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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에스파냐 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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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에스파냐 왕녀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의 장녀로, 프랑스의 루이 15세와의 약혼이 파기된 후 포르투갈의 주앙 5세와 결혼했다. 이후 포르투갈 왕비가 되었으며, 남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섭정으로 임명되어 통치했다. 그녀는 딸 마리아 1세가 즉위한 후 스페인과의 관계 개선에 힘썼으며, 류머티즘과 심장병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 그녀는 여러 명의 딸을 두었으며, 현재 스페인, 벨기에, 룩셈부르크 왕실 등의 선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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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에스파냐 왕녀
기본 정보
도메니코 마리아 사니가 카세르타 궁전에서 그린 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보르본 이 파르네시오, 포르투갈 왕비 초상화
도메니코 마리아 사니가 카세르타 궁전에서 그린 마리아나 빅토리아 데 보르본 이 파르네시오, 포르투갈 왕비 초상화
칭호포르투갈 왕비
재위 기간1750년 7월 31일 – 1777년 2월 24일
배우자주제 1세 (1729년 결혼, 1777년 사별)
자녀마리아 1세
마리아나 왕녀
도르테이아 왕녀
베네디타, 브라질 공주
전체 이름

가문부르봉 가문
아버지펠리페 5세
어머니엘리사베타 파르네세
출생일1718년 3월 31일
출생 장소마드리드 왕궁, 마드리드, 스페인
사망일1781년 1월 15일 (62세)
사망 장소아주다 왕실 막사, 리스본, 포르투갈
매장일1781년 1월 17일
매장 장소브라간사 왕가 판테온, 상 비센트 데 포라 수도원, 리스본, 포르투갈
마리아나 빅토리아 서명
마리아나 빅토리아 서명

2. 생애

스페인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엘리자베타 파르네세의 장녀로 마드리드 왕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쪽 할머니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의 이름을 따랐으며, 어머니 엘리자베타의 총애를 받아 "마리아니타"라고 불렸다. 어린 시절 프랑스의 왕태자 루이(훗날 루이 15세)와 약혼하여 프랑스에서 자랐으나, 약혼이 파기되어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1729년, 포르투갈 국왕 주앙 5세의 아들 주제와 결혼했다. 슬하에 딸만 두었기 때문에 장녀가 마리아 1세로 즉위했다. 1774년 남편 요제 1세로부터 섭정으로 임명되어 1777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통치에 관여했다.

2. 1. 어린 시절 및 프랑스와의 약혼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 이사벨 디 파르네시오의 장녀로, 마드리드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할머니 마리아 아나 폰 바이에른 선제후녀에서 따왔으며, 어머니가 가장 총애하던 딸이었다. 출생 당시, 이복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 루이스, 페르난도 왕자, 페드로 왕자, 그리고 친 오빠인 카를로스 왕자에 이어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5위였다. ''스페인 공주''로서 ''전하''라는 존칭을 사용했다.

루이 15세와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초상화, 알렉시 시몽 벨의 작품


어린 시절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미상 화가


1726년경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사자 동맹 전쟁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은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와 그녀의 사촌인 어린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약혼을 통해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혼은 필리프 2세, 오를레앙 공작이 주최했으며, 11세의 루이 15세를 위한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는[1] 필리페 5세의 장남 아스투리아스 공 루이 1세와 루이즈 엘리자베스 도를레앙, 그리고 필리핀 엘리자베스 도를레앙과 어린 스페인의 카를 3세 사이의 또 다른 약혼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약혼의 일부였다.[2]

루이 드 루브로이, 생시몽 공작은 1721년 11월 25일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약혼을 요청했다. 어린 공주와 "몽팡시에 양"의 교환은 "꿩 섬"에서 이루어졌으며, 그곳은 그들의 공동 조상인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가 1660년에 만났던 곳이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1722년 3월 2일 파리에 도착하여 루브르 궁전에 거주했다. 어린 공주는 부부가 마리아나 빅토리아가 더 성숙해질 때까지 결혼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여왕 공주"라는 별명을 얻었다.[2]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루이 15세에게 경외심을 느꼈지만, 왕은 그녀를 피했다.[3]

섭정의 어머니인 팔라티네이트의 엘리자베스 샤를로테에 따르면,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가장 달콤하고 예쁜 작은 것"이었으며 나이에 비해 상당한 재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교육은 루이 14세와 라 발리에르의 루이즈의 사생아인 마리 안 드 부르봉이 맡았고, 방타두르 부인이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1723년 2월, 루이 15세는 성년이 되어 자신의 뜻에 따라 나라를 통치했다.[4]

그러나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 수상과 그의 정부 프리에 부인의 영향으로 1725년 3월 11일, 일곱 살의 마리아나 빅토리아를 스페인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부르봉은 어린 루이 15세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싶어했으며,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달리 아이를 가질 수 있을 만큼 나이가 든 누이 부르봉의 앙리에트 루이즈를 잠재적인 아내로 제시했다. 스페인은 루이 1세로 7개월 동안 통치하고 사망한 남편에 의해 루이즈 엘리자베스 도를레앙을 거부했고, 그들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하고 여동생 필리핀 엘리자베스 도를레앙과 함께 프랑스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1725년 4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국경으로 갔고, 그곳에서 그녀와 두 오를레앙 딸들이 교환되었다. 루이 15세는 1725년 9월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했고,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여동생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는 1745년에 루이 15세의 아들과 결혼하여 모욕당한 스페인 궁정을 안심시켰다.

2. 2. 프랑스와의 약혼 파기 및 포르투갈 왕자와의 결혼

사자 동맹 전쟁 이후, 프랑스와 스페인은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공주와 그녀의 사촌인 어린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약혼을 통해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혼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에 의해 주최되었으며,[1] 아스투리아스 공 루이 1세와 루이즈 엘리자베스 도를레앙, 필리핀 엘리자베스 도를레앙과 어린 스페인의 카를 3세 사이의 약혼도 함께 이루어졌다.[2]

루이 드 루브로이, 생시몽 공작은 1721년 11월 25일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루이 15세의 약혼을 요청했다. 어린 공주와 "몽팡시에 양"의 교환은 꿩 섬에서 이루어졌는데, 이곳은 그들의 공동 조상인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가 1660년에 만났던 곳이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1722년 3월 2일 파리에 도착하여 루브르 궁전에 거주했다. 어린 공주는 "여왕 공주"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루이 15세는 그녀를 피했다.[2][3]

팔라티네이트의 엘리자베스 샤를로테에 따르면,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가장 달콤하고 예쁜 작은 것"이었으며 나이에 비해 상당한 재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교육은 루이 14세와 라 발리에르의 루이즈의 사생아인 마리 안 드 부르봉이 맡았고, 방타두르 부인이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1723년 2월, 루이 15세는 성년이 되어 자신의 뜻에 따라 나라를 통치했다.[4]

그러나 부르봉 공작 루이 앙리 수상과 그의 정부 프리에 부인의 영향으로 1725년 3월 11일, 일곱 살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졌다. 부르봉은 루이 15세의 아내로 자신의 누이 부르봉의 앙리에트 루이즈를 추천했다. 스페인은 루이즈 엘리자베스 도를레앙을 거부하고 프랑스로 돌려보냈으며,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1725년 4월 5일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국경으로 갔다. 루이 15세는 마리 레슈친스카와 결혼했고,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여동생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는 1745년에 루이 15세의 아들과 결혼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와의 외교적 균열에 분노하여 오스트리아와 1725년 빈 조약을 체결했고,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지원을 구했다.

1727년 포르투갈 왕국과의 결혼 협상이 시작되어,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의 왕태자 주제와, 그녀의 이복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는 주제의 누나 바르바라와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 1729년 1월 19일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주제와 결혼했고, 두 사람은 사냥과 예술을 즐겼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 넷이 살아남았다. 딸들에게 프랑스 왕족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왔지만,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모두 거절했다. 1750년 시아버지 주앙 5세가 죽자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다.

2. 3. 포르투갈 왕비 시절

1727년 포르투갈 왕국과의 결혼 협상이 시작되어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의 왕태자 주제와, 그녀의 이복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 페르난도는 주제의 누나이자 포르투갈의 공주 바르바라와 결혼하기로 결정되었다.[5][6] 1729년 1월 19일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엘바스에서 주제와 결혼했다.[6] 두 사람은 사냥과 예술을 좋아한다는 공통된 취미가 있었으며, 뛰어난 가수였던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와 극장을 후원했지만, 둘 다 열정적인 종교인이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고 그 중 넷이 살아남았다.[7] 딸들에게 프랑스의 왕족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왔을 때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이를 모두 거절했다.[8] 1750년 시아버지 주앙 5세가 죽자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포르투갈의 왕비가 되었다.

남편 요제 1세의 통치는 국모가 총애했던 폼발 후작의 영향력에 지배당했다. 요제 1세는 곧 폼발에게 국가 통치를 맡겼고, 폼발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궁정에서 교회의 영향력과 자신의 적들의 영향력을 제거했다. 마리아나 비토리아와 그녀의 딸은 폼발이 요제 1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싫어했다. 남편의 통치는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얼룩졌다. 이 지진으로 10만 명이 사망했고, 요제 1세는 심각한 폐쇄 공포증을 겪게 되어 다시는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 안에서 편안하게 생활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왕실을 아주다 언덕에 있는 광대한 텐트 단지로 옮겼다. 지진 이후 리스본의 재건을 조직한 사람은 폼발이었다.

1759년, 남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타보라 사건이 발생했고, 폼발의 눈에 강력한 타보라 가문은 공격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었다. 폼발은 나중에 귀족 가문의 모든 구성원의 처형을 명령했고, 마리아나 비토리아와 그녀의 딸 브라질 공주의 개입으로 몇몇 여성과 아이들이 목숨을 건졌다. 폼발이 사실상 국가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마리아나 비토리아와 그녀의 남편은 정치에서 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

2. 4. 섭정 및 말년

요제 1세의 장인 주앙 5세가 1750년에 사망하면서,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남편은 포르투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요제 1세는 곧 ''폼발 후작''에게 국가 통치를 맡겼고, 폼발 후작은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여 궁정에서 교회의 영향력과 자신의 적들의 영향력을 제거했다. 마리아나 빅토리아와 그녀의 딸은 폼발이 요제 1세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싫어했다.[9]

1759년, 남편에 대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타보라 사건''이 발생했고, 폼발은 타보라 가문이 공격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폼발은 귀족 가문의 모든 구성원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마리아나 비토리아와 브라질 공주의 개입으로 몇몇 여성과 아이들은 목숨을 건졌다. 폼발이 사실상 국가의 통치자였기 때문에 마리아나 비토리아와 그녀의 남편은 정치에서 덜 두드러진 역할을 했다.[9]

일련의 뇌졸중을 겪은 요제 1세는 아내가 정부 수반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대신하도록 허락했다.[9] 1776년 11월 29일,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섭정으로 임명되었고, 1777년 2월 24일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9] 남편이 죽자 장녀가 최초의 여왕인 마리아 1세가 되었다. 마리아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딸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딸은 종종 국정에 관해 어머니의 조언을 구했다. 마리아 1세의 통치 초기에 폼발은 시골로 추방되었다.[9]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초상화(1773년경, 미겔 안토니우 두 아마랄 제작)


딸이 정권을 잡자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자신의 형이자 스페인 국왕인 카를로스 3세가 통치하는 스페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두 나라는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 소유권을 두고 갈등을 겪고 있었다. 1777년 10월 28일 포르투갈을 떠난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스페인으로 가서 1년 넘게 머물렀으며, 아란후에스 왕궁과 마드리드에서 거주했다.[10]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두 나라 사이에 조약을 체결하는 데 기여했는데, 이 조약은 그녀의 손자녀들의 이중 결혼으로 굳건해졌다. 이 결혼은 카를로스 3세의 아들 스페인 가브리엘 왕자와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손녀인 마리아나 비토리아 공주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결혼은 카를로스 3세의 맏손녀인 스페인 카를로타 공주와 포르투갈 주앙 6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류머티즘 발작을 겪었고 1778년 8월 한동안 휠체어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녀는 1778년 11월 포르투갈로 돌아왔다. 그녀는 심장병을 앓고 있음이 분명해지면서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11] 노령의 마리아나 비토리아는 현재 아유다 국립 궁전이 있는 건물인 ''헤알 바라카 드 아유다''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리스본의 성 파올라 성당에 묻혔다.

3. 자녀


  • 마리아 1세 (1734년 - 1816년): 숙부인 페드루 3세와 결혼하여 공동으로 왕위를 이었다.
  • 마리아나 프란시스카 (1736년 - 1813년): 프랑스 루이 15세의 후계자 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신부 후보였으나 마리아나 빅토리아 왕비가 혼담을 거부하여 독신으로 사망하였다.
  • 도로테이아 (1739년 - 1771년): 루이 필리프 조셉(프랑스 국왕 루이 필리프 1세의 아버지)의 신부 후보였으나 결혼을 거절하고 독신으로 사망하였다.
  • 베네디타 (1746년 - 1829년): 왕세자 주세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4. 유산

마리아나 빅토리아의 문장: 포르투갈 문장과 부르봉 왕가의 합성 문장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모였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리스본이 파괴된 다음 날 태어났다. 마리아나 빅토리아는 스페인 국왕, 벨기에 국왕, 룩셈부르크 대공, 자칭 파르마 공작, 그리고 프랑스의 파리 백작에 이르기까지 후손을 두고 있다. 1822년, 그녀의 증손자 페드루는 브라질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2] 웹사이트 The Abdication of the throne of Spain by Felipe V (1724) http://www.heraldica[...] heraldica.org 2005-07-04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웹사이트 Maria Ana Vittoria Infanta de España http://wwperson.info[...]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Genealogie ascendante jusqu'au quatrieme degre inclusivement de tous les Rois et Princes de maisons souveraines de l'Europe actuellement vivans https://books.google[...] Frederic Guillaume Birnsti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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