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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2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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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멕시코 제2제국은 1864년부터 1867년까지 멕시코에 존재했던 제국으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 1세를 황제로 추대하여 세워졌다.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의 개혁에 반발한 보수파가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하면서 프랑스 군대가 멕시코를 침공하여 제국이 성립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보수파와 가톨릭 교회의 반발, 미국의 압박, 프랑스의 철수 등으로 인해 3년 만에 붕괴되었다. 제2제국은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개입이라는 배경 속에서, 멕시코의 건축 및 문화 유산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중문화에서도 다양한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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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제2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1864년 4월 막시밀리안이 왕위를 수락했을 때 멕시코 제2제국이 통치한 지역(연녹색)과 주장한 지역(진녹색)
1864년 4월 막시밀리안이 왕위를 수락했을 때 멕시코 제2제국이 통치한 지역(연녹색)과 주장한 지역(진녹색)
기본 정보
정식 명칭멕시코 제국
현지 명칭"Imperio Mexicano" (스페인어)
"Second Empire mexicain" (프랑스어)
"Imperio Mexicano" (스페인어)
일반 명칭멕시코
상태독립 군주국, 프랑스의 괴뢰국
존속 기간1863년 – 1867년
이전 국가멕시코 제2연방공화국
다음 국가재건 공화국
멕시코 제2제국 국기
상단: 국기, 하단: 황실 기
멕시코 제2제국 황실 깃발
멕시코 제2제국 국장
황실 문장
국가 표어'Equidad en la Justicia' (정의 안의 형평)
국가Himno Nacional Mexicano
수도멕시코시티
공용어스페인어
통화페소
정치
정부 형태연방 의회 입헌 군주제
섭정후안 알몬테, 호세 살라스, 펠라히오 데 라바스티다
섭정 기간1863년–1864년
황제막시밀리안 1세
황제 기간1864년–1867년
총리호세 마리아 라쿤사
총리 기간1864년–1866년
총리테오도시오 라레스
총리 기간1866년–1867년
총리산티아고 비다우리
총리 기간1867년
역사
시대제국주의
이전 사건프랑스의 멕시코 개입
이전 사건 날짜1861년 12월 8일
시작 사건막시밀리안 1세, 멕시코 왕관 수락
시작 날짜1864년 4월 10일
종료 사건막시밀리안 1세 황제 처형
종료 날짜1867년 6월 19일
면적 및 인구
면적1,972,550 km²
인구8,269,213명
기타
오늘날 국가멕시코

2. 역사

멕시코 제2연방공화국 시기,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원주민 권리 확보와 교회 특권 제한을 위한 개혁을 추진했다. 이에 반발한 보수파는 내전을 일으켰으나, 후아레스는 미국의 지원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멕시코 경제는 마비되었고, 후아레스는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기회로 1862년 멕시코에 군대를 파병했다.[12]

영국은 멕시코 채권국이었기에 프랑스를 도왔고,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프랑스를 막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1864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를 멕시코 황제로 추대했고, 국민 투표를 거쳐 멕시코 제국 황제가 되었다.[13][14]

막시밀리아노 1세는 멕시코 백성을 위해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보수파와 자유주의자 간 갈등을 봉합하려 했다. 그러나 멕시코 국민들은 괴뢰 정권인 제2제국을 지지하지 않았고, 자유주의자들은 막시밀리아노를 거부했으며, 후아레스의 개혁을 일부 지지해 보수파의 지지도 잃었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미국은 프랑스의 멕시코 내정 간섭을 비판했고, 프로이센이 강대해지자 프랑스는 멕시코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가 프랑스군을 물리치자,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에게 오스트리아 귀환을 권유했으나, 그는 지지자들을 버릴 수 없다며 거부했다. 프랑스군 철병이 시작되었고, 고립된 막시밀리아노는 후아레스군에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처형됨으로써 제2제국은 붕괴하였다.[12]

2. 1. 멕시코의 정치적 혼란과 외세의 개입

멕시코 제2연방공화국 시기,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은 원주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교회의 특권을 제한하며 재산을 몰수하는 개혁을 추진하려 했다. 이에 반발한 보수파는 후아레스를 몰아내기 위해 내전을 일으켜 수도 멕시코 시를 점령하며 승리하는 듯했다. 그러나 후아레스 대통령은 무기한 영토 종단 통과권까지 약속하며 미국의 지원을 받아 보수파를 패퇴시켰다. 이에 보수파는 후아레스처럼 외세를 끌어들일 목적으로 나폴레옹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2]

후아레스가 내전에서 승리했지만, 수도의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는 등 국토는 전쟁으로 피폐해지고 멕시코 경제는 마비되었다. 빚을 갚을 날이 다가오자, 후아레스 대통령은 모라토리움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은 외세 개입의 빌미를 제공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기회로 멕시코를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 속셈으로 1862년 멕시코에 군대를 파병했다.[12]

일반적으로 프랑스를 견제했을 영국은 멕시코에 돈을 빌려준 채권국이었으므로 오히려 프랑스를 도왔고,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프랑스의 간섭을 막을 수 없었다. 멕시코를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프랑스는 1864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를 멕시코 황제로 추대했고, 형식적인 국민 투표를 거쳐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13][14]

2. 2. 막시밀리아노 1세의 즉위와 통치

프랑스나폴레옹 3세멕시코를 보호국으로 만들 속셈으로 1862년 멕시코에 군대를 파병했다.[12] 당시 영국은 멕시코에 돈을 빌려준 채권국이었으므로 오히려 프랑스를 도왔고,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를 막을 수 없었다. 프랑스는 1864년에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아노 1세를 멕시코 황제로 추대했고, 국민 투표를 거쳐 멕시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막시밀리아노 1세는 자신을 추대한 프랑스와 멕시코 보수파들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베니토 후아레스의 개혁을 어느 정도 지지했고, 심지어 후아레스에게 항복하면 대법원장에 임명하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물론 후아레스는 거절했다.) 막시밀리아노는 멕시코 황제가 된 후 멕시코 백성을 위해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권도 포기하고, 보수파와 자유주의자들의 갈등을 봉합하려 했다.

하지만 300년 동안 식민지였던 멕시코 국민들은 괴뢰 정권인 제2제국과 외국인 막시밀리아노 1세를 외면했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거부했고, 후아레스의 개혁을 일부 지지했기 때문에 보수파의 지지도 잃었다.

막시밀리아노는 멕시코의 원주민 공동체의 법적 인격을 회복하고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 또는 정부가 부여한 토지에 대한 집단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공포했다.[63] 강제징집을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원주민들이 그의 군대에 자원했다.[63]

막시밀리아노는 나우아틀어를 배우려 노력했고,[59] 법률을 스페인어와 나우아틀어로 발표했으며, 나우아틀어 학자 파우스티노 갈리시아를 정부 고문으로 임명했다.[60]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프랑스의 멕시코 내정 간섭을 비판했고, 프로이센이 강대해지자 프랑스는 멕시코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가 막시밀리아노의 군대와 프랑스군을 물리치자,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에게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지지자들을 버릴 수 없다며 거부했다.

황제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군의 철병이 시작되었고, 고립된 막시밀리아노는 후아레스군에게 체포되어 1867년 6월 19일 측근 장군들과 함께 처형되어 제2제국은 붕괴하였다.

2. 3. 제국의 붕괴와 후아레스의 복귀

미국 남북 전쟁이 끝난 후, 미국베니토 후아레스를 지원하며 프랑스제2제국 내정 간섭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프로이센이 강대해지면서 프랑스는 멕시코에 더 이상 신경 쓸 여유가 없어졌다.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은 후아레스는 막시밀리아노 1세의 군대와 프랑스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막시밀리아노 1세에게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버릴 수 없다며 거부했다.

황제 즉위 1년도 되지 않아 프랑스군의 멕시코 철병이 시작되었고, 고립된 막시밀리아노 1세는 결국 후아레스군에게 체포되었다. 1867년 6월 19일, 막시밀리아노 1세는 측근 장군 두 명과 함께 처형되었고, 이로써 제2제국은 붕괴하였다.[12]

멕시코의 막시밀리아노 1세와 미라몬, 메히아 장군의 처형 사진. 왼쪽부터 메히아, 미라몬, 막시밀리안


1866년,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가능성과 매몰비용을 이유로 멕시코에서 프랑스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카를로타 황후는 유럽에서 지원을 호소했지만 실패했다. 1866년 10월, 막시밀리아노 1세는 수도를 오리사바로 옮기고 퇴위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장관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5] 그는 국민 총회를 열어 멕시코의 정부 형태를 결정하려 했지만, 후아레스는 이를 거부했다.

1867년 2월, 마지막 프랑스군이 철수하자 막시밀리아노 1세는 케레타로에서 공화군에 포위되었다. 1867년 5월 15일, 제국군 장교의 배신으로 케레타로가 함락되었고,[36] 막시밀리아노 1세는 체포되어 메히아, 미라몬 장군과 함께 재판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1867년 6월 19일, 세 사람은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3. 정치

멕시코 제2제국의 정치 체제는 초기에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의 자유주의 정부에 대항하는 보수파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866년부터 막시밀리안 황제의 정치 고문들의 영향으로 점차 보수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었다.[75] 이는 토착민과 일반 멕시코인들이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고수하고 근대화에 반대하는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려는 경향 때문이었다.

크리올로 엘리트 중심의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모델과 달리, 토착민들은 법 앞의 평등 개념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하며, 스페인 제국 시대의 '인디언'으로서의 법적 인정을 원했다. 특히 공동체 재산과 토착 공동체로서의 법적 존재를 유지하고자 했다.[75] 이러한 배경에서 정부는 개혁 전쟁의 결과를 조정하려던 초기 생각에서 벗어나, 사회 보수주의자들이 요구하는 보호주의 조치에 접근하게 되었다.

1863년, 미라마레에서 막시밀리안에게 멕시코 황제 즉위를 청원하는 멕시코 대표단


막시밀리안은 인디언법과 부왕 시대를 그리워하는 원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51][52] 그는 빅토르 프로스페르 콩시당과 유토피아 사회주의, 심지어 농촌 프롤레타리아의 영향을 받아 토착 공동체의 정치적 파괴를 통한 인디언 동화 대신, 부르주아-자유주의 혁명가들이 원하는 사회 변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겼다.[75]

이러한 배경에서 1865년 7월과 9월의 법률은 법 앞의 평등을 폐지하고 토착 공동체의 법적 인격을 재확립했다. 1866년 9월 16일의 토지법은 법적 소유권과 에히도(ejido)가 없는 토착 공동체에 토지를 부여하고, 공동체 토지의 복원을 추진했다.[53]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지지자들의 심각한 정치적 실수로 여겨졌다. 1866년, 막시밀리안은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은 권리와 개혁을 폐지하고, 가톨릭 교리와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새로운 조약을 제안했지만,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멕시코인들의 지지를 되찾기에는 너무 늦었다.[30][31]

장 메이어에 따르면, 막시밀리안은 자유주의자라기보다는 계몽된 전제군주로서 전통과 근대성의 요소들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에 모순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면서도, 자연권 자유주의로서 근대적 사유 재산에 의한 봉건적 공동체 재산의 극복에 대한 자유주의적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53]

막시밀리안은 멕시코를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웠고, 그의 통치가 그렇게 짧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1865년 제국 정권은 멕시코 국토를 재편성할 계획을 세우고, 산림 관리, 철도, 도로, 운하, 우편 서비스, 전신, 광산, 이민을 포함한 모든 정부의 측면을 다루는 8권의 법률을 발표했다.[43][44] 그는 또한 제국에 대한 특별한 공로와 봉사, 뛰어난 민정 또는 군사적 공훈, 과학과 예술 분야의 뛰어난 업적에 대한 상으로 멕시코 독수리 제국 훈장을 제정했다.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받은 멕시코 의회는 아메리카 대륙에 군주제 동맹국을 세우려는 계획에 따라 제2제국을 수립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이 국민투표를 통해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로 즉위하는 것이 승인되었다.

당시 멕시코 국내에서 다수였던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로부터 주로 지지를 받았으며, 원주민 출신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 하에서 비참한 상황에 이르렀던 정치 불안과 혁명의 반복을 종식시키고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멕시코 귀족들로부터 주요 자금이 모금되었다.

막시밀리안 황제의 통치는 끊임없는 분쟁 속에 있었다. 1864년 벨기에 레오폴드 1세의 딸 멕시코 황후 카를로타와 함께 멕시코에 도착했을 때, 막시밀리안을 지지하는 보수파와 베니토 후아레스가 이끄는 자유주의자들은 정쟁 중에 있었다. 보수파는 멕시코시티를 중심으로 중앙 멕시코를, 자유주의자들은 베라크루스를 중심으로 했다. 보수파는 유럽, 특히 스페인 여왕 이사벨 2세와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았고, 자유주의자들은 미국 대통령 링컨과 존슨을 배후에 두었다.

1867년 막시밀리안은 폐위되었고, 베니토 후아레스의 명령으로 케레타로 근교 세로 데 라스 캄파나스에서 처형되었다. 막시밀리안은 멕시코에 운명을 느끼고 헌신했으며, 멕시코 제1제정의 황제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의 손자를 양자로 삼았다.

나폴레옹 3세는 단순히 프랑스의 채권을 회수하는 것 이상의 야심을 품고 있었다. 외제니 황후의 영향으로 멕시코의 군주제를 부활시키려 했던 것이다. 1861년 이전에는 미국이 유럽 열강의 멕시코 내정 간섭을 미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각국은 미국과 분쟁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1861년 미국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다른 나라에 간섭할 여력이 없었다. 멕시코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한 외제니 황후의 권유로 나폴레옹 3세는 이 틈을 노렸다.

3. 1. 중앙 정부와 행정 제도

막시밀리아노 1세는 1865년에 임시 법령을 공포하여 정부의 기본 틀을 마련했다.[37] 황제는 9개의 부처를 통해 통치했는데, 각 부처는 다음과 같다.

부처
궁내부
국무부
외무부
육군부
내무부
재무부
사법부
교육·종교부
개발부



궁내부를 제외한 이들 부처는 국무회의를 구성하여 황제가 회부한 사안들을 논의했다. 황제는 궁내부 장관과 국무장관을 임명할 권한이 있었고, 국무장관(직권으로 국무회의 의장을 겸임)은 나머지 장관들을 임명했다.[37]

또한, 법안을 작성하고 황제에게 자문하는 국무원과 황제의 연락 담당 역할을 하는 별도의 비밀 내각(멕시코 막시밀리안 1세의 내각)이 있었는데, 이는 민정과 군정으로 나뉘었다. 카를로타 황후는 막시밀리안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경우 섭정으로서의 권한을 부여받았으며,[38] 이로써 멕시코와 아메리카 대륙을 통치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39][40][41][42]

3. 2. 영토 분할

제2 멕시코 제국의 주들


마누엘 오로스코 이 베라에게 새로운 영토 분할 설계 작업을 맡긴 막시밀리아노 1세는 역사적 유대, 전통적 충성심, 지역 집단의 이익 대신 과학적 기준에 따라 영토를 재편성하고자 했다.[102]

이 작업은 다음 기준에 따라 수행되었다.

  • 영토는 최소 50개의 주로 나뉘어야 한다.
  • 가능하면 자연 경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 각 주의 영토 범위는 지형, 기후 및 생산 요소를 고려하여 적절한 시기에 거의 동일한 수의 주민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102]


1865년 3월 13일, 멕시코 제국의 영토 분할에 관한 새로운 법률이 공포되었다.[103] 제국은 50개의 주(departamentos)로 나뉘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모든 주가 관리될 수는 없었다.

주 이름
아카풀코(Acapulco)
아과스칼리엔테스
알라모스
애리조나
아우틀란
바토필라스
바하 캘리포니아
캄페체
치아파스
치와와
코아우일라
코알코만
콜리마
두랑고
에후틀라
엘 포토시
프레스니요
과나후아토
게레로
우에후킬랴
이투르비데
할리스코
라 라구나
마피미
마타모로스(Matamoros)
마테우알라
마사틀란(Mazatlán)
미초아칸
나야리트
나사스
누에보 레온
오아하카
푸에블라
케레타로
시날로아
소노라
타바스코
타마울리파스
탄시타로
테우안테펙
테포스콜라
트라스칼라
톨루카(Toluca)
투라
툴란싱고
툭스판
바예 데 메히코
베라크루스
유카탄
사카테카스



멕시코 제2제국의 주

3. 3. 주요 정책

막시밀리아노 1세는 멕시코의 개혁 법률을 확인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보수파의 반발을 샀다.[20]

황실에서 영접받는 키카푸족 사절단.


막시밀리아노는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존중하고 보호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인디언법과 부왕 시대를 그리워하는 원주민들의 지지를 받았다.[51][52] 그는 원주민 공동체의 법적 지위를 회복하고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제정했다.[63] 또한, 원주민들을 강제 징집으로부터 보호하고, 나우아틀어를 배우는 등 원주민 문화에 대한 존중을 표했다.[59]

그는 노동자, 특히 원주민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막시밀리안은 원주민에게 생계비를 보장하고 체벌을 금지하며, 채무 상속을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려고 시도했다.[45] 또한 8시간 노동제를 선포하고, 노점상을 폐지하는 등 빈곤층을 위한 정책을 펼쳤다.[74]

막시밀리아노는 인종에 관계없이 이민을 개방하여 국가 발전을 촉진하고자 했다.[48] 미국, 남부 연합 이전의 주들, 유럽, 아시아에서의 이민을 장려하기 위해 이민 기관이 설립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식민지 정착지 중에는 빌라 카를로타와 뉴 버지니아 식민지가 있다.[49] 그는 또한 미국 남부 출신의 연합군 이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제도 폐지를 촉진했다.[76]

4. 경제

멕시코 제2제국은 나폴레옹 3세의 주도 하에 멕시코의 군주제를 부활시키려 한 시도였다. 이는 프랑스가 서반구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남아메리카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모르니 공작이 멕시코 국채의 대주주였다는 점도 프랑스의 개입에 영향을 미쳤다.[77]

먼로 독트린으로 인해, 1861년 이전에는 미국이 유럽 열강의 멕시코 내정 간섭을 경계했다. 그러나 남북 전쟁 발발로 미국의 감시가 약해진 틈을 타 프랑스가 개입했다.

멕시코 국내에서는 아시엔다 소유주, 보수파 인사들과 가톨릭 신자들이 제2제국을 지지했다. 이들은 베니토 후아레스 정권 하의 정치 불안과 혁명을 종식시키고 정세를 안정시키고자 했다.

4. 1. 철도 건설

멕시코 철도, 호세 마리아 벨라스코 고메스의 1877년 다리


황제가 직면한 주요 과제 중 하나는 제국의 여러 지역을 연결할 충분한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주요 목표는 베라크루스 항구와 수도 멕시코시티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1857년, 안토니오 에스칸돈(Don Antonio Escandón)은 베라크루스 항구에서 멕시코시티를 거쳐 태평양까지 철도를 건설할 권리를 확보했다. 혁명과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해 1864년 막시밀리안 황제 통치하에 멕시코 제국 철도 회사(Imperial Mexican Railway Company)가 철도 건설을 시작할 때까지 자금 조달이나 건설이 지지부진했다. 정치적 격변은 계속해서 진행을 방해했고,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까지의 초기 구간은 9년 후인 1873년 1월 1일에 세바스티안 레르도 데 테하다 대통령에 의해 개통되었다.

1857년, 정부 양허의 원래 소유주였던 마소 형제(Masso Brothers)는 7월 4일 멕시코시티의 트라텔롤코(Tlatelolco)에서 인근 마을인 과달루페 이달고까지 열차 서비스를 개시했다.[77] 결국 자금이 부족해지자 마누엘 에스칸돈(Manuel Escandón)과 안토니오 에스칸돈에게 매각하기로 결정했다.[78] 에스칸돈 형제는 프로젝트를 계속 진행했고, 안토니오 에스칸돈은 그 해 말에 미국과 영국을 방문했다. 미국에서는 앤드류 탈콧(Andrew Talcott)을 고용했고, 영국에서는 회사 주식을 매각했다. 오리사바(Orizaba)에서 말트라타(Maltrata)까지의 노선 탐사는 앤드류 H. 탈콧(Andrew H. Talcott)과 파스쿠알 알마산(Pascual Almazán) 엔지니어가 수행했다.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 기간 동안 일부 철도가 파괴되었다. 유일한 해결책은 프랑스군과 에스칸돈 형제의 두 회사 간의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군은 공사에 대해 매월 120000FRF의 보조금을 회사에 제공하고, 회사는 5월까지 베라크루스에서 솔레다드 파라(Soledad para)까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했다. 회사는 1862년 8월 15일에 41km의 선로를 완공했다. 다음으로 62km 길이의 카마론(Camarón) 역에 도착했다. 1864년 10월 16일에는 76km 길이의 파소 델 마초(Paso del Macho)에 도착했다.[79]

1864년 9월 19일, 런던에 멕시코 제국 철도 회사(Compañía Limitada del Ferrocarril Imperial Mexicano)가 설립되어 이전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이 노선의 건설을 계속했다. 에스칸돈은 그의 권리를 새 회사에 양도했다. 스미스, 나이트 앤 코(Smith, Knight and Co.)는 1864년 멕시코 제국 철도 회사와 계약을 맺고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스까지의 노선 공사를 계속했다.[80] 윌리엄 엘리엇(William Elliot)은 멕시코 철도의 가장 어려운 구간 약 약 112.65km(112km) 건설에 3년 동안 수석 조수로 고용된 후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영국, 인도, 브라질에서 여러 해 동안 철도 건설 경험을 쌓았다. 브라질에서는 상파울루 주의 수석 엔지니어직을 역임했다.[81]

막시밀리안 1세는 라 솔레다드(La Soledad)에서 몬테 델 치키우이트(Monte del Chiquihuite)까지의 노선 건설을 위해 M. 라이온스(M. Lyons) 엔지니어를 고용했으며, 나중에 베라크루스에서 파소 델 마초까지의 노선에 합류했다.[82] 베라크루스와 멕시코시티에서의 공사가 계속 진행되는 동시에 말트라타에서도 공사가 시작되었다. 1867년 6월 제국이 멸망했을 때, 베라크루스에서 파소 델 마초까지 76km(라이온스의 양허의 일부)가 기능하고 있었고, 멕시코시티에서 아피사코(Apizaco)까지 139km의 노선이 건설되었다.[83]

4. 2. 은행 제도

1864년 이전 멕시코에는 은행 시스템이 없었다. 종교 기관이 주로 토지나 도시 부동산을 소유한 엘리트 계층에게 신용을 제공했다. 프랑스의 멕시코 개입 기간 동안 영국 은행 지점이 개설되었다. 런던 멕시코 및 남미 은행 유한회사(London Bank of Mexico and South America Ltd.)는 2500000페소의 자본금으로 운영을 시작했다. 이 은행은 베링 브라더스 그룹에 속해 있었으며, 멕시코시티 도심의 카푸치나스 거리와 레르도 거리가 교차하는 모퉁이에 본사를 두고 있었다.[84]

4. 3. 대외 무역

미국 남북 전쟁이 발발할 당시, 마타모로스는 브라운스빌과 리오그란데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작고 조용한 국경 도시였다.[85] 항구로 여겨졌지만, 입항하는 배는 매년 6척을 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86] 그러나 4년 만에 텍사스와의 근접성 덕분에 마타모로스는 활기 넘치는 항구가 되었고, 인구도 크게 증가했다.

1865년, 한 연방군 장군은 마타모로스 항구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바그다드와 마타모로스에는 목화 무역으로 인해 연방과 남부 연합, 영국, 프랑스, 독일에서 온 2만 명이 넘는 투기꾼들이 몰려들었다.[88] 바그다드는 작은 해안 도시에서 "정식 도시"로 성장했다.[89] 1864년에는 영어 사용 인구가 매우 많아 마타모로스에 영어 신문인 "마타모로스 모닝 콜(Matamoros Morning Call)"이 발행될 정도였다.[90]

이 항구는 영국과 프랑스로 목화를 수출하는 주요 거점이었는데, 이곳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 목화가 필요했다.[91] 남부 연합에서는 파운드당 약 3센트였던 목화를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파운드당 50센트의 금으로 받을 수 있었고, "뉴욕과 유럽 항구에 도착한 목화는 훨씬 더 많은 돈을 벌어들였습니다."[92] 다른 자료에 따르면 마타모로스 항구는 런던, 하바나, 벨리즈, 뉴올리언스와 무역을 했다.[93][94] 마타모로스와 뉴욕 간의 무역 협정은 전쟁 내내 1864년까지 계속되었으며, "활발하고 수익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95]

1865년, 마타모로스는 3만 명의 인구를 가진 번영하는 도시로 묘사되었고,[96] 루 월리스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에게 볼티모어뉴올리언스도 마타모로스의 성장하는 상업 활동과 비교할 수 없다고 알렸다.[86] 그러나 남부 연합의 붕괴 이후 마타모로스에는 "침울함, 낙담, 절망"이 나타났다. 시장은 문을 닫았고, 사업은 거의 사라졌으며, 배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97] "매각" 표지판이 도처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타모로스는 리오그란데 강 건너편의 조용한 작은 국경 도시로 돌아갔다.[98]

5. 사회

막시밀리아노 1세는 세습 부채, 체벌, 아동 노동을 금지하고, 노동 시간 제한, 주 1일 휴식, 직원 자녀 학교 제공 의무화 등 소외 계층을 위한 다양한 사회 정책을 펼쳤다.[74] 빈곤층을 위해 노점상 폐지 정책도 시행했다.[74]

'빈곤 계층 보호 위원회'를 통해 농촌 노동 규제, 민족 갈등 및 토지/물 소유권 분쟁 중재, 인디오 공동체 토지 보호, 에히도 재분배 등을 추진했다.[75] 또한 원주민, 농민, 노동자들의 빈곤 해결을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산업 사회에서 이들의 사회적 위치와 보호 방법에 대한 논의를 통해 불만을 해소하고자 했다.[75]

이러한 정책은 인디오와 소외 계층의 빈곤 해결, 막시밀리아노의 박애주의적 성격,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고뇌에서 기인했다.[75] 그는 "불운한 계층의 상태를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75]

막시밀리안은 미국 남부 출신 연합군 이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제도 폐지를 촉진하며, 멕시코 땅을 밟은 흑인들은 자유인임을 선언했다.[76]

5. 1. 원주민 정책

막시밀리아노 1세는 원주민 보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865년 6월과 9월에는 원주민 공동체의 법적 지위를 회복하고, 그들이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나 정부로부터 받은 토지에 대한 집단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률을 공포했다.[63] 이는 개혁 법률로 인해 토지를 잃었던 원주민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또한, 막시밀리아노 1세는 원주민 강제 징집을 금지했다.[63] 당시 멕시코 공화국 군대는 원주민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전투에 참여시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원주민 사회에 큰 불만을 야기했다. 막시밀리아노 1세의 정책은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막시밀리아노 1세는 원주민 문화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우아틀어를 배우려고 노력했으며,[59] 법률을 스페인어와 나우아틀어로 모두 발표했다.[60] 또한, 나우아틀어 학자인 파우스티노 갈리시아를 정부 고문으로 임명하여 원주민 관련 정책에 조언을 구했다.[60]

막시밀리아노 1세는 원주민 출신 지식인들을 등용하여 원주민 귀족 계층을 복원하려 했다.[64] 틀라토아니의 후계자인 파우스티노 키말포포카(Faustino Chimalpopoca)와 호세파 바렐라 등은 궁정과 가까운 원주민 지식인 모임을 만들어 활동했다.[75] 이들은 원주민 문화를 보존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황제 부부에게 원주민 관련 문제에 대해 조언했다.[75]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의 원주민 정책은 멕시코 프랑스 제2차 간섭이라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많은 원주민 공동체는 제국을 지지했지만,[50] 게레로의 공화국 지지 공동체나 아파치족, 유카탄 마야인과 같이 제국에 저항하는 세력도 있었다.[53]

5. 2. 종교 정책

막시밀리안 1세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였다.[20] 그는 교황 특사에게 종교의 자유와 교회 재산 국유화에 관한 자유주의 개혁법을 확인시켜 주었다.[20] 이로 인해 황제는 가톨릭 성직자들과 많은 멕시코 보수파들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20]

1864년 12월, 교황 특사는 멕시코에 도착하여 교황 비오 9세의 요청대로 가톨릭 교회의 특권 회복을 요구했다.[69]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69]

교황 비오 9세의 요구
다른 종교를 배제하고 가톨릭을 국교로 삼을 것
주교들이 자유롭게 사목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할 것
교회의 재산을 보호할 것
공교육을 교회가 감독할 것
교회를 정부로부터 독립시킬 것



그러나 막시밀리안은 1864년 12월 17일에 9개 항의 조약을 역제안했는데, 이는 왕권주의적 성격으로 교황청의 입장과 충돌했다.[69]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69]

막시밀리안의 역제안
정부는 가톨릭을 보호하지만, 다른 종교도 허용한다.
성직자에게 급여를 지급한다.
성직자는 무료로 성사를 집행한다.
교회 재산에서 얻는 수입은 정부에 양도한다.



막시밀리안은 종교의 자유를 옹호했는데, 이는 그의 군대에 다양한 종교를 가진 군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70] 또한, 멕시코 발전을 위해 전 세계 이민자들을 유치하려면 종교적 관용이 필요했다.[70]

막시밀리안은 프랑스 군 지휘관들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왕권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70] 성직자는 국가가 지원하는 공무원처럼 행동해야 하며, 교황청이 자체적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경제적으로 독립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21]

1866년, 펠라지오 안토니오 데 라바스티다 이 다발로스 대주교와 멕시코 주교회의는 가톨릭 사회 교리에 더 부합하는 조약을 맺었지만, 이는 제국의 패배가 임박했기 때문이었다.[31] 이 조약은 가톨릭을 국교로 명시하고, 주교에게 출판물 검열권을 부여하며, 교황청과의 자유로운 소통을 보장했다.[31] 또한, 막시밀리안은 교회 재산을 반환하고 신학교와 교육 기관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31]

5. 3. 사회 정책

막시밀리안은 소외 계층을 위해 다양한 사회 정책을 펼쳤다. 제국 칙령을 통해 세습 부채, 체벌, 아동 노동을 금지했다.[74] 고용주에게는 주 1일 휴식과 직원 자녀를 위한 학교 제공을 의무화했으며, 8시간 노동제를 선포했다.[74] 빈곤층을 위한 조치에는 노점상 폐지도 포함되었다.[74]

'빈곤 계층 보호 위원회'(Junta Protectora de Clases Menesterosas)는 농촌 노동을 규제하고, 민족 간 갈등이나 토지 및 물 소유권 분쟁을 중재했다.[75] 인디오 공동체 토지를 보호하고, 법적 재산과 에히도(ejidos)를 빼앗긴 사람들에게는 재분배 정책을 통해 재산을 제공했다.[75] 새로운 산업 사회에 직면한 원주민, 농민, 노동자들의 극심한 빈곤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조치도 취했다.[75] 사회에서 원주민의 위치와 그들을 보호하는 방법에 대한 논의와 함께, 멕시코 대중의 경제적, 사회적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어 불만을 해결하고자 했다.[75]

이러한 법률은 인디오와 몰수 이후 소외된 계층의 극심한 빈곤 상황을 해결하려는 노력, 그리고 막시밀리아노의 박애주의적 성격 및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된 고뇌에서 기인했다.[75] 그는 "불운한 계층의 상태를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개선"하고자 했다.[75]

또한 막시밀리안은 미국 남부 출신 연합군 이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제도 폐지를 촉진했다. 멕시코 땅을 밟은 흑인들은 자유인이라는 선언을 통해서였다.[76]

6. 유산

멕시코 제2제국은 비록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멕시코 역사에 여러 유산을 남겼다. 특히 건축과 문화 분야에서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6. 1. 건축 유산

막시밀리안의 건설 프로젝트는 제2멕시코 제국이 몇 년 만에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멕시코시티의 중요한 랜드마크로 남아있다.

막시밀리안은 왕궁으로 멕시코시티의 전 부왕령 빌라를 개조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곳은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차풀테펙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도 유명했다. 그 결과 차풀테펙 성이 건설되었는데, 이 성은 북아메리카에서 군주가 사용한 유일한 성이다. 제국 몰락 후 차풀테펙 성은 1940년 박물관으로 개조될 때까지 멕시코 대통령의 공식 관저로 사용되었다.[104]

막시밀리안은 궁전과 멕시코시티의 정부 청사를 연결하기 위해 파세오 데 라 엠페라트리스 (황후의 산책로)라는 도로를 건설했다. 제국 몰락 후 정부는 라 레포르마를 기념하여 이 도로의 이름을 파세오 데 라 레포르마 (개혁의 산책로)로 변경했다. 현재 이 도로는 수도에서 가장 중요한 대로 중 하나이며 시민 기념물들이 늘어서 있다.[105]

멕시코 요리에서 널리 사용되는 빵 종류인 볼리요는 막시밀리안의 요리사들에 의해 멕시코에 전래되었으며, 제국 시대의 또 다른 유산으로 남아있다.[106]

6. 2. 문화 유산

멕시코 요리(Mexican cuisine)에서 널리 사용되는 빵 종류인 볼리요(bolillo)는 막시밀리안의 요리사들에 의해 멕시코에 전래되었으며, 제2멕시코 제국 시대의 또 다른 유산으로 남아있다.[106]

7. 대중문화

1970년 영화 《시스터 사라를 위한 두 마리 노새》는 멕시코 제2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셜리 맥레인이 연기한 두 주인공은 멕시코 저항군을 돕고 프랑스 주둔군을 제압한다.

1969년 영화 《무적》은 존 웨인록 허드슨이 주연을 맡았으며, 멕시코 프랑스 간섭 시대의 사건을 묘사한다. 이 영화는 남북 전쟁 후 멕시코로 도망친 남부 동맹 장군 스터링 프라이스의 탈출과 막시밀리안의 군대에 합류하려는 그의 시도를 바탕으로 한다.[1]

1965년 영화 《메이저 던디》는 찰턴 헤스톤과 리처드 해리스가 주연을 맡았으며, 북군 기병대가 멕시코로 들어가 미국 남북 전쟁 말기에 프랑스군과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2]

1954년 영화 《베라크루스》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가리 쿠퍼와 버트 랭커스터의 캐릭터가 차풀테펙 성에서 막시밀리안과 사격 대결을 펼치는 장면이 있다. 막시밀리안은 조지 맥레디가 연기했는데, 당시 54세였던 그는 1866년 황제였던 막시밀리안보다 20살 많았다.[3]

1939년 영화 《후아레스》는 폴 무니베니토 후아레스 역을, 베티 데이비스가 카를로타 황후 역을, 브라이언 에어니가 막시밀리안 황제 역을 맡았다. 이 영화는 버티타 하딩의 소설 ''유령 왕관''(1937)을 바탕으로 한다.[4]

멕시코 대중문화에서는 "엘 카루아헤"(1967)와 같은 연속극, 연극, 영화, 그리고 페르난도 델 파소의 ''임페리오의 뉴스''(1987)와 같은 역사 소설이 있다. 1860년대부터 전기, 회고록, 소설이 출판되었으며, 최근에는 여러 언어로 출판된 그리스의 마이클 왕자의 ''이별의 황후''가 있다.[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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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뉴스 Port of Matamoros: "gloom, despondency, and despair" 186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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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학술지 Reviewed work: The Matamoros Trade: Confederate Commerce, Diplomacy, and Intrigue., James W. Daddysman Southern Historical Association 1984-11
[100] 뉴스 Cuando el río Bravo era navegable http://www.zocalo.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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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간행물 Biografía, bibliografía e iconografía de don Manuel Orozco y Berra Compañía Editora e Impresora "La Afición"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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