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드루 1세 (브라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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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루 1세는 1798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태어나, 포르투갈 국왕 주앙 6세의 아들이자 브라질의 초대 황제였다. 그는 1822년 브라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입헌 군주제를 시행했으나, 아르헨티나와의 전쟁 패배, 경제 불안, 측실의 횡포 등으로 인해 인기가 하락하여 1831년 퇴위했다. 이후 포르투갈로 돌아가 동생 미겔 1세와 내전을 벌였고, 1834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브라질로 이장되었으며, 브라질 독립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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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루 1세 (브라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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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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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페드루 1세 |
전체 이름 | 페드루 데 알칸타라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주앙 카를루스 자비에르 데 파울라 미겔 하파엘 조아킴 주제 곤자가 파스쿠알 시프리아누 세라핌 |
칭호 | 브라간사 공작 |
왕가 | 브라간사 왕가 |
종교 | 가톨릭교회 |
출생일 | 1798년 10월 12일 |
출생지 |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켈루스 궁전 |
사망일 | 1834년 9월 24일 |
사망지 | 포르투갈, 켈루스 궁전 |
매장지 | 포르투의 라파 교회 (심장) 브라간사 왕가의 왕실 판테온 (몸; 1972년까지) 브라질 독립 기념비 (몸; 1972년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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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황제 | |
즉위 | 1822년 10월 12일 |
퇴위 | 1831년 4월 7일 |
대관식 | 1822년 12월 1일 제국 예배당 |
이전 국왕 | 주앙 6세 (브라질 국왕으로서) |
다음 국왕 | 페드루 2세 |
포르투갈 국왕 | |
즉위 | 1826년 3월 10일 |
퇴위 | 1826년 5월 2일 |
이전 국왕 | 주앙 6세 |
다음 국왕 | 마리아 2세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마리아 레오폴디나 데 아우스트리아 (1817년 결혼, 1826년 사망) 아멜리아 데 로이히텐베르크 (1829년 결혼) |
자녀 | 마리아 2세 주앙 카를루스, 베이라 공자 자누아리아, 브라질 황녀 파울라 공주 프란시스카, 조인빌 공주 페드루 2세, 브라질 황제 마리아 아멜리아 공주 사생아: 이사벨 마리아, 고이아스 여공작 마리아 이사벨, 이구아수 백작부인 |
아버지 | 주앙 6세 |
어머니 | 카를로타 조아키나 데 보르본 |
2. 생애
1798년 10월 12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당시 섭정이었던 주앙 왕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프란시스쿠가 일찍 사망하여 실질적인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1808년, 나폴레옹 군대의 침공을 피해 왕족과 함께 포르투갈령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로 피신하였다.
1816년 아버지가 주앙 6세로 즉위하면서 왕태자가 되었고, 이듬해 1817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나 대공녀와 결혼했다. 페드루는 복잡한 성격의 소유자로, 쾌활하면서도 때로는 폭력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1821년, 포르투갈 왕가가 리스본으로 귀환하게 되자 페드루는 브라질 섭정으로 남았다. 브라질 내 독립 요구가 거세지자 이를 받아들여 1822년 독립을 선언하고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페드루 1세'''로 즉위했다. 그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여 1824년 입헌 군주제 헌법을 제정했으나,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시스플라티나 주(현 우루과이)를 상실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인플레이션 상승, 각지에서의 반란, 애인 도미틸리아를 둘러싼 문제 등으로 인해 인기가 하락했다.
1826년 아버지 주앙 6세가 사망하자 포르투갈 왕위를 잠시 계승(페드루 4세)했으나,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통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하여 곧바로 장녀 마리아 2세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그러나 페드루 1세의 동생 미겔이 1828년 왕위를 찬탈하고 절대주의 정치를 펴면서 포르투갈은 내전에 휩싸였다.
1831년, 7월 혁명의 여파가 브라질에 미치고 근위대까지 폭동에 가담하는 등 국내 정치 불안정이 심화되자, 페드루 1세는 브라질 황제 자리에서 퇴위하고 어린 아들 페드루 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가 딸 마리아 2세의 정당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동생 미겔 1세에 맞서 포르투갈 내전(1828년-1834년)을 이끌었다. 내전은 자유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으나, 페드루 1세는 전쟁의 여파와 지병인 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1834년 9월 24일 리스본 근교 켈루스 왕궁에서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페드루는 1798년 10월 12일 오전 8시에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 켈루스 왕궁에서 태어났다.[1] 그는 성 알칸타라의 베드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의 전체 이름은 페드루 드 알칸타라 프란시스쿠 안토니우 조앙 카를루스 자비에르 드 파울라 미겔 라파엘 조아킴 호세 곤자가 파스쿠알 시프리아누 세라핌(Pedro de Alcântara Francisco António João Carlos Xavier de Paula Miguel Rafael Joaquim José Gonzaga Pascoal Cipriano Serafim)이었다. 그는 출생 시부터 존칭 "돔"(주(Lord))을 사용하여 불렸다.
아버지인 돈 조앙(나중에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6세가 됨)을 통해 페드루는 브라간사 왕가(포르투갈어: ''Bragança'')의 일원이었으며, 삼촌이자 조카 관계이기도 했던 국왕 돈 페드루 3세와 여왕 도나(레이디) 마리아 1세의 손자였다. 그의 어머니, 도냐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딸이었다. 페드루의 부모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야심 찬 여성이었고, 포르투갈의 이익을 해치는 경우에도 항상 스페인의 이익을 증진시키려 했다. 그녀는 남편에게 부정을 저질렀다는 평판을 받았으며, 불만을 품은 포르투갈 귀족들과 공모하여 남편을 전복하려는 음모까지 꾸몄다고 전해진다.
페드루는 조앙 왕자의 둘째 아들이자 넷째 자녀였으나, 1801년 그의 형 프란시스쿠 안토니우가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후계자이자 베이라 공(Prince of Beira)이 되었다. 당시 아버지 돈 조앙은 1792년에 치유 불가능한 정신 질환 진단을 받은 어머니 마리아 1세 여왕을 대신하여 섭정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802년경 페드루의 부모는 사이가 멀어져, 조앙은 마프라 국립 궁전에서, 카를로타 조아키나는 라말량 궁전(Ramalhão Palace)에서 각각 거주했다. 페드루와 그의 형제자매들은 켈루스 왕궁에서 할머니 마리아 1세와 함께 살았으며, 국가 행사에서만 부모를 만날 수 있었다.

1807년 11월 말, 페드루가 아홉 살이었을 때,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리스본으로 접근하자 포르투갈 왕가는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로 피신했다. 페드루와 그의 가족은 1808년 3월, 당시 포르투갈의 가장 크고 부유한 식민지였던 브라질령의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다.[2][38] 항해 중 페드루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읽고, 배의 승무원들과 대화하며 항해 기술을 익혔다. 브라질에서는 시립 궁전(Paço Imperial)에 잠시 머문 후, 동생 미겔 및 아버지와 함께 상 크리스토방 궁전(Paço de São Cristóvão)에 정착했다. 페드루는 아버지를 존경했지만 친밀한 관계는 아니었으며, 어머니 카를로타 조아키나가 아버지를 끊임없이 굴욕시키는 것에 분개했다. 성인이 된 후 페드루는 어머니에 대해 공공연히 경멸감을 드러내며 "개년(bitch)"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배신, 냉담, 방치의 경험은 페드루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 페드루에게 안정감을 준 인물은 어머니처럼 아꼈던 그의 ''아이야''(aia, 유모) 마리아 제노베바 도 레고 이 마토스와 그의 멘토가 된 ''아유''(aio, 감독관) 안토니우 데 아라비다 수사였다. 두 사람은 페드루의 양육을 책임지고 교육을 제공하려 노력했다. 그의 교육 과정에는 수학, 정치 경제학, 논리학, 역사, 지리학 등 다양한 과목이 포함되었다. 그는 포르투갈어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읽고 쓰고 말할 수 있었으며, 영어를 번역하고 독일어를 이해할 수 있었다.[3] 황제가 된 후에도 그는 매일 최소 두 시간을 공부와 독서에 할애했다.
그러나 페드루의 교육은 폭넓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점이 많았다. 역사가 옥타비우 타르퀴니우 드 소자는 페드루가 "의심할 여지 없이 지적이고, 재치 있으며, 통찰력이 있었다"고 평가했지만, 역사가 로데릭 J. 바르만은 그가 본질적으로 "너무 활기차고, 너무 변덕스러우며, 너무 감정적"이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충동적인 성향을 극복하지 못했고, 자기 통제나 자신의 결정이 가져올 결과를 평가하고 상황 변화에 따라 관점을 조정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페드루를 징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페드루는 매일 두 시간의 공부 시간이 정해져 있었지만, 때때로 더 흥미로운 활동을 위해 교사를 내쫓으며 공부를 피하기도 했다.

페드루는 학문보다는 신체 활동에서 더 큰 성취감을 느꼈다. 아버지의 산타 크루스 농장에서 그는 길들여지지 않은 말을 훈련시켰고 뛰어난 기수가 되었으며, 숙련된 장제사이기도 했다. 그와 동생 미겔은 낯선 땅이나 숲, 심지어 밤이나 악천후 속에서도 말을 타고 사냥을 즐겼다. 그는 그림과 수공예에도 재능을 보여 나무 조각과 가구 제작에 몰두했다. 또한 음악에도 소질이 있어 마르쿠스 포르투갈의 지도를 받아 유능한 작곡가(훗날 브라질의 독립 찬가를 작곡)가 되었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가졌고 플루트, 트롬본, 하프시코드, 바순, 바이올린, 기타 등 여러 악기에 능숙했으며, 특히 기타로는 대중적인 노래와 춤곡을 연주했다.
페드루는 습관이나 타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소탈한 면모를 보였다. 궁정 예복을 입어야 하는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면, 평소에는 흰색 면 바지, 줄무늬 면 재킷, 챙 넓은 밀짚모자를 착용하거나, 좀 더 격식을 차릴 때는 프록코트와 탑햇을 썼다.[4] 그는 종종 거리에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고충에 귀 기울였다.
페드루의 성격은 과잉 행동에 가까울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그는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했으며 지배적인 경향이 있었다. 쉽게 지루함을 느끼고 산만해졌으며, 사냥과 승마 외에는 여성들과의 교제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의 불안정한 기질은 모험을 추구하게 만들었고, 때로는 여행자로 변장하여 리우데자네이루의 평판이 좋지 않은 선술집을 드나들기도 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지만, 그는 고질적인 바람둥이였다. 그가 처음으로 지속적인 관계를 맺은 여성은 프랑스 댄서 노에미 티에리(Noémi Thierry)로 알려져 있으며, 그녀는 페드루의 아이를 사산했다. 당시 왕위에 오른 아버지 주앙 6세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딸인 마리아 레오폴디나 대공비와의 약혼을 위태롭게 하지 않기 위해 티에리를 추방했다.
1817년 5월 13일, 페드루는 대리 결혼을 통해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결혼했다. 그녀가 11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을 때, 페드루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잘생긴 모습임을 알고 즉시 사랑에 빠졌다. 당시 19세였던 페드루는 "열대 지방의 햇볕 아래서 여러 해를 보냈음에도 안색은 여전히 밝았고 뺨은 장밋빛이었다." 그는 준수한 외모에 평균보다 약간 큰 키, 밝은 갈색 눈과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 닐 매컬리는 "그의 훌륭한 외모는 어색한 나이에도 꼿꼿한 태도와 흠 잡을 데 없는 용모 덕분이었다. 습관적으로 깔끔하고 깨끗했던 그는 브라질의 잦은 목욕 습관을 받아들였다."고 묘사했다. 대리 결혼 서약을 비준하는 결혼 미사가 다음 날 거행되었다. 이 결혼을 통해 마리아 다 글로리아, 미겔 드 베이라 공(Miguel, Prince of Beira), 주앙 카를루스 드 베이라 공(João Carlos, Prince of Beira), 자누아리아 마리아, 파울라 지 브라간사, 프란시스카 지 브라간사와 훗날 브라질 황제가 되는 페드루 데 알칸타라 등 일곱 자녀가 태어났다.
2. 2. 브라질 독립

1820년 10월 17일, 포르투갈의 군사 주둔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리우데자네이루에 전해졌고, 이는 1820년 자유주의 혁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군대는 임시 정부를 구성하여 주앙 6세가 임명한 섭정을 대체하고, 헌법 제정을 목표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수백 년 된 포르투갈 의회인 코르테스(Cortes)를 소집했다. 페드루는 그의 아버지가 자신의 조언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대신하여 섭정으로 포르투갈에 파견하여 혁명가들을 진정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왕자는 통치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고, 이전에 국정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의 역할은 오히려 누나인 도나 마리아 테레사가 맡아왔다. 주앙 6세는 그녀의 조언에 의존했고, 그녀는 국무원의 일원이었다.
페드루는 그의 아버지와 왕의 측근 고문들에게 의심을 받았다. 이들은 모두 절대 군주제의 원칙을 고수했다. 반대로, 왕자는 자유주의와 입헌 군주제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볼테르, 벤자민 콘스탄트, 가에타노 필랑기에리 및 에드먼드 버크의 저서를 읽었다.[5] 심지어 그의 아내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남편은, 신이시여, 새로운 사상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 주앙 6세는 페드루가 포르투갈에 도착하면 혁명가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될 것을 우려하여 그의 출발을 가능한 한 늦췄다.
1821년 2월 26일, 리우데자네이루에 주둔한 포르투갈 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앙 6세와 그의 정부는 반란군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페드루는 스스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반군을 만나러 갔다. 그는 그들과 협상하여 새로운 내각을 임명하고 곧 제정될 포르투갈 헌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포함하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도록 아버지에게 설득했다.[6] 4월 21일, 리우데자네이루의 교구 선거인단은 상인 교환소에서 코르테스의 대표를 선출하기 위해 만났다. 소수의 선동가들이 회의를 점거하고 혁명 정부를 구성했다. 다시 한번, 주앙 6세와 그의 장관들은 수동적으로 남아 있었고, 왕은 혁명가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페드루는 주도권을 잡고 군대를 파견하여 질서를 회복했다.[7] 코르테스의 압력으로 주앙 6세와 그의 가족은 4월 26일 포르투갈로 떠났고, 페드루와 마리아 레오폴디나를 남겨두었다. 그는 출항하기 이틀 전, 왕은 아들에게 경고했다. "페드루, 브라질이 떨어져 나간다면, 저 모험가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를 존경할 너를 위해 그렇게 하도록 해라."[8]

페드루는 섭정을 시작하면서 개인 및 재산 권리를 보장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는 정부 지출과 세금을 줄였고, 부동산 소유주는 토지 몰수로부터 보호받았으며, 시민들은 영장 없이 체포되거나 형사 절차 없이 구금되지 않았다. 피의자는 48시간 이상 구금되지 않았고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었으며, 고문, 비밀 재판, 비인도적인 구금 역시 폐지되었다. 심지어 상인 거래소 사건에서 체포된 혁명가들까지 석방되었다. 1821년 6월 5일, 포르투갈 육군 중장 호르헤 아빌레즈 (후에 아빌레즈 백작) 휘하의 군대가 폭동을 일으켜 페드루가 포르투갈 헌법이 제정된 후 이를 준수하겠다고 서약할 것을 요구했다. 황태자는 폭동 진압을 위해 혼자 나섰다. 그는 침착하고 기민하게 협상하여 군인들의 존경을 얻고, 그들의 더 용납할 수 없는 요구의 영향을 줄이는 데 성공했다. 이 폭동은 페드루를 단순한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아빌레즈에게 넘기려는 얇게 위장된 쿠데타였다.[44] 황태자는 불만족스러운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압력에 굴복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계속되는 위기는 코르테스가 리우데자네이루의 중앙 정부를 해산하고 페드루의 귀환을 명령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 이것은 브라질인들에게 자국을 다시 포르투갈에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인식되었다. 브라질은 1815년 이후 식민지가 아니었고 왕국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1822년 1월 9일, 페드루는 떠나지 말 것을 간청하는 서명 8,000개가 담긴 청원을 받았다. 그는 "모두의 이익과 국가의 일반적인 행복을 위해 기꺼이 하겠다. 국민들에게 내가 머물 것이라고 전하라"고 답했다. 이 날은 "피쿠의 날"(Fico Day, '나는 머문다'는 뜻)로 알려지게 되었다.[45] 아빌레즈는 다시 폭동을 일으켜 페드루를 포르투갈로 강제 송환시키려 했다. 이번에는 황태자가 반격하여 브라질 군대 (이전 폭동에서 포르투갈 군에 합류하지 않았던) , 민병대, 무장한 시민들을 소집했다. 수적으로 열세인 아빌레즈는 항복하고 그의 군대와 함께 브라질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몇 달 동안 페드루는 포르투갈과의 통합을 유지하려 했지만, 최종적인 단절은 임박했다. 유능한 장관 조제 보니파시오 데 안드라다의 도움을 받아 그는 리우데자네이루 외부에서 지지를 모색했다. 황태자는 4월에 미나스제라이스로, 8월에는 상파울루 주로 여행했다. 그는 두 브라질 주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았고, 방문은 그의 권위를 강화했다. 상파울루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는 9월 7일에 코르테스가 브라질의 자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명령을 거부하는 모든 사람을 처벌할 것이라는 소식을 받았다. 페드루는 결정을 내리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밤색 암말[46]에 올라, 수행원과 명예 근위병 앞에서 말했다: "친구들이여, 포르투갈 코르테스는 우리를 노예로 삼고 박해하려 했다. 오늘부터 우리의 유대는 끝났다. 내 피로, 내 명예로, 내 신에게 맹세하건대, 브라질의 독립을 가져오겠다. 브라질인들이여, 오늘부터 우리의 구호는 '독립 아니면 죽음!'이 될 것이다."[47]
2. 3. 브라질 통치와 위기

1822년 10월 12일, 24번째 생일에 황태자는 브라질 제국의 초대 황제 '''동 페드루 1세'''로 추대되었다. 그의 대관식은 12월 1일 히우 지 자네이루 구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은 즉시 브라질 전역에 미치지 못했다. 브라질 북부, 북동부, 브라질 남부 지역의 여러 주를 복속시켜야 했으며, 마지막 포르투갈 저항 부대는 1824년 초에야 항복했다.[12]
한편, 페드루 1세와 조제 보니파시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보니파시오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정적을 탄압했으며, 결국 페드루 1세는 부적절한 행위를 이유로 그를 해임했다.[13] 이러한 갈등은 헌법 제정을 위해 소집된 제헌 의회에서도 이어졌다. 보니파시오는 포르투갈 출신인 페드루 1세가 브라질의 이익에 반하는 음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하며 선동했다. 이에 분노한 황제는 1823년 11월 12일 제헌 의회를 해산시키고 새로운 선거를 요구했다.[15] 다음 날, 그는 국무원에 헌법 초안 작성을 지시했고, 이 초안은 각 시의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제국 헌법으로 채택되었다.[16]

새 헌법에 따른 중앙 집권 체제에 반발하여 세아라, 파라이바, 페르남부쿠 등 북동부 지역에서는 적도 연맹 결성 시도가 있었다. 페드루 1세는 초기에는 회유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강경하게 진압했다. 분노한 그는 "페르남부쿠의 모욕은 무엇을 요구했는가? 분명히 처벌, 그리고 미래의 본보기가 될 처벌을 요구했다."라고 말했다. 반란은 1824년 말까지 진압되었고, 16명의 주동자가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으나 나머지는 황제에 의해 사면되었다.
1825년 8월 29일, 오랜 협상 끝에 포르투갈은 리우데자네이루 조약을 통해 브라질의 독립을 승인했다.[17] 그러나 이 조약은 브라질에게 불리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포르투갈에 대한 배상금 지불, 브라질 거주 포르투갈 시민의 재산 손실 보상 등이 요구되었으며, 주앙 6세에게 명예 브라질 황제 칭호를 부여하는 등 독립이 마치 포르투갈의 호의로 주어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18] 또한 영국은 중재의 대가로 유리한 통상 조약 갱신과 브라질의 노예 무역 폐지 약속(4년 이내)을 받아내어 브라질의 경제적 이익에 타격을 주었다.
1826년 3월 10일, 아버지 주앙 6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국왕 '''페드루 4세'''로 즉위했다.[42] 그러나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재결합이 불가능함을 알고 5월 2일 장녀 마리아 2세에게 왕위를 양위했다. 양위 조건은 포르투갈이 페드루 1세가 만든 헌법을 수용하고, 마리아 2세가 그의 동생 미겔과 결혼하는 것이었다.[42] 양위 후에도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의 부재 군주로서 내정과 외교에 관여하며 딸의 이익을 보호하려 애썼다.
그러나 미겔은 1828년 초 섭정으로 선포되자마자 헌법을 폐지하고, 모후 카를로타 조아키나와 절대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스스로 국왕 '''미겔 1세'''를 칭했다.[46] 페드루 1세는 동생의 배신뿐 아니라, 막내 여동생 아나 데 제수스를 제외한 다른 누이들마저 미겔 편으로 돌아선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미겔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소문까지 믿으며 포르투갈 문제에 더욱 몰두했고, 마리아 2세의 권리를 위해 국제적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825년 리오데라플라타 연합주(현재의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은 분리주의자들이 브라질 최남단 시스플라티나 주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시스플라티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1826년 바이아를 방문했으나, 전쟁은 지지부진했고 브라질군의 상황은 열악했다. 이 시기 황제의 정부(情婦) 도미틸리아 데 카스트루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나는 공개적으로 수치심을 겪었다. 페드루 1세는 황후에게 무례하게 굴고 경제적으로 압박했으며, 도미틸리아를 황후의 시녀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1826년 말, 남부 전선 시찰 중 페드루 1세는 황후가 유산 후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했다.[55] 전쟁은 결국 1828년 우루과이의 독립을 인정하며 종결되었고, 같은 해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아일랜드와 독일 용병들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황후 사후 페드루 1세는 깊은 후회와 슬픔에 빠졌고, 도미틸리아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그는 아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불쌍한 아들아, 너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황태자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재혼을 결심했으나 과거 행실 때문에 유럽 공주들에게 연이어 거절당했고, 1828년 도미틸리아를 잠시 궁정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결국 1829년 아멜리아 드 보아르네와 약혼하면서 도미틸리아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고, 같은 해 10월 결혼식을 올렸다.
1823년 제헌 의회 시절부터 시작된 황제와 의회 간의 권력 투쟁은 1826년 브라질 국회 개원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페드루 1세 측은 군주가 내각 구성과 정책 방향을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의회 다수파가 내각을 구성하고 정부 운영을 책임져야 한다고 맞섰다.[22] 양측 모두 자유주의와 입헌 군주제를 표방했지만, 권력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놓고 대립했다.[23]
페드루 1세는 통치 과정에서 여러 비판에 직면했지만, 헌법 자체는 존중했다. 선거 개입이나 언론 탄압은 하지 않았고, 의회 해산권도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유주의 언론은 그의 포르투갈 출생을 문제 삼아 포르투갈 문제에 과도하게 개입한다는 비판과 함께, 헌법을 폐지하고 양국을 재통합하려 한다는 근거 없는 비난을 제기했다. 또한 그의 포르투갈 출신 측근들이 "그림자 내각"을 형성하여 국정을 농단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57]
페드루 1세의 노예제 폐지론적 견해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는 점진적인 노예제 폐지를 구상하고 자신의 영지에서 모범을 보이려 했으나, 노예 소유주가 다수인 의회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는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1822년 브라질 잔류 선언 당시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대중을 향해 "나는 내 피가 흑인들의 피와 같은 색깔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며 왕권신수설과 인종차별을 동시에 비판하기도 했다.
2. 4. 포르투갈 왕위 계승과 퇴위
1825년 8월 29일, 오랜 협상 끝에 포르투갈은 리우데자네이루 조약에 서명하여 브라질의 독립을 인정했다.[17][53] 하지만 독립 승인 외에 조약 내용은 브라질에게 불리했는데, 포르투갈에 대한 배상금 지불 의무를 지고[18][54], 브라질에 거주하던 포르투갈 시민들의 재산 손실까지 보상해야 했다. 또한 주앙 6세는 명예직으로 브라질 황제 칭호를 유지할 권리를 얻었다.[18][54] 더욱이 이 조약은 브라질 독립이 투쟁의 결과가 아니라 주앙 6세의 관용으로 주어진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설상가상으로, 협상을 중재한 영국은 대가로 유리한 통상 권리 갱신과 4년 내 노예 무역 폐지 약속을 받아내는 별도 조약을 체결하여 브라질의 경제적 이익에 큰 타격을 입혔다.
몇 달 뒤인 1826년 3월 10일, 아버지 주앙 6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여 국왕 페드루 4세가 되었다. 그러나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통합은 양국 국민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던 그는, 5월 2일 자신의 장녀 마리아 다 글로리아 공주를 여왕 마리아 2세로 즉위시키며 포르투갈 왕위를 양위했다.[24] 이 양위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는데, 포르투갈이 페드루 4세가 제정한 새 헌법을 받아들이고, 마리아 2세가 페드루 1세의 동생인 미겔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왕위를 양위했음에도 페드루 1세는 포르투갈의 부재 국왕으로서 외교 및 내정(정부 인사 등)에 계속 관여했다. 그는 브라질 황제로서의 지위와 포르투갈에 있는 딸의 권익을 지켜야 하는 의무 사이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페드루 1세의 동생 미겔은 처음에는 형의 계획에 따르는 척했다. 그러나 1828년 초, 어머니 카를로타 조아키나 왕비의 지지를 등에 업고 섭정으로 선포되자마자 헌법을 폐지하고, 절대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의 추대를 받아 스스로를 국왕 미겔 1세로 선언하며 왕위를 찬탈했다. 믿었던 동생의 배신과 더불어, 살아남은 누이들(마리아 테레자, 마리아 프란시스카, 이자벨 마리아, 마리아 다 아순상)마저 미겔의 편에 선 것은 페드루 1세에게 큰 충격이었다. 오직 막내 여동생 아나 데 제수스만이 그에게 충성을 지켰고, 훗날 그와 함께하기 위해 리우데자네이루로 건너왔다. 동생에 대한 증오심이 커진 페드루 1세는 미겔이 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소문까지 믿게 되었고,[19] 딸 마리아 2세의 왕위 계승권을 위해 국제적 지원을 얻으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한편, 브라질 국내에서는 시스플라티나 전쟁이 계속되었으나 승산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페드루 1세는 1828년 8월 시스플라티나 주를 포기했고, 이 지역은 우루과이라는 독립 국가가 되었다. 전쟁 패배와 영토 상실은 황제의 인기를 더욱 떨어뜨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페드루 1세는 자유주의 세력을 포용하려 노력했다. 그는 의회 책임을 강화하는 1827년 법을 지지했고, 1831년 3월 19일에는 야당 인사들로 구성된 내각을 임명하여 의회의 역할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비밀 내각' (포르투갈 출신 측근들로 구성되었다는 의혹)에 대한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포르투갈 출신 친구들에게 유럽에서의 직책을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자유주의자들은 황제의 외국 태생 배경과 통치 방식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되는 비판과 정치적 불안정에 지친 페드루 1세는 점차 브라질 통치에 대한 의욕을 잃어갔다. 때마침 포르투갈 망명자들은 그에게 브라질 황제 자리를 포기하고 딸 마리아 2세의 포르투갈 왕위를 되찾는 데 집중하라고 설득했다. 페드루 1세는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침착하고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일상적인 입헌 군주의 역할은 그의 성격과 맞지 않았다. 반면, 딸의 왕위를 위해 싸우는 것은 그의 기사도 정신과 행동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키는 일이었다.
퇴위하고 포르투갈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은 1829년 초부터 페드루 1세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24][60] 결정적인 계기는 1831년 3월 11일 발생한 '병 싸움의 밤'(Noite das Garrafadas) 사건이었다. 자유주의 급진파가 선동한 거리 폭력 사태로 리우데자네이루의 포르투갈인 공동체가 공격받았고, 이에 포르투갈인들이 보복하면서 수도는 혼란에 빠졌다. 4월 5일, 페드루 1세는 질서 회복에 무능하다는 이유로 자유주의 내각을 해임했다. 다음 날인 4월 6일, 해임된 내각의 복귀를 요구하는 대규모 군중 시위가 벌어졌다.[25][61] 황제는 "나는 백성을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나, 백성에게 강요당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라고 응수했다.[26][62] 그러나 그날 밤, 황제를 호위하던 군대마저 시위대에 합류하자, 페드루 1세는 자신이 브라질에서 완전히 고립되었음을 깨달았다. 결국 1831년 4월 7일 새벽 3시경, 그는 브라질 황제 자리에서 퇴위했다.[27][63] 퇴위 문서를 전달하며 그는 "여기 나의 퇴위 조서가 있다. 나는 내가 매우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이 나라를 떠나 유럽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그의 퇴위로 브라질 황위는 어린 아들 페드루 2세에게 넘어갔고, 페드루 1세는 딸 마리아 2세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포르투갈 내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2. 5. 유럽 귀환과 사망

1831년 4월 7일 새벽, 페드루 1세는 브라질 황제위를 장남 페드루 데 알칸타라에게 양위하고 퇴위했다. 그는 아내 아멜리 왕비, 딸 마리아 2세, 여동생 안나 데 제수스 등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영국 군함 HMS ''Warspite''에 승선했다. 4월 13일, 전 황제는 HMS ''Volage''로 옮겨 타 유럽으로 떠났다.
6월 10일 프랑스 셰르부르-옥트빌에 도착한 페드루는 이후 몇 달간 프랑스와 영국을 오갔다. 그는 따뜻한 환영을 받았으나, 딸 마리아 2세의 포르투갈 왕위 회복을 위한 실질적인 지원은 어느 정부로부터도 얻지 못했다. 브라질과 포르투갈 양쪽 왕가에서 공식적인 지위가 없어진 그는 6월 15일, 과거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 시절 사용했던 브라간사 공작 칭호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칭호는 본래 마리아 2세의 후계자에게 속해야 했지만, 그의 주장은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12월 1일, 파리에서 아멜리에와의 사이에서 유일한 딸인 마리아 아멜리아 공주가 태어났다.
페드루는 브라질에 남겨둔 자녀들을 잊지 않고, 그들을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교육에 진지하게 임해달라고 거듭 당부하는 감동적인 편지를 보냈다. 퇴위 직전 아들 페드루 2세에게 "나는 내 동생 미겔과 내가 브라간사 가문에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마지막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기도 했다. 1830년대 페드루의 편에서 싸웠던 해군 사령관 찰스 네이피어는 "그의 좋은 점은 그의 것이었고, 그의 나쁜 점은 교육의 부족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결함을 그 자신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페드루 2세에게 보낸 편지는 종종 어린 아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내용이었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훗날 군주가 참고할 조언으로 여긴다. 한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 철학을 드러냈다. "단지 왕자라는 이유만으로 존경받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는, 백성들이 그들의 권리에 대해 상당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왕자들은 사람들이고,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들은 지식과 좋은 감각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존경받는 것보다 더 빨리 사랑받아야 합니다. 자유로운 백성이 그들의 통치자에 대한 존경심은 그들의 통치자가 그들이 열망하는 행복의 수준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나와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불행한 통치자, 불행한 백성."[64]
파리 체류 중, 페드루는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그의 확고한 지지자가 된 길베르 뒤 모티에, 라파예트 후작과 만나 친구가 되었다. 페드루는 제한된 자금으로 알메이다 가렛, 알렉산드르 에르쿨라누와 같은 포르투갈 자유주의자들과 라파예트의 손자 아드리앙 쥘 드 라스테리 같은 외국 용병 및 자원봉사자들로 소규모 군대를 조직했다.[29] 1832년 1월 25일, 그는 가족과 라파예트, 약 200명의 지지자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마리아 2세 앞에 무릎 꿇고 "제 여왕님, 여기 당신의 권리를 지키고 당신의 왕위를 되찾을 포르투갈 장군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눈물을 흘리는 딸의 배웅을 받으며[30] 그는 마리아 2세에게 충성하는 유일한 포르투갈 영토였던 대서양의 아조레스 군도로 항해했다. 몇 달간의 준비 끝에 포르투갈 본토로 향하여, 7월 9일 포르투 시에 저항 없이 입성했다. 그러나 그의 동생 미겔 1세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면서 1년 이상 지속된 포르투 포위전이 시작되었다.[31]

1833년 초, 포르투에서 포위된 상태에서 페드루는 브라질에 있는 딸 파울라 공주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달 뒤인 9월에는 브라질에서 온 조제 보니파시오의 동생 안토니우 카를루스 드 안드라다를 만났다. 복고주의 정당 대표였던 안토니우 카를루스는 페드루에게 브라질로 돌아가 아들 페드루 2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통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페드루는 복고주의자들이 자신을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브라질 국민 전체의 뜻이 확인되어야 한다며 몇 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여 사실상 거절했다. 그는 섭정 요청이 헌법에 따라 유효해야 하며, 국민의 의사가 지역 대표를 통해 전달되고 총회에서 승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브라질 의회의 공식 대표단이 포르투갈에서 그에게 청원서를 제출한 후"에야 수락을 고려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내전 기간 동안 페드루는 직접 대포를 설치하고, 참호를 파고, 부상자를 돌보며, 병사들과 함께 식사하는 등 최전선에서 싸웠다.[32] 전세가 불리해지자, 그는 군대를 나누어 일부를 남부 포르투갈에 대한 수륙 양용 공격을 감행하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알가르브 지역을 점령한 군대는 북진하여 7월 24일 리스본을 함락시켰다. 페드루는 나머지 지역을 장악해 나갔으나, 전쟁 막바지에 그의 스페인 삼촌인 카를로스 백작이 조카 이사벨 2세의 왕위를 빼앗으려 개입하면서 제1차 카를로스 전쟁으로 확전되었다. 페드루는 이사벨 2세에게 충성하는 스페인 자유주의 군대와 동맹을 맺어 미겔 1세와 카를로스를 모두 격파했다. 1834년 5월 26일, 에보라몬테 협정이 체결되어 내전은 자유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간헐적인 간질 발작을 제외하면 건강했던 페드루였지만, 전쟁은 그의 건강을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1834년경 그는 결핵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9월 10일부터 리스본 근교의 켈루스 왕궁 병상에 누워 지냈다. 임종 직전, 그는 브라질 국민들에게 노예 제도의 점진적 폐지를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작성했다. 그는 "노예 제도는 악이며, 인간 종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공격이지만, 그 결과는 노예 제도가 허용되는 국가보다 억류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덜 해롭습니다. 그것은 도덕성을 좀먹는 암과 같습니다"라고 경고했다. 길고 고통스러운 투병 끝에 페드루는 1834년 9월 24일 오후 2시 30분에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3]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심장은 포르투의 라파 교회에 안치되었고, 시신은 리스본의 브라간사 왕가의 왕립 묘소에 묻혔다. 그의 사망 소식은 11월 20일 리우데자네이루에 전해졌지만, 브라질에 있는 그의 자녀들은 12월 2일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후견인 자리에서 해임되었던 조제 보니파시오는 페드루 2세와 그의 누이들에게 "돔 페드루는 죽지 않았습니다.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만이 죽습니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3. 유산과 평가
페드루 1세가 사망하자 강력했던 복고주의 정당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전 군주의 귀환 위협이 사라지면서 그의 공과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자유당 지도자이자 그를 강하게 비판했던 에바리스토 다 베이가는 이후 지배적인 견해가 된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다.
"브라질의 전 황제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고 섭리는 그를 브라질과 포르투갈 모두에서 해방을 위한 강력한 도구로 만들었다. 우리가 [브라질인]이 자유로운 국가의 일원으로서 존재하고, 우리 땅이 무정부 상태와 군국주의 정신만이 지배하는 작은 적대 공화국으로 찢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와 함께 머물며 독립을 외친 결단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이어서 "포르투갈이 가장 어둡고 굴욕적인 폭정에서 벗어났고... 대의 정치로 인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이는 돔 페드루 데 알칸타라의 덕분이다. 그의 노고, 고통, 그리고 포르투갈 대의를 위한 희생은 그에게 국가적 감사의 칭송을 받기에 충분하다."
페드루 1세의 통치 후반기에 브라질에 살았던 존 아미테이지는 "군주의 실수조차도 모국의 문제에 영향을 미쳐 큰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그가 더 현명하게 통치했다면 그가 선택한 땅에 좋았겠지만, 아마 인류에게는 불행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아미테이지는 또한 "프랑스의 전 황제처럼, 그는 운명의 아이였으며, 정확히 말하면 모든 것을 알고 자비로운 섭리가 위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였다. 구세계와 신세계에서 그는 앞으로 혁명의 도구가 될 운명이었고, 아버지의 땅에서 그의 화려하지만 덧없는 경력이 끝나기 전에, 그는 시민적, 종교적 자유를 위한 그의 기사도적이고 영웅적인 헌신으로 이전 삶의 과오와 어리석음을 충분히 속죄했다."고 덧붙였다.
1972년, 브라질 독립 150주년을 맞아 페드루 1세의 유해(심장은 제외)는 그의 유언에 따라 성대한 기념행사와 함께 국가 원수 예우를 받으며 브라질로 옮겨졌다. 그의 유해는 황후 마리아 레오폴디나와 아멜리에 드 뵈아르네와 함께 상파울루 시의 브라질 독립 기념비에 재안치되었다.
수년 후, 역사가 닐 매컬리는 페드루 1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돔 페드루에 대한 비판은 자유롭게 표명되었고 종종 격렬했다. 이는 그가 두 개의 왕좌에서 물러나게 했다. 대중의 비판을 수용하고 권력을 포기하려는 그의 의지는 돔 페드루를 그의 전제 군주 선배들과 오늘날의 강압적인 국가 통치자들과 구별되게 했는데, 이들은 오래된 왕들과 마찬가지로 종신직이었다." 매컬리는 또한 "돔 페드루와 같은 성공적인 자유주의 지도자들은 때때로 돌이나 청동 기념비로 존경받을 수 있지만, 그들의 초상은 공공 건물에 4층 높이로 새겨지지 않으며, 수십만 명의 제복을 입은 행진 참가자들의 퍼레이드에 그들의 사진이 들려오지 않으며, 그들의 이름에 '-주의'가 붙지 않는다."라고 단언했다.
2022년 브라질 독립 20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페드루 1세의 방부 처리된 심장은 브라질리아에 도착하여 군사적 예우를 받았으며 외무부에서 일반에 공개되었다. 심장은 브라질 독립 기념일 이후 포르투갈로 반환되었다.[34][35]
4. 가족 관계
페드루는 1798년 10월 12일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 켈루스 왕궁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는 훗날 포르투갈의 국왕이 되는 주앙 6세이며, 어머니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4세의 딸인 카를로타 조아키나이다. 아버지를 통해 페드루는 브라간사 왕가의 일원이었으며, 친조부모는 페드루 3세와 마리아 1세 여왕이다. 페드루의 부모는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으며, 1802년경부터는 마프라 국립 궁전(주앙)과 라말량 궁전(카를로타 조아키나)에서 떨어져 살았다.[1] 페드루와 그의 형제들은 국가 행사 외에는 부모를 거의 만나지 못했으며, 켈루스 궁전에서 할머니 마리아 1세와 함께 지냈다.[1] 페드루는 차남이었으나, 1801년 형 프란시스쿠 안토니우가 사망하면서 아버지의 후계자인 베이라 공이 되었다.[1]
1817년 5월 13일, 페드루는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레오폴디나 대공녀와 대리 결혼을 하였다.[1] 그녀는 같은 해 11월 5일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으며, 페드루의 외모에 즉시 호감을 느꼈다고 전해진다. 다음 날 결혼 미사를 통해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1] 마리아 레오폴디나와의 사이에서는 일곱 자녀가 태어났다. 그녀 사후 페드루 1세는 생전에 그녀를 홀대한 것을 깊이 후회했으며, 그녀를 매우 그리워했다고 한다.[20]
마리아 레오폴디나 생전부터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 데 카스트루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마리아 레오폴디나 사후 잠시 도미틸라를 멀리하기도 했으나(1828년 6월 추방), 새 황후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자 1829년 4월 다시 그녀를 불러들였다.[1] 그러나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와의 약혼이 확정되자, 페드루 1세는 도미틸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했고, 그녀는 1829년 8월 27일 고향 상파울루로 돌아가 그곳에 머물렀다.[1]
과거 행실로 인한 평판 때문에 새 황후를 맞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나, 1829년 8월 2일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와 대리 결혼을 했고, 같은 해 10월 17일 정식으로 결혼 미사를 올렸다.[1] 아멜리는 페드루 1세의 자녀들에게 친절했으며, 황실에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페드루 1세는 아멜리와의 결혼 이후로는 불륜 없이 충실한 남편이 되었다.[21] 아멜리와의 사이에서는 딸 하나를 두었다.
페드루 1세는 여러 정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를 두었으며, 일부는 유언을 통해 자녀로 인정하고 재산을 분배해주었다.
'''자녀'''
이름 | 초상 | 생몰년 | 비고 |
---|---|---|---|
어머니는 마리아 레오폴디나 (1797년 1월 22일 – 1826년 12월 11일; 1817년 5월 13일 결혼(대리인에 의함)) | |||
마리아 2세 | ![]() | 1819년 4월 4일 – 1853년 11월 15일 | 포르투갈 여왕 "마리아 2세" (재위 1826년-1853년). 첫 번째 남편인 오귀스트와는 결혼 후 몇 달 만에 사별했다. 다음 남편인 작센코부르크고타가의 페르디난트(페르난두 2세)와는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마리아 2세의 계통은 1835년 10월 30일 브라질 제위 계승법 제91호에 의해 브라질 황실의 제위 계승권을 잃었다. |
베이라 공 미겔 | 1820년 4월 26일―동월 동일 사망 | 요절 | |
베이라 공 조앙 카를루스 | 1821년 6월 6일 – 1822년 2월 4일 | 요절 | |
자누아리아 | ![]() | 1822년 3월 11일 – 1901년 3월 13일 | 아퀼라 백작 루이지(양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란체스코 1세의 아들)와 결혼. 4명의 자녀를 두었다. 1822년 6월 4일 공식적으로 포르투갈의 인판타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브라질 독립과 함께 포르투갈 왕가의 계통에서 제외되었다. |
파울라 | ![]() | 1823년 2월 17일 – 1833년 1월 16일 | 9세에 요절. 수막염으로 추정된다. 브라질 독립 후에 태어났다. 포르투갈 왕가의 계통에서 제외. |
프란시스카 | ![]() | 1824년 8월 2일 – 1898년 3월 27일 | 조앙빌 공작 프랑수아 필리프 (프랑스 7월 왕정의 루이 필리프의 아들)와 결혼. 3명의 자녀를 두었다. 브라질 독립 후 출생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왕실 계통에서 제외. |
페드루 2세 | ![]() | 1825년 12월 2일 – 1891년 12월 5일 | 2대 브라질 황제(재위 1831년-1889년). 황후는 테레자 크리스티나 (양 시칠리아 왕국 프란체스코 1세의 딸).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황이 포르투갈 왕에서 퇴위했기 때문에 "포르투갈 왕 페드루 5세"가 되지 못했다. 계통 또한 포르투갈 왕실에서 제외. |
어머니는 아멜리 드 보아르네 (1812년 7월 31일 – 1873년 1월 26일; 1829년 8월 2일 결혼(대리인에 의함)) | |||
마리아 아멜리아 | ![]() | 1831년 12월 1일 – 1853년 2월 4일 | 그녀는 유럽에서 자랐고, 브라질에 살지 않았다. 마리아 아멜리아는 멕시코 제2제국의 황제가 되는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 대공의 약혼자였으나 결혼 전에 사망했다. 부친이 포르투갈 왕 퇴위 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포르투갈 왕위 계승권 상실. |
어머니는 산토스 후작 부인 도미틸리아 데 카스트로 (1797년 12월 27일 – 1867년 11월 3일) | |||
고이아스 공작 부인 이자벨 마리아 | ![]() | 1824년 5월 23일 – 1898년 | 그녀는 페드루 1세의 자녀 중 그가 공식적으로 사생아임을 인정한 유일한 자녀이다. 1826년 5월 24일, 이자벨 마리아는 고이아스 공작 작위와 전하의 칭호, 도나("Dona")의 존칭을 사용할 권리를 받았다. 그녀는 브라질 제국에서 최초로 공작 작위를 가진 인물이다. 이러한 영예는 그녀에게 브라질 황녀의 지위를 부여하거나 황위 계승 대상자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페드루 1세의 유언에 따라 그녀는 페드루의 재산을 분여받았다. 그녀는 1843년 4월 17일 외국 귀족인 트로이베르크 백작 에른스트 피슐러 폰 트로이베르크와 결혼했고, 이에 따라 브라질 제국에서의 영예를 상실했다. |
페드루 데 알칸타라 브라질레이로 | 1825년 12월 7일 – 1825년 12월 27일 | 페드루는 "상파울루 공" 작위를 줄 것을 생각했지만, 요절했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 |
마리아 이자벨 데 알칸타라 브라질레이로 | 1827년 8월 13일 – 1828년 10월 25일 | 페드루 1세는 그녀에게 세아라 공작 부인의 작위와 전하의 칭호, "도나"의 존칭을 사용할 권리를 주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너무 이른 죽음으로 인해 실행되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역사 자료에서 그녀는 세아라 공작 부인으로 불리고 있다. | |
이과수 백작 부인 마리아 이자벨 데 알칸타라 | ![]() | 1830년 2월 28일 – 1896년 | 마리아 이자벨은 1848년 바르바세나 후작 펠리스베르투 칼데이아 브란트의 아들 페드루 칼데이아 브란트와의 결혼으로 이과수 백작 부인이 되었다. 아멜리 왕비와의 결혼 때문에 그녀에게는 작위가 주어지지 않았다. 페드루 1세는 자신의 유언에 의해 그녀를 딸로 인정했지만, 아멜리 왕비에게 마리아 이자벨의 교육과 양육을 지원하도록 요청했을 뿐 재산은 분여하지 않았다. |
어머니는 소로카바 남작 부인 마리아 베네디타(1792년 12월 18일 – 1857년 3월 5일) | |||
로드리구 델핀 페레이라 | ![]() | 1823년 11월 4일 – 1891년 1월 31일 | 페드루 1세의 유언에 따라 아들로 인정받아 재산을 분여받았다. 그는 브라질 외교관이 되었으며, 생애 대부분을 유럽에서 보냈다. |
어머니는 앙리에트 조세핀 클레망스 세세 | |||
페드루 데 알칸타라 브라질레이로 | 1829년 8월 23일 – 1902년 | 페드루 1세의 유언에 따라 아들로 인정받아 재산을 분여받았다. 마리아 팔로마레스와 결혼하여 4명의 자녀를 두었다. 미국에서 프랑스 영사관의 영사 대리를 30년 이상 역임했으며, 여러 사업에 관여했다. [70] |
5. 칭호 및 영예
페드루 1세는 시기별로 다음과 같은 칭호와 경칭을 사용했다.
기간 | 칭호 및 경칭 |
---|---|
1798년 10월 12일 – 1801년 6월 11일 | |
1801년 6월 11일 – 1816년 3월 20일 | |
1816년 3월 20일 – 1817년 1월 9일 | |
1817년 1월 9일 – 1826년 3월 10일 | 전하(His Royal Highness) 왕세자 |
1822년 10월 12일 – 1831년 4월 7일 | |
1826년 3월 10일 – 1826년 5월 2일 | |
1831년 6월 15일 – 1834년 9월 24일 | 폐하(His Imperial Majesty) 브라간사 공작 |
브라질 황제로서 그의 정식 칭호와 작위는 "그의 황제 폐하 돔 페드루 1세, 브라질의 입헌 황제이자 영구적인 수호자"였다.
포르투갈 국왕으로서 그의 정식 칭호와 작위는 "그의 가장 충실하신 폐하 돔 페드루 4세, 포르투갈과 알가르브 국왕, 아프리카 해협 양쪽의 국왕, 기니 및 에티오피아, 아라비아, 페르시아 및 인도의 정복, 항해 및 상업의 주군"이었다.
포르투갈 왕위 계승자로서 다음과 같은 작위를 보유했다.
작위 종류 | 작위명 |
---|---|
공작 | 브라간사 공작 |
공작 | 바르셀루스 공작 |
공작 | 기마랑이스 공작 |
후작 | 빌라 비소자 후작 |
백작 | 오우렝 백작 |
백작 | 바르셀루스 백작 |
백작 | 파리아와 네이바 백작 |
백작 | 아라이올루스 백작 |
백작 | 기마랑이스 백작 |
황제 페드루 1세는 다음 브라질 훈장의 그랜드 마스터였다:
훈장명 |
---|
그리스도 훈장 |
아비스 훈장 |
성 야고보의 검 훈장 |
남십자성 국가 훈장 |
페드루 1세 훈장 |
장미 훈장 |
페드루 4세 국왕으로서 그는 다음 포르투갈 훈장의 그랜드 마스터였다:
훈장명 |
---|
그리스도 훈장 |
아비스의 성 베네딕토 훈장 |
성 야고보의 검 훈장 (포르투갈) |
탑과 검 훈장 |
빌라 비소사의 무염시태 훈장 |
포르투갈 왕위에서 물러난 후, 1834년 9월 20일 포르투갈 탑과 검 훈장 그랜드 크로스를 수여받았다.
그는 다음과 같은 외국 훈장을 수여받았다:
수여 국가 | 훈장명 |
---|---|
스페인 | 금양모 기사단 기사 |
스페인 | 카를로스 3세 훈장 그랜드 크로스 |
스페인 | 이사벨라 가톨릭 훈장 그랜드 크로스 |
프랑스 | 생 루이 훈장 그랜드 크로스 |
프랑스 | 성령 훈장 기사 |
프랑스 | 성 미카엘 훈장 기사 |
오스트리아-헝가리 | 성 스테판 훈장 그랜드 크로스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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