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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발레리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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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 발레리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막내딸로, "하나뿐인 아이" 또는 "헝가리인 아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1890년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잘바토어와 결혼하여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자선 활동과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부상병 치료 지원에 힘썼다. 1918년 합스부르크 왕가 몰락 후 황실 재산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발제 성에서 거주하다가, 1924년 림프종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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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발레리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리 발레리 폰 외스터라이히
오트마르 폰 튀르크 촬영, 1890년
전체 이름마리 발레리 마틸데 아말리에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출생1868년 4월 22일
출생지부다, 헝가리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사망1924년 9월 6일
사망지,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
배우자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살바토르 (1890년 결혼)
자녀오스트리아 대공녀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1892–1930)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카를 살바토르
오스트리아 대공 후베르트 살바토르
오스트리아 대공녀 헤드비히
오스트리아 대공 테오도어 살바토르
오스트리아 대공녀 게르트루트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리아 엘리자베트
오스트리아 대공 클레멘스 살바토르
오스트리아 대공녀 마틸데
오스트리아 대공녀 아그네스
가문합스부르크-로렌
아버지프란츠 요제프 1세
어머니엘리자베트 인 바이에른
신분
칭호오스트리아 대공녀

2. 생애

마리 발레리 폰 외스터라이히 여대공은 1868년 4월 22일 헝가리 부더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그의 아내인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웅가른 황후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가 직접 양육하며 각별한 애정을 쏟아 '하나뿐인 아이'(Die Einzige|디 아이진게de)로 불렸으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태어나 '헝가리 아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1890년 7월 30일 오스트리아 바트이슐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계인 프란츠 잘바토어 대공과 결혼하였다. 부부는 1895년 다뉴브강변의 발제궁(Schloss Wallsee)을 구입하여 1897년부터 거주했다.

마리 발레리는 1900년경부터 적십자 후원을 시작으로 빈곤층을 위한 병원 설립 등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기 위한 병원 막사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헌신적인 활동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발제의 천사'(Engel von Wallsee|엥겔 폰 발제de)라는 칭송을 받았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가 끝나자, 마리 발레리는 왕가의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합스부르크 법을 수용하였다.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 공화국 내에서 개인적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24년 9월 6일 림프종으로 발제궁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1. 어린 시절

1868년 4월 22일 헝가리 부더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다. 언니 기젤라 여대공과 오빠 루돌프 황태자와는 달리,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가 직접 양육한 자녀였다. 첫째 딸 조피 여대공은 마리 발레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망했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이전 세 자녀가 황제의 어머니인 조피 대공비에 의해 양육된 것과 달리, 막내딸 발레리만큼은 직접 키우고자 했으며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이 때문에 궁정에서는 그녀를 '하나뿐인 아이'(Die Einzige|디 아이진게de)라고 부르기도 했다. 발레리는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일기에 따르면 어머니의 지나친 관심에 때때로 부담감을 느꼈다고 한다.

마리 발레리는 '헝가리 아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그녀의 출생이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 사이의 관계 개선 및 헝가리와의 화해를 상징하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의도적으로 헝가리에서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는데, 이는 수 세기 동안 헝가리 왕국 영토 내에서 왕족이 태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헝가리에서는 그녀의 탄생을 하늘의 축복으로 여겨 '괴될뢰의 공주님'으로 불렀다. 만약 남자아이였다면 헝가리의 성왕 이슈트반 1세의 이름을 따 '슈테판'(이슈트반)으로 지을 예정이었다고 전해진다.

어린 시절, 마리 발레리는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의 친구이자 헝가리 총리였던 줄라 안드라시 백작의 딸이라는 악의적인 소문에 시달렸다. 이러한 소문은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외모가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점점 더 닮아가면서 이러한 소문은 점차 사라졌다. 그럼에도 이 경험은 발레리가 헝가리에 대해 평생 반감을 가지는 한 원인이 되었으며, 어머니가 그녀에게 헝가리어만 사용하도록 강요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아버지와 독일어로 대화하는 것을 더 편하게 여겼다.

마리 발레리는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헝가리어 등 여러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또한 예술적 재능이 있어 연극과 시 쓰기를 즐겼고, 특히 꽃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부르크 극장의 열렬한 지지자로서 자주 공연을 관람했다.

2. 2. 결혼과 자녀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잘바토어


마리 발레리는 1886년 한 무도회에서 사촌 관계인 프란츠 잘바토어 대공을 만났다. 프란츠 잘바토어는 오스트리아 황실의 토스카나 분가 출신으로, 상대적으로 지위나 재산이 뛰어나지 않았다. 궁정의 많은 이들은 마리 발레리가 작센 왕세자나 포르투갈 왕자, 혹은 바이에른의 알폰스 왕자와 결혼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는 마리 발레리의 의사를 존중하여, 그녀가 원한다면 굴뚝 청소부와도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딸의 선택을 지지했다. 이는 정략결혼을 해야 했던 다른 자녀들의 경우와는 대조적이었다.

마리 발레리는 프란츠 잘바토어에 대한 감정이 결혼으로 이어질 만큼 충분히 강한지 확인하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렸고, 마침내 그를 선택했다.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는 약속대로 딸의 결정을 지지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한동안 형제자매들과 깊은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1888년 크리스마스에 프란츠 잘바토어와 약혼하면서 오빠 루돌프와는 결국 화해했다. 하지만 올케인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의 관계는 마이얼링 사건 이후에도 냉랭하게 유지되었다.[2]

결혼을 진행하기 위해, 마리 발레리는 1890년 7월 16일 헤르메스빌라에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권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3] 결혼식은 1890년 7월 31일 바트이슐의 교구 교회에서 린츠 주교 프란츠 마리아 도펠바우어의 주례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결혼 후 부부는 이탈리아, 스위스, 바이에른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1895년 6월 11일,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잘바토어 부부는 다뉴브강과 접한 발제궁(Schloss Wallsee)을 구입했다. 이 궁전의 이전 소유주였던 알프레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이 보수 공사에 참여했으며, 부부는 1897년 9월 4일부터 이곳으로 이주하여 생활했다.

마리 발레리와 프란츠 잘바토어 대공 부부는 슬하에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엘라"1892년 1월 27일1930년 1월 29일발트부르크-차일의 게오르크 백작(1878-1955)과 결혼하여 자녀를 둠.
프란츠 카를 살바토르1893년 2월 17일1918년 12월 12일스페인 독감으로 미혼으로 사망.
후베르트 살바토르1894년 4월 30일1971년 3월 24일잘름-잘름의 로즈메리 공주와 결혼하여 자녀를 둠.
헤드비히1896년 9월 24일1970년 11월 1일슈톨베르크-슈톨베르크의 베르나르 백작(1881–1952)과 결혼하여 자녀를 둠.
테오도르 살바토르1899년 10월 9일1978년 4월 8일발트부르크-차일-트라우히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백작부인(1901–1967)과 결혼하여 자녀를 둠.
게르트루트1900년 11월 19일1962년 12월 20일언니 엘리자베트의 남편이었던 발트부르크-차일의 게오르크 백작과 결혼하여 자녀를 둠.
마리아 엘리자베트1901년 11월 19일1936년 12월 29일미혼으로 사망.
클레멘스 살바토르1904년 10월 6일1974년 8월 20일레세기에르 드 미르몽 백작부인 엘리자베트(1906–2000)와 결혼, 알텐부르크 공작 칭호를 사용, 자녀를 둠.
마틸데1906년 8월 9일1991년 10월 18일오스트리아 정치인 에른스트 헤펠과 결혼, 자녀 없음.
아그네스1911년 6월 26일1911년 6월 26일태어난 지 8시간 만에 사망.


2. 3. 자선 활동과 제1차 세계 대전

1900년부터 적십자 후원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자선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빈곤층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상당한 기금을 모금하는 등 지역 사회에 대한 관대한 기여로 널리 알려졌다.[5] 또한 어려운 이웃과 가난한 마을 사람들을 지원하고, 병원이나 구빈원을 세우는 데 힘썼으며, 이러한 활동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발제의 천사"(Engel von Wallsee|엥겔 폰 발제de)로 불리며 칭송받았다.[5] 그녀는 적십자사를 포함하여 총 8개의 자선 단체 후원자이기도 했다.[5]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자신이 거주하던 발제궁(Schloss Wallsee) 내에 직접 병원 막사를 만들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보는 데 헌신했다.[5]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였던 그녀는 종교 관련 자선 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별십자 훈작부인이기도 했다.[5]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몰락한 후, 마리 발레리는 왕가의 일원으로서 소유했던 재산에 대한 모든 권리를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포기한다는 내용의 합스부르크 법에 서명하여 이를 수용했다. 이를 통해 그녀는 개인적인 거주지와 소유물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4. 합스부르크 왕가 몰락과 죽음

마리 발레리는 1889년 오빠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과 1898년 엘리자베트 폰 외스터라이히웅가른 황후의 암살 사건으로 인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6] 그녀는 언니 기젤라와 함께 이 비극적인 사건들 이후 아버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또한 어머니 엘리자베트 황후가 남긴 편지와 서신 등 유품을 시녀들과 함께 정리하기도 했다.[6]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8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가 막을 내리자, 마리 발레리는 합스부르크 군주제의 종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녀는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내용의 문서에 서명했으며, 이는 합스부르크 법을 수용한 것이었다. 이러한 권리 포기를 통해 그녀는 자신의 거처인 발제궁(Schloss Wallsee)과 소유물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마리 발레리는 1924년 9월 6일 림프종으로 발제궁(Schloss Wallsee)에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가 사망하기 직전, 언니 기젤라는 편지에 마리 발레리가 자신의 상태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으며, 임박한 죽음을 매우 경건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기쁘게 기대하고 있다고 적었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신델부르크의 교구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마지막 길을 따랐다.

3. 유산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 발레리의 제국 문장


마리 발레리는 생전에 다음과 같은 훈장을 받았다:[7]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 별 십자 훈장 여대수훈자
  • * 엘리자베스 훈장 대십자장 (1898년)[8]
  • 바이에른 왕국:
  • * 성 엘리자베스 훈장 여대수훈자
  • 포르투갈 왕국:
  • * 성 이사벨 훈장 여대수훈자

4. 훈장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 관련 정보가 없습니다.)

참조

[1] 서적 The reluctant empress http://archive.org/d[...] New York : Knopf 1986
[2] 간행물 "They will call us some strange family." The diaries of an Austrian Archduchess https://www.royalboo[...] Ted Rosvall 2020-09-25
[3] 서적 Kaiserin wider Willen 1981
[4] 웹사이트 Franz Joseph: Ehe, Familie und Nachkommen https://www.habsburg[...]
[5] 문서 Livraria Esquina 1997
[6] 간행물 "They will call us some strange family." The diaries of an Austrian Archduchess https://www.royalboo[...] Ted Rosvall 2020-09-25
[7]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1915) http://alex.onb.ac.a[...] 1915
[8]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Druck und Verlag der K.K. Hof- und Staatsdruckerei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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