 막부의 시작으로 간주될 수 있다.[2]
1335년, 호조 도키유키가 이끈 나카센다이의 난 동안, 다다요시는 도시를 방어할 수 없어 가마쿠라를 급히 떠나야 했다. 고다이고 천황의 또 다른 아들 모리나가 친왕을 데려갈 수 없었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인질로 잡고 있었지만, 그를 풀어주는 대신 참수하기로 결정했다.[8]
1335년 12월, 다다요시는 닛타 요시사다가 지휘하는 황실 군대에 패배하여 하코네 산맥으로 후퇴했다. 그러나 형 다카우지의 도움으로 사노야마 전투와 미시마 전투에서 요시사다를 물리칠 수 있었다. 형제는 그 후 교토로 진격할 수 있었다.[8]
1336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의 연합군에게 패배하여, 형제는 서쪽으로 도망갔다. 이후,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가 기쿠치 씨와 고다이고의 동맹을 격파하는 것을 도왔다. 이 다타라하마 전투 (1336)는 하카타만에서 일어났으며, 승리로 다카우지는 규슈의 지배자가 되었다.[8] 5월까지 다카우지는 함대를 진격시켜 7월에는 현재의 고베 부근에 도착했고, 다다요시는 육군과 함께 병행하여 뒤따랐다.[8]
고다이고 천황에게 등을 돌린 다다요시와 다카우지는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충성파를 물리친 후 1336년에 고곤 천황을 세웠다. 그들의 무로마치 막부는 1338년에 건국되었다.[9] 권력을 분담하여 다카우지는 군사 문제를, 다다요시는 사법 및 행정 문제를 맡았다.
다다요시와 다카우지는 모두 유명한 선승이자 지식인, 정원 설계가인 무소 소세키의 제자였으며, 그의 지도 아래 다다요시는 나중에 불교 승려가 되었다.[2] 소세키의 영향으로 오산 시스템의 선종 사찰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강화되었으며, 먼저 짓세쓰가 설립되고, 나중에는 안코쿠지 사찰 하위 네트워크가 설립되었다. 두 시스템의 창설은 일반적으로 다다요시의 공로로 여겨진다.[2] 소세키는 또한 두 형제에 대해 썼는데, 다카우지는 군사적 활동에 더 적합하고, 다다요시는 정치에 더 적합하다고 묘사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형식적으로 임명된 쇼군이었지만, 10년 이상 동안 그는 (즉, 북조) 통치 능력이 없음을 증명했기 때문에 그의 대신 다다요시가 통치했다.[3] 그러나 두 형제의 관계는 간노의 난으로 파멸될 운명이었다. 이 사건은 발생했던 간노 연호(1350-1351)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이로 인해 전국에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다카우지가 고노 모로나오를 자신의 부 쇼군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타이헤이키에 따르면, 다다요시는 모로나오를 싫어하여 그를 제거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하자 그를 암살하려 했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그의 음모가 발각되어 그는 정부에서 제거되었다. 어쨌든, 1350년 다다요시는 모로나오에 의해 정부에서 물러나 삭발하고 승려의 이름인 게이신을 사용해야 했다.[10]
1351년 다다요시는 반란을 일으켜 형의 적, 즉 당시 황제인 고무라카미가 모든 군대의 장군으로 임명한 남조에 합류했다. 1351년 그는 다카우지를 격파하고 교토를 점령했으며, 가마쿠라에 입성했다. 같은 해 그의 군대는 미카게(셋츠국)에서 모로나오와 그의 형제 고노 모로야스를 죽였다. 이듬해 다다요시는 불운을 겪었고 삿타야마에서 다카우지에게 패배했다.[10] 두 형제의 화해는 잠시 동안 지속되었고, 다다요시는 1352년 다카우지의 두 군대에 포위되어 이즈 반도의 언덕으로 도망갔다. 명목상의 두 번째 화해 직후, 다다요시는 체포되어 가마쿠라 조묘지 절에 감금되었고, 3월 갑자기 사망했다. 타이헤이키에 따르면 독살당했다.[8]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현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유적이 가마쿠라의 조묘지 근처에 있는 불교 사찰에 묻혔다.[11] 조묘지 자체의 기록에 따르면, 이 사찰은 다다요시의 가마쿠라 저택 부지에 다다요시가 직접 건립했다.[12] 승려 기도 슈신의 일기인 따르면, 1372년 다다요시의 사망 당일에 가마쿠라의 구보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다이큐지를 방문했다.[5] 사찰이 사라진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다.[5] 그는 또한 다카우지의 친아들 중 한 명인 아시카가 다다후유를 양자로 삼았다.
다다요시는 아시카가 사다우지의 측실인 우에스기 기요코의 아들로, 호조 씨 출신이 아니다.
출생 연도에 대해서는, 『공경보임』 조와 5년(1349년) 조 등에서 도쿠지 원년(1306년)으로 하는 것이 통설이었다. 그러나 『산보인 겐슌 승정 일기』의 랴쿠오 5년(1342년) 2월 조에 "산조 전(殿) 서른여섯, 축미(丑未)"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에 따르면 도쿠지 2년(1307년)이 되어 통설과는 1년 차이가 난다. 겐슌이라는 다카우지, 나오요시 형제와 가까운 인물에 의한 증언이며, "몬요기 130"[15]이라는 방증도 있다. 2010년대 시점에서 새로운 설인 도쿠지 2년(1307년) 설을 채택하는 연구자가 늘고 있으며, 새로운 설이 유력하다고 여겨진다.
출생 관련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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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경보임』 조와 5년(1349년) 조 | 도쿠지 원년(1306년) 출생 (통설) |
『산보인 겐슌 승정 일기』 랴쿠오 5년(1342년) 2월 조 | 도쿠지 2년(1307년) 출생 (새로운 설, 유력) |
2. 1. 가마쿠라 막부 멸망과 겐무 신정
겐코 3년/쇼쿄 2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섬에서 탈출하여 센조 산에서 거병하자, 형 다카우지와 함께 천황 측에 가담하여 막부의 로쿠하라 단다이 공격에 가세했다.[2] 겐무 신정이 시작되자 겐지 연고의 관직인 사바노카미(左馬頭)에 임명되었고, 새로 가마쿠라 후쇼군(鎌倉府将軍)이 된 나리요시 친왕과 함께 가마쿠라로 가서 가마쿠라 부의 싯켄직을 맡아 훗날의 가마쿠라 부의 초석을 쌓았다.[6][7]겐무 2년(1335년) 옛 가마쿠라 막부 잔당이 다카토키의 어린 아들 도키유키를 앞세워 시나노에서 거병, 간토(関東)로 진격해 오면서 나카센다이의 난이 발발했다. 다다요시는 무사시국 이데노사와(井出の沢)[32]에서 반란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하고 가마쿠라로 쫓겨왔다. 반란군이 가마쿠라로 밀려오자 앞서 유폐되었던 모리요시 친왕을 부하 후치베 요시히로(淵辺義博)를 시켜서 혼란 와중에 살해하고, 미카와국 야하기(矢作)[33][34][35][36]로 달아났다. 그러나 가마쿠라 후쇼군 나리요시 친왕을 무사히 교토까지 돌려보냈으며, 모리요시 친왕 암살도 겐무 정권의 입장을 세우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지적이 있다.[37]
그 해에 형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잔당들의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천황의 명령도 없이 무단으로 원군을 일으켜 오자 형에게 합류, 반란군으로부터 가마쿠라를 탈환했다. 가마쿠라를 탈환한 뒤에도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자신을 따랐던 장사들에게 독자적으로 논공행상을 집행했는데, 이는 다다요시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반발한 고다이고 천황의 조정은 다카우지 추토령을 내리고 닛타 요시사다를 총대장으로 하는 다카우지 추토군을 파견했다. 궁지에 몰린 다카우지는 자신에 대한 사면을 주청하며 칩거에 들어갔고, 다다요시를 위시한 군사들이 요시사다에 맞서 스루가국 다고시가와라(手越河原)[38]에서 맞아 싸웠지만 패배, 이에 위기감을 느낀 다카우지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해 토벌군을 하코네(箱根) ・ 다케노시타(竹ノ下)에서 격파하고 그대로 교토로 쳐들어 갔다. 하지만 엔겐 원년/겐무 3년(1336년), 오슈로부터 상경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의 연합군과의 사이에 벌어진 교토에서의 시가전에 패해 교토에서 쫓겨났고, 이이어 셋쓰국 데시마가와라(豊島河原)에서 패하자 규슈로 도주하였다. 규슈에서 세를 수습한 다카우지는 서국 무사들을 결집시켜 재차 교토로 진군했고, 진군 도중에 빈고국 도모노우라(鞆の浦)에서 고곤 상황의 인젠(院宣)을 받으면서 관군으로써 대의명분을 얻게 된다. 다타라하마에서 겐무 정권측의 기쿠치 다케토시 군을 격파하고, 바닷길로는 다카우지, 육지로는 다다요시가 총지휘를 맡아 지금의 효고현 고베시의 미나토가와 전투에서 합류해 이곳에서 닛타, 구스노키가 이끄는 관군을 다시금 격파하고 교토로 입성한다.
2. 2. 무로마치 막부 성립과 이두정치
겐코 3년/쇼쿄 2년(1333년) 고다이고 천황이 오키 섬 탈출에 성공하여 거병하자, 형 다카우지와 함께 천황 측에 가담하여 로쿠하라 단다이 공격에 가세했다. 겐무 신정이 시작되고 나리요시 친왕과 함께 가마쿠라로 가서 가마쿠라 부의 싯켄직을 맡아 훗날 가마쿠라 부의 초석을 쌓았다.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에서 무사시국 이데노사와에서 반란군을 맞아 싸웠으나 패하고 가마쿠라로 쫓겨왔다. 그러나 미카와국 야하기로 달아났지만, 가마쿠라 후쇼군 나리요시 친왕을 무사히 교토까지 돌려보냈다.
1335년 형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가마쿠라 잔당들의 반란 진압을 명분으로 천황의 명령도 없이 무단으로 원군을 일으켜 오자 형에게 합류, 반란군으로부터 가마쿠라를 탈환했다. 가마쿠라를 탈환한 뒤에도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무르며 자신을 따랐던 장사들에게 독자적으로 논공행상을 집행하는 등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는 다다요시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라고 한다.
닛타 요시사다를 총대장으로 하는 다카우지 추토군이 파견되자, 다다요시는 스루가국 다고시가와라에서 맞아 싸웠지만 패배했다. 위기감을 느낀 다카우지는 직접 군을 이끌고 출진해 토벌군을 하코네 ・ 다케노시타에서 격파하고 그대로 교토로 쳐들어 갔다. 1336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구스노키 마사시게, 닛타 요시사다의 연합군과의 교토 시가전에서 패해 교토에서 쫓겨났다. 셋쓰국 데시마가와라에서 패하자 규슈로 도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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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묘 천황을 옹립한 다카우지는 겐무시키모쿠 17조를 제정해 새로운 막부를 열었다. 이 식목의 제정에 있어서도 다다요시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1338년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직에 임명되고, 다다요시는 사에몬노카미(左兵衛督)에 임명되어 정무에 관련된 업무를 보게 되었다. 이는 '두 쇼군'이라 불린,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에 의한 이원정치의 시작이었다.
1341년 시오야 다카사다를 모반인이라 꾸짖고 모모이 다다쓰네 ・ 야마나 도키우지를 주장으로 하는 추토군을 파병하여 며칠 만에 다카사다를 자결로 몰아갔다.
그러나, 1348년 무렵부터,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를 맡고 있던 고 모로나오와 대립하면서 막부는 다다요시 세력과 반 다다요시 세력으로 양분되고 이는 간노의 소란이라 불리는 사건으로까지 발전한다. 1349년 다다요시는 출가해 정계를 은퇴하는 것으로 사건은 수습됐다. 다다요시는 출가한 뒤 법명을 에겐(慧源)이라 했다.
2. 3. 간노의 소란과 최후
쇼헤이(正平) 3년/조와(貞和) 4년(1348년) 무렵부터,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를 맡고 있던 고 모로나오(高師直)와 대립하면서 막부는 다다요시 세력과 반 다다요시 세력으로 양분되고 이는 급기야 간노의 소란(観応の擾乱)이라 불리는 사건으로까지 발전한다. 이 혼란을 틈타 요시노의 남조도 세력을 펼쳐 다카우지의 북조를 위협했다. 그러던 중 다다요시 세력의 참언으로 집사직에서 해임된 모로나오가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 동생 모로야스(師泰)와 함께 다다요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의 저택으로 도망쳤고, 이를 쫓아 모로나오 형제의 대군은 쇼군 다카우지의 저택 주위를 포위했다. 모로나오 형제는 다다요시의 파면을 요구했고, 다다요시가 출가해 정계를 은퇴하는 것으로 사건은 수습됐다. 다다요시는 출가한 뒤 자신이 머무르던 산조 보몬도노(三条坊門殿) 저택을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상경해 온 조카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에게 넘겨주었고, 법명을 에겐(慧源)이라 했다.쇼헤이 5년/간노(觀應) 원년(1350년) 다카우지가 다다요시의 양자(그러나 혈통상 다카우지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였다)인 다다후유(直冬)를 토벌하기 위해 주고쿠(中国)로 떠난 후, 다다요시는 교토를 탈출해 모로나오 토벌을 요청하며 남조에 투항해 버렸다.[42] 다다요시의 세력은 형인 다카우지를 압도하는 것이었고, 쇼헤이 6년/간노 2년(1351년) 하리마국(播磨国)의 고메지 성(光明寺城)과 셋쓰 국의 우치데노하마(打出浜)[43]에서 다카우지 세력을 격파했다.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와 모로야스 두 형제의 출가를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화친하였고, 화의가 성립되었다. 모로나오 형제와 그 일가는 다다요시 파의 우에스기 요시노리(上杉能憲)에 의해 2월 26일에 제거되었다.
모로나오 형제가 제거된 뒤, 다카우지의 적자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보좌를 맡아 다다요시는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아들 요시아키라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나아가 다카우지 부자는 출진을 칭하고 교토를 떠나서 제각기 오미(近江)와 하리마(播磨)에서 반 다다요시 세력의 태세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다다요시는 8월 1일에 교토를 빠져나와 호쿠리쿠(北陸), 시나노(信濃)를 거쳐 가마쿠라에서 반 다카우지 세력을 규합했다. 이에 다카우지 부자는 측근 사사키 도요, 아카마쓰 노리무라와 함께 남조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비치며 쇼헤이 일통(正平一統)을 이끌었고, 일통을 성립시킨 남조 정권은 도리어 다다요시 토벌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스루가국(駿河国)의 삿타 산(薩埵山)[44], 사가미국(相模国) 하야카와지리(早川尻)[45] 등지에서 다다요시는 다카우지에게 연패했고, 쇼헤이 7년(1352년) 1월 5일에 가마쿠라에서 무장해제당하고 조묘지(浄妙寺) 경내의 렌푸쿠지(延福寺)에 유폐되었다. 이듬해인 쇼헤이 7년/분나(文和) 원년(1352년) 2월 26일, 급사한다. 향년 47세.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라고 말하고 있지만, 군담소설 《태평기》(太平記) 권제33에서는 "갑자기 황달이라는 병에 걸려 허망히 명을 다하셨도다, 하고 바깥으로는 피로되었으되, 실제로는 짐독 때문에 서거하신 것이라 수군거렸다"라고 적어서 독살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독살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다.
3. 인물과 평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형제는 서로 다른 개성과 능력을 지니고 협력하여 무로마치 막부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를 도와 무로마치 막부를 설립하고 운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의 정치적, 행정적 능력은 막부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 성격: 다다요시는 냉정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감정 기복이 심했던 형 다카우지와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형을 보좌했고, 아시카가 가문이 권력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정치적 역할: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와 권력을 분담하여, 주로 사법 및 행정 문제를 담당했다. 그는 겐무시키모쿠 제정에 영향을 미쳤고, 무로마치 막부의 초기 정책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간노의 소란으로 형 다카우지와 대립하게 된 뒤에도 일관되게 무로마치 막부의 정통성을 옹호했다.
- 문화적 소양: 다다요시는 와카에 능했으며, 선종 불교를 후원했다. 그는 무소 소세키와 교류하며 덴류지 건립을 지원하는 등 문화, 종교적으로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다다요시는 형과의 권력 투쟁 (간노의 소란)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 사건은 무로마치 막부 초기의 혼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최근에는 진고지 3상 중 하나가 다다요시의 초상화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3. 1. 성격
현대 사학자들이 조울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다카우지와는 달리, 다다요시는 냉정침착한 자세를 잃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형을 보좌했다. 때문에 아시카가 씨가 천하를 쥐는 데 있어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태평기』 등에서는 도덕적으로 치졸하거나 더러운 수작이라고 평가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 행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행위를 싫어했던 형 다카우지와는 달리,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역할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이 책에서는 친왕의 독살이나 천황과의 절충에서 벌어졌던 배반 행위 등은 다카우지가 아니라 다다요시가 행한 것이었다고 되어 있다.[24]다카우지가 자신에게 들어오는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을 부하들에게 모두 나눠줄 만큼 욕심이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한데, 다다요시는 애초에 그런 선물을 받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고 한다.
다다요시는 아시카가 일문의 시부카와 사다요리의 딸을 정실로 맞았을 뿐, 다른 측실을 들인 적도 없었다. 둘 사이에는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으므로 다카우지의 서자인 다다후유를 양자로 삼았는데, 마흔이 넘어서야 뜻하지 않게 아들 뇨이마루(如意丸)를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야심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것이 『태평기』의 묘사이다.
3. 2. 정치가로서
고묘 천황을 옹립한 다카우지는 법학자인 제엔, 신에 형제의 자문을 얻어 겐무시키모쿠 17조를 제정해 새로운 막부를 열었다. 이 식목의 제정에는 다다요시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한다. 1338년 다카우지는 정이대장군직에 임명되고, 다다요시는 사에몬노카미(左兵衛督)에 임명되어 정무 관련 업무를 보게 되었다. 이는 '두 쇼군'이라 불린,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에 의한 이원정치의 시작이었다.1341년 3월 24일에는 이즈모, 오키 두 구니의 슈고로 유력 무장이었던 시오야 다카사다를 모반인이라 꾸짖고 모모이 다다쓰네, 야마나 도키우지를 주장으로 하는 추토군을 파병하여 며칠 만에 다카사다를 자결로 몰아갔다.[39][40][41] 다카사다의 모반이 사실일 가능성은 충분하며 황족 하야타노미야 출신이라는 설도 있는 다카사다의 아내를 중개로 의제(의형이라고도)에 해당하는 남조측 구교(公卿)로 규슈 방면군의 지휘를 맡고 있던 미나모토노 무네하루 등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40][41]
1348년 무렵부터, 아시카가 가문의 집사를 맡고 있던 고 모로나오와 대립하면서 막부는 다다요시 세력과 반 다다요시 세력으로 양분되고 이는 간노의 소란이라 불리는 사건으로까지 발전한다. 이 혼란을 틈타 요시노의 남조도 세를 펼쳐 다카우지의 북조를 위협했다. 그러던 중 다다요시 세력의 참언으로 집사직에서 해임된 모로나오가 1349년 동생 모로야스와 함께 다다요시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다요시는 형 다카우지의 저택으로 도망쳤고, 이를 쫓아 모로나오 형제의 대군은 쇼군 다카우지의 저택 주위를 포위했다. 모로나오 형제는 다다요시의 파면을 요구했고, 다다요시가 출가해 정계를 은퇴하는 것으로 사건은 수습됐다. 다다요시는 출가한 뒤 자신이 머무르던 산조 보몬도노 저택을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상경해 온 조카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에게 넘겨주었고, 법명을 에겐이라 했다.
1350년 다카우지가 다다요시의 양자(그러나 혈통상 다카우지 자신의 아들이기도 하였다)인 다다후유를 토벌하기 위해 주고쿠로 떠난 후, 다다요시는 교토를 탈출해 모로나오 토벌을 요청하며 남조에 투항해 버렸다.[42] 다다요시의 세력은 형인 다카우지를 압도하는 것이었고, 1351년 하리마국의 고메지 성과 셋쓰 국의 우치데노하마[43]에서 다카우지 세력을 격파했다.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나오와 모로야스 두 형제의 출가를 조건으로 다다요시와 화친하였고, 화의가 성립되었다. 모로나오 형제와 그 일가는 다다요시 파의 우에스기 요시노리에 의해 2월 26일에 제거되었다.
모로나오 형제가 제거된 뒤, 다카우지의 적자인 아시카가 요시아키라의 보좌를 맡아 다다요시는 정계에 복귀했다. 그러나 다카우지는 아들 요시아키라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나아가 다카우지 부자는 출진을 칭하고 교토를 떠나서 제각기 오미와 하리마에서 반다다요시 세력의 태세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를 본 다다요시는 8월 1일에 교토를 빠져나와 호쿠리쿠, 시나노를 거쳐 가마쿠라에서 반 다카우지 세력을 규합했다. 이에 다카우지 부자는 측근 사사키 도요, 아카마쓰 노리무라와 함께 남조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비치며 쇼헤이 일통을 이끌었고, 일통을 성립시킨 남조 정권은 도리어 다다요시 토벌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스루가국의 삿타 산[44], 사가미국 하야카와지리[45] 등지에서 다다요시는 다카우지에게 연패했고, 1352년 1월 5일에 가마쿠라에서 무장해제당하고 조묘지 경내의 렌푸쿠지에 유폐되었다. 이듬해인 1352년 2월 26일, 급사한다. 향년 47세.
공식적인 사인은 병사라고 말하고 있지만, 군담소설 《태평기》에서는 독살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연구자들 가운데는 독살설을 지지하는 이들이 많다. 다다요시가 죽은 날은 묘하게도 다다요시와 정치적으로 대립했던 고 씨 형제가 죽은 지 1주기에 해당하는 날이었고, 요절한 다다요시의 친아들 뇨이마루(뇨이오)의 1주기 바로 다음날이기도 했다. 일본의 사학자 세노 세이이치로는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죽음으로, 고노 모로나오 형제에 의해 시작된 간노의 소란은 완벽히 그 막을 내렸다고[46] 평가한다(다만 다다요시 세력의 저항은 다다요시의 아들 다다후유를 맹주로 1364년까지 이어졌다).
다카우지는 자신이 죽기 직전인 1358년 죽은 동생 다다요시를 종2위에 위계되도록 고코곤 천황에 상소했었다. 그 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지만 다다요시는 거듭 정2위에 추증되었다.[47] 1362년 7월 22일에는 「오쿠라노미야」라는 신호가 추증되었고, 「오쿠라 니이 묘진」으로써 다다요시의 저택이 있던 산조 보몬도노 부지에 산조보몬 하치만구를 지어 그를 제사한 것 외에, 다다요시가 실각한 뒤에 머물렀던 아야노코지 저택에서도 그에 대한 제향이 이루어졌다. 나아가 교토 덴류지 부근에 다다요시를 제향하는 인사가 세워진다.
많은 전공을 세운 도키 요리토가 고곤 상황에게 행패를 부리자, 요리토의 군사적 재능과 그가 세운 전공을 들어 그를 구명하는 목소리가 높았지만, 조정의 권위를 중시한 다다요시는 그러한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요리토를 처형했다. 고곤 상황의 권위를 가볍게 보거나 부정하는 것은 상황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으로 임명된 형 다카우지와 그의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까지도 자칫 부정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정에 흔들리지 않은 냉철한 판단으로 요리토를 처형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요리토의 무공을 감안해 도키 집안 자체에 대해서는 요리토의 조카에게 집안의 대를 잇게 하는 등 현실적인 절충을 시도하기도 했다.
간노의 소란으로 형 다카우지와 대립하게 된 뒤에도 일관되게 무로마치 막부의 정통성을 옹호했다. 다다요시와 남조 사이의 화의 교섭을 기록한 「요시노 어사서안」에서 다다요시가 승리하는 날에는 막부는 북조 정권을 해체하고 남조에 모든 정권을 반환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남조 측에 다다요시는 실제 천하의 질서를 지키는 것은 막부와 그 막부를 이루고 있는 무사들이므로 남조도 막부의 요구대로 무조건 교토로 귀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양자 화의 후에도 다다요시와 남조 정권은 서로 여전히 불신하는 상태가 이어졌다. 그 후, 다카우지는 남조와 화의교섭을 벌이면서 당면과제였던 다다요시 토벌을 앞세우며 남조 측의 요구를 전면 받아들인다는 항복선언에 가까운 조건을 제시했고 이에 안도한 남조 역시 다카우지와 손잡고 다다요시 토벌을 명령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남조 앞에서 막부의 정통성을 옹호한 다다요시였지만 정작 막부의 쇼군이자 형인 다카우지와의 외교전에서 패함으로써 여러 구니의 무사들 뿐 아니라 오오타카 시게나리와 같은 측근들로부터도 배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권력을 분담하여 다카우지는 군사 문제를, 다다요시는 사법 및 행정 문제를 맡았다.
다다요시와 다카우지는 모두 유명한 선승이자 지식인, 정원 설계가인 무소 소세키의 제자였으며, 그의 지도 아래 다다요시는 나중에 불교 승려가 되었다.[2] 소세키의 영향으로 오산 시스템의 선종 사찰 네트워크가 확장되고 강화되었으며, 먼저 짓세쓰가 설립되고, 나중에는 안코쿠지 사찰 하위 네트워크가 설립되었다. 두 시스템의 창설은 일반적으로 다다요시의 공로로 여겨진다.[2] 소세키는 또한 두 형제에 대해 썼는데, 다카우지는 군사적 활동에 더 적합하고, 다다요시는 정치에 더 적합하다고 묘사했다.
3. 3. 문화적 소양
뛰어난 가인(歌人)이었던 형 아시카가 다카우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무가(武家)의 가인으로써 형에 버금가는 와카(和歌)의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26] 특히 형이 은거해 있던 고에이(康永) ・ 조와(貞和) 연간(1342년 - 1350년) 무렵에는 다다요시가 무가 가단(武家歌壇)을 이끄는 존재였다.[26] 『후가와카슈(風雅和歌集)』이래의 칙찬와카집(勅撰和歌集)에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와카 26수가 실렸다.[27] 그 가풍(歌風)은 니조파(二条派)에 가까운 평명(平明)한 것이었다고 평가된다.[26]와카에 있어서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남긴 최대의 업적은 무가 가인으로써는 역사상 최초로 정치를 노래한 와카가 칙선 와카 모음집에 수록되었다는 것이다.[28] 가마쿠라 시대까지 일본에서 무인이 정치에 대한 와카를 읊어 그것이 칙선 즉 천황의 명령으로 편찬되는 와카 모음집에 실리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고, 고곤 상황이 몸소 선별한 『후가와카슈』에서 그 오랜 전례를 깨고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정치에 대해 읊은 와카를 실은 것이다.[28] 그 배경에는 고곤 상황 개인이 다다요시에 대해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28] 북조의 막부에 대한 의존이 강해져 있던 당시의 정치상황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지적도 존재한다.[28]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선종 불교를 독실하게 비호하였다.[29] 정치상으로는 선승 무소 소세키(夢窓疎石)와도 관계가 깊어서 덴류지(天龍寺) 조영을 위한 교역선인 덴류지선(天龍寺船)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무소와의 대화는 『몽중문답집(夢中問答集)』으로 간행되기도 했다.[29] 다만, 신앙적으로도 소세키를 깊이 숭경했던 고다이고 천황이나 형 다카우지와는 달리, 다다요시 개인으로써는 그렇게까지 소세키를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29] 무소 소세키를 비롯해 소세키파가 기존의 일본 불교와도 친화성이 높았던 절충주의적인 선풍(禅風)이기도 했던 데다,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순수하게 선종 불교를 추구하던 무가쿠 소겐(無学祖元)을 비롯한 홋코파(仏光派)에 귀의해 있었고, 그 점에서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29]
일설에는 《태평기》의 원형이 된 사서의 오류를 정정하였다는 이야기 등도 전해진다.
3. 4. 진고지 3상과 아시카가 다다요시
1995년 일본 도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요네쿠라 미치오(米倉迪夫)는 헤이본샤에서 펴낸 《초상화는 말한다》(絵は語る)의 네 번째 출간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 - 침묵의 초상화》(源頼朝像 沈黙の肖像画)에서, 지금까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초상화로 알려졌던 진고지 3상 가운데 하나는 사실은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것이라는 새로운 설을 발표하여 반향을 일으켰다.[49][50] 역사학자 구로다 히데오(黒田日出男) 역시 요네쿠라의 학설을 지지하였는데, 진고지 3상에 대해 다니 신이치나 미나모토 도요무네 등이 제기했던 이설들을 계승하면서 1980년대 해당 초상화에 대한 수리 보고서에서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던 점들을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림 속 모발형 태도(毛抜型太刀)의 아랫부분에 남은 흔적에서 칼자루에 오동나무 무늬 즉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 하사받은 무늬가 있음이 확인되었던 점
- 세 초상화에 사용된 크기의 비단은 가마쿠라 시대 후기 이후에 출연한 것으로 그 이전에는 비단을 쓰지 않았다는 것
- 세 초상화 속의 표현 양식(눈썹이나 눈, 귀, 입술 등의 화법)에서 14세기 중기 즉 무로마치 시대 전기의 무소 소세키(夢窓疎石)의 초상화(교토 덴류지 묘지원 소장)와 닮아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진고지 3상의 성립은 남북조 시대에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주장하였다.

고에이(康永) 4년(1345년) 4월 23일자로 아시카가 다다요시 자신이 진고지에 보냈던 발원문인 《아시카가 다다요시 원문》(足利直義願文)[51] 또한 유력한 논거로 제시되었다. 원문 속에는 "본 집안(아시카가 가문)은 (진고지와는) 특별한 인연으로 대대로 깊이 귀의하여 왔으므로, 《아함경》(阿含経) 한 축과 함께 정이장군(아시카가 다카우지)과 나의 영정을 진고지에 안치합니다. 좋은 연을 이 자리에서 맺어 현세와 내세의 소원이 모두 원만히 성취되기를."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진고지 3상의 강한 공통점은 아시카가 쇼군가와 유래가 있다는 것이다.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원문을 바탕으로 추론하면 통상 두 초상화가 나란히 병립할 경우 오른쪽에 상위자, 왼쪽으로 하위자를 배치하는 관습 등을 근거로 요네쿠라 미치오는 오른편에 시게모리의 것으로 알려졌던 초상화의 주인공은 사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이며, 왼편의 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이 아시카가 다다요시인 것으로 비정하였다.
대영박물관 소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초상에 대해서도 구로다나 우와요코테 마사노리(上横手雅敬)는 초상화에 부기된 찬의 내용상 이것은 에도 시대 중기(18세기) 이후에야 성립되었다는 설을 제기하였는데,[52] 대영박물관 소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상은 1998년 수리 문제로 일본으로 돌아와서 이듬해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 개최되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공 8백년제 기념[53]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공 전시전(源頼朝公八百年祭記念 源頼朝公展)에서 공개되었는데, 수리 과정에서 그림 속의 찬은 나중에 추가된 것이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2011년부터 2012년까지 구로다 히데오는 요네쿠라의 설을 계승한 진고지 3상 관련 논고를 잇따라 발표하였는데, 여기서 구로다는 "일본 초상화의 최고 걸작의 하나인 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을 논하는 것"과 "역사상의 인물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가장 적합한 초상, 이미지는 뭔가"라는 문제는 엄밀하게 나누어 생각해야 하는데 양측이 혼동되면서 쓸데없는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보았다.
구로다 히데오는 아시카가 다다요시의 발원문을 검토해, 진고지 3상이 요네쿠라의 설대로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요시아키라 세 사람의 것이라는 전제 속에서 진고지 3상이 그려진 상황이나 배경의 고찰을 시도하였는데, 우선 발원문의 작성 날짜인 4월 23일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다다요시 형제의 어머니인 우에스기 기요코(上杉清子)의 기일에 해당한다. 원문을 작성하기 1년 전 아시카가 다다요시는 같은 4월 23일에 고야산(高野山)의 금강삼매원(金剛三昧院)에 기부하였는데,[58] 발원문에서 언급된 두 초상화를 진고지에 봉납한 것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라고 주장하였다.

구로다는 다다요시가 형 다카우지와 자신의 초상화를 봉납한다는 아이디어를 그 자신이 발안하였다기보다 그러한 발안을 다다요시에게 제기한 인물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았고, 그것은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교류가 깊었던 선승 무소 소세키였을 것으로 지적하였다.
전 다이라노 시게모리 상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하치만 대명신의 더블 이미지, 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상은 다다요시와 고보 대사 그리고 쇼토쿠 태자의 트리플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으며, 두 초상화는 이두정치를 체현하고 남북조 동란의 시대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현현했던 하치만 대보살(八幡大菩薩) ・ 다카우지와 불법을 토대로 세상을 다스렸던 쇼토쿠 태자(고보 대사) ・ 다다요시를 표상하는 새로운 '서로의 초상화'로써 진고지에 봉납되었다는 것이 구로다의 해석이다.[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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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원현준승정일기(三宝院賢俊僧正日記) 랴쿠오(暦応) 5년(1343년) 2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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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요시의 사망일의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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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형 다카요시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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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요시가 조카 다다후유를 양자로 맞이한 뒤인 1347년에 태어난 다다요시의 친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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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도쿄 도 현 마치다시(町田市) 혼마치다(本町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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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아이치 현 오카자키시(岡崎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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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2 ~ 1205. 헤이안 말기에서 가마쿠라 초기의 귀족으로 화가로 이름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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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護寺蔵伝隆信筆の画像についての疑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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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山御文庫文書』 일본 궁내청(宮内庁) 소장. 다만 원본이 아니라 겐키(元亀) 2년([[1571년]]) 3월에 필사된 사본이다. 한편 일본 도쿄대학 사료편찬소(東京大学史料編纂所)에서 해당 문서의 사본이 소장되어 있는데, 요네쿠라 미치오가 신설을 발표하는 가장 큰 동인이 되었다.
[52]
간행물
大英博物館本『源頼朝像』の制作時期について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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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오는 1999년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사망(1199년)한지 꼭 800주년이 되는 해였다.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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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西ふたつの頼朝像
福岡市美術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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足利尊氏と直義
吉川弘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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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次将装束抄』と源頼朝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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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よみがえる国宝
일본 규슈국립박물관(九州国立博物館)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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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적경 요품』(宝積経要品, 1첩, 마에다 육덕회前田育徳会 소장). 다다요시와 다카우지, 무소 소세키가 함께 썼다.
[59]
간행물
「互いの御影」空海と僧形八幡神画像について ―成立から浄光明寺本ま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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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내각목록(内閣目録)에 소장되어 있는 간에이(寛永) 14년([[1637년]])에 작성된 《진고지 영보 목록》(神護寺霊宝目録)에는 『요리토모 영정』(頼朝御影), 『사쿠라마치 주나곤(桜町中納言) 나리노리(成範) 영정』(桜町中納言成範御影), 『고마쓰 3위 영정』(小松三位御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이라노 시게모리(고마쓰 3위)나 후지와라노 미쓰요시(사쿠라마치 주나곤 나리노리)가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에서 언급되는 이름인 반면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만은 분명하게 특별취급을 받고 있다. 구로다는 그 이유를 진고지 소유의 영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절에는 28석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게이초]](慶長) 6년([[1601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진고지에 기증한 영지는 그 열 배인 262석으로 이어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히데타다]](秀忠)의 시기에 다시금 28석이 더해지는 등 진고지가 에도 막부의 두터운 보호를 받았던 일이나, 권진 무렵에 대중에 대한 어필을 위해 자주 그림을 이용하였던 것에서、진고지 승려들이 센고쿠 시대에 황폐해졌던 진고지를 부흥시키기 위해 사찰에서 소유하고 있던 초상화 가운데서도 가장 훼손이 적고 위엄 있는 초상화를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초상화」로써 이에야스 등의 앞에 내세워 진고지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관계를 강조함으로써 「미나모토노 이에야스」(源家康)가 되어 막부를 열었던 이에야스의 보시를 구하려 했던 것, 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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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高雄山神護寺 寺宝紹介 伝平重盛像・伝源頼朝像・伝藤原光能像
https://web.archive.[...]
2019-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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